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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는 시(詩)로 이치(理)를 깨닫는(悟)를 사람이다

《맛있는 시-외롭고 힘들고 배고픈 당신에게》를 읽고

CEO는 시()를 통해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 사람이다.

맛있는 시-외롭고 힘들고 배고픈 당신에게를 읽고 

    

방송작가 정진아 동시작가가 편집한 《맛있는 시》를 읽다 보면 이 시에 등장하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충동과 욕구가 춤을 춘다. ‘1장 위로 맛 시(詩), 토닥토닥, 너만 그런 거 아니야’를 읽다 보면 힘든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는 따뜻한 위로를 전해준다. 위로하는 시를 읽다 보면 어느새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지만 어느새 갑자기 위로 올라가고 싶은 생각이 꿈틀거린다. 고두현 시인의 「진미 생태찌개」를 읽다 보면 생태찌개를 먹으면서 주고받는 정담이 눈앞에 그려진다. 그 사이 나도 모르게 꼴깍 목으로 넘어가는 침 삼키는 소리를 감추지 못하는 실례를 범한다. 어떤 집만 생각하면 그 집의 정다운 풍경이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진다. “한 사람은 거참 좋다 감탄사를 연발하고/또 한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숟가락질 바쁘고/다른 한 사람은 감탄사와 말없음표 번갈아 주고받다/이 좋은 델 왜 이제야 알려주느냐고/눈 흘기며 원망하는 집이지요.” 시의 위대한 힘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에게도 경험한 사람처럼 오감각을 자극하는 상상력에 있다. 생태찌개 먹으며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대화에 귀 기울이지 않고 오로지 생태찌개에 전념하며 맛을 음미하는 건 그만큼 딴전 피울 시간이 없을 정도 진미라는 말이다. 그 국물은 또한 진국이 아니고 뭐였을까.     



“물건을 훔치면 범인이 되지만 마음을 훔치면 연인이 된다. 세상에서 가장 훔치고 싶은 게 있다면 연인의 마음이 아니라 시인의 영감이다. 왜냐하면 시인의 영감으로 연인의 마음도 얼마든지 훔칠 수 있기 때문이다. ‘틀 밖’에서 호기심의 물음표(?)를 던져 ‘뜻밖’의 느낌표(!)를 찾고 싶은가? 마감 시간 전에 무릎을 치며 공감할 수 있는 시인의 영감이 곳곳에 숨어 있는 이 책을 보는 순간 우리 모두는 ‘시 읽는 CEO’를 넘어 ‘삶의 CEO’가 될 수 있다. 고두현의 《시 읽는 CEO, 처음 시작하는 이에게》에 쓴 추천사다. 나는 시를 읽으면서 언제나 시인한다. 시인(詩人)의 영감은 함부로 흉내 낼 수 없음을 시인(是認)하는 것이다. 시인의 영감을 훔쳐 내 것으로 만들고 싶지만 쉽지 않다. 마음을 움직이는 시를 읽고 어떻게 이런 표현을 할 수 있을까 한참을 생각한다. 역시 나는 시인이 될 수 없음을 시인하고 나는 시가 아닌 다른 글로 시인을 능가하는 작품을 남기기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진미 생태찌개를 보고 그것을 매개로 주고받는 사람의 정감 어린 담론에서 우리의 일상에 담긴 소소함을 읽어내는 묘미를 시인은 놓치지 않는다.     



박성우 시인의 「삼 학년」이란 시를 읽으면서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가 갑자기 서글픈 심정이 심장을 때리면서 순간적으로 눈가에 맺히는 눈물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미숫가루를 실컷 먹고 싶었다/부엌 찬장에서 미숫가루통 훔쳐다가/동네 우물에 부었다/사카린이랑 슈가도 몽땅 털어 넣었다/두레박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미숫가루 저었다/뺨따귀를 첨으로 맞았다.”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미숫가루를 통째로 우물에 부는 만행을 저질렀을까. 동심을 넘어 주체할 수 없는 도발적인 행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뺨따귀를 맞은 추억으로 끝나는 시를 읽다가 동심이 받은 상처는 얼마나 컸을까 상상이 된다. 오로지 죄라면 미숫가루를 너무 먹고 싶어서 우물에 풀어 휘저은 돌발적 행동 이다. 하지만 더 큰 어른의 죄는 그 아이의 뺨따귀를 때린 것이다. 아이는 뺨따귀를 맞고 깊은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지금 어른이 된 그 아이의 모습을 보고 싶다.      


‘2장 사랑 맛 시(詩)-사랑한다, 사랑한다, 나 너를’에서 만난 시는 저마다 음식에 맺힌 사랑 찬가를 기억한다. 정다혜 시인의 「콩밥 먹다가」를 읽노라면 어린 시절 영양가 좋다는 콩을 골라내다 엄마의 매정한 한 마디에 풀이 죽은 사연이 떠오른다. “콩밥을 싫어하여 콩만 골라내더/눈 맑은 그 아이 생각에 목이 메고/잊고 살았던 슬픔의 오장육부에/검은 콩알이 산탄처럼 박힌다.” ‘콩밥 먹는 죄인“이라는 표현에 왜 죄인들이 먹는 밥은 영양가 좋은 콩밥일까를 생각해보았다.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콩을 싫어하는 어린아이처럼 벌을 주는 사람이 먹어야 할 밥이 콩밥이라서 그런지를 상상하게 만들지만 콩밥에 얽힌 애틋한 사연은 사람을 사랑하게 만든다. 「우리는 질문하다가 사라진다」는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보면 질문하다 사라지는 안타까운 인간적 삶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우리가 아는 것은 한 줌 먼지만도 못하고/짐작하는 것만이 산더미 같다/그토록 열심히 배우건만/우리는 단지 질문하다 사라질 뿐.“ 비록 질문하다 사라질지언정 콩밥은 왜 교도소에 들어가서 먹어야 하는지를 아직도 질문한다.      


안현미 시인의 「비굴 레시피」에서 슨 굴의 종류를 요리하는 특별한 레시피인 줄 알았다. 비굴하게 살 수밖에 없는 우리 시대의 참을 수 없는 아픔의 일면을 요리로 치유하겠다는 시인의 발상이 놀랍다. “그러니까 내일 당도할 오늘도/나는 비굴하고 비굴하다/팔팔 끓인 뼈 없는 마음과 몸인/비굴을 당신이 맛있게 먹어준다면.” 세상의 누가 비굴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단 말인가. 비굴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지만 그럼에도 현실은 멀쩡한 사람도 비굴하게 만든다. 더구나 남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비굴하게 살아가는 삶을 자청했던 부모님의 서글픔을 생각하면 갑자기 눈물을 삼키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본다. 전복을 먹다 전복당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은 욕망처럼 굴을 먹다 비굴하게 살지 말아야겠다는 정상적이지 않는 다짐을 해본다. 비굴을 요리하는 안현미 시인의 상상력에서 갑자기 든 의문은 도대체 시란 무엇인가였다. “어떤 책을 읽는 대 전신이 얼어붙어 어떤 불기로도 몸을 덥힐 수 없게 되면, 나는 그것이 시인 줄 안다. 머리 맨 위가 떨어져 나간 듯 몸이 반응해도, 나는 그것이 시인 줄 안다. 이것이 내가 시를 알아보는 유일한 방법이다. 다른 방법이 있을까?”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시에 대한 정의다. 전신이 얼어붙었지만 어떤 불기로도 몸을 덥힐 수 없는 전율하는 경각심이 다가오거나 생각하는 머리가 떨어져 나갔어도 여전히 몸이 반응하는 그런 충격이 바로 시라는 것이다. 비굴 요리에서 인생의 비굴함을 건져 올린 시인의 상상력에서 시의 본령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었다.     



‘3장 인생 맛 시(詩)-간장, 소금, 설탕, 된장, 고추장, 인생의 기본 맛’에는 희로애락이 담긴 음식으로 인생의 사계절을 읊는 시가 등장한다. 산문처럼 쓰인 함민복 시인의 「눈물은 왜 짠가」는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시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유튜브 동영상(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PwdjKQGRjCc&t=73s)으로 감상하면 아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엄마가 설렁탕 집에 들어가서 주고받는 대화에 코끝이 찡해지고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도 없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힘겨운 삶을 버틸 수 있는 방부제가 바로 눈물과 땀이다. 침 흘리는 사람보다 땀 흘리며 노동하는 사람, 노동의 고단함을 견디지 못하고 눈물 흘리는 사람이 결국 세상의 평범함을 거부하고 비범한 상상력의 경지로 날아간다. 개인적으로 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한 함민복 시인의 시야말로 한 사람의 고단한 삶 속에서 건져 올린 사연을 품고 있다.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김수영의 시론, ‘시여, 침을 뱉어라’에 나오는 말이다. 함민복 시인의 「눈물은 왜 짠가」야말로 온몸으로 밀고 나간 시였다. 어떤 꾸밈도 없고 그런 꾸밈이 들어간 틈도 없이 온몸으로 밀고 나가면서 가슴 저려오는 그 서글픔을 뚝배기로 끓여낸 시라고 생각한다.     


이재무 시인의 「항아리 속 된장처럼」은 속성으로 뭔가를 달성하려는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는 시다. 이 시는 고속으로 양산하는 속성(速成) 시대에 숙성(熟成)으로 경지에 이르려는 지난한 노력의 수고스럽지만 정도의 길을 알려준다. “세월 뜸 들여 깊은 맛 우려내려면/우선은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자는 거야...중략/기다리지는 거야 원치 않은 불순물도/뛰어들겠지 고것까지 내 살肉로/품어보자는 거야 썩고 썩다가 간과 허파가 녹고/내장까지 다 녹아나고 그럴 즈음에/햇볕 좋은 날 말짱하게 말린 몸으로/식탁에 오르자는 거야.” 된장이 되려는 몸부림과 바위도 뚫을 정도의 결연한 각오와 다짐이 느껴지는 시에서 “이런 된장”이라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햇볕 좋은 날 말짱하게 말린 몸으로/식탁에 오르자”는 다짐에는 된장의 결연한 각오와 결행을 감행하겠다는 눈물겨운 다짐이 서려 있다. 오늘 된장찌개를 먹으면서 된장과 어울려 봄의 향기를 전해준 냉이와 달래의 속마음도 궁금해졌다. 자신의 몸속으로 된장이 침투하도록 내버려둔 속사정이 있을 것이라는 짐작으로 궁금증을 대신했다.     


서윤규 시인의 「두부」 시를 읽으면서 시인의 상상력이 품고 있는 생각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었다. “두부를 보면/비폭력 무저항주의자 같다/칼을 드는 순간/순순히 목을 내밀 듯 담담하게 칼을 받는다/몸속 깊이 칼을 받고서도/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칼을 받는 순간, 죽음이 얼마나 부드럽고 감미로운지/칼이 두부를 자르는 것이 아니라/두부가 칼을 온몸으로 감싸 안는 것 같다/저를 다 내어주며/칼을 든 나를 용서하는 것 같다/물어야 할 죄목조차 묻지 않는 것 같다.”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두부를 보고 자신이 두부라고 역지사지로 입장을 바꿔 공감하는 시에서 우리는 시인은 아무나 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시인해야 했다. 가장 좋아하는 요리 중의 하나가 바로 두부 요리지만 그 많은 두부를 먹으면서도 서윤규 시인처럼 두부를 생각해본 적이 없는 내가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자신을 찌르는 칼조차 받아들이며 “두부가 칼을 온몸으로 감싸 안는 것 같다”는 표현에서 시인이 꿈꾸는 삶의 무궁한 상상력 경지를 그저 감탄으로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4장 엄마의 맛 시-그리움이 피어오르는 시간’에는 음식에 담긴 엄마에 대한 애틋한 사연으로 물들여 있다. 이정하 시인의 「함박눈」에 나오는 수제비 같은 함박눈은 수제비에 담긴 가난한 살림으로 사투를 벌였던 엄마를 떠올리게 만든 장본인이다. “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분식집 창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그날 어머니가 떠먹여 주던 수제비 같은/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펑펑 내리는 함박눈은 펑펑 쏟아지는 눈물의 다른 표현으로 읽힌다. 수제비 국물에 녹아든 담백한 감자 맛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던 수제비 추억이 생생한 기억으로 떠올랐다. 쌀밥은 그림의 떡이었던 시절, 저마다의 방향으로 산만하게 흩어지는 모래알처럼 보리밥을 먹다가 먹는 뜨거운 국물에 빠져든 수제비 맛은 추운 겨울을 버텨내는 온기품은 음식이었다. 한편 한순 시인의 「김치찌개」를 읽는 순간 돼지고기 있는 김치찌개가 얼마나 입맛을 돋우는 엄마 맛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치료약으로 돼지고기 몇 조각 넣은 김치찌개를 끓인다”는 시인의 감수성에 그만 핑 도는 눈물을 잠시 가눌 길이 없었다. 모든 김치찌개에 치료약으로 돼지고기가 들어가야 하지만 그것조차 넣지 못하고 김치만으로 끓이는 엄마표 김치찌개를 먹었을 때 나는 왜 쓸 데 없는 원망과 불만을 쏟아냈을까를 생각하면 한 없이 부끄럽기만 하다.     

엄마표 요리의 정점은 이문재 시인의 「연금술」에 나타난다. 좀 길지만 시 전문을 인용해본다.   

   

배추는 굵은소금으로 숨을 죽인다

미나리는 뜨거운 국물에 데치고

이월 냉이는 잘 씻어 고추장에 무친다

기장멸치는 달달 볶고

도토리묵은 푹 쑤고

갈빗살은 살짝 구워내고

아가미 젓갈은 굴 속에서 곰삭힌다


세발낙지는 한 손으로 주욱 훑고     

안치고, 뜸 들이고, 묵히고, 한소끔 끓이고

익히고, 삶고, 찌고, 다듬고, 다지고, 버무리고

비비고, 푹 고고, 빻고, 찧고, 잘게 찢고

썰고, 까고, 갈고, 짜고, 까불고, 우려내고, 덖고

빚고, 졸이고, 뜨고, 뽑고, 어르고

담그고, 묻고, 말리고, 쟁여놓고, 응달에 널고

얼렸다 녹이고 녹였다가 얼리고   

  

쑥 뽑아 든 무는 무청부터 날로 베어 먹고

그물에 걸려 올라온 꽃게는 반을 뚝 갈라 날로 후루룩

알이 잔뜩 밴 도루묵찌개는 큰 알부터 골라먹고

이른 봄 두릅은 아침 이슬이 마르기 전에 따되

겨우내 굶주린 짐승들 먹을 것은 남기고

바닷바람 쐬고 자란 어린 쑥은 어머니께 드리고

청국장 잘 뜨는 아랫목에 누워

화엄경을 읊조리던 그런 날들이 있었다.     



요리의 연금술사, 엄마에게 배우는 소중한 교훈은 재료마다 궁합이 맞는 적절한 요리법이 있으며, 식재료의 본질에 따라 그걸 살리는 요리의 연금술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 시에는 음식의 종류별로 어떻게 요리의 연금술을 발휘해야 저마다 품고 있는 고유한 맛이 우러나오는지를 적확한 동사를 동원해서 묘사한다. 마찬가지로 지식의 연금술도 어울리는 지식을 숙성시켜 저마다의 고유한 지식 맛이 살아 숨 쉬도록 지식요리사의 연금술을 발휘해야 한다. 시인의 주특기는 관성이나 타성대로 살아가지 않고 탄성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데 있다. 자두 하나를 보고도 감탄하는 사람이 시인이라는 앙드레 지드의 말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을 평범하게 바라보지만 시인은 평범속에서도 비범함을 발견한다. 그들은 언제나 정상에서 벗어나 비정상적 사유를 즐기고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서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역지사지의 대가다. 틀에 박힌 현상을 보고도 특유의 언어적 감각과 남다른 상상력으로 비상하는 날개를 펼친다.     


“우리는 모두 삶의 CEO(詩理悟)다. CEO는 시(詩)를 통해 세상의 이치(理)를 깨닫는(悟) 사람이다. 시인은 ‘틀 밖’에서 물음을 던져 ‘뜻밖’의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다. 이 책은 시를 통해 세상을 다르게 보고(見) 들으며(聞) 남다른 조합(編)으로 놀라운 ‘깨달음(覺)’과 ‘깨우침’을 배우고 싶은 분, 그래서 작은 일상에서도 비상하는 감동으로 세상을 움직이고(動) 싶은 모든 사람들이 ‘필독’해서 ‘중독’되어야 할 책이 아닐 수 없다. 대작과 걸작도 시인의 마음으로 시작(詩作)해야 시작(始作)될 수 있다는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황인원의 《시 한 줄에서 통찰은 어떻게 시작하는가》라는 책에 쓴 추천사다. 삶의 CEO는 회사를 운영하는 대표가 아니다. 오히려 삶의 CEO는 타성과 통념에 갇혀 틀에 박힌 생활을 반복하는 사람들에게 시가 품고 있는 이치를 깨달으며 일상에서도 비상하는 상상력을 건져 올리는 사람이다. 「어느 수인囚人과 에밀리 디킨슨」이라는 시에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온다. ”사랑은 - 생명 이전이고/죽음 - 이후이며/천지창조의 시작이고/지구의 해석자.“ 여기서 사랑을 시로 바꿔 읽어도 같은 의미로 다가온다. ”시는 천지창조의 시작이고 지구의 해석자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 곧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삶을 창조하기 시작하는 사람이며 우리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지구를 어제와 다르게 해석하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이다. 이런 노력을 거듭하며 사투를 벌이는 우리 모두는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한 세상’을 대변하는 「어떤 경우」를 쓴 이문재 시인처럼 비범한 시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     


어떤 경우/이문재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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