“공연을 보려와 주신 관객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판데믹 시대의 극장1

by 김소연





나는 광대극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좋은 광대극을 별로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지난 해 <스카펭> 초연에서도 관객들의 웃음이 터져나오는 과장된 동작들에서 나는 그닥 웃지 않았던 것 같다. 희극은 현실적 맥락의 환기가 웃음의 포인트이며 그래서 웃음이야말로 정치적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기발한 표현이나 잘 정돈된 리드미컬한 장면의 전개 등등을 그렇게 꼽아보지 않았던 것 같다.


지난 해 한 좌담에서 <스카펭>에 대해 좀 심드렁하게 이야기했더니 같이 좌담에 참여했던 후배가 이 공연을 즐기는 관객들에 대해서도 공연 내적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받았었다. 하여, 지난 해 초연에서 내가 보지 못한 것은 무얼까 싶어서 다시 봤다. 광대극에 대한 심드렁함도 내려놓고, 웃음에 대한 나의 지조(?)도 내려놓고.


명동예술극장 무대를 전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붉은 휘장에는 코메디아델 아떼, 몰리에르 등이 옛 서체로 크게 씌여있고 아르깽(아마도?)의 가면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무대 좌우로 한편엔 악사가 다른 한편엔 몰리에르의 책상이 놓여 있다. 한껏 연극사의 권위를 앞세운 듯한 이러한 무대는, 도리어 지금 왜 여기에서 <스카펭>을 공연해야 하지라는 질문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질문은 각색과 연출 역시 품었던 것 같다. 이 거대한 휘장이 여전히 무대 전면을 가득채운채 꼬불머리 가발에 금단추 달린 자켓을 입은 '몰리에르'(역)가몰리에르가 누구인가에 대한 장광설을 온갖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함께 늘어놓는 것으로 연극이 시작된다. 어쩌면 저 거대한 붉은 휘장과 한껏 몰리에르로 치장하고선 광대의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은 한편으로 연극사적 권위와 지금 여기의 간극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면서 그 간극을 건너기 위한 징검다리 같았다.


장광설은 관객들에 대한 인사로 마무리되고 드디어 붉은 막이 서서히 오르면서 몰리에르 당시의 수레무대, 그러니까 당시 유랑극단의 가설무대를 모티브로 한 무대가 극장 가득 음악으로 차오르며 밀려나온다. 마치 이 뜬금 없는, 창고형 인물들과 라찌가 가득한 17세기 프랑스 희극이 지금 여기로, 이 무대를 둘러한 모든 것을 찢고 나오는 것만 같다.


잘 ‘연출’된 이러한 시작에 덧붙여,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판데믹 시대 극장에서 빠져드는 감상까지 덧붙여져 지금 여기에서 몰리에르 희극으로의 진입은 좀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 지난 해 초연에서는 연극을 여는 관습적 장광설이었던 것이 오늘은 예사롭지 않은 것이다. 연극을 여는 장면을 마무리하는 몰리에르의 인사가 특히 그랬다. “오늘 이 공연을 보러와 주신 관객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아마도 떠돌이 유랑극단으로 공연을 다니던, 작가이자 연출자이자 제작자였던 몰리에르는 이 말을 무대에서 무수히 했을 것이다. 지금도, 근엄하거나 엣지 넘치는 근현대공연이 아니라면 관객들에게 이런 인사를 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 말은 공연자들에게는 빈말이 아닐 것이다. 몰리에르 역시 진심을 담아 매번 무대 위에서 인사했을 것이다. 관객이 없다면 대체 어떻게 공연이 만들어질 수 있는가. 미학적으로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그럼에도 무수히 들어왔던 이 평범한 인사가 판데믹의 오늘은 더 특별하지 않을 수 없다. 내내 닫혀 있던 ‘국립극단’이 아닌가. 공연의 마지막, 지난 해 다시 돌아오겠다던 약속을 지켰다는 말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해 그 말이 재공연에 대한 희망이었다면, 오늘 이 말은 연극의 존재 자체에 대한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이런 감상이 불쑥 울컥 떠오르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오늘도 희극에 대한 나의 지조를 내려놓은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웃음은, 현실의 맥락을 환기할 때 터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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