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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영 Aug 05. 2022

Krótki film o zabijaniu

박찬욱의 오마주를 오마주 #8

한 청년이 사진관 앞을 서성인다.

구깃구깃 낡고 손때가 탄 작은 사진을 조심 스래 꺼내 놓는다.

사진 속, 앳된 얼굴의 한 여자아이가 카메라를 보고 긴장한 듯 굳은 얼굴로 서있다.

그는 이 사진을 확대 인화해줄 것을 부탁한다.


이 청년은 오늘 가방 속 사진뿐 아니라 밧줄과 쇠막대기 또한 챙겨 나왔다.

무슨 연유로 그것들을 가지고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하릴없이 거리를 배회하며 하는 짓거리들을 보니 좋은 일에 사용하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고가 밑을 지나는 차에 돌을 떨어뜨리고, 밥 먹는 비둘기들을 쫓아내고, 화장실에서 어떤 남자가 쳐다봤다고 그를 소변기에 처박아 버린다. 카페에 들어선 그는 커피와 빵을 주문하고 자리에 앉는다. 같은 시각 카페 안, 청년과 가까운 테이블에서 방금 변호사 시험에 통과한 남자가 자신의 애인과 함께 자신들 앞에 펼쳐질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다정히 대화를 나누고 있다. 청년은 마침내 무언가 결심한 듯 탁자 밑에서 밧줄을 알맞은 길이로 잘라 손바닥에 단단히 감고 주머니에 그 손을 넣은 채 정류장에 서있는 택시로 향한다. 아, 남은 커피에 침을 뱉어놓는 짓도 잊지 않는다.


한 택시기사가 물 양동이를 들고 세차를 하러 나선다.

택시의 룸미러에는 도깨비같이 생긴, 왠지 험상궂은 그를 닮은 듯한 인형의 머리만 댕강 달려있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온갖 불평불만을 쏟아낸다.

한 손님이 세차가 끝나면 태워달라고 기다리고 있는데, 세차를 마친 뒤 자신에 마음에 둔 여자에게 드라이브를 신청하고 거절당하자 기다리던 손님은 무시한 채 달아나고, 아파 보이는 손님이 타려 하자 귀찮아질 듯해 무시하고 지나친다. 어떤 오토바이를 탄 사람이 정지 신호에 멈추어 있는 그의 택시 옆에 멈추어 선다. 몹시 흥분된 표정으로 그에게 소리친다. "저 방금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어요!" "저 이제 변호사예요!"

어쩌란 거지? 남의 기쁨은 그의 불행이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증오에 찬 눈빛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카페 앞 정류장에 차를 세워놓고 있는데, 한 남자가 간발의 차이로 두 명의 남자들보다 앞서 그의 택시를 잡는다.


"저희가 너무 급한 일이 있는데, 혹시 성수동 쪽으로 안 가시나요?"

"저는 연남동 쪽으로 갑니다."

청년은 두 남자들에게 차갑게 대답한 후 택시 뒷자리에 들어가 앉는다.

"성수동으로 갑시다."

"저 사람들은 어디로 간데요?"

"연남동으로 간답니다."

그들을 태운 택시가 출발한다.


빠아아 앙! 빠아앙! 빠앙!

인적 없는 기찻길 옆 공터에 홀로 선 택시의 경적소리가 요란하다.

한동안 계속되던 경적소리가 멈추고 정적.


택시기사의 드라이브 신청을 거절한 여자가 가게를 정리 중이다.

가게 앞에 한 택시가 멈추어 선다. 그 청년이 안에 타고 있다.

청년은 여자에게 드라이브 신청을 하고 여자는 신이 나서 차에 탄다.

룸미러에 매달린 험상궂은 도깨비 머리.


재판이 끝나고 변호사가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있다. 뒤에 앉은 청년이 무심하게 끝났냐고 묻고, 그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청년은 다른 장소로 이송되고 변호사는 판사를 찾아간다.

"혹시 오늘 재판에 저 같은 초임 변호사가 아닌 경험 많은 변호사였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요?"

"당신은 아무 잘못 없네. 누가 변호를 했던, 결과는 같았을 게야."

"이 청년이 카페에서 살인을 결심한 날, 저도 같은 카페에 있었어요. 같은 날, 같은 시간에 말이에요. 만약 제가 막을 수 있었더라면..."


청년을 면회하러 온 변호사. 30분의 시간이 주어진다.

청년은 유일하게 살인자라는 이름표 이면에 숨은 자신의 인간적인 면을 봐준 그에게 마지막 부탁을 전한다.

"우리 집안에는 미리 준비해둔 묫자리가 세 군데가 있어요. 저의 어머니께 이미 묻혀있는 아버지의 옆자리를 제게 양보해 주실 수 있는지 물어봐주세요."

"다른 한 군데는?"

"제 여동생이 묻혀있어요… (감정에 복받치며 고통스럽게 말을 잇는다) 제 여동생은 오래전 저와 제 친구가 타고 있던 트랙터에 깔려 죽었어요... 저와 제 친구는 술에 몹시 취해있었죠. 저는 여동생을 너무도 사랑했어요... 그때 그 일만 아니었다면..."

"지금 이 상황까지 오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청년이 고개를 끄덕인다.


힘없이 고개가 앞으로 쳐진, 눈 가리게에 얼굴이 반쯤 덮인 청년의 모습.

공중에 떠 있는 발 밑으로 묽은 액체가 뚝뚝 떨어진다.

사무적인 태도의 교도관들과 사형집행인들 사이,

변호사는 왜인지 모를 죄책감에 몸서리치고, 결국 오열한다.


FIN



세 번의 살인과 관련된 세 명의 인물들.


자신의 실수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 여동생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청년,

얄밉긴 하지만 죽을 정도의 죄를 진 적은 없는 택시기사,

정의감에 불타는 법대 학생.


이야기의 끝에 다 달아 그들이 얻은 새로운 이름들,

가해자.

피해자.

변호사.


실수에 의해 벌어진 살인,

개인적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살인,

사회적 합의에 따른 국가 권력에 의한 살인.


모든 다른 이유에서 벌어진 세 번의 살인.

하지만 모두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그 살인과 가까웠던 사람들의 비극 말이다.



-Krzysztof Kieślowski 감독 영화 "Krótki film o zabijaniu(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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