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내가 만약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내가 만약 책을 읽지 않았다면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9쪽).”

파묵의 《새로운 인생》 첫 줄에 나오는 말이다.

이처럼 책 한 권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다.



책을 만나는 순간은

단순히 머리로 들어오는 정보와 지식과의 만남이 아니라  

저자의 메시지가 몸을 관통하며 

진저리를 치게 만든다.

책을 읽기 전과 읽은 후의 사이,

그 사이에 돌아갈 수 없는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책과 숙명적으로 만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양보할 수 없는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우연한 만남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책과는 우연히 만나야 합니다(70-71쪽).“

우찌다 다쓰루의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에 나오는 말입니다.



물론 누군가 추천해준 책을 통해 

깊은 감명과 인생의 깨달음이 

몸으로 각인되는 경우도 많다.

나의 경우 우연히 잡은 책 한 권으로 시작,

내 운명을 바꾸고, 삶을 뒤흔든 책은 

대부분 우연히 잡아든 책이었다.

그 책이 바꾼 사람과 삶의 짧은 역사를 돌이켜 반추해본다.


내가 만약 질풍노도의 시기에 

공고생이 사법고시 합격한 

《고시를 향한 집념》이나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 길을》과 같은

고시 체험수기집을 읽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도 평택이나 송탄 뒷골목에서 

음주와 가무를 즐기고 있었으리라.



내가 만약 고시공부를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고시 수험도서를 붙잡고 있었다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놓지 못하고

얼마나 지루한 인생을 살고 있을까.


내가 만약 카뮈의 

《이방인》이나 《시지프의 신화》를 읽지 않았다면

삶의 부조리에 항거하는 

반항정신을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내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나

《싯다르타》, 《수레바퀴 아래서》, 

《유리알의 유희》를 읽지 않았다면

한 인간이 세상의 유혹과 불의와 싸우면서 

자기다움을 실현하는 과정을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카프카의 《변신》을 읽지 않았다면

존재 이유를 상실하고 현실의 부조리 앞에 

대책 없이 무너질 때 대책을 찾지 못하고

여전히 방랑을 넘어 방탕생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만약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지 않았다면

탁월성의 본질과 전문가가 갖추어야 될 

미덕이 무엇인지를 모른 채

기능적 지식인의 기교와 재치가 전문성의 본질임을 

맹목적으로 신봉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만약 프로조프 카프라의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이나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을 읽지 않았다면

과학과 기술은 가치중립적이며 

세계는 부분의 집합적 산물이라는 환원론적 철학을

맹목적으로 신봉하면서 시스템적 사고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내가 그레고리 베이트슨의 

《마음의 생태학》을 읽지 않았다면

육체와 정신, 몸과 마음, 자연과 인간을 분리시키는

서구의 이분법적 패러다임에 물들어

생태학적 상상력과 감수성을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내가 Guba와 Lincoln의 

《자연주의적 탐구(Naturalistic Inquiry)》를 만나지 못했다면

세상을 실험실 상황에 몰아놓고 통제하면서

무조건 객관적으로 측정하고 이해하려는

실증주의적 패러다임에 사로잡혀 살고 있을 것이다.



내가 만약 영국의 경영철학자 Checkland의

 《Systems Thinking, Systems Practices》나

《Soft Systems Methodology in Action》을 우연히 만나지 않았다면

내가 만나는 세상의 모든 시스템을

부분으로 쪼개서 설명하는 파편화된 앎으로 

물들어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내가 만약 마이클 폴라니의 《개인적 지식》이나 

일본의 경영철학자 노나까 교수의 

《Knowledge Creating Company》나

《Enabling Knowledge Creation》을 읽지 않았다면

말로 다할 수 없는 암묵적 지식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관찰-측정 가능한 지식만 계량적으로 관리하려는 

발상에 물들어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내가 만약 미국의 MIT Schon 교수의 

《The Reflective Practitioner》나

《Educating Reflective Practitioner》를 읽지 않았다면

진정한 전문가와 전문가 육성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지식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려는 

미천한 발상에 물들어 지냈을 것이다.



내가 만약 캐나다의 헨리 민쯔버그(H. Mintzberg) 교수의 

《The Rise and Fall of Strategic Planning》이나

《Strategy Safari》를 읽지 않았다면 

전략경영이나 전략기획에서 말하는

전략의 허상과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만약 윤석철 교수의 

《프린시피아매니지멘타》나 《삶의 정도》를 읽지 않았다면

경영학의 본질과 핵심이 인간적 삶은 물론

자연과 우주의 본질과 맞닿아 있는

거대한 철학적 사유임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내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지 않았다면

관념적인 공부를 계속하면서 

스스로를 타성과 통념이 틀에 가둬놓고

몸으로 깨닫는 감각적 체험과 

자유로운 영혼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으리라.



만약 밀란 쿤테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지 못했다면

무거운 주제의 가벼운 선택과

가벼운 주제의 무거운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의사결정을 내려야 할지를 놓고

여전히 고민만 거듭하고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지 않았다면

넓은 세계를 직접 체험해보지 않고, 

골방에 틀어박혀 매달려온 학문적 탐구결과가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를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만약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을 읽지 않았다면

감각적 체험으로 깨닫는 삶의 지혜가

얼마나 소중한 지를 미처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만약 니체의 《아침놀》, 《우상의 황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지 않았다면

나다움의 본질이 무엇인지, 

신체적 욕망이 지향하는 커다란 이성의 깨달음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여전히 사회가 정한 도덕과 

관념의 덫에 빠져 지내고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를 읽지 않았다면

서구의 과학적 사고가 갖는 한계와

원시인의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의 사고가 갖는 

위력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과학적 사고만이 

참된 앎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착각하고 살았을 것이다.



만약 내가 푸코의 《광기의 역사》나 

《감시와 처벌》을 읽지 않았다면

정당화된 국가권력이나 기관의 정당성에 의문의 화살을 던지지 않고

그것이 지향하는 가치의 본질을 의심해보지도 않았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설명과 해석에 치중하는 관념적 철학에서

세계를 혁명하려는 푸코의 철학적 숙제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위르겐 하버마스의 《인식과 관심》을 읽지 않았다면

인식이 인간의 주관적 인식인 한

인간의 합목적적 관심에 따라 좌우되며

다시 그렇게 생긴 인식은 관심을 유발하는 

호혜적 관계임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만약 C. W, Mills의 《사회학적 상상력》을 읽지 않았다면

지적 장인으로서의 학자적 기질이 무엇인지

진정한 학자라면 어떤 사회학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탐구 대상을 파고들어야 하는지를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칠레의 인지 생물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의

 《있음에서 함으로》나 《앎의 나무》를 읽지 않았다면 

모든 생명체는 부단한 자기생산(Autopoesis)을 통해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는 자연 표류의 부산물이며,

사는 게 힘들고 지치지만 

우리는 모두 우발적 사건과의 마주침을 통해

끊임없이 변형시키는 예술가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 《천 개의 고원》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발적 접촉으로 새로운 창조를 거듭하는 리좀의 철학과

사건이 만드는 기호를 해석하는 과정이 

진정한 인간의 생각임을 깨우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만약 월북 철학자 윤노빈의

신생 철학을 만나지 못했다면 

“철학의 출발은 눈을 하는 명상이 아니라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운 고통이다”(p.105)이라는 서설과 

“철학은 서재 또는 강의 실안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눈물과 피와 땀과 한숨이 뒤범벅된 사람들의 생존 현장에서 탄생한다... 

철학은 철학적 안락의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햇볕이 내리 쪼이는 공사장에서, 

불꽃이 튀는 용광로 곁에서, 

거센 풍랑이 휩쓰는 바다 위에서, 

거머리가 꿈틀거리는 논바닥에서, 

검은 먼지가 가득 찬 갱 속에서, 

또는 어둡고 그늘진 뒷골목에서 써지고 있는 것, 

이것이 살아있는 철학이다.  

철학의 활자들이 기록되는 장소는 창백한 종이(tabula rasa)가 아니다.  

한숨과 고통이 철학의 종이이며 

눈물과 피가 철학의 잉크다”(p.106)라는 

철학자의 고통을 육화 시켜 써 내려간 한 철학자의 몸부림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만약 신영복 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강의》, 《담론》, 

《처음처럼》 등을 읽지 않았다면

인간과 세계는 거대한 관계망의 일부이자 산물이며

관계가 존재를 결정한다는 관계론적 사유의 틀을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만약 이홍우 교수의 

《교육의 목적과 난점》과 《교육과정탐구》 등을 읽지 않았다면

교육의 본질이 보이지 않는 것이 진리임을 깨우치는 데 있음을 

미처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돌이켜 보건대 이외에도 수많은 고전과

소설, 에세이와 산문집을 읽으며

내 생각의 씨줄이 형성되고 경험의 날줄과 합쳐지면서

오늘의 내 삶을 만들어 온 것이 아닐까.


“사람이 책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책이 사람을 고르는 것이다.”

영화 《허리케인 카터》에 나오는

대사 중의 한 마디가 시사하듯

나는 내가 선택해서 책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그런 책이 나의 절박한 문제의식과 위기의식을 감지하고

나에게 다가온 마주침일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사유는 어떤 책을 읽었는지가 아니라 

어떤 책을 읽지 않았는지에 달려있다(191쪽).”

박총의 《읽기의 말들》에 나오는 말이다.



나는 내가 읽은 책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다른 책을 읽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나의 몸으로 파고들지 못해서 

지금 나는 이런 수준이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모든 소멸은 불멸을 잉태하고 있다(172쪽).”

김기석 목사님의 《일상 순례자》에 나오는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모든 절망은 희망을 잉태하고 있으며

모든 실패는 성공을 잉태하고 있다.

모든 밤은 새벽을 잉태하고 있듯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곤경도 풍경을 잉태하고 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힘,

실패에서 성공을 배우는 방법,

곤경에서 풍경을 낳는 비밀도 

나는 그동안 책을 통해서 얻은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오늘도 아직 읽지 않은 책을 읽으며

이미 읽은 책과 접속을 시도하고 있다.

읽은 책과 읽지 않은 책이 만나면서

또 다른 나의 책이 탄생하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좁힐 수 있는 견해 차이, 좁힐 수 없는 상상력 차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