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의 낡은 드라마

연극 <얼음>

by 김소연

이번 공연이 초연은 아니다. 기사를 보니 2016년에 올렸던 작품이다. 연극에서 출발했고, 천만관객을 동원한 스타감독, 스타 시나리오작가이면서도, 장진은 꾸준히 연극을 만들어왔다. 나는 그의 연극보다는 영화가 더 좋았다. 각본과 감독을 모두 한 <간첩 리철진>이나 시나리오만 맡았던 <개같은 날의 오후> 등등. <동막골>도 연극보다는 '영화'가 더 좋다. 장진의 연극 중 내게 제일 좋았던 작품은 <택시드라이벌>.


<얼음>은 경찰 취조실이 무대다. 토막살인사건이 벌어졌고, 여러 정황상 여기 잡혀와 았는 용의자가 범인일 확률이 높다. 슈트를 입은 고참 형사의 잰틀한 태도나 카고바지에 점퍼를 입은 젊은 형사의 엄벙덤벙 거들먹거림이, 책상 너머 의자에 있는 용의자가 진범이라는 확신을 보여준다. 연극의 시작이 이러하니, 연극 안 형사의 궁금증이나 연극 밖 관객들의 궁금증은 범인은 누구인가가 아니다. 대체 살인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로 옮겨간다. 여기에, 연극 안 형사들은 알고 있지만 연극 밖 관객들은 알 수 없는 관객들의 궁금증이 하나 더 추가된다. 무대 위 형사들이 취조를 하고 있는 용의자가 무대 위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즉 연극적 트릭이 하나 설정되는데 무대와 관객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용의자가 취조실에 앉아 있다고 믿는 것이다.


모든 연극은 무대와 객석 간의 약속들 속에서 이루어진다. 아니 모든 예술이 그렇다. 예술의 형식미, 장르규칙, 관습 등등은 수많은 작품들을 통해 매우 정교하게 쌓아올려진 것이다. 보이지 않지만 있다고 하고, 라는 약속은 거의 모든 무대에 등장하게 마련이지만, 이 연극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드라마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을 그렇게 비워놓았기 때문이다. 이 약속을 관객이 받아들인다면, 무대와 객석의 공모관계에서 비롯되는 몰입감은 배가 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 약속을 관객이 승낙하지 않는다면 연극 자체가 허물어지고 말, 위태로운 것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단지 공모의 몰입감을 넘어서는 드라마적 정당성의 구축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예를 들어 영화 <살인의 추억>의 저본이 된 연극 <날보러 와요>에서 계속 잡혀들어오는 서로 다른 용의자를 류태호 배우 한 사람이 연기하는데, 이러한 설정은 같은 배우의 변신을 보는 연극적 재미만이 아니라 미궁에 빠진 살인사건을 통해 알 수 없는 진실이라는 연극의 결말을 쌓아가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얼음>의 트릭은 성공했을까. <얼음>은 두 가지 선택이 가능했을 것 같다. 여러 연극적 장치들을 통해 부재하는 존재를 실감나게 존재하게 할 것이냐, 아니면 용의자에 대한 관심을 사건에 파고드는 형사1과 형사2로 온전히 옮겨가게 할 것이냐. 결론부터 말하자면, <얼음>은 보이지 않지만 있다고 하고, 라는 공모관계를 만들어내는 이상을 선택하지 않았다. 객석의 다른 관객들은 지금 무대 위에 우주선이 날이다닌다 치고, 라는 약속마저도 기꺼이 받아들일 만큼 우호적이었다. 하지만 무대와 객석의 공모라는 즐거움 외에 이렇다 할 기능이나 의미를 찾기 어렵다. 도리어 객석에는 보이지 않는 용의자의 진술을 전하기 위해 형사1과 형사2는 내내 용의자의 진술을 마치 되묻는 것처럼 반복해야했다. 사건에 대한 정보, 용의자에 대한 정보는 있다고 치고,라는 트릭 때문에 매우 불편하게 전달되어야 했다. 이러한 불편한 방식으로 정보를 전달하느라 정작 무대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형사1과 형사2의 캐릭터 구축은 느슨해지고 관객의 관심을 두 인물로 옮겨가게 하는 데에도 실패한다. 결국 굳이 용의자를 보이지 않게 하는 설정은 추리극의 서스펜스를 쌓기 위해 정보를 어떻게 감추고 어떻게 드러내게 할 것인가에 대한 손쉬운 작위적 기능 이상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얼음>의 불편함은 이러한 작위성만은 아니다. <얼음>이 형식의 작위성에도 불구하고 서스펜스를 끌고 가고 있었다면, 그것은 무대에서 다루고 있는 토막살인이라는 사건의 선정성이다. 피해자는 용의자의 학교 선배이자 용의자가 연정을 품었던 상대다. 연극의 전개, 그러니까 무대에서 전개되는 취조과정은 대체 왜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를 그렇게 끔찍하게 살해했는가, 어떻게 살해했는가를 구성해가는 것이다. 취조실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전개되는 연극은 피해자와 피해자에게 행해졌던 폭력에 대한 용의자의 진술과 경찰의 추리가 반복된다. 진술과 추리가 객석은 피해자에 대한 어떠한 객관적 정보도 없이 세 인물의 진술과 추리로 피해자를 재현할 수밖에 없다. 물론 용의자도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진술은 경찰의 리액션을 통해 전해진다. 연극의 후반부에서는 경찰1이 용의자에게 새로운 혐의를 취조하면서 갑자기 또다른 살인사건의 범인이 되어 사건을 설명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더 강렬한 선정적 사건으로 폭력이 재현되는 이 장면은 배우에게는 급작스러운 몰입과 강렬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도전이자 관객에게는 변신연기를 보는 흥미로움이 있겠지만, 여전히 피해자는 지워진채 지금까지 관객들의 추리에 맡겨두었던 범인의 형상을 직접 무대에 등장시킴으로써 선정성은 배가된다. 이 모든 과정에서 피해자의 진실에 대한 궁금증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자 이것은 폭력에 대한 고발일까. 선정성에는 폭력에 대한 두려움도 포함된다. 그러니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토막살인이라는 사건의 폭력성에 대한 두려움을 환기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연극이 폭력을 다루는 방식이 선정성에 머문다는 것은 폭력의 잔혹성을 과시하고 그에서 비롯되는 두려움을 객석에 강요할 뿐 폭력의 연원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마지막 반전, 지금까지 범인이라 추정되었던 취조실의 용의자가 아닌 진짜 범인이 밝혀지면서 도달하는 결말은 더 잔혹한 폭력일 뿐이다.


장진의 대표작 중 하나인, <박수칠 때 떠나라>도 살인사건이 등장하고 경찰과 검사의 수사과정으로 전개된다. <얼음>이 취조실이라는 단일 공간에서 형사 1,2와 보이지 않는 용의자로 전개되는 데에 비해 이 작품은 수사과정이 생방송으로 중계된다는 설정으로 여러 인물들이 들고 나지만 피해자는 등장할 수가 없다. 이 작품에서도 피해자는 젊은 여성인데, 토막살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아홉군데의 자상, 독극물이 등장한다. 역시 끔찍한 살인사건이다. 그리고 역시 마찬가지로 피해자는 수사과정에서 용의자, 참고인 등의 진술과 수사관의 추리로 재현될 뿐이다. 또 역시 마찬가지로 진술과 추리에서 재현되는 그녀는 불륜 등등의 소문들이 따라붙는다. (<얼음>의 피해자 역시 문란했다는 점이 등장한다.) 그러고 보면 왜 토막살인, 난자 등등의 살인사건의 피해자는 젊은 여자인 이유에는 부재하는 피해자에 대한 관음증적 호기심을 유발하는 진술과 추리로 선정성을 더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 만약 피해자가 남자였다면 과연 이렇게 그녀가 누구인지에 대한 아무런 질문도 남기지 않은 채 드라마를 이끌어 갈 수 있을까.


장진은 90년대부터 주목받는 젊은 창작자였다. 그는 극작가, 연출가,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으로 그의 역할이 뻗어갔던 데에는 '드라마'에 대한 탁월한 감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의 작품을 돌아보면 그 탁월한 감각이라는 것이 당대에 용인되었던 폭력에 기반한 것이라는 점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2000년에 연극으로 먼저 오르고 2005년에 영화로 만들어져 개봉하는 <박수칠 때 떠나라>에서 최연기 검사(차승원 분)가 용의자 김영훈(신하균 분)을 취조하는 장면은, 방송 중계 카메라를 상의로 덮고 폭행하는 장면들이 최연기 검사의 불같은 성격, 일에 대한 집념 등으로 아무렇지 않게 연출된다. 게다가 불륜에 휘말린 누나 정유정을 찾아간 김영훈이 누나의 불륜을 질타하는 장면 역시 정유정에게 폭행은 가하는 것은 아니라 해도 엄청나게 폭력적이다. 김영훈은 불륜에 빠진 누나를 벌하기 위해 살인을 계획하고 누나를 찾아가지만 누나는 이미 죽어있었다고 증언한다. 이러한 서사에서 김영훈의 순수한 분노, 누나에 대한 지극한 애정이 구축되는 반면, 정작 누나 정유정은 그러한 캐릭터 구현의 대상일 뿐이다. 이 작품의 다소 뜬금없는 설정이었던, 수사 막바지 방송 흥행을 위해 벌어지는 굿판은, 최연기가 사건의 진실을 목격하게 되는 혹은 최연기의 시선을 통해 관객들이 사건의 진실을 목격하게 되는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는데, 굿 즉 영혼과의 접속을 매개로 최연기의 시선을 통해 피해자를 만나게 된다. 여전히 피해자는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다. 끔찍한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지워지는 것, 용의자와 수사관의 진술과 추리에 의해서 재현되는 것은 사실 추리극의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일종의 극적 기법이다. 범인을 찾는 추리극은 종종 사건의 진실이 아니라 쫓고 쫓기는 추격전 자체의 서스펜스에 몰두하게 되는데, 이때 피해자가 공백으로 존재할 때 서스펜스는 더 강화된다. 그 공백에 난자당하고 토막나고 음탕한 피해자의 모습이 용의자와 수사관의 진술과 추리로 채워진다.


이 역시 한 시대의 증언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도 여전히 용의자를 겁박하는 장면이 수사관의 집념으로 연출되고 (최근의 재심판결들을 보라) 범죄의 끔찍한 장면을 재현하고 그 과정에서 피해자는 난자당하고 토막나고 그러한 엽기적 살인행각을 불러일켰으리라 의심되는 피해자의 행적이 재구성되는, 그렇게 폭력의 대상 폭력의 피해자가 수사극의 과정에서 다시 난자당하고 마는 드라마는, 시대착오적이다. 이것은 폭력의 고발이 아니라, 폭력의 선정성을 즐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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