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의 반격> -손원평-
김지혜. 소설 속 등장인물 중 한 명인 그녀.
그녀의 이름은 친할아버지의 완고한 뜻으로 인해 가을의 정점 혹은 화려함의 극치라는
뜻을 지닌 김추 봉(秋峰)이 될 뻔하였으나 이름 때문에 출산까지 미룰 정도로 완강한 어머니
덕분에 그녀의 이름은 지혜가 되었다.
이렇듯 그녀가 지혜라는 이름을 지닌 연유는 평범하지 않았으나 88년도에 태어난 수많은 여자아이들의
이름 중 미정이나 현주와 더불어 흔하디 흔한 여자아이의 이름 중 하나가 되었다.
지혜가 살고 있던 대한민국 사회는 백화점 붕괴와 IMF 외환위기 등 굵직 굵직한 일들이 일어났으나
한 명 걸러 한 명씩 있는 이름을 가진 지혜는 트라우마를 갖게 된 학창 시절을 지나 그 시절 또래의 80년대생이 그러하듯 취업을 위해 스펙을 쌓고 면접을 보러 다니며 사회에 뿌리를 내릴 곳을 찾으며 아등바등
살고 있다.
결국 자신이 가고 싶었던 굴지의 대기업인 DM그룹 본사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계열사인 디아망 아카데미에
인턴으로 취업하여 훗날 본사로 정직원으로 갈 꿈을 꾸면서 매일 복사와 의자정리 등의 잡일을 하며 매일매일을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카데미에 규옥이라는 사람이 들어오게 되면서 그저 무한히 뻗어있는 직선 같은 지혜의 삶이
파동을 그리며 요동치게 된다.
규옥은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사람이었다. 비록 바위는 계란 따위를 던져봤자 조금의 상처도 생기지 않지만
바위에는 깨진 계란에서 흘러나오는 노른자로 인해 얼룩이 남게 된다.
그처럼 규옥은 부조리한 현실을 깨버리진 못하지만 놀이라는 형태로 현실에 소리를 외침으로써 현실에 변화를 일으키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지혜는 그런 규옥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엉겁결에 규옥의 놀이에 동참하게 되었고 또 다른 동참자인 남은가 무인과 더불어 대단하지는
않지만 하고 나면 통쾌한 부조리한 현실에 날리는 놀이행위를 통해 그들의 외침에 조금은 닿기를 바랐다.
하지만 처음부터 지혜가 예상했듯이 놀이는 끝이 났고 네 사람은 각자 제 갈길을 찾아 흩어지고 만다.
훗날 지혜가 새롭게 찾은 일터에서 자신의 꿈을 그려나가고 있을 때 어느 날 뉴스에 나온 비리사건 보도에서
규옥의 흔적을 발견하고 지혜의 작은 바람이 실현된 공간에서 두 사람은 재회하게 된다.
지혜는 자신이 작은 지혜, 혹은 삐가 아니라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page127. 아빠 세대와 우리 세대가 서로를 이해하고 바라보는 방식은 그런 건지도 모른다. 각자의 세대가
다 힘들다고 주장하고 그에 비해 상대의 세대를 쉽게 얘기하며 평행선을 달린다. 그런 걸 보면 삶을 관통하는
각박함과 고단함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공통적인가 보다.
page147. 대개의 인간관계가 그렇게 시간 속에 희석된다. 그러나 드물게는 영영 볼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누군가를 만나는 경우도 있다. 내가 그랬다. 그 존재가 갑자기 나타나 과거의 수치심을 복기시켰다.
내게 분노와 절망을 가르쳐준 희미해진 기억 속의 아픈 존재가.
page170. 서른 살의, 젊다면 젊은 낙오자가 서 있었다. 아니 성공한 적이 없기 때문에 낙오한 적도 없다.
잘 나갔던 적도 없기 때문에 슬럼프라는 말도 사치다. 그저 하루하루를 살았을 뿐이다. 내 깜냥만큼, 내 능력만큼. 내 성격이 받쳐주는 딱 그만큼. 그게 나였다.
page232. 내가 우주 속의 먼지일지언정 그 먼지도 어딘가에 착지하는 순간 빛을 발하는 무지개가 될 수도
있다고 가끔씩 생각해본다. 그렇게 하면, 굳이 내가 특별하다고. 다르다고 힘주어 소리치지 않아도 나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존재가 된다. 그 생각을 얻기까지 꽤나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지만 조금 시시한 반전이 있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애초에 그건 언제나 사실이었다는 거다.
1988년생. 소설 속 주인공인 김지혜의 탄생연도이다.
같은 80년대생 인간으로서 소설 속 지혜의 현실이 내가 살아온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나는 특별하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어느 누구와도 다르지 않은 평범한 인생이었다.
나는 10여 년쯤 전에 10년 후 나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그 속에서 나는 글을 쓰는 작가로서 살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린 모습이 현실이 되도록 꿈을 꾸었고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나는 의지가 약한 사람이었고 나 역시 해변가에 무수히 펼쳐진 모래 알갱이 중 하나였고
파도에 휩쓸려가지 않기 위해 다른 모래 알갱이들과 엉켜 있으려고 하는 전혀 특별하지 않는 흔한 인간이었다.
동네에 흔하게 있는 말썽 피우는 아이 중 하나였고 학교에 들어가서는 어떻게든 상위권 성적에 들어가기 위해
학원을 다니며 공부하던 학생들 중 하나였고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휴학과 복학을 왕복하며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스펙 쌓기에 찌든 청춘 중 하나였다.
하지만 결국 커피 심부름이나 정수기 물통 갈기가 주 업무인 허울뿐인 인턴사원과 별 다를 바 없는 회사원이
될 뿐이었다. 나는 왜 이러고 살고 있나 하는 자기 비하는 옵션처럼 따라왔다.
무엇이 잘못되었나 ,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나 , 나는 제대로 방향을 잡고 가고 있는가.
소설 속 지혜 역시 이런 고민들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지혜의 이야기를 통해 사회의 상위 1%를 향해 꿈틀대는 그들의 모습에 공감하였고 그들의 놀이에
통쾌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결국 지혜는 혼자서 나아감으로써 결국엔 나 자신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학창 시절 또 다른 지혜인 공윤으로 인해 따돌림을 당한 지혜였지만 다시 만난 공윤에게 당당하게 자신의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지혜는 결국 자신의 자리를 찾게 된다.
지혜는 소설 속에서 자신의 길로 걸어가고 있었지만 현실 속의 나는 언제쯤 제 자리를 찾게 될까 하는
생각에 또다시 불안에 빠지는 이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