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서는 40대 가장이다. 도희는 오롯이 집안일과 아이를 키우는 주부다. 명수는 고3이다. 아이 본인은 물론 온 가족이 대학입시에 물심양면 올인해야 할 때다. 그리고 따로 살면서 빠듯하게 살림을 꾸려가는 노년의 어머니가 있다. 그렇다. 현서는 이 가족의 '가장'이다. 그런데 현서가 누웠다. 누워서 일어나질 않는다. 일어날 수가 없다. 연극은 현서의 멈춤에서 시작된다. 현서 대신 가장이 된 도희는 식당에서 일한다. 경력이 단절된 중년의 도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저임금 노동이다. 20대의 그녀는 학자라 되리라 꿈꾸었지만 그 꿈을 어떻게 잃어버렸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 주위를 맴도는 현서의 친구 우섭과 불륜에 빠진다. 어머니는 아들이 다시 일어나길 바라며 살던 집의 보증금으로 부적을 산다. 그리고 명수는 점점 공부와 멀어진다. 저임금 노동, 불륜, 사기, 탈선. 익숙한 불행이다. 가장은 이 불행을 온몸으로 막고 있던 것일까.
연극은 실재의 공간과 움직임을 해체하고 재조합하여 전개된다. 무대 한 편에 현서는 누워 있고 다른 인물들은 상황과 무관한 양식적 동작들을 수행하면서 장면을 전개한다. 상황과 어긋나는 낯선 동작들은 이 익숙한 불행에 연극적 거리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불편한 거리일 수도, 예기치 않은 상황 때문에 툭툭 불거져 나오는 웃음의 거리일 수도 있다.
상황과 어긋나는 움직임과 움직임의 반복이 극단 돌파구의 <하면 된다>를 떠오르게 한다. <하면 된다>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 궁정동 시해사건이 반복되는데, 인물들이 진술과 행동의 속도가 벌어지면서 말과 상황이 어긋나게 된다. 장면이 반복되면서 어긋남은 점점 벌어지고, 무대의 혼란은 커진다. 반면 이 작품에서 상황의 반복은 없다. 현서의 멈춤 이후 가족들이 겪어내는 여러 사건들이 전개된다. 그에 따라 이 낯선 움직임들이 하나 둘 제자리를 드러내는데, 움직임은 각 인물의 주요 사건과 연관된다. 상황과 움직임의 어긋남은 인물들의 행동이 양식적 동작으로 반복되기 때문이다. <하면된다>에서 어긋남은 반복에서 비롯되고 반복을 강조한다면 이 작품에서 어긋남은 애초에 상황에서 떨어져나온 움직임 때문이다. 게다가 낯설다. 연극이 전개되면서 동작의 연원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그래서 상황에서 떨어져나온 움직임의 반복은 인물의 고립을 두드러지게 한다. 인물은 계속 사건을 맞닦드리고 관계를 만들어가지만, 이들의 움직임은 그러한 상황과 무관하게 반복된다. 그래서 이 연극에서 어긋남과 반복은 인물의 고립을 두드러지게 한다. 무대 한편에 누워있는 현서나 끊임없이 움직이는 가족들이나 고립되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X의 비극>은 현서의 비극을 넘어선다.
<X의 비극>은 낯설고 불편하지만 매혹적인 점이 있다.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장면들 행동들 선택들이 마치 큐빅이 맞춰지듯 연극의 전개에서 '찰칵'하고 연결된다. 그리고 현서, 우섭, 도희의 관계와 상황의 반전은 마지막까지 연극의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극이 도착한 지점은 모호하다. 무엇보다 '애리'가 그렇다. 애리의 죽음은, 그 사건 자체의 충격과 더불어 드라마의 전개에서 터닝포인트가 되는 주요한 사건이이다. 그러나 정작 애리도 애리의 죽음도 모호하다. 그리고 또하나 남는 질문. '현서'의 멈춤에도 불구하고 도희는 왜 그렇게 악착같이 움직일까. '현서'를 압도하는 삶의 무게에서 도희는 비껴나있기 때문일까? 사실 이 연극이 양식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모든 인물들의 고립을 도드라지게 만들어내지 않았다면, 이 질문은 연극을 보는 내내 관극을 방해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