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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핼로군 Dec 12. 2019

공보의 배치

초보 의사 일지 3

 내 인생에서 제일 길었던 4주 동안의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15mm로 잘랐던 머리가 25mm가 되어서 연무대를 떠났다. 하지만 앞으로 제일 중요한 것이 남아있다. 바로 제비뽑기이다.


 공중보건의사 (줄여서 공보의)는 전국적으로 의사가 없는 의료취약지역의 보건지소로 파견되게 된다. 각자 사는 곳과는 전혀 다른 순전한 제비뽑기로 지역이 정해지게 된다. 경기도부터 제주도까지 모든 지역으로 배치를 받게 된다. 그중에서 악명 높은 곳은 모두가 꺼려하지만, 1년 차의 1/3이 가게 되는 곳 전라남도, 서울과도 엄청나게 멀면서 그중에서도 1/4 정도는 의사 한 명 없는 섬에 배치되기 때문에 인기가 가장 없다.


 OMR 카드에 신중하게 작성해나가기 시작했다. 1 지망만 떨어져도 거의 95%의 확률로 전라남도에 배치되어 섬에 갈 확률이 증가하기 때문에 엄청난 압박감을 받는다. 내가 적은 것은 1 지망 2 지망 3 지망 순으로 충청북도-보건복지부(교도소)-경상북도, 마지막까지 공보의 톡방은 "이번 연도는 강원도가 제일 핫하대요" "올해 충청북도 자리가 정말 좋다는데" 이런 얄팍한 대화를 하며 들끓었다.


 아 씨....

 나의 바람이 무색하게 '전라남도'에 배치가 되었다. 항상 제비뽑기에서 좋은 것만 뽑아서 애들이 샘냈었는데, 아이스크림 내기할 땐 잘 걸리지도 않던데, 모두 이 순간 운을 앗아가려고 그랬나 보다 싶었다. 공보의의 근무 환경은 현역병에 비해 편한 대신 기간은 2배인 37개월.. 뮤지컬을 하고 싶어 공보의를 선택했던 나로서는 서울과도 먼 전라남도에 배치된 게 너무나도 막막했고, 이럴 거면 왜 공보의를 왔지 그냥 인턴 할걸..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다음 날 두 번째 제비뽑기를 하기 위해 무안의 김대중홀로 98명의 일반의 공보의들이 모였다. 다들 씁쓸하게 웃으며"전남이에요?" 하면서 두 번째 제비뽑기를 기다렸다. 2번째 제비뽑기는 '나주' '곡성' '장성' 등 그나마 KTX도 지나고 위쪽인 지역부터, '신안' '완도' 등 섬 투성이인 지역까지 여러 지역 중 어디를 가게 될지 뽑는 제비뽑기인지라 어찌 보면 첫 번째 제비뽑기보다 중요하다.

    

 앞에서 들리는 1번이라는 소리에 부러워 죽고, 뒷번호 뽑은 사람을 보면 다행이다 싶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87번...  그렇게 나는 섬 많다는 곳에 가게 되었다.  이제 그냥 나는 세상에서 제일 운 나쁜 놈이 되어 있었다.


 앞으로 살면서 어떠한 제비뽑기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한 보건소 마지막 제비뽑기에서 그나마 운이 좋아 가까운 쪽의 섬을 뽑고 집으로 돌아왔다. 기차 3시간 반을 타고 돌아오는데 7명의 친구와 통화를 했는데도 도착하질 않았다. 어제의 나는 상상도 못 했던 내가 또 되어 있었다.


 후.. 신안 섬이라니 앞으로 어떻게 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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