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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함에 담긴
에스프레소 한잔의 향기

소소소(小素笑): 진짜 나로 사는 기쁨》를 읽고

사소함에 담긴 에스프레소 한잔의 향기

 《소소소(小素笑): 진짜 나로 사는 기쁨》를 읽고



독서는 새로운 탄생입니다


“서삼독(書三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책은 반드시 세 번 읽어야 합니다. 먼저 텍스트를 읽고 다음으로 그 필자를 읽고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그것을 읽고 있는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합니다. 모든 필자는 당대의 사회 역사적 토대에 발 딛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를 읽어야 합니다.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하는 까닭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서는 새로운 탄생입니다. 필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탈주(脫走)입니다. 진정한 독서는 삼독입니다“(266쪽). 신영복 교수님의 《처음처럼》에 나오는 말입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책을 읽기 전에 저자를 먼저 읽어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저자의 문제의식이나 사연과 배경, 그리고 저자가 걸어온 길을 먼저 읽고 제목을 보고 목차를 훑어본 다음 본문을 읽기 시작합니다. 그럼 책의 본문이 마치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리고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책이 눈으로 들어오고 머리로 생각하며 가슴으로 느끼는 와중에 몸을 통과합니다. 그리고 나를 반성해봅니다. 책을 거울삼아 내 삶을 반추하고 반성하며 성찰해봅니다. 저자의 텍스트가 끝나는 곳에서 독자의 탈주는 시작됩니다. 지금 여기서 안주하는 삶을 탈출하고 새로운 각성의 장으로 옮겨갑니다. 책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내가 다르게 다가옵니다. 나는 이제 읽기 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의 변화는 진저리를 동반한다. 독서에는 반드시 몸의 반응이 따른다. 가벼운 바람도 있고 통곡할 때도 있다. 어쨌거나 읽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한겨레 신문에 연재했던 정희진의 ‘어떤 메모’, 정찬의 《베니스에서 죽다》 리뷰 편에 나오는 말입니다. 읽기 전의 돌아갈 수 없는 비가역적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이 바로 독서입니다. 한 사람은 이미 한 권의 책입니다. 그 사람이 살아가는 삶 자체가 책이 되는 셈입니다. 책이 주는 힘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독서는 한 사람을 이전과 다른 인간으로 거듭나게 만드는 위대한 창조입니다.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과 접속해서 내 생각도 틀릴 수 있음을 배우는 겸손함도 책이 가르쳐주는 소중한 교훈입니다. 똑같은 시대를 살아가지만, 반복되는 익숙한 일상을 보고 살아가지만 누군가는 같음에서 다름을 보고, 익숙함에서 낯선 의미를 캐냅니다. 책에는 그런 다름과 차이, 낯선 상상과 창조가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항상 “나를 넘어서는 지혜가 있다는 믿음, 이를 배우면 현재의 내 삶이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이 인생을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199쪽). 사소한 일상에서 만나는 익숙한 사물이나 현상, 사람과의 대화, 지나가다 우연히 만나는 거리의 간판과 문구에서도 비상하는 상상력을 발휘하며 큰 깨달음을 얻는 윤재윤 변호사님의 소소한 이야기가 심장을 파고듭니다. 

     


소소함을 몸소 체험하며 나답게 사는 길소소소(小素笑)


“세상에 사소한 일은 없다. 겉으로 작아 보이는 일이 더 본질적인 것일 수도 있다. 일상의 사소한 일을 보다 정성스럽게 대하면 좋겠다”(207쪽). 사소하면서도 평범한 일상을 비상하는 상상력의 텃밭으로 바꿔주는 깨달음의 향연이 곳곳에서 펼쳐집니다. “우리가 판단하고 행동한 것 중에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얼마나 많을까? 오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다른 사람에게 섭섭해하고 비난하는 것이 불행과 다툼의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겨울 숲길에서 들었던 작은 소리가 나의 굳은 사고방식을 새롭게 점검해보라고 속삭이는 듯하다”(111쪽). 늘 생각을 반추해보고 한 발 물러서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관조하는 자세가 습관적으로 살아가면서 자기 삶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원동력인 셈입니다. 사소함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곳에서 희소가치를 발견하고 창조하는 저자의 삶에서 사색하며 관조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를 몸소 보여줍니다. “읽기는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날 오후 강행군을 마치고 그늘에서 마시는 차가운 샘물과 같은 것이다. 책이 그렇게 읽히는 것이라면 반복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215쪽). 사사키 아타루의 《이 나날의 돌림노래》에 나오는 말입니다. 바쁜 일상을 어제처럼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사색의 샘물이자 죽비 같은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작은 울림이 앞산에 반동되어 돌아오는 조용한 메아리처럼 귓전을 때립니다. 책을 읽으며 손을 놓을 수 없는 이유는 그런 저자의 목소리가 담긴 글에 밑줄을 치며 생각을 거듭하게 만드는 메모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다 보면 “내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118쪽). 책은 이제 내 몸을 통과하면서 새로운 나로 재탄생시키는 창조의 과정으로 변신합니다.




책 제목이 소소소(小素笑)여서 호기심을 갖고 목차를 보고 본문을 보니 이런 풀이가 나옵니다. ‘소소소’, “바람이 아주 부드럽게 부는 모양”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라고 합니다. 머리말에는 이 말의 연원과 배경, 그리고 의미를 다음과 같이 풀이하는 글이 나옵니다. 


“小(작을소), 이는 격을, 소(少)의 뜻도 갖고 있다. ‘조심하다’라는 뜻도 있단다. 작게, 적게, 조심스레 마음먹고 행하라는 의미이겠다.


(본디 소). ‘꾸미거나 덧붙이지 아니하다’, '바탕', ‘질박’의 뜻이다. 아무런 빛깔도 없다는 의미에서 ‘흰빛깔’을 뜻하기도 한다. 생긴 대로, 본바탕대로, 꾸미지 않는 마음가짐과 태도를 나타낸다.


(웃음 소). 이 글자를 파자하면 '대나무(竹)에서 나는 소리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중의 하나가 웃음이다. 웃음은 단순히 웃기는 일이 생겨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을 수 있는 마음이 갖추어졌을 때에야 가능하고, 깊은 데서 터져 나오며, 이때 마음이 아래에서 위로 열린다. 아무리 짧은 웃음도 그 순간 하늘의 느낌을 갖게 한다(나무 짧아서 기억하지 못할지라도)“(6쪽). 


“작게, 본디 바탕대로, 웃으며 사는 모이 바람이 부드럽게 부는 모양과 같지 않을까”(7쪽). 책의 제목대로 이 책은 조심하지 않고 큰 것을 탐내는 욕심과 바탕대로 자기 다운 색깔을 찾아 살아가야 됨에도 불구하고 과장하고 치장하며 사는 태도,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웃을 잃고 살아가는 현대인들과 오늘의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적 메시지를 전합니다. 욕심부리지 않고 본바탕대로 살아가면서 “삶의 근원을 깊숙이 보는 지혜”(32쪽)를 만나는 순간 깊은 깨달음의 미소가 나도 모르게 나옵니다.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라는 것이다. ‘잘남’이 아니라 ‘나다움’이 중요하다... 나답게 사는 것이야말로 온전한 삶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75쪽). 


오늘의 우리들은 바탕색, 내가 갖고 태어난 나만의 독특한 색깔대로 살아갈 때 색다름이 드러나고 그 색다름이 바로 나다움인데 남다르게. 남들처럼 살아가면서 나만의 바탕색을 잃어버렸습니다. 바탕대로 살아가면 발견하는 진정한 나다움의 매력이 드러날 때 가장 아름다운 순간입니다. 보여주기 위해 앞만 달려가서 성취한 결과가 아니라 나답게 살아가며 가장 나다운 성취를 이루었을 때 나오는 미소(微笑)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닐까요. “외적 경험을 많이 하더라도 자신에 대한 떳떳함이 없으면 자신의 성장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또한 자기에게 정직한 사람만이 참된 힘을 가지고 강해질 수 있다. 자기가 가짜로 산다는 느낌을 갖고 있으면 결코 강건해지지 않는다. 무기력에 빠지는 가장 큰 원인은 자기가 가짜라고 느끼기 때문이다”(83-84쪽). 춘풍 추상(春風秋霜), 즉 “남을 대하기는 춘풍처럼 관대하고 자기를 지키기는 추상같이 엄격해야 한다”라는 말처럼 추상같이 엄격한 자기를 지켜낼 때 비로소 진짜 나로 살아가는 길이 열립니다.


판단(判斷)은 칼)로 반()을 나누는 결단입니다


“사람은 고통받을 때 변화가 오고 성장하는 것 같다. 힘든 일을 겪을 때 진짜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별할 줄 알게 되고 내면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것 아닐까”(41쪽)와 같은 메시지를 만나면 숙연해집니다. 고통은 스승이다. 큰 기회를 주기 전에 고통이라는 관문으로 사람을 통과시키는 이유다. “가장 큰 배움은 가장 큰 고통 속에 숨어 있는 듯하다”(115쪽). 이 책은 역사적 사건이나 실제로 저자가 고소된 사건에 대해 원고와 피고를 대상으로 판결하는 장면, 승소와 패소, 기소와 출소 등 법조인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보고 느낀 점을 진솔하게 들려줍니다. “평소에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이런 모순에 갑자기 의문이 생기는 순간을 나는 문학적 시간이라고 부른다. 문학적 시간은 대부분 개인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지만, 사회적 주제와 연결될 때 그것은 역사적 시간이 된다. 그것은 또한 미학적 시간이고 은혜의 시간이고 깨우침의 시간이다”(8쪽).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에 나오는 말입니다. 한 개인에게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걸 사회제도나 구조와 연결시켜 성찰하는 역사적 시간을 통해 인간의 존엄함을 깨닫는 미학적 시간이자 은혜의 시간이며 깨우침의 시간을 마련하는 장면이 이 책의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30여 년 동안 법조인의 길을 걸어왔지만 여전히 부족한 인간의 불완전성과 이로 인한 판결의 위험성을 고백하는 장면을 자주 만납니다. “재판 경험이 쌓일수록 재판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절감한다. 다투는 당사자 사이에서 진실을 찾고, 가치가 충돌하는 사안에 관하여 정의를 선언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한계를 넘어서는 것 같다. 인간이 참으로 나약하고 부족하며 편향성을 가진 존재이며, 인간이 만든 재판제도 역시 불완전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26-27쪽). 



인간이 인간의 죄에 대해 평가하고 판단해서 판결을 내리는 과정은 헌 인간의 생사를 가늠하는 막중한 작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법리적 해석만으로는 시비를 가릴 수 없는 진퇴양난의 난국에서도 판사는 판결을 통해 유죄 여부와 형량을 결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각한 고뇌의 그늘이 늘 무거운 책임감으로 짓누르는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판사의 ‘판(判)’이란 글자도 ‘칼(刀)로 반(半)을 나눈다’는 것이어서 저울과 같은 뜻이라고 하겠다”(183쪽). 이 책은 칼로 정확하게 또는 공정하게 반으로 자르듯 판단하기 어려운 딜레마 상황에서 고뇌하는 한 법조인의 진솔한 인간적 고백과 직면하는 책입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사람과 세상에 대한 따뜻한 사랑도 같이 읽었습니다.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을 때 증명과 진실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감을 좁히는 마땅한 대안이 없을 때 판사는 다시 깊은 인간적 고뇌에 빠집니다. “사람들은 향기로 기억되고, 그런 향기는 저울로 결코 잴 수 없다. 내가 해온 ‘법의 저울질’은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것이었지만, 결코 최종 해답도 아니었고, 온전한 판단과는 사뭇 거리가 멀었다”(186쪽). 언제나 자기 안으로 파고들어가 깊은 자아를 만나 반성합니다. 동시에 다시 밖으로 나와 나의 생각과 행동을 사회 전체 구조나 틀과의 관계 속에서 성찰합니다. “일상 속게 파묻혀 있으면 그 의미를 알 수 없고, 일상을 깨고 나올 때에만 일상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사람이 여행을 떠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128-129쪽). 이런 삶을 습관화시켜온 윤변호사님의 생활은 그 자체가 서릿발 같은 엄정함을 추구함과 동시에 인간에 대한 깊은 배려와 존중으로 촘촘히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음을 실감합니다.


인공지능을 능가하는 인간 지성, 실천적 지혜가 답입니다


범죄자는 개인차원의 문제라기보다 그런 개인으로 하여금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도록 부추기는 사회적 관계나 구조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질환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고혈압에 걸리는 원인은 개인차원의 혈관질환이 아니라 그 사람이 고혈압에 걸릴 수밖에 없도록 내몰아 부치는 스트레스와 억압적 구조에 있다는 것이 사회역학의 진단입니다. 사회역학은 한 개인의 질환은 개인의 육체적이고 생리적인 문제라기보다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제도, 시스템과 문화의 문제라고 봅니다. “사회역학은 사회적 관계가 인간의 몸에 질병으로 남긴 상처를 해독하는 학문입니다”(14쪽).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쓴 김승섭 교수의 주장입니다. 그는 이어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인간의 몸에는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시간이 새겨집니다”(22쪽). 물고기가 어떤 바다에 사느냐에 따라 비늘에 생기는 얼룩과 무늬가 달라지듯, 사람이 어떤 사회적 관계와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몸에 새겨지는 스트레스와 질병을 일으키는 흔적이 달라집니다. 저자 역시 사회역학과 비슷한 입장에서 범죄도 결국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 인간이 노숙자나 범죄자로 전락하는 가장 큰 원인은 개인의 도덕성 결함이라기보다 이러한 모욕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구조에 있다. 상습 범죄자는 가해자이기 이전에 속으로 피를 흘리고 있는 피해자인 셈이다”(248). 범죄자로 취급하고 법리를 들이대고 판결을 내리기 전에 피 흘리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피고가 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관계와 구조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법률가는 판례와 판단에 따라 판결을 내리는 기술적 숙련공이 아닙니다. 법률가는 무엇보다도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부딪치는 가치관의 갈등과 사회적 구조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범죄행위의 인간적 측면을  들여다볼 줄 아는 따뜻한 인간미의 소유자가 먼저 되어야 합니다.




기술이 발전하고 인공지능이 인간지능을 대체해도 딜레마 상황에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이슈를 판단하는 능력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영역입니다.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경우에 인공지능이 어떤 판단을 하도록 할지가 어려운 문제이다. 사람이 운전을 한다면 스스로 판단할 것이므로 이런 윤리적 문제는 없다. 아무리 고도의 지능을 쌓아도 가치와 의미를 선택하는 도덕적 판단은 인공지능이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이다”(105쪽). 법률가가 도덕적 판단을 생략한 채 판례에 따라 기계적으로 판결을 내린다면 인공지능이 법률적 판단을 내리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이 옳은지, 선한지, 의미가 있는지에 관하여는 인간만이 직관을 갖고 있다”(107쪽)면 판례에 축적된 수많은 빅데이터를 근간으로 판결하는 인공지능이 여전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공지능을 능가하는 인간 지성 시대에 올바른 법률가가 갖춰야 할 진정한 경쟁력은 풍부한 법률지식과 더불어 다양한 딜레마 상황을 탈출할 수 있는 혜안과 안목, 그리고 도덕적 판단능력과 지혜입니다. “고통받는 인간을 이해하려는 열린 마음이 법률 지식보다 앞서 법률가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냉철하게 판단하는 업무를 하는 법률가에게도 이런 마음이 필수적이라면 다른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필요할 것이다”(152쪽). 저자가 언급하는 법조인의 자세와 태도, 갖추어야 할 자질과 역량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강조하는 ‘실천적 지혜(phronesis, practical wisdom’)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딜레마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일인지를 파악해서 주어진 상황에서 가장 올바른 선택지를 숙고하고 결정해서 행동으로 옮기는 능력입니다. 저자 역시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으로 도덕적 판단력을 꼽고 있습니다. 


배리 슈워츠와 케니스 샤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지혜를 의사나 변호사 등 전문 직업별로 어떤 점에서 중요한지를 주장하는 《어떻게 일에서 만족을 얻는가》에 보면 실천적 지혜를 “특정한 상황에서 능력 단순한 흑백 영역이 아닌 특정한 상황이 낳는 미묘한 차이, 즉 회색지대를 간파하는 능력”(36쪽), 또는 “내면으로 ‘공감’하고 ‘이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냉정함’과 ‘객관성’을 유지하는 일”(59쪽), 즉 공감하면서도 거리감을 유지해 상황을 편견 없이 공정하게 판단하는 능력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들에 따르면 실천적 지혜를 지니고 있는 진정한 전문가는 “의뢰인의 문제를 풀어주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전문가가 아니라, 의뢰인과 함께 협력해 문제를 푸는 해결사”(304쪽)가 돼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실천적 지혜를 갖게 되면 비로소 “특정한 환경에서 특정한 대상에게 특정한 시점에 맞추어 올바른 일을 올바로 하는 법을 깨우치는 일”(15쪽)을 수행할 수 있게 됩니다. 저자가 언급하는 판사나 변호사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원고나 또는 의뢰인과 피고가 처한 인간적 딜레마,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사연과 배경에 공감하고 이해하면서도 거리감을 두고 주어진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해서 올바른 판단과 변호를 하기 위해서 실천적 지혜를 갖춰야 합니다. 문제는 이런 실천적 지혜는 지식이나 기술을 가르치고 배울 수 없다는 데 있다. 오직 다양한 딜레마 상황에서 시행착오를 경험하면서 판단 착오를 줄여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과거는 다른 사람의 미래입니다


“그는 도중에 물웅덩이를 피하느라 살짝 옆으로 비켜갔다. 이상한 일이지만, 바로 그 순간까지 나는 건강하고 의식 있는 사람의 목숨을 끊어버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죄수가 웅덩이를 피하느라 몸을 비키는 것을 보는 순간, 한창 물이 오른 생명의 숨줄을 뚝 끊어버리는 일의 불가사의함을, 말할 수 없는 부당함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가 살아 있듯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이었다”(26쪽).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에 나오는 말입니다. 부당한 권력의 힘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무너뜨리는 어떤 행위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조지 오웰의 주장입니다. 



그는 버마 정부의 경찰을 그만두고 진정한 작가로 거듭나기 위해 "억압받는 사람들에게로 내려가 그들 중 하나가 되어 그들의 편에서 폭군들에게 대항하고 싶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 밑바닥 생활을 시작합니다. 그 결과 탄생한 작품이 바로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입니다. 이 책의 끝 부분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언젠가는 그 세계를 더 철저하게 탐구하고 싶다. 우연한 만남이 아닌 허물없는 사이로서 마리오, 패디, 동양 아치 빌 같은 사람들을 알고 싶다. 접시닦이, 부랑인, 강변 둑길 노숙자의 영혼 속에는 정말로  무슨 일들이 벌어지는 지를 이해하고 싶다. 현재로서는 가난의 언저리까지 밖에는 보지 못한 것 같다”(284쪽). 가난했던 시절의 아픔을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가난한 사람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그 어떤 조언도 불가능함을 작가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자의 책 역시 힘들고 아픈 사람, 생사기로에서 마지막 희망을 기다리며 불안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과 만나면서 건져 올린 잔잔한 감동적 단상입니다. 그들과 공감하려는 측은지심의 한 극단에는 오늘의 우리를 만들어가는 거대한 시대적 흐름과 역사적 사건과의 연계성을 잃지 않으려는 안간힘이 무게중심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의 향유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시야의 확대와 상처의 존재다. 시야의 확대가 따르지 않는 성장은 진정한 성장이 아니다. 확대된 시야 없이는 상처를 심미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할 수 없다. 동시에 아무리 심리적 거리를 유지해도 상처가 없으면, 향유할 대상 자체가 없다. 상처가 없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캔버스, 용기가 없어 망설이다가 끝난 인생에 불과하다”(37쪽). 김영민 교수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에 나오는 말입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위치에서 고통을 몸으로 견뎌내며 상처 받고 살아갑니다. 한 번 일어선 자리와 높이에서 확보한 시야는 내가 겪고 있는 아픔으로 해석하는 관점을 제공해줍니다. 시야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내 생각도 틀릴 수 있음을 전제하고 나와 다른 생각과 세계와 자주 만나야 합니다. 



지금 여기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봐야 하고, 나와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저자들의 책을 읽어야 하며, 다른 전공과 관심을 갖고 있는 낯선 사람과 자주 만나야 합니다. 그런 만남이 아픈 상처를 줄 수 있지만 시야를 확장시키고 인식의 깊이를 심화시킬 수 있는 소중한 디딤돌이 됩니다. “내 과거는 다른 사람의 미래에 도움이 될 거예요”(153쪽). 미국의 여자 유도 선수, 케일러 해리슨의 말입니다. 내가 겪은 사소한 이야기라고 할지라도 그 속에는 에스프레소 같은 진한 삶의 향기가 들어 있는 감동의 서사가 되기도 합니다. 몸소 겪은 체험은 사소한 깨달음일지라도 다른 사람의 미래에 소중한 성장의 씨앗이 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서로의 씨앗을 깨워 꽃을 피워줄 기회로 가득 차 있는 꽃밭인 셈이다”(143쪽). 사소(小)한 일상이지만 진지한 성찰의 반복으로 가꾸어나가는 나의 바탕(素)이 활짝 웃는, 진짜 나로 사는 기쁨(笑)을 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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