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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핼로군 Sep 27. 2023

귀에 벌레가 들어갔어요

2019.11.27. 초보의사일지

 새벽 1시 30분에 환자가 왔다. 할머니인데, 귀에 벌레가 들어갔다고 하면서 소리 지르고 계셨다. 이경으로 귀를 보니 살짝 보이는 벌레...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집에 있는 벌레도 못 잡아서 맨날 종이컵으로 덮고 버리는 나인데, 새벽 1시고 "저는 못하니까 옆에 이비인후과 가보세요" 하기엔 섬이라 너무 밤이라 배도 안 뜨고, 어떤 의료시설도 없는 환경에서 유일하게 할머니의 귀에서 벌레를 빼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라는 생각을 하면 항상 뭐라도 시도해보게 된다.

근데 학교에서 '귀에 벌레가 들어갔을 때' 같은 수업은 하지 않으니까.. 어떻게 해야할까 하다가 최근에 읽은 웹툰에서 이 내용을 봤던 생각이 났다. 그래서 바로 옆에서 소리를 지르고 계신 할머니를 두고 웹툰을 켜서 두 화 정도를 정독했다. 보호자가 있었으면 엄청 뭐라고 했었겠지만, 방법이 없었다. 


귀에 알코올이나 물이나 참기름 등을 부어서 벌레를 익사시키고 빼내는 것이 가장 안정적이라고 한다. 그렇게 하고 빼냈더니 벌레가 툭 떨어졌다. 떨어진 벌레를 화나서 마구 밟는 할머니를 보면서 얼마나 아팠으면 했다. 


 고작 의대 6년 다니고 갓 의사된 뒤에 이렇게 의료의 최전방에서 모든 환자를 봐야 하니 힘이 들긴 하다. 모르는 게 너무 많은데 그때마다 인턴 동기들이나 선배들, 같이 일하는 형에게 묻지만 새벽 같은 때에는 그것조차 너무 힘들어 완전 혼자 해결해야 할 때면 정말 막막하고 누군가 확실히 알려줄 사람이 있는 수련받는 동기들이 부러울 때도 있다. 


 나도 하나도 몰라서 패닉인데 환자한테는 다 아는 척 월드클라스 의사 인척 해서 안심시키는 것도 힘들고 그래도 어찌어찌 항상 해내고는 있다. 심근경색, 경운기에 깔림, 화상, 칼에 찔린 상처 같은 큰 질환에서 귀에 벌레 들어감, 혼자서 가시 박힌 거 안 나와서 빼 달라는 사람들까지... 이렇게 보다 보면 성장하기는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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