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청능청, 이야기꾼 고선웅

국립창극단 <귀토- 토끼의 팔란>

by 김소연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이 리노베이션 마치고 문을 열었다. 외관상 달라진 건 중앙 계단을 없앤 것. 접근성이 훨씬 좋아졌다. 로비도 달라졌는데 티켓박스 등 위치가 달라지고, 1층에서 올라오는 에스컬레이터 위치 때문인듯, 인터리어도 변화가 있다. 화장실도 좋아졌다. (많아짐.) 무엇보다 극장 내부에 공들인듯. 가로로 넓게 퍼져서 크기만 강조되던 무대와 객석이 무대를 중심으로 집중되었달까. 무대도 많이 낮춘 것 같다. (1열에 앉아서 공연보다가 고개 떨어지는 줄.) 내부 음향도 다시 잡은 것 같다. 이제 여기서 연극해도 되겠다 싶은데, 어라 여긴 극단이 없구나.


계단을 뜯어낸 외관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새 것을 만들면서 옛 것을 따로 치장하지 않았다. 어색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것도 괜찮은 것 같다. 70년대 남북회담 준비팀이 북을 방문해서 <피바다> 보고 우리도 저런 대극장 필요하다해서 급하게 지은 것이 국립극장. 그래서 그렇게 크게 무겁게 지은 것. 개관공연으로는 허규의 <이순신>이 올랐다. 그렇게 시작된 극장이 부침을 하면서 지금 여기까지 온 거다. 부끄러운 역사도 역사고 그 역사에서 자라나온 것이 오늘이다. 굳이 지우지 말고 두는 것도 좋은 것 같다. 청산이 아니라 반성과 성찰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내일을 만들 것이다.


고선웅의 <귀토>는 재개관공연으로도 고선웅의 창극으로도 또 창극단의 레파토리로도 좋았다. 빈 무대에 멀리서 들려오던 소리가 가까워지면 후면을 높인 무대에서 마치 고개를 넘어오는 듯 광대들이 내려와 오늘 오신 손님들께 인사를 하고 공연을 시작한다. (<스카팽>에서도 이렇게 공연을 연다. 동서양 막론 광대극이란 무릇.) <나무...>에서도 그렇고 창극단 공연에서 소리꾼, 이야기꾼, 광대를 드러내고 광대들이 공연의 문을 연다. 넉넉함과 능청거림이 좋다.


고선웅은 이제 재기발랄함을 넘어 이야기의 능청스러움으로 나아가는 듯. 그 능청스러움이 어떻게 완미함과 크기를 갖을 것인가가 관건인듯.


이야기는 과감하게도, 용궁을 빠져나온 토끼가 자라에게서 도망치는 것에서 시작된다. 어 이거 뭐지? 플래시백? 식상한데? 하지만 이야기는 되감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나아가긴 나아가는데 원환에 갇힌 걸까. 자라는 용왕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온갖 지성을 들이면서 토끼를 잡으려 하고 용궁을 빠져나온 토끼는 독수리에게 잡아 채여 죽임을 당한다. 아비의 비참한 죽음을 본 아들 토끼는 산중의 삶을 떠나 바다에 이른다. 자라는 토끼를 다시 만나고 아들 토끼와 토끼의 여자친구는 용왕 앞에 붙들려 가고 용왕은 어서 빨리 토끼의 간을 바치라고 재촉한다. 이야기꾼 고선웅은 산중팔란으로 이 원한을 잇고 푼다. 산중 수중 도처가 팔란이어서 다시 죽음 앞에 서고 죽음을 빠져나온다. 여기에 오르페우스 신화까지 끼어들면서 이야기가 능청능청 흘러간다.


고선웅은 짐짓 자신은 재미난 이야기를 짓는 사람일 뿐이라는 듯하지만, 이야기의 구비구비에는 여린 것에 대한 연민과 여린 것들이 제 삶을 꾸려가는 도도한 흐름에 대한 믿음이 비친다. 뮤지컬 <남한산성>의 각본에서 마지막 장면이 그러했고,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의 마지막 "부디 이런 일 겪지 말라"는 묵자의 당부가 그렇다. 용왕의 자진 하야가 드라마적인 절정을 오르지 못한 패착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고선웅의 이야기에서는 굳이 왕 하나를 죽이는 것이 무슨 소용이랴는 듯.


덧) 주요 인물들에게 모두 짝을 맞추어 주었다는 것, 자라와 자라부, 토부와 토모, 토자와 토녀. 페미니즘에 대한 영향인지 고려인지 그저 재미난 이야기거리이든 여자 남자 함께 사는 세상이 이야기를 더 깊고 풍성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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