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의 연약함에 대하여
2019 명동예술극장 <알리바이 연대기>
연극은 시간을 견뎌내지 못하는 연약한 예술인가 아니면 특정한 시간을 응축하는 예술인가. 아니 시간을 견뎌내는 연극과 그렇지 않은 연극이 있는 것인가. 그도 아니라 연극의 연약함은 초연의 강렬함에 사로잡혀 있는 주관적 인상인가.
<알리바이연대기>는 제목처럼 아버지와 나와 형이 겪었던 시간들로 전개된다. 연대기라고는 하지만, 그래서 과거로부터 현재로 거슬러 오르는 에피소드가 순차적으로 전개되지만, 시간의 순서를 정연하게 따르는 것은 아니다.
연극은 공익 근무 훈련을 마치고 나서는 아들을 붙들고 눈물바람인 장면에서 시작되어 영어선생님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던 학교에서의 정년퇴임식에서 서재의 책들을 뒤적이며 오사카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을 아들에게 들려주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분절적인 에피소드를 이어주는 것은 연극 내내 무대 한켠에서 이야기를 지켜보고 있는, 혹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아들 재엽의 존재다. 재엽은 에피소드와 에피소드를 이어주는 나레이터이자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그리고 종종 아버지에게 질문하는 인터뷰어다. 이러한 재엽의 역할로 연극은 여러 겹의 시간이 공존하는 독특한 드라마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재엽을 앞에 두고 오사카에서의 어린시절을 들려주는 장면. 무대 오른 쪽 서재에서는 아버지와 재엽이 대화를 하고 있고 무대 중앙과 앞쪽은 오사카에서의 어린시절이 펼쳐진다. 시간과 공간은 이렇게 구획되어 있지만 그 경계는 종종 흐트러진다. 아버지는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재엽에게 이야기를 건네고 재엽은 그 앞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지만, 재엽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아버지의 시간에 속한다기보다는 연극이 전개되고 있는 지금 여기의 시간에 속해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시간의 만남은 아버지가 어린 시절의 아버지에게 말을 건네고, 어린 시절의 아버지가 아버지의 서재에 들어와 책을 둘러보는 등으로 가시화된다. 이러한 여러 겹의 시간은 이 연대기가 아버지의 과거, 그 과거에 대한 아버지의 기억, 그 기억이 재엽에게 전해져 재구성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과거의 사건이지만 그것을 말하고 있는 있는 것은 현재인 것이다.
이렇듯 <알리바이연대기>가 과거의 사건을 전개하면서도 과거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지금 여기를 환기하는 것은 무대 한 켠의 '재엽'의 존재다. 이 때문에 아버지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1막에서 이야기를 전하는 자로서 '재엽'의 역할이빛났다면 2막에서 '재엽'이 에피소드의 당사자로 등장하면서 과거 사건 밖의 재엽의 공간이 모호해지고 그에 따라 겹겹의 시공간의 공존과 겹침이 만들어내던 긴장감이 약화되었다.
명동예술극장에 다시 오른 <알리바이 연대기>에서는 1막에서부터 이 연극 특유의 드라마를 만들고 있던 '재엽'의 역할이 도드라지지 않는다. 소극장 무대 한 켠에서 여러 겹의 시간을 들추어내던 '재엽'은 프로시니엄 무대에서는 분절적인 시공간의 여러 이야기조각들을 이어가는 나레이터로 물러서 있다. 이때문에 서로 다른 시공간의 대화는 연출적 아이디어이거나 희극적 파격으로 남는다. 각각의 에피소드의 일상성, 그 일상성이 역사적 사건의 주변을 맴도는 사소하지만 또렷한 기억의 무게역시 텅빈 무대를 지탱해내지 못한다. 이 때문에 1막 아버지의 에피소드는 개인의 사소하지만 또렷한 기억의 역사를 구성하기보다는 현대사의 다이제스트처럼 다가온다.
2013년 초연 당시는 박근혜 대통령이 막 취임했던 때였다. 1막 아버지의 연대기에서 박정희와의 조우가 강조되고, 손가락 권총 같은 장면들이 지금 여기의 이야기로 받아들여졌던 데에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배면에 놓여 있다. 그 배면이 걷힌 이번 공연에서는 과거의 에피소드가 환기하는 현재성이 약화된다. 한국사회가 멀미나게 빠르게 변화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연극이 권력에 대한 질문을 더 끌고 가지 못하기 때문일까. 반면 초연에 비해 이번 공연에서는 2막 재진과 재엽의 에피소드가 좀더 생기 있게 다가온다. 1막 아버지의 에피소드가 익숙한 7,80년대 서사로 다가오는 것과 달리 2막 90년대의 에피소드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서사이기 때문일까. <응답하라 1994>나 온라인 탑골공원에 대한 대중적 열광이 배면이 되는 걸까.
또 하나 초연에서는 개인의 사적 기억으로 재구성되는 역사라는 데에 압도되어 간과했던 남성서사의 빈 부분이 이번 공연에서는 가려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연극에는 딱 두 명의 여성인물만이 등장하고, 그 두명은 모두 어머니이다. 그중 한명은 인혁당 사건의 에피소드에 잠깐 등장할 뿐이고 다른 한명은 재엽의 어머니다. (두 인물은 모두 전국향 배우가 분한다.) 재엽의 어머니는 아버지와 아들로 이어지는 연대기에서 자신의 에피소드를 갖고 있지 않다. 아버지가 식사 중에 어머니에게 반찬 심부름을 시키고 노태우에게 투표했다고 타박하며 일어날 때 반찬 그릇에 화풀이 하는 장면마저 없었다면 이 캐릭터가 얼마나 밋밋했을까.
중극장 무대에서 더 강렬해진 장면은 아버지의 죽음이다. 죽음을 앞둔 아버지가 평생 가슴 속에 묻어두었던 한국전쟁의 기억을 아들에게 들려줄 때 그 이야기는 연극의 첫 장면 훈련소를 퇴소하는 아들을 붙잡고 눈물바람을 하던 아버지를 환기하게 한다.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압도적인 사건이 텅 빈 무대를 가득 채우면서 아버지의 신산한 삶에 대한 애도로 연극의 시작과 끝을 완성한다.
블랙박스 소극장과 프로시니엄 중극장이라는 공간의 변화(물론 이는 물리적인 무대의 크기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2013년과 2019년이라는 시간의 변화가 초연과 이번 공연 사이에 놓여 있다. 한국사회가 너무나 빠르게 변화하기 때문일까, 시간과 공간을 견뎌내는 지금 여기의 연극으로 다시 만들어지지 못했기 때문일까. 혹은 날선 정치극에서 아비에 대한 애도로 한 걸음 옮겨간 것일까. 초연으로부터 채 10년도 지나오지 않았는데, 연극은 사뭇 다른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