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사유가 나에게 급습했다.
사유가 나를 덮쳤다

자기배려의 책 읽기를 읽고

사유가 나에게 급습했다사유가 나를 덮쳤다 

자기배려의 책 읽기를 읽고


평범한 은행원이 있었다. 새벽에 출근해서 새벽이 가까워오는 한 밤 중에 퇴근한다. 하루에 담배 세 갑을 피울 정도로 골초였고, 자주 많은 술을 마시며 무거운 몸을 이끌고 퇴근했다 비몽사몽간에 일어나 다시 출근하는 삶을 살다가 고혈압으로 쓰러져 죽을뻔한 체험을 한다. 우연히 수유너머 공동체에 들어가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공부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그날로 술 담배를 끊는 역사적 사건을 감행한다. 그리고 황홀한 철학의 바다에서 오늘도 즐거운 사유를 즐기며 유영(遊泳)하고 있다. 니체에서 장자까지 은행원 철학자의 철학책 읽기라는 부제목이 붙은 《자기배려의 책 읽기》는 저자의 전작, 《자기배려의 인문학》에서 밝힌 ‘자기배려’라는 철학적 개념으로 문제의식의 화두를 잡는다. 자기배려는 철학자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에서 유래된 개념이다. 말 그대로 ‘자기’를 ‘배려’한다는 말이지만 통상적인 ‘자기’를 ‘배려’하는 개념적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자기배려는 단 한 번도 되어 본 적이 없는 자기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한 번도 되어 본 적이 없는 자기가 되기 위해서는 어디에도 물들거나 의지하지 않고 통념으로부터 과감히 벗어나 새로운 자기를 만들어내는 결단과 결행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자기배려는 자기 파괴나 자기 해체를 통해서만이 가능해지는 전투적 결기가 서려 있는 개념이다.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에서 가져온 자기배려 개념을 책 읽기는 물론 삶에도 적용, 어제와 다른 나로 변신하기 위한 전쟁 같은 삶을 살아가려는 저자의 짙은 의도를 엿볼 수 있었다. 습관적으로 마시고 피웠던 술 담배도 끊고 좋아하던 육식과도 단절함으로써 일상적으로 반복하는 습관을 다른 습관으로 바꿔냄으로써 몸이 느끼는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도 바꿔내는 혁명을 감행한다.      



한 문장에 붙잡혔다 결국 그 사람에게 사로잡혔다     


책 속의 한 문장이 다음 문장을 읽으려는 내 시선을 붙잡고 늘어진다. 아니 뇌리를 파고들어 파란을 일으킨다. 무엇에 꽂혔는지 나는 거기서 한참을 머물며 곰곰이 생각해보고 반추해본다. 무려 799 페이지에 걸쳐서 동서양의 고전을 넘나들며 저자가 펼치는 사유의 얼룩과 무늬에 붙잡혀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연휴 이틀 동안 이 책에 빠져 빠져나갈 수 없다. 가라타니 고진, 고쿠본 고이치로, 나쓰메 소세키와 같은 일본 철학자, 공맹 철학과 노장철학, 손자, 주자, 리쩌허우, 루쉰, 펑유란, 용수와 같은 중국 철학자, 박지원, 허준, 함석헌과 다양한 한의학자,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세네카와 같은 그리스 로마 철학자, 호메로스,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 단테, 마키아벨리, 알랭 바디우, 버틀러 주디스, 앙리 베르그송, 발터 벤야민, 비트겐슈타인, 스피노자, 줄리앙 프랑수아, 칸트, 니체, 푸코, 사르트르, 하이데거, 프로이트, 데리다, 랑시에르, 레닌, 마르크스, 알튀세르, 이반 일리치 등 동서양을 대표하는 철학자들의 사유체계를 씨줄과 날줄로 엮듯 종횡무진 사색하면서 개념적 통찰력과 체험적 단상을 융합하여 자신의 생각으로 녹여낸다. 내가 문장을 잡은 것이 아니라 문장 속의 어떤 의미가 나를 붙잡았고 순식간에 나는 속수무책으로 사로잡혀버렸다. 내가 먼저 문장을 붙잡지 않았는데 문장에 의해 내가 붙잡혀서 문장이 던져주는 의미에 빠져 연휴 내내 빠져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다.      



“저는 그동안 착각해 왔던 것입니다. 내가 이 책의 정신을 훔쳐오고 있다고 착각했지요. 그게 아니었습니다. 니체가, 마르크스가, 푸코가, 그들의 정신이 관절을 타고 들어와 내 정신을 훔쳐가고 있었습니다. 내가 그들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40쪽).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정신세계로 들어와 기존 통념을 깨부수고 새로운 생각의 씨앗을 뿌리고 간다. 그 생각의 씨앗은 기존 생각과 짝짓기를 통해 또 다른 생각으로 잉태된다. 어느새 내 머릿속 생각은 수많은 저자들의 생각으로 부단히 잉태되고 출산되어 사유의 격전장을 만든다. 읽기야말로 정신의 관절인 것입니다(33쪽). 근육을 통해 관절의 약함을 보완하듯 책 읽기를 통해 정신의 근육을 단련한다. 저자는 그래서 읽을 수 없었던 책을 읽어보라고 권한다. “읽을 수 있는 것을 읽을 때보다 읽을 수 없던 것을 읽게 되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일고 있는 것이다. 편하게 읽히는 책이라면 이미 읽은 글이거나, 이미 알고 있는 생각이어서 제게 새로움을 안겨주지 않는 글,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는 글일 가능성이 클 거라고요. 생각할 필요가 없는 글이라면 지금 이렇게 나의 시간과 존재를 걸고 읽어야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29쪽). 난공불락의 책을 공격하고 마침내 한 권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을 때 다가오는 희열감은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독서의 즐거움이다. “한 페이지도 넘기기 힘든 글이지만, 한 땀 한 땀 어렵게 읽어 내어 저자가 이야기하는 내용을 이해하고 나면 그 글이 그렇게 쓰일 수밖에 없었단 생각이 들면서, 그 순간 그의 문장이 아름답다는 감각을 갖게 되더라고요. 푸코나 니체가 엄청나게 난해한데도 저에겐 모두 아름다운 문장으로 다가왔습니다”(592쪽). 그래서 아름다운 문장은 남의 좋은 글을 끌어다 짜 맞춘 미사여구가 아니다. 오히려 “아름다운 문장이란 자신의 이론에 맞추어 적확하게 구성된 문체의 글”(592쪽)이다.   

  

어떤 글은 머리가 아니라 신체를 때린다     


지루함과 장엄함의 아이러니 틈바구니 속에서 난해한 철학책들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숨겨진 개념의 껍질 속으로 파고 들어가 낱낱이 분해하고 다시 조립하면서 힘겨운 해석을 시도해본다. “길이 멈춘 곳에 지루함이 솟아났다”(241쪽). 지루한 싸움 끝에 한 줄기 광명의 빛이 먹구름 속에서 반짝이는 서광의 흔적을 목격하는 순간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여 책장을 넘긴다. “루쉰의 글들은 그런 물질성을 드러내고 제 신체를 때립니다. 기존의 의미를 싹 지우고 물질 그 자체로 출현해서 저를 때립니다”(333쪽). 글이 물질성을 띤다는 말, 그냥 관념이 야적된 정신의 산물로서가 아니라 저자의 신체성이 사투 끝에 축적된 물질로 신체를 직접 공격한다. “독서는 몸이 책을 통과하는 것이다”(19쪽)라는 정희진의 《정희진처럼 읽기》에 나오는 말처럼. 그야말로 책 “읽기는 존재론적인 사건을 만드는 역량”(475쪽)이자 “책 읽기란 어떤 반란과도 같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편견을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느닷없이 깨버리는 것이 책 읽기라는 이상한 행위인 것입니다”(511쪽). 난해한 철학서적을 한 권 한 권 독파해내고 돌파하면서 이전과 다른 존재로 거듭나기가 바로 푸코가 말하는 자기배려가 아닐까. 평온한 가운데 힘들고 지친 자기를 위로해주는 힐링이 자기배려가 아니다. 오히려 자기배려는 나를 포획하고 있는 통념의 그물을 끊어내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낯선 길로 내 몸을 던져 과거의 나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자 안간힘이다.      



“철학은 교묘합니다. 신체를 힘들게 하지 않고서는 나에게 다가오지 않습니다”(626쪽). 철학은 창백한 책상에 앉아서 다양한 관념 덩어리를 추적하며 내 머릿속에 채우는 야적(野積)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철학은 전율하는 깨달음과 함께 이전과 다르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연한 각오로 재무장함을 넘어서 위험한 삶을 선택하도록 자극하는 정신적 각성제이자 실천적 촉구 행위다. “진실은 위험한  실천 속으로 들어가야만 그 대가로서 획득되는 것이다”(66쪽). 위험한 실천이 동반되지 않는 철학 책 읽기는 문자와 문장 읽기에 그친다. 진짜 철학 책은 삶의 철학을 바꿀 것을 요구한다. 남의 생각에 물들고 타성에 젖어 살던 안온했던 내 삶에 의도적으로 폭풍우를 일으키는 격랑의 바다로 뛰어들 때 삶의 철학은 다시 세워진다. 이런 전투적 행위와 실천이 반복될 때 당연히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생기고 치유 불가능한 질병에 휘말릴 수 있다. “그 누구도 상처를 반복하지 않고서 어떤 상처를 돌파할 수 없다”(441쪽). 상처를 상처로 치유하는 아픈 전략의 채택만이 아픈 상처를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앎으로 생긴 상처는 또 다른 앎으로 연고처럼 발라줄 때 거기서 새로운 앎의 새살이 돋아난다. 그런 아픔의 치유 과정 자체가 즐겁고 행복한 공부 여정이 되는 것이다. “행복은 힘이 증가되고, 또 그 힘의 증가를 방해하는 저항들을 물리칠 때 발생한다”(500쪽). 철학적 사유체계가 무너지고 또 다른 사고 양식이 그 자리를 점유할 때 생기는 힘은 형언할 수 없는 즐거운 힘이자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기쁨이다. 그 기쁨이 원동력이 되어 탐구를 방해하는 온갖 방해물과 장애물을 격파해나가는 원천이 된다. 

    

책을 읽는 행위는 저자와 독자가 합작하는 공사현장이다     


문학이든 철학이든 예술작품이든 그 작품은 눈으로 감상하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모든 작품은 작품을 탄생시킨 창작자의 욕망을 쫓아 나도 그런 삶을 살아낼 때 작품은 나와 멀리 떨어진 감상 대상에서 내 삶과 한 몸이 되는 실천의 원료가 된다. “예술작품을 내 신체에 장착하고 연결시켜서 내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것을 완전히 새롭게 보게 하고, 듣게 하고,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예술작품은 그것 자체가 감각기관입니다. 예술은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것이죠. 예술가가 느낀 것이 바로 내가 느낀 것입니다”(607쪽).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책이 담고 있는 메시지의 맥락을 읽어내야 한다. “나는 책 읽기가 단순한 활자 읽기가 아니라 그 책이 던져져 있는 상황 읽기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89쪽). 김현의 《행복한 책 읽기》에 나오는 말처럼 읽기는 곧 시대 역사적 맥락을 읽어내는 일이다. 맥락을 읽어내지 못하는 독서일수록 맥을 추지 못한다. 아무리 위대한 생각이 집결된 사고체계라고 할지라도 내가 직접 사고 치면서 내 삶의 맥락으로 녹여내지 않으면 관념의 파편에 불과하다. 내가 직접 다른 사람의 사상을 사용할 때 사용 과정에서 내 생각이 스며들어가고 내 몸으로 빨려 들어와 나의 감각 체계를 변형시키는 각성제가 된다.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재단하기 이전에 몸으로 느끼고 각인시키는 과정, 신체성으로 재탄생시키는 사용 과정이 동반되지 않는 사유는 현실 변혁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유약한 사색의 파편에 불과하다.    

 


“그의 시는 치열한 번역 과정, 즉 외국어와의 침통한 투쟁 속에서 체득한 것이다(염무웅). 그(김남주)에게 번역은 혁명의 번역이었다. 그것은 번역이라는 작업을 통해서 원문에 숨어 있는 새로운 타자를 발견하는 욕망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584-584쪽). 모든 책은 번역을 통해 나의 것으로 전환된다. 다른 언어로 바꾸는 작업만이 번역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나의 생각으로 탈바꿈시키는 변혁의 과정이 바로 번역의 혁명이다. 저자의 문제의식 속으로 파고들어가 어떤 맥락과 사연을 배경을 이런 생각을 잉태시킬 수밖에 없었는지를 반추해보고 추체험해보지 않으면 맥락성을 잃어버리고 부유(浮遊)하는 사유의 거품에 불과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책을 읽는 모든 행위는 오리지널 저자의 생각을 나의 생각으로 전환시켜 또 하나의 생각의 집을 짓는 건축행위다. 단어와 개념으로 건축된 문장을 빌어다 용처에 맞게 재조립하고 아예 다른 개념으로 재개념화 시켜 내 집의 성격을 전혀 다르게 번안해내는 변혁 작업이다. “아이들의 세계는 언제나 공사현장”(422쪽)인 것처럼 책을 읽는 모든 순간은 저자와 독자가 합작해서 벌이는 공사현장이다. 공사가 언제 끝날지는 책을 읽는 독자가 저자와 합의하는 순간에 따라 결정된다.      


공사는 실천적 행위를 통해 이전과 다른 개념 건축을 지을 수도 있고, 공사기간에 깨달은 또 다른 깨우침으로 글짓기로 연결할 수도 있다. “문학이란 읽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588쪽)이고 “글쓰기란 사건을 돌파하기 위한 실천”(97쪽)인 것처럼 궁극적으로 읽기는 다름 아닌 쓰기이자 실천이다. 읽기에 투자한 시간은 한 인간이 특정한 공간에 자리 잡고 사투를 벌이며 보낸 전쟁 같은 시간이다. 텍스트에 감춰진 저자의 의도와 문장과 개념 속에 묻어둔 의미의 껍질을 깨고 파내기 위해서 고군분투한 저자의 노력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그러면서 저자는 시종일관 자기 주관으로 철학자들의 사유체계를 해체해서 재구성해본다. 자신을 사로잡게 만드는 개념 체계와 사상적 원천에 깊이 빠지지만 다시 빠져나와 나의 사고 양식에 비추어 재개념화 시켜보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수용하면서 비판하고, 비판하면서 빼앗아 오는 들뢰즈의 능수능란한 모습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철학사의 모든 철학자들을 모조리 자기 식으로 새롭게 주조해내는 최고의 연금술사였습니다”(721쪽). 철학자 들뢰즈가 모든 철학자를 자신의 연금술로 철학 체계를 재주 조했듯이 저자 역시 방대한 독서로 닦은 사유의 힘과 체험적 천착으로 자기 배려를 위한 각성과 통찰의 계기로 삼는다.     


경지(境地)는 궁지(窮地)에서 나온다      


“통찰은 받아들이되, 어떤 프레임에 지식들을 배치하고 가두려는 욕망을 따라가지 않으려 합니다. 그것은 과도하게 어느 프레임으로 자신을 가두는 행위가 되어버리니까요”(692쪽). 철학자에게 철학이라는 내용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철학하는 방법과 철학적 문제의식, 철학적 문제의식으로 걸러내는 사유체계의 증축 과정을 배운다. 그것도 한 사람의 이론체계에 지나치게 함몰되어 편파적 세계관을 생성하지 않도록 또 다른 철학자의 사상적 편력에 부단히 비추어보면서 각성하고 통찰하는 과정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저자의 종횡무진 책 읽기를 따라가다 보면 수많은 철학자들의 다양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들이 내뱉는 한 마디는 모드 특유의 칼라와 스타일을 지닌 목소리다. “언어는 신체가 되어버린 기계다. 웃음은 심과, 울음은 폐와, 노래는 비장과 서로 공생하며 신체가 되어버린 언어-기계들이다. 따라서 언어를 바꾼다는 말은 신체를 바꾼다는 말과 같다. 언어의 배치를 바꾸는 것은 이 의미에서 내 신체를 변형시키는 문제이고, 분명히 건강의 문제인 것이다”(729쪽). 언어와 신체와 건강의 삼위일체론, 너무 아름다운 조화가 아닌가. “이른바 ‘말’은 신체가 내놓는 ‘소리-물질’인 것이다”(728쪽). 철학자의 고뇌에 찬 한 마디 말과 하나의 개념, 그리고 한 문장에 함유된 신념의 목소리는 곧 그 철학자의 신체가 담고 있다 겉으로 토해낸 사유의 진액이자 정수다. 언어는 관념적 표현의 산물이 아니라 신체적 물질로서 독자의 신체를 직접 때린다.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위기 상황에 몰아넣고 가열 찬 사고 실험을 감행해야 한다. 나를 만들어준 사고기반을 끊임없이 의심해보고 내가 당위적으로 생각하는 가치관의 터전에도 물음표를 던져 자주 시비를 걸어봐야 한다. 한 마디로 밑바탕이나 뿌리 채 뒤흔들어 정초를 무너뜨리고 다시 집을 짓기를 반복해야 한다. “나를 존재하게 만드는 안정성과 근거들을 흔들어 대는 위험지대로 넘어가는 것. 그래서 지식의 고고학의 시절, 푸코는 자꾸 '다른 곳'으로 간다고 했다. 그의 표현 그대로 친숙한 광경들의 바깥(dehors)으로 말이다”(619쪽). 이전에 쌓았던 업적과 성취를 뒤흔들어 무너뜨리고 색다른 곳에서 다시 정초부터 쌓으려는 무모한 노력은 위험하지 않을 수 없다. 책 읽기도 마찬가지다. 체험적 깨달음과 독서를 통해 습득한 개념적 통찰이 묶여 생긴 나다운 신념과 가치관의 터전에 안주하려는 나 자신을 또 다른 생각과 접속시켜 기존 생각 바깥으로 나가려는 시도다.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미래를 앞당겨 실험하고 예측해볼 수는 없다. “앞만 보고 발을 내딛는 전투적 실천의 실행. 이것이 앞으로 출현할 모든 우연을, 그러니까 모든 차이를 긍정하는 실천이다. 바로 이 순간, 무한한 동일성, 끔찍한 동일성조차 긍정하는 극점에서 비로소 대체될 수 없는 단독성(singularity)이 출현한다. 무한한 반복에 대해서 “그랬었다”라고 체념하기를 넘어서 “나 그렇게 되기를”, 즉 더 무한히 반복되기를 “원했다”라고 외치며 한 걸음 내딛는다. 그 순간 단독적이 된다(634쪽), 백척간두 진일보를 통해 내 몸을 우연의 허공 속에 내던지는 것이다. 떨어지는 순간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단독적인 생각은 오로지 그런 위험 속에서만 잉태된다.    

 


사유가 나에게 급습했다사유가 나를 덮쳤다      


이제 남은 과제는 “우리들만의 이론적 문체를 전투적으로 탐구해야 한다는 생각”(592쪽)이다. 아무리 좋은 철학적 사유도 내가 처한 문제 상황에서 부단히 실험하고 갈고닦으면서 제3의 독자적인 사유체계로 재건축해내지 않는 한 우리는 영원히 사유의 식민지에 종속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누군가 새로운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혼자여야 한다”(345쪽). 외롭고 힘든 일이지만 사유는 고독 속에서 잉태되고 숙성된다. 숙성의 시간은 고요한 기다림의 시간이다. 격렬한 토론도 나만의 사유체계가 숙성되었을 때 필요하다. “누군가 새로운 이론을 세우기 위해서는 혼자여야 한다.” 푸코도 들뢰즈도 그리고 프로이트도 이전의 철학적 사유체계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해체하는 외로운 작업을 고독하게 숙성시킨 결과 수많은 후대 철학자와 대중들의 사유의 촉매제가 된 것이다. “땀은 몸속에서 일어난 마주침의 사건이다. 그들은 무언가 비틀며 자신의 경로를 이탈한 자들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내 몸의 탈주자일지도 모른다... 잠재적인 것들은 마주쳐야 현실화된다. 땀은 그렇게 마주쳐서 기어코 현실이 된 잠재태다”(752쪽). 다른 철학자와 우연히 만난 마주침이 때로는 내가 가고 싶은 경로를 한 동안 이탈하게 만드는 변주곡의 주범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변방에 울려대는 변주곡을 땀으로 녹여내서 나의 깨우침으로 축적하지 않는 이상 사고의 질적 도약은 일어나지 않는다. 침 흘리며 나보다 월등한 철학자를 감상하는 데 그치지 말고 다양한 단독성을 지닌 철학적 사유체계들을 내가 직접 사용하며 실천하는 땀 흘려 노력하는 사투만이 철학과 삶이 혼연일체로 변환되는 혁명이지 않을까.     



나는 다분히 삶을 녹여 글을 쓴다고 생각했다. 즉 삶이라는 재료로 글을 짓는 건축이 바로 글짓기라고 생각했다. 삶이 없으면 글을 쓸 수 없다는, 내가 살아온 삶만큼 글을 쓸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저자가 이전에 쓴 《자기배려의 인문학》에는 이와 다른 의견이 나와 있다. “글은 삶에 앞선다...글은 삶을 모방하여 서술하지 않는다. 거꾸로 글이 삶을 만든다. 계약에 의해 행위가 만들어지듯이 글이 삶을 구성한다. 글은 삶에 앞서 이루어진 운명의 계약이다. 삶이 글로 모방되는 것이 아니라, 글이 삶으로 상연된다. 그 상연 속에서 나는 운명의 매질을 당한다. 매질은 삶의 수많은 사건들이다”(263쪽). 오히려 글이 삶을 만들어간다는 파격적인 주장에 비추어 볼 때 내가 쓴 이 리뷰의 글이 내 삶을 이끌어가는 하나의 선언서이자 계약서 같기도 하다. 쓴 대로 운명 지워진 삶이라면 더 치열한 전투적 글쓰기를 통해 삶의 풍파를 헤쳐 나가야 되지 않을까. 평범한 은행원 작가가 쓴 자기배려의 책 읽기는 평범하지 않았다. 비범을 넘어 비상하는 상상력을 자극하며 나의 연휴 시간으로 침범한 불법 작가였다. “사유가 나에게 급습했다. 사유가 나를 덮쳤다”(637쪽). 저자 강민혁의 사유가 내 사고(思考) 속으로 급습해서 심각한 사고(事故)를 일으켰다. 그의 사유가 나를 덮쳤다. 속수무책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발적 마주침이 색다른 깨우침을 낳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