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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즐거운 피서(避暑)는 독서(讀書)다!

지식생태학자 유영만의 8가지 독서법:

가장 즐거운 피서(避暑)는 독서(讀書)!

세상에는 다양한 독서법이 있다. 저마다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독서법을 주장하는 책과 독서법을 별도로 강의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그 어떤 독서법도 책을 손에 들지 않고 시작하지 않는 독서법은 없다. 더 중요한 사실은 독서법 이전에 책을 읽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다. 내가 책을 읽어보겠다는 마음속의 위기의식이나 문제의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좋은 독서법도 약이 되지 않는다. 모든 독서법은 책을 읽으려고 마음먹은 사람에게는 유용한 가르침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내 삶을 옭아매는 또 다른 법에 불과하다. “읽기는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날 오후 강행군을 마치고 그늘에서 마시는 차가운 샘물과 같은 것이다. 책이 그렇게 읽히는 것이라면 반복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215쪽).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로 유명한 사사키 아타루의 다른 책, 《이 나날의 돌림노래》에 나오는 말이다. 폭염이 계속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들고 저자의 생각 속으로 빠져 내 삶을 돌이켜 성찰하는 독서(讀書)야 말로 가장 즐거운 피서(避暑)가 아닐까



①복독(復讀)은 반복해서 읽는 독서다. 여러 권 읽는 노력도 중요하지만 읽은 책을 여러 번 읽기는 더 의미심장하다. “두 번 읽기를 시행해보면 그 효력은 한 번 읽기의 두 배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 몇 배 더 큰 효력을 발휘한다. 나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한 열 배 정도의 효력이 있는 것 같다“(250쪽). 롤프 도벨리의 《불행피하기 기술》에 나오는 말이다. 어떤 일이든지 반복하지 않으면 경지에 이를 수 없다. 책도 마찬가지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저자가 쓴 책이라고 할지라도 한 문 장에 담긴 의미심장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복해서 읽어야 한다. 처음에는 읽어도 이해가 되지 않다가 반복해서 읽으면 의미가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반복해서 읽기의 놀라운 효과다. 주변에 보면 독서를 무슨 목표 달성하듯이 권수를 정해놓고 성과를 올리는 책읽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1년 목표 300권을 설정해놓고 미친 듯이 책을 읽는 경우다. 물론 많이 읽는 것이 무조건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여러 권 읽는다고 그 만큼 내 몸에 남는 게 많지 않은 경우도 많다. 읽는 행위 자체에 너무 신경을 쓰다 보니 정작 읽으면서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는 신경을 덜 쓰게 된다. “맹목적인 독서의 한없는 행보가 이어지는 어느 먼 훗날, 당신은 자신이 무언가를 잉태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것이 책의 힘이다“(215쪽). 사사키 아타루의 《이 나날의 돌림노래》에 나오는 말이다. 평범함 보행(步行)이지만 매일 반복하면 어느 순간 보행이 뒤집혀 일생일대의 혁명이 일어나는 행보(行步)가 된다. 읽기를 반복해야 되는 이유, 자신도 모르게 쌓이는 사고의 흔적과 주름, 사고방식의 혁명이 잉태되는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반복해서 읽는 책을 주변에 늘어놓고 시간이 날 때마다 읽어본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이 사람을 보라》를 비롯한 다수의 저작들, 신영복 교수님의 《강의》와 《담론》, 그리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 《처음처럼》 등 다수가 있다.



②습독(習讀)은 밥 먹듯이 습관적으로 읽는 독서다. 습관적으로 읽지 않으면 습관적으로 읽지 않는다. 습관은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 행위다. 밥을 먹을 때 대단한 결심을 하지 않고 먹는다. 밥 먹고 나서 양치질을 할 때도 “오늘은 내가 반드시 양치질을 하고야 말꺼야”라고 다짐하지 않는다. 그냥 거의 무의식적으로 반복한다. 반복해서 읽는 복독(復讀)을 하다보면 생기는 습관이 습독(習讀)이다. 습독(習讀)은 한 가지 책을 여러 번 읽는 복독(復讀)과 다르게 아무 책이나 습관적으로 읽는 독서다. 시간을 의도적으로 내서 책 읽는 시간을 따로 떼어놓고 읽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은 그게 습관이 된 것이다. 시간이 나면 책을 읽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보다 시간 날 때마다 자투리 시간이라도 아껴서 책을 읽을 때 책 읽는 습관이 자연스럽게 몸에 밴다. 다음에 읽겠다는 말은 다음에 시간이 나도 읽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말이다. 책 읽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지금 당장 여기서 읽는 것이다. 시간이 없어서 책을 못 읽겠다는 사람에게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책을 읽을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시간이 남아도 책을 읽지 않는다. 습관이 생기기 않았기 때문이다. 바빠서 책을 못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안 읽어서 바쁜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우리가 밥을 먹고 영양을 보충하듯이 바쁜 일상에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아무데서나 책 읽는 수불석권(手不釋卷)의 독서 습관을 만들어야 책을 읽을 수 있다. 밥 먹듯이 책을 읽지 않으면 습관이 생기지 않는다. 배가 고프면 습관적으로 음식을 먹듯이 뇌가 고프면 습관적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 그런데 배는 늘 고프지만 뇌는 늘 편안하다. 인간의 신체는 균형이 깨져야 균형을 맞추려는 의도적인 노력이 자생적으로 전개된다. 배가 고플 때 먹는 설렁탕이나 갈비탕처럼 뇌가 고플 때 먹는 음식은 뇌진탕이다. 뇌진탕은 뇌가 이전과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공급하는 모든 신선한 자극이다. 그 자극 중에 최고의 자극은 책을 통해 주는 자극이다. 뇌를 말랑말랑하게 선물(膳物)은 뇌물(腦物), 그 뇌물은 바로 책이다. 오늘도 뇌물을 습관적으로 먹는 사람은 뇌근육이 말랑말랑해질 것이다.



③정독(精讀)은 빨리 읽기보다 느리게 읽는 독서다. 정독(精讀)하지 않으면 해독(解讀)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을 만났다고 가정해보자. “내게 일어나는 우연을 내가 설계할 수 없지만, 타인에게 일어나는 우연은 내가 설계할 수 있다“(52-53쪽). 최인철 교수의 신간, 《굿 라이프: 내 삶을 바꾸는 심리학의 지혜》에 나오는 말이다. 이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곰곰히 생각해보지 않고 그냥 넘어가면 책을 읽어도 저자가 하려고 했던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놓치게 된다. 나는 우연은 무조건 계획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에게 다가오는 우연을 계획할 수 없지만 타자를 위해 우연을 설계할 수 있다는 문장을 만나는 순간 전두엽에 불이 켜지면서 잠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타자를 위해 우연을 설계해준다면 그 우연을 만나는 사람은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를 생각하면서 저자가 하고 싶었던 메시지의 의중을 반추해보는 정독의 즐거움을 맛보았다. 이처럼 우리는 타자의 낯선 생각과 부딪히는 아픔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내 생각의 온전한 자유를 얻을 수 없다. 여기서 타자는 나의 기존 생각을 불편하게 만들고 나로 하여금 이전과 다른 해석을 강요하면서 나를 생각하게 만드는 기호(sign)다. 《프루스트와 기호들》을 쓴 들뢰즈에 따르면 기호는 우리에게 사유하도록 강요하고 참된 것을 찾도록 강요한 힘을 갖고 있다고 한다. 책을 읽으면 낯선 기호들의 천국이다. 그 기호를 둘러싸고 있는 의미의 껍질을 깨부수면서 하나씩 내 삶의 현장으로 끌어내려 반추하고 성찰해본다. ”사람이 책을 읽으면서 자기가 읽는 대목의 의미를 알고 싶다면 오직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단단하든 부드럽든 단어들의 껍질들을 깨고, 그 단어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 응축되어 있는 의미가 자신의 가슴속에서 폭발하게끔 해야 하는 것이다. 작가의 기술이란 인간의 정수를 알파벳 문자들에 압축해 넣는 마술,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독자의 기술은 그 마술적 장치들을 열고 그 속에 갇혀 있는 뜨거운 불이나 부드러운 숨결을 느끼는 것이다“(128쪽).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국 기행》 에 나오는 말이다. 작가의 기술로 의미의 껍질 속에 감춰진 의미심장함으로 깨부수고 파고들어가는 독자의 기술이 만날 때 독서는 기술이 아니라 예술로 승화된 것이다. 



④체독(體讀)은 눈으로 읽는데 그치지 않고 읽은 내용을 삶에 적용하면서 실천하는 독서다. 정독이 앉아서 저자가 던져주는 메시지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를 파고들어 따져보는 독서라면 체독(體讀)은 깨달은 교훈적인 메시지를 내 삶에 직접 적용하면서 체험적 깨달음을 얻는 독서다. 체독(體讀)은 눈으로 읽으며 머리로 생각하는 독서를 넘어 손으로 밑줄 치면서 몸으로 실천하는 독서다. 독서는 저자의 생각이 담긴 책을 앉아서 읽는 행위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진정한 독서는 책에서 깨달은 교훈을 실제 내 삶에 적용해서 삶의 변화를 관찰하고 배울 때 일어난다. 깨어있는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게 바로 독서라는 것도 책을 읽고 생각만 깨우지 말고 정체되어 있는 내 삶을 흔들어 깨우라는 말이다. 묘계질서(妙契疾書)라는 말이다 있다. 묘계(妙契)는 책을 읽다가 퍼뜩 떠오른 깨달음이고, 질서(疾書)는 떠오른 생각이 도망가지 전에 붙잡아서 쓴다는 의미다. 읽을 때는 많은 공감과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책을 덮는 순간 남는 게 없다. 눈으로 읽고 머리로 생각해서 가슴으로 느꼈지만 떠올랐던 생각을 붙잡아 메모하지 않아서 다 휘발된 것이다. 머릿속에 저장된 기억은 휘발성이 강해서 믿을 것이 못된다.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다. 출처도 생각나지 않고 어디로 사라졌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손으로 메모하고 메모한 대로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내 것이 되지 않는다. 지나치면 나중에 중요한 메시지가 생각나도 붙잡을 수 없다. 누구나 메모(memo)하지만 그것이 곧바로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nemorable)으로 환산되지 않는다. 메모(memo)가 메모러블(memorable) 해지려면 메모(memo)에 내 생각과 느낌이 추가되어 의미 있게 재구조화 되어야 한다. 진짜 책읽기는 《정희진처럼 읽기》에 나오는 말처럼 “내 몸 전체가 책을 통과하는 것(19쪽)”이다. 책이 몸을 통과하면서 생긴 흔적이나 얼룩이 내 생각이나 체험과 뒤섞여 또 다른 책이 생긴다. 그 책은 내가 저자의 책을 읽으면서 내가 다시 쓴 책이다. 그래서 “모든 독자는 자기가 읽은 책의 저자”라고 알랭 드 보통이 말한 것이다. 



⑤찰독(察讀)은 책을 읽으면서 삶도 성찰하는 독서다. 신영복 교수님은 독서는 3독이라고 했다. 독서는 먼저 텍스트를 읽고 그다음 그것을 쓴 필자를 읽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책을 읽는 나를 읽는 것이다. 책을 읽는 것을 이렇게 세 번 읽는 것이다. 그 중에서 책을 읽은 나를 읽는 것이 내가 생각하기에 찰독(察讀)이라고 생각한다. 독서는 저자가 던져주는 메시지를 통해 나를 성찰하는 과정이다. 성찰 없는 독서는 오히려 독(毒)이 될 수 있다. 독서가 해독인 이유는 복잡했던 마음, 상처받은 마음을 저자의 메시지를 매개로 풀리거나 치유되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그때 독서는 단순히 책을 읽는 행위를 넘어서서 내 삶을 돌아보고 앞을 내다보며 지금 여기서의 삶을 성찰하는 자기 반성적 행동이다. 기형도 시인의 〈우리 동네 목사님〉이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 성경말씀에 밑줄을 긋고 기억하고 암송하지만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고 손발을 움직여 실제 삶에 적용하지 못하는 관념적인 신자들을 염두에 두고 쓴 말이다. 성경을 금언과 잠언처럼 머리로 알지만 그 앎이 가슴으로 내려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손발이 움직이는 현실의 삶으로 내려오지 않는다. 밑줄은 성경에도 쳐야 되지만 성경말씀대로 살아가면서 잘 되지 않는 부분, 실천하면서 깨닫고 내 삶이 바뀐 부분에 쳐야 된다. “성경에 밑줄을 긋는 것도 좋지만 성경이 당신 삶에 밑줄을 긋게 하라.” 헬렌 켈러가 한 말이다. 밑줄을 열심히 치면서 깨달은 앎으로 삶을 재단하고 평가하려는 관념적 지식인도 예외는 아니다. 진정한 지식인은 책에서 배운 앎으로 삶을 운운하지 않고 자기 생각으로 해석한 책대로 직접 실천하면서 몸으로 깨달은 삶으로 앎을 만들어간다. 그런 앎에는 용기와 신념과 철학과 열정이 철철 넘친다. 책을 열심히 읽고 밑줄을 치지만 책이 나를 먹어버렸다. 나는 없어지고 책이 내 안으로 들어와 나를 삼켜버리고 책이 주인행세를 시작한다. 책은 밑줄 치면서 읽었지만 읽은 책을 토대로 내 생각을 읽어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내 삶에 적용하며 체험적으로 몸에 각인된 깨달음에 밑줄을 치지 않았기에 책을 안 읽은 만도 못하다. 책에는 나와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도 많고 나와 다른 생각으로 다른 가능성의 문을 열어가는 사람도 많다. 자유는 타성에 젖어드는 생각을 깨부수고 주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힘을 가질 때 생긴다. 책을 읽는 이유도 자유를 얻기 위해서다. 다양한 저자의 체험적 깨달음의 세계에 진입해서 함부로 내 생각이 옳다라고 주장할 수 없는 상황도 생각보다 많다는 점을 깨닫기 위해서다. 책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도 책 밖으로 나와 주체적인 나를 생각하는 자유, 책을 읽되 책속으로 함몰되지 않고 그 의미를 저마다의 삶으로 재해석하는 힘에서 자유로운 생각의 씨앗이 발아되기 시작한다.



⑥고독(苦讀)은 나에게 약이 되는 독서다. 약은 쓰지만 몸에는 좋은 것처럼 내 생각에 쓴 약을 공급하는 독서가 바로 고독(苦讀)이다. 고독(苦讀)은 고독(孤獨)한 시간을 벗 삼아 편한 책만 읽기보다 불편한 책도 읽으면서 익숙한 생각에서 벗어나 낯선 생각을 잉태하는 독서다. 새로운 생각은 낯선 생각과 마주칠 때 비로소 잉태되고 탄생된다. 낯선 생각과의 마주침에 가장 좋은 자극제는 나와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책을 읽는 것이다. 책은 나에게 공감을 주는 감성적 자극제이기도 하지만 공감되지 않는 많은 불편한 생각을 품고 있는 창고이기도 하다. 읽는 순간 공감되는 책만 계속 읽으면 마음은 편안해지지만 낯선 생각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줄어든다. 공감이 안 되는 이유는 내가 체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와 살아온 배경이 다르고 공부한 분야도 달라서 나와 경험적으로 공통적인 부분이 적을 경우 공감대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책이 어렵게 다가오는 이유는 저자가 사용하는 개념이 어렵거나 주장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쉽게 알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우는 반복해서 읽고 저자가 하고 싶은 메시지의 진정한 의미와 의도가 무엇인지를 파고 들어가 깊이 생각해보고 반추해보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전자의 경우, 즉 개념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더 이상 책을 읽지 않고 덮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문장은 개념으로 지은 집이다. 그래서 니체는 꿀벌은 밀랍으로 집을 짓고 살지만 사람은 개념으로 집을 짓고 산다고 했다. 내가 어떤 개념으로 집을 짓고 사는지 모를 때 개념없는 인간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개념을 모르면 책을 안 읽고 책을 안 읽으니 개념이 더 없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은 방법은 모르는 개념이 나왔을 때는 다양한 참고 서적이나 사전을 찾아가면서 익히는 고독(苦讀)을 해야 한다. 



⑦월독(越讀)은 내가 좋아하거나 전공분야의 경계를 넘어 다른 분야의 책을 읽는 독서다. 이런 점에서 월독(越讀)은 기본적으로 고독(苦讀)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경계 안에서만 읽기보다 경계 밖의 책을 읽어야 내 전공분야의 편협한 시각을 넘어서는 초월적 생각을 할 수 있다. 일순간에 넘어서는 초월보다 땅바닥을 기어가면서 힘겹게 넘어서는 포월의 독서가 바로 월독(越讀)이다. 포월은 한 마디로 포복하면서 힘겹게 지금 여기서 저기로 넘어가는 사투다. 나는 교육공학자로서 사람이나 조직을 변화시키는 다양한 학문분야와 실천적 접근에 관심이 많다. 교육공학자라고 해서 교육과 교육공학 관련 전공 책만 읽으면 전공이 가져다주는 편협한 시각에 매몰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봉쇄될 수도 있다. 《지식생태학》이라는 책을 써서 생태학적 시각과 접근으로 지식창조 과정을 밝혀보고 거기서 얻은 깨달음으로 개인과 조직의 지식창조 원리를 밝혀보려는 간학문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또한 심리학 기반의 미시적 사고방식이나 행동변화를 추구하는 접근논리의 한계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역학이나 행동경제학을 공부해서 인간의 행동변화를 일으키는 사회환경적 차원을 밝혀보는 대안적인 관점을 찾아보고 있다. 사회역학은 인간의 질환은 개인적인 생물학적 또는 생리학적 문제라기보다 개인이 질병에 걸릴 수 밖에 없는 사회적 환경문제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본다. 행동경제학은 인간은 합리적이라는 전통 경제학적 가정을 부정하고 비합리적 선택을 통해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인간의 의사결정 과정과 방법을 연구함으로써 인간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열어가고 있다. 이처럼 한 가지 분야를 깊이 파는 독서도 중요하지만 일정 시점이 지나면 옆으로 퍼져나가는 독서를 통해 깊이가 갖고 있는 인식의 편협성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부단히 전개할 필요가 있다.


⑧협독(協讀)은 혼자 읽기보다 여럿이 함께 읽고 토론하는 독서다. 책을 읽으며 내 생각을 키우는 한 가지 방법은 혼자 책을 읽는 고독(孤讀)에서 벗어나 함께 읽는 협독(協讀)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독서의 완성은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가 아니라 책을 읽으며 메모한 다음 그 내용을 갖고 다른 사람과 함께 토론할 때다. 독서는 그래서 함께 읽는 협독(協讀)이다. 혼자 읽으며 생각한 내용과 다른 사람이 읽으면서 깨달은 내용이 융합될 때 책은 한 권의 책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책은 한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혁명적 촉진제이자 위험한 생각을 품은 사람들의 비밀결사를 구성한다. 한권의 책을 혼자 읽고 생각하면 내 생각을 능가하는 새로운 해석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하지만 같은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에 가서 각자 읽으면서 가슴에 와 닿았던 메시지나 느낀 점을 공유해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미처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색다른 생각으로 저자의 메시지를 다르게 해석하는 다른 사람의 독후감을 만나면 “아 저렇게도 생각할 수도 있구나”라고 깨달을 수 있다. 같은 책을 같이 읽었는데 책을 읽고 느낀 점과 자신이 얻은 가치는 천차만별이다. 자신이 얻은 가치를 같이 토론하는 가운데 저자가 생각했던 의도나 의지를 넘어 다른 관점과 방식으로도 해석해낼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음을 독서토론을 통해서 찾아낼 수 있다. 책은 저자가 체험적 깨달음으로 쓴 새로운 사고의 보고(寶庫)이기도 하지만 저자의 관점으로 해석한 편견(偏見)의 산물일 수도 있다. 편견은 또 다른 편견과 만나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의견(意見)으로 거듭날 수 있다. 편견도 의심해볼만한 의견(疑見)일 수 있지만 다양한 사람들의 주관적인 의견이 교감되면서 공감할 수 있는 의견(意見)으로 거듭날 수 있다. 독서 토론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가치는 혼자 읽고 생각해낼 수 없는 수많은 편견과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독서토론을 통해 다양한 편견이 충돌하면서 의견이 만들어지고 저자의 의견을 확대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을 만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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