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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어 찍은 사진,
보여줄 수 없어 쓴 글

최필조 작가의 사진 에세이집을 읽고

말할 수 없어 찍은 사진보여줄 수 없어 쓴 글     


최필조(2019). 《말할 수 없어 찍은 사진, 보여줄 수 없어 쓴 글》. 서울: 알파 미디어.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담아내는 일입니다. 둘은 다르지 않습니다.”    

 

초등학교에서 아이를 가르치면서 최필조의 사진첩을 운영 중인 사진작가, 최필조의 사진 에세이, 《말할 수 없어 찍은 사진, 보여줄 수 없어 쓴 글》이라는 책의 저자 소개 페이지에 나오는 글입니다. 가르치는 일에 사랑이 동반되지 않고, 사진을 찍는 과정에 마음이 담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르치는 일이나 사진을 찍는 일이나 궁극에는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가 사랑을 매개로 가슴으로 다가가는 위대한 만남입니다.    

    

《말할 수 없어 찍은 사진, 보여줄 수 없어 쓴 글》이라는 제목이 이 책의 제 몫을 다하고도 남음이 충분합니다. 부제목은 독자의 심금을 더 울립니다. “힘껏 굴러가며 사는 이웃들의 삶.” 본업에 충실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전국을 발로 뛰면서 생각의 발로를 담아내는 사진과 사진을 담아내는 글이 사진작가의 진심과 사진에 찍힌 사람이나 현상의 진심이 만나 심금을 또 울립니다. 사진은 사실적 현상에 작가의 진심이 담긴 작품입니다. 평생 결정적인 순간을 찍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큰 깨달음을 얻은 사진작가,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이 남긴 한 마디, “삶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었다.” 모든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이지만 그 순간이 기록으로 남으려면 누군가에게 결정적인 순간이 포착되어야 한다. 사진작가가 저 순간을 마음에 담아내야 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그 순간은 지나가지 않고 여러 사람의 마음속에 남아 오랫동안 역사적 시간의 흐름을 멈추고 한 장의 추억으로 기억됩니다.     


《말할 수 없어 찍은 사진, 보여줄 수 없어 쓴 글》에는 정말 말로 담아낼 수가 없어서 마음에 담아낸 흑백사진의 정경이 때로는 짧은 글을 만나고 또 때로는 긴 단상을 만나 과거로 흘러가는 추억의 한 장면을 영원히 추억하게 만들어준다. 스쳐 지나가는 장면 하나하나가 우주의 숨결을 머금고 있고 세계의 일면을 부분으로 감추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사진작가의 마음으로 다가오는 자연의 숨결이 카메라 셔터를 자기도 모르게 누르게 만들기도 합니다.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저마다의 사람이 보여주는 안간힘이 힘껏 살 굴러가며 사는 이웃들의 정경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진실한 당신, 남몰래 훔쳐본 뒷모습이 PART 1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사람의 진면목은 앞모습이나 옆모습에 있지 않고 뒷모습에 있습니다. 앞모습은 위장과 변장이 가능하지만 뒷모습은 그 사람의 고달픈 삶이 기쁜 성취의 뒤안길이 숨김없이 잔잔하게 다가옵니다. 앞만 보고 살아가다 자신이 어떤 족적을 남기고 달려가는지 생각해볼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는 와중에도 “거짓 없는 진실이 그의 뒷모습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 그리고 둘’이라는 제목의 사진에는 우산으로 연결되는 두 사람의 간절한 심정이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다가옵니다.     

좋아서요

하나면 족한 우산이 좋아서요     

“이제 비 그쳤습니다.”라고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만약 우산을 각자 하나씩 쓰고 바다를 바라보면 이야기를 나눈다면 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따뜻한 한 마디를 주고받기 힘들었을 겁니다. 한 사람이 간절한 열망을 품고 한 마디 던집니다. 우산이 하나라서 우리도 하나로 묶어준다고. 우산이 하나라서 우리는 하나가 되는 열망을 품을 수 있다고. 그 우산 덕분에 세월의 거리를 좁혀 주고 있다고. 그래서 더 가까이 당신의 진면목을 바라볼 수 있다고. 비가 그쳤음에도 떨어지기 싫어서 차마 비가 그쳤다고 말할 수 없다고. 사진 한 장이 두 사람의 간절한 열망을 고스란히 담아냅니다. 《말할 수 없어서 찍은 사진, 보여줄 수 없어서 쓴 글》의 전형입니다.     


비탈길을 할머니가 힘겹게 허리를 땅과 수평으로 맞출 수도 없을 정도로 구부리고 올라갑니다. 그것도 빈 박스가 담긴 리어카를 끌고. 그리고 한 마디 내던집니다. “이 철없는 종이박스야, 이 매정한 비탈길아!” ‘야, 이놈들아!’라는 제목의 사진입니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구부러진 허리는 이제 더 이상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땅에 닿아갑니다. 거기에 인생이 짐을 짊어지지 못해 리어카에 싣고 평생을 올라갔을 비탈길을 힘겹게 또 올라갑니다. 오르막길에서 숨넘어가듯 기어올라가다 깊은 한 숨을 내쉬며 잠시 쉬었다 다시 올랐을 겁니다. 그렇게 오르고 올라도 앞산을 넘으면 어느새 먼 ㅍ산이 앞을 가립니다. 철없는 종이 박스는 나를 애 무겁게 만들고 매정한 비탈길은 나를 힘들게 하느냐, 할머니가 내뱉은 한 마디에 한 많은 인생살이의 고단함이 배어있습니다. 쉽게 지워지지 않는 그 한 마디가 앞으로 내가 살아갈 미래의 잔상을 미리 보는 듯했습니다.     



‘그녀의 갯벌’이라는 사진에는 이런 글이 곁에서 사진이 품고 있는 삶의 애환을 토해냅니다.      

발자국 찍어

바닷물 고이면,     

거기엔 무엇이 피어날까?     



광활한 바다가 수평선을 펼쳐 보이고, 바다와 갯벌이 만나는 삶의 텃밭에는 허리를 숙이고 힘겹게 삶의 양식을 찾아 움직이는 한 여인의 그림자 같은 모습이 사진의 오른쪽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잔영이 보입니다. “갯벌이 주는 공간 정서는 비논리적이다. 언어를 걸칠 만한 표적이 없고 논리를 비빌 언덕이 없다. 그리고 갯벌의 생태는 끝없이 질퍽거리고 뒤섞이는 불안정성이다. 이 불안정이 갯벌의 안정성이다. 갯벌에는 바퀴의 길이 없지만 갯벌은 수억만 개의 작은 길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갯벌은 갈 수 없는 큰길이다”(109쪽). 김훈의 《자전거 여행 2》에 나오는 말입니다. 오늘 갔던 갯벌의 길에는 내일의 희망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그 길은 또 바다가 지워버리고 내일은 다른 길로 가라는 희망의 명령을 품고 있는 터전이 갯벌입니다. 오늘 찍어 놓은 발자국의 힘겨움이 내일은 다행히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수없이 걸어갔지만 흔적도 없는 길이 영원히 반복되는 갯벌은 그래서 언제나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인생길입니다.     

 

해 넘어간 줄도 모르고 열심히 한 농부가 일을 합니다. 그 곁에서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불안한 눈빛을 품고 힘든 삶을 같이 살아가는 개 한 마리가 주인을 바라봅니다. 그 사진 옆에는 ‘개심심’이라는 제목으로 이런 글이 붙어 있습니다.     


언제 끝나는 데?

집에 좀 가자, 응?     



“얼굴의 언어는 말의 언어가 아니라 몸과 마음의 언어이다. 사람은 말로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교신한다”(229쪽). 역시 김훈의 《자전거 여행 2》에 나오는 말입니다. 개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에 몰두하는 주인에게 차마 말할 수 없는 안타까운 표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그저 바라보고 지켜볼 뿐입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어서 주인 곁은 지키는 삶의 동반자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지금 당장 말하고 싶은 욕망은 목구멍을 타고 입에 도달했지만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고 침묵을 유지하는 힘든 시간을 선택합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불안함이 가중되면서 애간장은 끓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기다립니다. 긴 기다림 끝에 집에 가자는 희망의 메시지가 나에게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며 살아가는 게 고단한 우리들의 삶입니다.     


당신의 오늘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무게였나요?     

고무대야가 

시멘트 바닥에 갈리는 소리가

마음속에 박힙니다.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구부정해진 허리가 수직으로 땅과 수평을 이룹니다. 그리고 ‘삶의 무게’가 담긴 고무대야를 끌고 가는 한 노인의 뒷모습에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단면의 힘겨운 사투를 조용히 보여줍니다.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 무너집니다. 넘어지면 일어날 수 있지만 무너지면 원상복귀가 불가능합니다. 그게 바로 무너지는 것과 넘어지는 것의 현격한 차이입니다. 수없이 넘어지고 자빠지고 때로는 엎어지면서 무릎도 깨지고 얼굴에 생각지도 못한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세상의 무게는 세월의 무게가 추가되면서 혼자 견디기 어려운 삶의 무게로 내 어깨를 짓누릅니다. 무게를 견뎌야 야무지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짊어지고 가는 삶의 무게가 고무대야에 담기면서 걸어가지 못하고 시멘트 바닥에 갈리며 끌려가는 소리가 마음속에 박혀버립니다. 가슴에 못이 박히듯, 끌려가며 시멘트 바닥에 긁히기 전에 본인이 스스로 먼저 갈아버린다는 생각으로 힘겨운 위로를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한 발을 앞으로 꾸역꾸역 내딛습니다.      


PART 2는 ‘늙는 게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네’라는 주제로 다양한 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손 좀 보자는 사람”보다 “손 내밀어 손 잡아주는 사람”의 모습이 상징적으로 잘 드러납니다. “삶의 내공이 묵직하게 묻어난 이웃들의 손은 때때로 삶의 지혜가 되어주기도 한다.” 손으로 힘든 육체노동을 견디면서 살아온 얼룩이 손가락 마디마디에 한으로 맺힙니다. 삶의 시름이 손등의 주름으로 아로새겨집니다.      


이 다 빠지고

틀니 정도는 해야

이 맛을 아는 거야!  


   

‘니들이 홍시 맛을 알아?’라는 제목이 세월의 아픔을 견디며 살아온 왼손이 빨간 홍시를 잡고 있습니다. 그 홍시가 너무 먹음직스러워 한 잎 문 흔적이 역력하게 보이면서 홍시의 속살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그리고 한 마디 툭 던집니다. 세상의 아픔을 다 견디고 또 견뎌내고 버티면서 밥심으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아무 음식이나 씹어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내 이빨은 세파의 노고와 함께 세상으로 빠져 달아났습니다. 몇 개 안 남은 이빨과 이빨에 힘을 기대어 틀니로 간간히 버텨나갑니다. 그 틀니로 맛보는 홍시 맛은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지고의 경지에 이른 자연과 우주가 만들어낸 신비한 맛입니다. 봄의 희망으로 일군 꽃이 한 여름의 천둥과 번개, 그리고 비바람을 맞아가면서 땡감은 이제 노을의 아름다운 기운을 받아들여 가을의 붉은색으로 익어갑니다. 그 홍시를 한 잎 물었을 때 입안에 고이는 침과 부드러운 홍시 속살은 한바탕의 짧은 뒤섞임을 하다 좁은 목구멍을 타고 넓은 위장의 바다로 나아갑니다. 자연과 우주와 내가 한 몸이 되는 순간입니다.     


네 아물겠지요.     

상처에 익숙해지면

이유 따위는 관심 없습니다. 

    

상처의 이유는 몰라도

우리는 살아야 하니까요.  

   

어디서 그랬는지

누가 그랬는지

몰라도 괜찮습니다.    

 


‘몰라, 어디서 그랬는지’라는 사진 작품 곁에 조용히 독백하는 글입니다. 할머니의 깎지 낀 오른손 위에 깊은 상처인지 손등을 덮고 있는 하양 헝겊 위로 피 묻은 흔적이 역력히 보입니다. 하지만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받은 상처인지는 모릅니다. 아니 알고 싶지 않다는 심정이라고 합니다. 상처임에도 불구하고 또 상처 받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내야 합니다. 살아가지 않으면 사라지기 때문에 꾸역꾸역 살아가는 게 아니라 안간힘을 쓰면서 살아내야 합니다. 상처는 상급을 보장해줍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상처가 나의 처신을 결정해주기 때문에 오늘도 상처 받으러 바깥세상으로 나갑니다. 상처 받을 용기를 품고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갑니다. 정신없이 달리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해보면 삭신이 쑤시고 몸의 어딘가에는 나도 모르게 긁히고 베인 상처가 상한 마음을 향해 아픔을 호소합니다. 어디서 누구에게 받은 상처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오늘을 힘겹게 버텨오면서 내 몸에 각인된 사투의 증표이기도 합니다.      


PART 3은 “괜한 참견, 뜻밖의 위로, 밤골”의 적나라한 풍경을 고스란히 드러내 줍니다. 하늘을 이고 살았던 달동네 밤골에서 보여주는 이웃들의 따뜻한 시선을 작가의 마음이 다가가 담아낸 저마다의 사진에는 뜻밖의 위로가 되어 나를 위로해줍니다. 차마 말할 수 없어서 마음에 담은 사진에 담긴 잔상을 반추하며 보여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보여주고 싶은 마음 한구석의 글을 토해냅니다.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밤골에는 밤마다 서글픈 추억을 머금고 골골히 맺힌 저마다의 사연이 모든 사물에도 박혀 있습니다.     


외롭다고 

말하기 싫어     

빈 하늘에

줄 몇 개 그었다.     



‘줄 하나’라는 제목의 사진에는 밤골의 깊어가는 밤 이전에 하늘을 전깃줄과 전홧줄이 가로질러 만들어내는 어긋남의 아름다움을 외로움으로 승화시키는 장면이 담겨 있습니다. 끊어지면 죽는다는 각오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어지는 줄들의 사투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연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기고 있는 것일까요. 그동안 쌓아온 삶의 숱한 굴곡의 장면들이 점들로 이어져 선을 이루었습니다. 저 선에는 직선도 있고 곡선도 있다. 직선과 곡선 사이를 가로지르는 사선도 있습니다. 삶은 그동안 숱한 사선을 넘으며 목숨 걸고 사투를 벌이며 넘어온 변곡점이 저마다의 선으로 연결되고, 그 선은 또 다른 선과 만나 면(面)을 만들어냅니다. 내 얼굴이 드러내는 면상(面像)과 면모(面貌)도 점과 선과 면이 만들어낸 합작품입니다. 밤골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모든 삶의 족적은 이처럼 밤골 사람들의 면모를 나도 모르게 얼굴에 축적하며 살아갑니다.     


어제 국 끓여 먹던 양은 냄비가

오늘은 고물이 되어 팔려갑니다.     


창틀에 올려놓은 소주 반 병도

곧 고물이 되어 언덕을 내려가겠지요.    

 

그전에 마셔버려야겠습니다.

그러니 오늘도 한 잔 해야 합니다.     



‘고물’이라는 제목이 붙은 글로 고물을 싣고 내려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뒤에서 아련히 바라보는 남편의 모습은 말할 수 없는 아련한 서글픔이 온몸을 휘감고 있습니다. 냄비가 고물이 되고 배고픈 위장을 위로해주던 소주병도 곧 고물이 되어 언덕을 내려가야 되는 운명을 생각하면 차마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소주를 마시지 않고 마셔버리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마실 때의 느낌과 마셔버릴 수밖에 없을 때의 아픔에는 천지차이가 존재합니다. 버리고 싶은 생각과 내다버리고 싶을 때의 느낌이 다르듯이 말이죠. 언덕 위로 올라와 힘들지만 같이 감내해온 지난 시절의 추억이 모든 사물에 속속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 사물이 내 곁을 떠나갈 때 내가 겪은 사연도 함께 언덕 아래로 내려가 세상 어딘가로 다시 떠나갑니다. 내가 떠나가기 전에 그들이 먼저 떠나갈 때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 마음은 온전하지 않습니다. 삶은 우연히 만났다가 서로가 서로에게 고마움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와중에 떠나보내야 하는 이별과 작별의 아픔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살아가야 되는 운명인가 봅니다.     


마지막 PART 4는 “고마워요, 당신을 만날 수 있어서-길 위에서” 살아가며 사랑하는 이웃들의 저마다의 삶을 담아냅니다. 오래전부터 있어 왔지만 느끼지 못하고 지나쳤던 수많은 길에서는 만남을 추억하며 묵묵히 오늘도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에서 삶의 진면목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이 세상에

완벽히 버려진 외로움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걱정 말아요’라는 제목의 사진 곁에서 속삭이는 글입니다. 뒷 배경에는 푸른 바다가 세월의 풍파에 지워져서 흐릿한 푸른색으로 칠해져 있고 바다와 인접한 모래사장에 한 남자가 바다와 수평을 이루며 깊은 사색에 잠겨 있습니다. 그리고 사진 맨 앞 오른쪽 끝으로 이름 모를 한 마리 새의 뒷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바다와 모래사장, 그리고 사람과 새는 한 장면 속에서 저마다의 존재감을  말없이 드러내지만 사진의 배경이 될수록 희미하게 사라집니다. 아마 조만간 전경으로 드러낸 새도 희미하게 보이다 보이지 않는 배경 속으로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사진 속의 사람은 푸른 바다 곁으로 완벽히 버려진 것일까요? 아니면 사람을 곁에 두고 파도소리를 들려주는 바다는 보이지 않는 배경에서 점차 사라지는 외로운 존재일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전경으로 드러난 새는 저만큼 뒤에서 수평선을 바라보는 사람과 어울릴 수 있을까요? 모두가 저마다의 위치에서 존재하는 이유를 드러내며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완벽히 버려진 외로움은 없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인지, 사진을 보면서 작가가 품은 상상력의 뒤안길을 상상해보았습니다.     


어느 역은 기뻤고

어느 역은 슬펐고     


그냥 지나쳤더라면 좋았을

그런 역도 있었겠지요.     


당신이 다 지나갈 때까지

멈추지 않는 기차     


눈을 질끈 감고

또 다음 역을 기다립니다.     



기차역이라는 제목이 붙은 사진 옆에는 깊은 시름에 빠진 할머니의 진한 흑백사진이 말없이 많은 말을 건네줍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목적지를 향해 달려왔지만 기억에 남은 간이역은 거의 없습니다. 목적지를 향해 앞만 보고 달리면서 행복이 거기에 가면 널려 있는지 알았습니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 돌이켜 보니 목적지로 가는 수많은 간이역에 행복이 지천에 깔려 있습니다. 모든 간이역이 다 기쁨만 주지 않듯, 살아가는 매 순간이 모두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어떤 간이역에서의 삶은 견디기 힘든 순간의 연속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간이역과 간이역을 연결해주는 기차는 말없이 오늘도 사람이 품고 있는 희망을 싣고 끊임없이 이어 달려 나갑니다. 눈을 질끈 감고 다음 역에서 만날 희망의 소식을 기대하며 기다립니다. 우리는 아직 가보지 않은 간이역이 더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가보지 못한 간이역에 어쩌면 우리가 찾는 이상향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머무는 간이역에서 매 순간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의 한 페이지를 만들어나가는 일입니다.      


사진과 사진에 담긴 글을 읽으면서 이제껏 살아본 지난 시절을 반추하며 한 편의 드라마나 영화를 다시 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또 어떤 사진과 글 속에서는 내가 앞으로 살아갈 삶의 모습을 파노라마로 바라보며 전망하는 내 모습을 혼자 상상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사진첩의 한 페이지를 넘기며 책을 덮는 순간 사진들이 담고 있는 삶의 희로애락이 한 편의 영상시처럼 가슴을 파고들면서 은은한 향기가 은근하게 울려 퍼지는 듯했습니다. “힘껏 굴러가며 사는 이웃들의 삶”에서 저는 따뜻한 정을 느꼈으며, 인간적인 유대감 속에서 만나지 않았지만 만나면서 오래 살아온 친근한 우정을 몸으로 실감하는 듯했습니다. 각박한 사회, 급변하는 세상에서도 변하지 않는 삶의 진리는 사람이 사람을 만나 곤경 속에서 풍경을 만들어가는 사람의 안간힘이 우리 모두에게 힘을 준다는 사실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살아온 인생이 살아갈 인생에게 한 마디 던집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지지 않기 위해 살아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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