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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힐 수 있는 견해 차이,
좁힐 수 없는 상상력 차이

견해의 차이는 좁힐 수 있지만 상상력의 차이는 좁힐 수 없다.

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와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을 읽고 나서


황현산의 《밤이 선생이다》에는 주옥같은 문장, 심장을 잠시 멈추게 만들고 전두엽에 경련을 일으키는 인두 같은 문장이 나온다. 수많은 문장 중에서도 몸이 체험적 깨달음으로 체득한 지혜의 본질을 드러내는, 저자의 체험적 깨달음을 몸으로 깨달을 수 있는 문장을 만나보자. “성현들이 무슨 말을 하였다면, 옛사람들은 그 말을 쓰고 외우면서 육체 속에 새겨 넣었다. 자기가 배우는 것의 의미와 자기의 몸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컴퓨터의 검색으로만 글자들을 만날 때 그 의미는 우리 몸속에 들어오지 않는다”(278쪽). 머리로 생각하는 앎과 몸으로 깨닫는 느낌이 별개의 독립적인 활동이 아니라 하나의 움직임이다. 머리와 가슴, 이성과 감성, 논리와 일리, 생각과 느낌은 별개의 독립적인 두 가지 활동이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한 순간에 일어나는 두 가지 같은 활동이다.



“물동이를 이는 일은 쉽지 않다. 먼저 똬리를 머리에 얹고, 몸을 낮추어 쪼그리고 앉아, 물이 가득 찬 동이를 수직으로 들어 올려 그 똬리 위에 안정시키고는...몸을 다시 수직으로 일으켜 세워야 한다. 제 몸에 물을 끼얹지 않고 제대로 물동이를 이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훈련이 필요하다. 반세기 전만 해도 우리의 삶은 이런 힘든 기술들이 그 구석구석을 받쳐주지 않으면 하루도 지탱하기 어려웠다. 자연이 그 물질성을 야만스럽게 드러내는 궁핍한 삶에서는 이런 기술을 하나하나 몸과 결합시켜야만 인간이 들어설 작은 자리가 마련되고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할 수 있었다”(149쪽). 머리로 배운 관념성은 몸으로 배운 물질성을 이길 수 없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해도 머리로는 이해는 가지만 그 이해를 기반으로 몸을 움직이는 실천으로 연결시키지 못한다. 몸은 머리로 이해하는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머리와 분리될 수 없는 일심동체다.  


“몸으로 체득했기에 그것은 밑바닥 진실이며 마지막 진실이다. 어떤 경우에나 세상의 변화를 꾀하게 하는 힘은 이 마지막 진실에서 온다. 그러나 이 마지막 진실이 항상 과격한 형식으로 드러날 때, 그것이 우리 삶 자체를 불안하게 흔들고, 말하는 사람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는 함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마지막 진실은 배타적인 진실일 경우가 많으며 해석의 여지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200쪽). 몸으로 익힌 마지막 진실은 배타적이며 과격하다. 다른 상황에서 무한 반복할 수 없기 때문에 배타적이며, 구체적인 맥락에서 몸으로 깨달은 진실이기에 신념과 열정을 머금은 주관이라서 타협을 하지 않는 과격한 주장일 수 있다. 또 다른 상황에서 반복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신뢰성이 아니라 특정한 맥락에서만 진리로 통용되는 일리이기에 다른 사람이 반복해도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 없다. 반복한다고 이전 반복한 결과와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 없는 특수한 맥락적 고유함, 그것이 몸으로 체득한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주관적 과격함의 발로다. 주장의 과격함은 주장의 체험적 자신감에서 비롯된다. 해보지 않고 말로 이해한 관념적 앎이 아니라 실제로 악조건 속에서도 몸을 던져 깨달은 소중한 체험적 지혜다.


“우리 섬의 어른들은, 비록 오늬죽의 맛에 날카롭지는  못했어도, 소금 그 자체의 맛에는 너나없이 귀신들이었다. 소금 한 알갱이를 입에 넣으면, 섬의 동쪽 염전 소금인지 서쪽 염전 소금인지, 초여름 소금인지 늦가을 소금인지, 어김없이 알아맞혔다”(251쪽). 동쪽 염전과 서쪽 염전의 소금인지를 소금을 입에 넣고서도 알아차릴 수 있는 놀라운 혜안은 책상에서 책으로 배울 수 없는 소중한 체험적 깨달음이다. 문제는 이런 앎을 머리로 배울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책상에서 책으로 입으로 설명할 길이 없다는 데 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식을 다 대체해도 쉽게 대체할 수 없는 소중한 지혜는 몸으로 터득한 체험적 지혜(Practical Wisdom, Phronesis)다. 책상머리에서 머리로 알 수 없는 지혜다. 안다고 할지라도 전달이 불가능하다. 지식은 머리에 들어 있지만 지혜는 온몸에 퍼져 있다. 지능은 머리로 생각하는 방법을 단련시키는데 관여할 수 있다. 하지만 지성은 지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생각지도 못한 생각으로 위기에 직면한 현실적 상황을 타개할 묘안을 포기하지 않고 찾아 나선다.

 

    

그 묘안이 바로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문제의식이자 우리에게 던져주는 시사점의 보고다. 문학적 깊이는 삶의 깊이이자 고뇌의 깊이다. 깊이 없는 삶은 기피 대상이 되는 글이 나오고, 고뇌의 깊이로 숙성되지 않는 생각은 각성의 즐거움을 줄 수 없다. 황현산 작가의 글 속에는 문학을 매개로 삶과 사회와 역사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단련하는 저자의 치열한  열정이 곳곳에서 열기를 뿜어내지만 적당한 냉정으로 무한 폭발함의 무모함을 자제하려는 고민이 엿보인다. “나는 문학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오랫동안 물어왔다. 특히 먼 나라의 문학일 뿐인 프랑스 문학으로 그 일을 할 수 있는지 늘 고뇌해왔다. 내가 나름대로의 어떤 슬기를 얻게 되었다면 이 질문과 고뇌의 덕택일 것이다”(8쪽).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로 우리 사회를 지금보다 밝고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고 사회와 연결시켜 고뇌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개인차원의 심리적 고민으로 끝나고 사회 또는 역사적인 고뇌와 성찰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냥 지나쳤던 당연한 현상과 원래 그렇다고 치부했던 사회적 제도나 관습에 어느 순간 모순이 보이기 시작한다. 왜 그래야만 되는지 왜 그렇게 주장할 수밖에 없는지를 의문의 물음표를 던지다 문득 깨달음이 올 때가 있다, 황현산 교수님은 그런 순간을 문학적 순간이라고 한다. “평소에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이런 모순에 갑자기 의문이 생기는 순간을 나는 문학적 시간이라고 부른다. 문학적 시간은 대부분 개인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지만, 사회적 주제와 연결될 때 그것은 역사적 시간이 된다. 그것은 또한 미학적 시간이고 은혜의 시간이고 깨우침의 시간이다”(8쪽). 우리가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시사점은 문학적 순간이 개인차원의 지적 희열이나 각성의 순간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적 이슈와 연결되는 성찰의 시간으로 연결될 때, 그 순간은 한 사회의 변혁적 동력을 얻는 역사적 시간이 된다는 점이다. 심리적 고민이 사회적 고뇌의 순간으로 연결될 때 개인의 고민은 사회적 연대가 던져야 될 성찰의 질문으로 발전한다.



“한 인간의 내적 삶에는 그가 포함된 사회의 온갖 감정의 추이가 모두 압축되어 있다. 한 사회에는 거기 몸담은 한 인간의 감정이 옅지만 넓게 희석되어 있다. 한 인간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린 슬픔은 이 세상의 역사에도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믿어야 할 일이다. 한 인간의 고뇌가 세상의 고통이며, 세상의 불행이 한 인간의 슬픔이다. 그 점에서도 인간은 역사적 동물이다”(169쪽).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도 하지만 역사적 동물이라는 깨달음의 이면에는 인간성이나 인성도 그 사람이 살아오면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과의 사회적 관계성이 역사적으로 축적되어 생긴 산물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된다는 메시지가 숨겨 있다. 프랙털의 원리처럼 부분 속에 전체가 들어있다. 한 사람의 감정은 진공관 속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과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생긴 사회적 관계의 부산물이다. 한 인간의 고뇌를 통해서 사회적 고뇌를 읽을 수 있는 이유는 그 사람이 몸담고 있는 사회적 맥락이 그 사람의 고뇌에 담긴 콘텐츠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온몸으로 고통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 밑바닥에서 절치부심하며 재기를 꿈꿨던 사람의 고뇌의 심연은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가슴으로 느낄 수 없다. 경험해보지 않고도 책상에 앉아서 머리로 이해할 수 있지만 몸으로 느낄 수는 없다. 밑바닥 인생을 살면서 처절한 삶을 온몸으로 겪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밑바닥이라는 삶의 무대는 나와 관계없는 논리적 이해의 대상이다. 그 사람에게 밑바닥은 관념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객관적 이해의 대상이다. 체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는 어느 정도 갈 수 있지만 공감대가 형성되거나 그 상황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은 역부족이다. “세상에는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은 구의역의 수리공을 진실로 제 자식처럼 여기는 사람도 많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위선자가 아닌지 자문하는 사람도 많고,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도 많고, 비록 위선적일지라도 그 생각을 마음에 새기려고 애쓰는 사람도 많다. 그 많은 사람은 제 생각을 버선목처럼 까보일 수 없다. 그 사람들과 나향욱들은 끝내 만날 수 없다. 그것이 충격적이다. 거기에는 견해의 차이가 아니라 상상력의 차이가 있다”(177쪽). 견해의 차이는 노력을 통해서 좁힐 수 있지만 상상력의 차이는 노력을 통해서 좁힐 수 없다. 영원히 건널 수 없는 상상력의 차이로 좁힐 수 없는 사이다.


문재의 심각성은 직접 경험해봐야 타자의 입장을 능가 할 수 있고 상상력도 생길 수 있는데, 현실은 그런 직접 경험을 의도적으로 가로막는 수많은 인터페이스의 세계로 변화되고 있다. 내가 직접 대상과 현실로 접근하지 않고도 훌륭한 인터페이스 덕분에 간접경험으로도 편리하고 효율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컴퓨터의 본체와 모니터 안에는 수많은 부품이 있지만, 우리가 보는 것은 몇 개의 단추가 있는 본체와 외관과 모니터의 화면뿐이다. 그것을 인터페이스라고 한다. 우리의 삶과 사회에도 이 인터페이스가 있다. 갸륵한 마음으로 조국을 예찬하는 저 재미교포의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온갖 편의성의 이기들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고, 그가 보지 못하는 것은 그 인터페이스 너머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는 지하철 스크린 도어를 보지만 그 뒤에서 죽어가는 젊은 수리공은 그에게 보이지 않는다. 그 수리공을 간접화하고, 저 값싼 택시의 운전기사를 간접화할 때, 또 한편에서는 우리가 삶에서 겪어야 하는 모든 곤경이 간접화된다”(178쪽). 내가 매일 직면하는 경험의 최전선은 거의 인터페이스로 가려져 있다. 실제로 인터페이스 너머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게 만드는 일종의 차단막, 인터페이스로 우리는 직접 경험할 수 없게 간접화되고 있다.



“구의역의 젊은 수리공을 제 자식처럼 여기거나 여기려 한 사람들과 나향욱들의 차이는 위선자와 정직한 자의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과 갖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이며, 슬퍼할 줄도 기뻐할 줄도 아는 사람들과 가장 작은 감정까지 간접화된 사람들의 차이다”(179쪽). 견해의 차이가 아니라 상상력의 차이다. 견해 차이는 토론을 통해서, 논쟁과 타협, 협상과 공감을 통해서 좁힐 수 있지만 상상력의 차이는 태생적 문제라서 좁힐 수 없다. 토론을 거듭할수록 서로가 서로에게 이해될 수 없는 인식의 깊이와 넓이를 떠나 근원적인 사고방식의 차이를 절감할 뿐이다. 한 사람에게는 가슴으로 공감되는 뼈저린 아픔이지만 상대에게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억지 추측이나 궤변일 뿐이다. 견해의 차이로 좁혀지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상상력의 차이로 좁힐 수 없는 벽은 장벽을 넘어 절벽이며 절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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