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불행 만은 아닌지도.

가족.

by NOMAD J

우리 가족을 설명할 때 나는 종종 이렇게 말했다.

"우리 가족은 모두 다섯이에요. 현존해 계시는 외조모님까지 하면 여섯 명이죠? 근데, 다~ 따로 살아요. 그리고 다~ 혼자 살죠."


우리 가족 개개인 모두는 자의식이 아주 강하다. 때문에 어쩌면 당연히 화목할 수는 없었다.

우리 자매들이 성인이 되고 하나 둘 집을 떠나고, 심지어 외국으로 각각 나돌아 다니는 동안 부모님들도 어느정도 각자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둘 중 누군가는 원했고 누군가는 원하지 않았던 시작이었으나, 그것도 20년쯤 지나고보니 각각 적응이 되어 함께 하는 삶을 꿈꿀 수 없게 되었다.

오늘에 와 생각해보니,

우리 다섯.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아마도 17~8년 전쯤 장녀의 석사졸업식 사진을 위한 30분 남짓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여행이란 것은 초등학교 즈음이 마지막이 아니었을까 싶고.


시간은 그렇게 흘렀다.

그렇게 흘러보내려 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냥 그렇게 흘렀다.

대한민국에 사는 싱글 중년여성으로서, 결국은 내 한 몸 내가 건사해나가는 게 그나마 효도라고 생각하면서. 시간에 떠밀려 일도 미친 듯이 해보고, 내 삶을 자괴하며 넋 놓은 시기도 보내보고, 내일 따윈 없는 것처럼 놀아도 보며 그렇게 지나왔다.



"놀라지 마세요. 암이랍니다."

아빠는 담담하게 알려왔다.


그 길로, 아빠는 스스로 서울 큰 병원에 진료를 잡으셨고, 진료 전날 몇 개월 정도는 지낼 수 있게 짐을 싸서 서울로 올라오셨다. 얼마 전 이사를 한 언니는, 지금 상황에서 본인이 아빠를 모시는 건 "당연"하다며 담담히 받아들였다. 우리는 그저 첫 진료는 누가 따라 갈 것인지 의논했고, 엄마에게도 상황을 알렸다. 울컥하는 감정을 모두 수시로 느꼈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은 무너질 때가 아니라 우리가 딸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한다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수술을 위해 입원하는 날, 외국에 있는 장녀를 제외한 가족이 모두 모였다. 이렇게 다 모인 것이 언제였었는지 아무리 기억해보려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정도로 오래되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아빠는 수술을 잘 마쳤고, 지금은 3~4주에 한번씩 항암사이클을 돌고 있는 중이다.

이미 십 수년 떨어져 지내던 아빠와 엄마는 매일 통화를 주고 받고, 시간이 허락하면 엄마가 올라와서 아빠를 간병한다. 옆에서 보고있자니 70 언저리에 두 분 지금 연애하는건가~싶다.

역시 수 년간 데면데면 연락 끊고 지내던 언니와 엄마는 아빠 일을 논의하기 위해 별 수 없이 대화를 시작했고, 이제는 둘이 마주앉아 아빠 흉을 보며 깔깔대기도 한다.


진단-수술-1차 항암시작, 고작 그 1달 남짓의 시간.

많은 것이 바뀌었다.


서로의 성향을 혐오하며 멀어졌던 사람들이었는데 분명히.

그런데 위기상황에 봉착하고 보니 기저에 깔린 근본은 같은 사람들인 것인가~싶어 의아하다.

우리는 누구하나 감정을 터뜨리기보다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각자가 해야할 일을 고민하고 의논하며 같이 대안을 마련하고 있다. 또, 서로의 자리에서 아빠를 위해 하고 있는 행위를 칭찬하고 고마워한다.


불행이 반드시 불행으로 끝나진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아빠의 투병이 우리를 다시 가족으로 만들었다.

발병 자체는 너무나 슬픈 일이지만, 가족이 가족처럼 지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 있어서 너무나 좋은 하루하루일지도 모르겠다.


주말이 되어 아빠를 보러 온 언니 집.

냉장고를 열어보니, 엄마가 해다 놓은 얼추 아빠입맛 반찬이 잔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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