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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발적 마주침이
색다른 깨우침을 낳는다

《들뢰즈와 교육》을 함께 공부하고 나서

우발적 마주침이 색다른 깨우침을 낳는다

들뢰즈와 교육을 함께 공부하고 나서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교육학적으로 풀어낸 《들뢰즈와 교육》의 저자 중의 한 분인 김재춘 교수님을 모시고 그동안 대학원생들과 스터디하면서 잘 이해가 안 갔던 부분이나 궁금한 점을 허심탄회하게 질문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 마디로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이 품고 있는 수많은 기호가 방출되면서 낯선 마주침의 연속이었지만 색다른 깨우침과 가르침을 얻었던 소중한 만남이었다.     




들뢰즈와 접속하는 순간, 난해하지만 심장을 파고드는 의미심장한 기호가 날아들었다. 들뢰즈가 말하는 기호는 다양한 이념, 즉 다양한 차이를 잉태하고 있는 낯선 자극이다. 매년 맞이하는 봄이지만 작년과 똑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봄은 그저 지난번 봄이 다시 재현되는 봄에 불과하다. 하지만 매년 맞이하는 봄이지만 봄과 마주칠 때마다 그 봄이 품고 있는 기호가 나에게 매년 다른 의미를 품고 다가온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쉼보르스카 시인의 ‘두 번이란 없다’가 바로 들뢰즈가 말하는 '동일성의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니라 '차이를 반복'하는 모습을 정확하게 표현해준다.     


“두 번 일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일어나지도 않는다. 중략

인생의 학교에서는

꼴찌라 하더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같은 공부는 할 수 없다.   

  

어떤 하루도 되풀이되지 않고

서로 닮은 두 밤(夜)도 없다.

같은 두 번의 입맞춤도 없고

하나같은 두 눈 맞춤도 없다.“     


진리는 우리가 현상계에서 경험할 수 없다. 플라톤이 말하듯 현상 너머의 세계에 존재하는 이데아는 우리 모두가 온갖 노력을 다한다고 해도 영원히 다다를 수 없는 이상적인 진리다. 그 진리와 정확히 닮은 사람이 되기 위해 그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던가. 하지만 들뢰즈에게 진리는 우리 모두가 도달해야 될 하나의 이상적인 지향점이 아니다. 그런 하나의 이상적인 진리는 없다. 다만 매 순간 만나는 전 세계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유한 특이성(singularity)을 지닌 기호들의 세계일 뿐이다.     


어제 만난 사물이나 현상을 오늘 만났다고 할지라도 그 사물이나 현상은 끊임없이 차이를 생성하면서 어제와 다른 특이성을 품고 있다. 특이성은 매 순간 다르게 변신을 거듭하며 다양체(multiplicity)로 다시 태어난다. 들뢰즈가 말하는 교육은 철로처럼 동일한 주로를 따라 동일한 목적지로 가는 동일성이 교육이 아니다. 들뢰즈가 말하는 교육은 도로처럼 여러 가지 도로가 있지만 결국 같은 목적지로 몰고 가는 다양한 교육도 아니다. 들뢰즈가 말하는 교육은 망망대해의 바다에서 항해를 거듭하면서 생각지도 못한 파도와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고 난파당하기도 하지만 매 순간 다가오는 다양한 기호를 주체적으로 해석하면서 어제와 다른 앎을 신체적 감각으로 익히는 배움의 연속이다.     



지금까지의 교육은 교육목표를 제시하고 그 목표와 동일한 목표를 누가 더 빨리, 더 많이 달성했는지를 판단하는 동일성의 재현 교육이었다. 지금까지의 교육은 목표를 달성하는 여정에서 절대로 샛길로 새서도 안 되고, 우연히 마주치는 생각지도 못한 만남도 모두 회피하거나 원천 봉쇄해서 제시된 목표와 동일한 인간상을 대량 복제하거나 양산하는 공장 생산 패러다임이었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이 말하는 교육은 목표나 전형을 제시하고 ‘나처럼 해보라’고 강요하는 교육이 아니다. 오히려 들뢰즈가 말하는 교육은 수많은 기호들의 천국에 몸을 던져 그런 기호가 나에게 속삭이는 의미와 매 순간 변화되는 특이성의 세계를 온몸으로 지각하면서 ‘나와 함께 해보자’는 교육이다.     


책상머리에서 머리로 깨닫는 관념적 앎은 들뢰즈가 보기에 진정한 배움이 아니다. 진정한 배움은 나에게 다가오는 다양한 기호의 이념적 차이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세계에 몸을 던져 시시각각 다르게 감지되는 감각적 경험을 분해시켜 합성해보고 분류하고 정리하면서 새로운 의미체계를 생성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도달한 앎이야말로 배움을 통해서 증류해낸 신체적 깨달음의 정수다. 이런 깨달음은 기존 사유체계를 송두리째 뒤흔들기도 하고 고정관념이나 타성에 젖어 살던 나의 관습을 뿌리째 뽑아버리는 발본색원(拔本塞源)의 배움이 만들어낸 결과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온몸으로 느끼는 창조의 기쁨이며, 들뢰즈가 말하는 감각의 교육학이자 기쁨의 교육학이다.      



다람쥐 쳇바퀴를 빨리 돌리는 다람쥐에게 어제와 다른 낯선 날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 다람쥐에게는 언제나 어제와 같은 날이 앞으로도 영원히 재현될 것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사람이 바로 어제와 동일한 일을 재현하는 직장인이다. 직장인이 출근할 때 심장이 떨리지 않고 다리가 떨리는 이유는 생각지도 못한 다른 일이 예상되지 않고 어제와 동일하거나 비슷한 일이 재현될 것이라고 예측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심원을 그리며 영역을 확장하고 깊이를 심화시키는 사람에게는 어제와 같은 날은 없다. 매일 만나는 일도 어제와 다른 기호를 품고 나에게 새로운 의미의 차이로 다가오는 낯선 마주침의 연속이다.  

   

동심원의 넓이를 확장시키고 깊이를 심화시켜 어제와 다른 삶을 반복하는 사람이 바로 장인이다. 장인에게는 동일한 일이 재현되는 단 하루도 없다. 그에게 일은 늘 어제와 다른 일이며 이전과 다르게 일하는 순간이 바로 창조의 기쁨을 맛보는 행복한 순간이다. 직장인 양성과정을 현대적 교육으로 해석해보면 어제와 동일한 일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모범생 육성이 지금까지 우리가 지향해왔던 교육 패러다임이다. 모범생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매뉴얼이다. 그에게 매뉴얼은 생존수단이자 위기극복 도구다. 매뉴얼대로 돌아가지 않는 세상은 모범생에게 어찌할 수 없는 속수무책의 세계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이 말하는 인재는 하던 방식에서 과감하게 탈피하고 무수한 기호들이 다양한 의미를 내뿜고 있는 미지의 세계로 뛰어들어 자기만의 방식으로 미래를 개척해나가는 모범생이나 문제아다. 정해진 주로를 어제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으로 달려가는 직장인이나 모범생보다 어제와 다른 길을 걸어가면서 이전과 다른 나로 부단히 변신을 거듭하는 장인이나 모험생 또는 문제아를 길러내는 ‘감각의 교육공학(Educational Technology of Sense)’이나 기쁨의 교육공학(Joy of Educational Technology)을 건설하기 위해 오늘도 호시우보(虎視牛步)의 자세로 기호의 천국으로 뛰어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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