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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영 Aug 15. 2022

여와 남

<봄날은 간다>

강릉 여자와 서울 남자


한 남자를 만났다.

어수룩하고 재밌는 말도 할 줄 모르는 숙맥이다.

그래도 숨김없이 진실된 사람 같아 보여서 싫진 않다.

뭐 웃을 땐 좀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근데 문제가, 나를 보며 항상 웃는다.


너무 예쁜 여자를 만났다.

태어나서 이렇게 예쁜 여자를 실제로 본 적 있나 싶다.

말할 때도 예쁘고, 말 안 할 때도 예쁘고, 웃을 때도 예쁘고, 심술부릴 때도 예쁘고, 밥 먹을 때도 예쁘고...

또 뭐냐, 그냥, 항상, 너무 예쁘다.

아, 벌써 그녀가 보고 싶다.

내일이 빨리 왔으면!


이 남자, 뜨겁진 않은데 따뜻하다.

재밌지도 않고, 멋도 없는데, 그래서 좋다.

그냥 같이 있으면 편하고 좋다.

자판기 커피 같은 남자다.

내가 외로울 때면, 언제든 버튼 한 번만 누르면 달려와준다.

달려와서 나를 따뜻하게 안아준다.

뜨겁지 않아서 더 좋다.

우리 집에서 라면 먹고 갈래요?


이렇게 예쁜 여자가 나를 좋아한다니!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결혼식은 언제 하지? 결혼식장은? 애는 몇 명을 낳을까?

김치를 담글 줄 모른다는데 무슨 상관이랴, 내가 담가주면 되지!

사랑이란 게 이리도 좋구나!


그이가 갑자기 나보고 자기 집에 인사하러 가자고 했다.

내가 김치 담글 줄 모른다니깐 자기가 담가준단다.

내가 앞으로의 계획을 살짝 물어봤을 땐 대답도 안 하고,

같이 무덤을 보며 우리도 죽으면 저렇게 같이 묻히자고 물었을 때도 대답 안 하고,

함께할 미래에 대해 아무런 말도 같이 한 적이 없는데...

그냥 매일같이 우리 집에 와서 라면 먹고, 자고, 또 라면 먹고, 자고,

같이 좋은 레스토랑 가서 분위기 내본 적도 없고,

제대로 된 데이트 한 번 한적 없는데...

아니, 뭐 비싼 선물, 고급 레스토랑 따위를 원하는 건 아닌데,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진지한 제스처나

미래에 대한 대화 한 번 없이 자기 집에 인사하러 가자 할 수 있는 거지?

사랑은 사랑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는 건데...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너무 답답해.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요즘 우리 방송국에 홍보차 온 가수가 자꾸 수작을 건다.

어제는 자기가 좋은 곳 안다고 맥주 한 잔 하자고 해서 오케이 했다.

이 사람은 능력도 있고 말도 잘하고 능숙하다.

여자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잘 안다.

하지만 그뿐이다.

항상 그래 왔다.

이런 남자들은...


요즘 조금 이상하다.

표정도 어둡고,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

어제는 술에 잔뜩 취해서 들어왔다.

회사에서 무슨 일 있는 것 같아서 물어봐도 대답이 없다.

내가 이렇게 걱정해주는데 되려 나한테 짜증이다.

내가 매일 라면도 끓여주고, 오늘은 해장하라고 북엇국까지 끓여줬는데...

나의 성의를 이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게 너무 괘씸하다.

이제 나를 그냥 라면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어제 다투고 나서 너무 화가 난 나머지 그이가 집을 나간 사이 그이 짐을 다 싸놓았다.

근데 정말로 집에 오자마자 그 짐을 들고 서울로 가버렸다.

도대체가...

왜 이렇게 사람 마음을 몰라주는지.

너무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근데 어쩌지?

그이가 벌써 보고 싶다.


사랑 따윈 필요 없어!

여자는 다 똑같아.

이기적이고 제 잘난 줄만 알지.

혹시라도 그녀가 후회하고 찾아오면 차갑게 대해야지.

받은 대로 똑같이 갚아줄 거야.


그녀가 서울로 찾아왔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그녀, 너무 예쁘다.

보고 싶었어.


결국 그이와 함께 강릉으로 돌아왔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너무 보고 싶었어서 어쩔 수 없었다.

우리의 관계는 여기까지야.

머리는 이렇게 말하는데 가슴은 따뜻한 그이의 품을 원한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말했다.

한 달만 생각할 시간을 갖자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한 달.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버티지?

절대 이대로 헤어질 수 없어.

그냥 안부 묻는 척 전화해 봐야겠다.

내가 계속 헌신적인 모습을 보이면 분명 그녀의 마음이 돌아올 거야.

다시 이 전으로 돌아갈 수 있어.

행복했던 그때로.


그 돈 많은 가수가 차도 사주고 비싼 레스토랑, 호텔들도 데려가 준다.

사람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점점 그이를 생각하는 시간이 줄어간다.

마음도, 생각도, 조금씩 정리가 되어간다.


그녀를 보러 강릉에 왔다.

회사 앞에서 기다리는데 웬 남자가 그녀를 차에 태워간다.

그 남자가 그녀의 손을 잡고 있다.

결국 그런 거였어.

심장이 쪼그라들어 터져 버릴 듯한 통증이 느껴진다.

너무 힘들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나 너무 힘들어.

그녀가 새 차를 몰고 고급 리조트에서 그 남자랑 손을 잡고 들어간다.

저 차를 부서 버리고 싶다.

다 부서 버리고 싶다.


오늘 정리된 나의 마음을 그이에게 전했다.

그이가 상처받지 않고 잘 받아들였으면 좋겠는데...

그이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기 너무 괴롭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하지만 이전보다는 덜하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하지만 완고한 그녀의 표정을 보자 왜인지 마음이 좀 편해진다.

희망이 사라진 포기에서 오는 마음의 평화랄까?

이제 정말 끝이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그이가 요즘 들어 문득문득 생각이 난다.

그이의 따뜻한 품이 그립다.

서울로 그이를 찾아왔다.

또 가슴이 머리를 이겼다.

하지만 그이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애써 모르는 척하며 그이의 팔에 안겼다.

그이가 조심스레 내 팔을 놓아주고는,

거리를 두고,

나를 바라보며 따뜻하게 웃어주었다.

마치 겨울을 이겨낸 봄 햇살 같이.

나도 그를 보며 웃었다.



그대가 나에게 선물해준 시간,

고마웠고, 행복했고, 사랑했어.








-허진호 감독 영화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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