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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튼 Jan 15. 2020

여행과 라면 수프 # 2

여행의 이유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여행의 이유, 김영하-


 매년 12월 말이 되면 전국의 내과 레지던트들은 '보드 리뷰'라는 강의를 듣기 위해 한 곳에 모인다. 보드 리뷰란 전문의 시험을 보기 전에 교수님들께서 해주시는 족집게 강의 같은 것이다. 이때 모이는 레지던트 숫자가 700명 정도, 700명의 내과 레지던트가 한 강의실에 몰려있는 것은 정말 진풍경이다. 작년에는 1300명이 모였다고 하니, 전국의 내과의사가 얼마나 많은지 눈으로 확인해볼 수 있는 기회이다. 사실 보드 리뷰 자체도 만만치 않아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지만, 700명의 의사들 사이의 나를 보니 여러 가지 생각을 들게 하였다.


 "내가 이 사람들 사이에서 구별되는 점이 있기나 할까? 나의 경쟁력은 무엇일까?"

같은 자격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나의 든든한 동료가 될 수도 있지만, 경쟁자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요새 의사들도 치열한 스펙 경쟁을 벌이고 있다. '소화기 내시경 전문의, 심초음파 전문의, 복부 초음파 인증의... 등등' 수많은 자격증이 난무한다. 자신을 남과 구별 짓지 못하면 노바디 Nobody 가 되는 건 의사들도 마찬가지이다.






여행은 정반대의 과정이다. 우리나라에서 '어떤 누군가' Somebody 갇히기 위한 과정이었다면, 여행하는 나는 그냥 수많은 관광객 중 한 명일 뿐이다. 여행의 초반에는 짜릿한 해방감을 맛본다. 한국에서 짓누르던 수많은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낯선 풍경과 낯선 사람들이 주는 자유로움. 하지만 여행이 길어질수록 고립감과 외로움은 깊어진다. 정확히 한국에서 힘들었던 그 숙제가 다시 나를 짓누른다.


"나는 누구인가?"
필리핀, 세부


 수많은 사람들이 경쟁에 지쳐 한국을 떠난다. 하지만 고추장 튜브와 라면수프를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나를 보면서, 길거리의 'SAMSUNG' 로고에 자부심을 느끼는 나를 발견하면서, 촌스러운지 알면서도 '두 유 노 김치'를 연발하는 나를 보면서, 나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임을 느낀다. 무엇으로부터 도망친다고 해서 자유로울 수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자유롭다는 건 나를 잘 알고 그 잠재력을 발휘할 때이다.

 64개국 267개 도시, 볼 것 다 보고, 먹을 것 다 먹고, 겪을 것(때론 안 겪어도 좋았을 것도) 다 겪고 든 생각은? 여행은 떠나는 것이다, 제자리가 아니라 '제대로 된 내 자리'로 돌아오기 위해


-세계 여행 플랜 북 中-







 결국 여행은 돌아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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