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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와 톨스토이도 몰랐던  
10대 글쓰기 비밀 기술

일상에서 비상하는 글쓰기의 10가지 비밀 병기

일상에서 비상하는 글쓰기의 10가지 비밀 병기

괴테와 톨스토이도 몰랐던 10대 글쓰기 비밀 기술


글쓰기는 세탁기다; 세탁기는 청소기다

 세탁기로 빨래하듯, 청소기로 고정관념을 청소하듯 글을 쓴다


작가는 쓰레기 더미에서도 쓸 이야기를 찾아내는 발견의 전문가다. 남들은 버리고 싶어서 쓰레기장에 버렸지만, 작가에게는 버려진 쓰레기도 영감을 자극하는 글감의 원료다. 쓸모가 있느냐 없느냐의 판단은 어떤 의도와 목적의식으로 누가 판단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의사결정에 따라 이루어진다. 쓸모없음이 쓸모 있음이다. 즉 무용지용(無用之用)이다. 글쓰기는 쓸 모 없다고 버려진 세계를 남다른 시각으로 조명하는 낯설게 보기의 일환이다. 글쓰기는 기존의 시각으로 보면 쓰레기지만 기존 생각의 때를 벗겨내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면 색다른 영감의 원천지나 근원지로 전환시키는 일종의 세탁기다. 더러운 옷이 세탁기를 통해 깨끗해지듯, 글쓰기는 생각의 각질을 벗겨내고 윤기 나는 생각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드는 일종의 변신술이다. 세탁기는 이런 점에서 고정관념을 깨끗하게 털어내는 청소기다. 글쓰기는 세상 사람들의 시선이 비껴간 곳, 많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곳,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곳을 남다른 애정과 관심으로 찾아가 들여다보고 파헤치며 세상 밖으로 드러내기다. 글쓰기는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 밑바닥을 치고 일어서려는 발버둥과 몸부림을 그대로 들어내는 일이며, 소외된 곳을 찾아가 희망의 불빛으로 담아내는 이야기다. 쓰레기라고 버려진 곳을 이야기의 텃밭으로 재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생각 세탁 샴푸로 틀에 박힌 생각을 헹궈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생각 세탁을 자주 해야 틀에 박힌 타성을 털어내고 탄성을 지르게 만들 수 있다. 세탁기를 거쳐서 탄생한 글은 일상의 고정관념이나 타성을 깨끗하게 털어낸 청소기로 청소한 깨끗한 방처럼 청명한 느낌을 준다.



글쓰기는 소나기다; 소나기는 갑자기다

소나기가 예고 없이 내리듯 영감이 오는 순간 갑자기 쓴다


내가 원하는 ‘자기’는 ‘갑자기’ 온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은 어느 날 갑자기 영감을 머금고 달려온다. 갑자기 달려온 자기가 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멀리서 볼 때는 마음에 들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내가 싫어하는 단점이나 약점 투성인 경우도 있다. 영감(inspiration)은 땀(perspiration의 결과다. 성공하는 사람은 땀을 흘리지 침을 흘리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심금을 울리는 작가는 영감을 얻기 위해 책상에서 오랫동안 생각만 하지 않는다. 이전과 다른 생각을 얻기 위해 낯선 곳에서의 아침을 자주 맞이한다. 생각의 발로는 발로부터 나오듯, 색다른 영감 역시 발로 뛰면서 땀을 흘릴 때 갑자기 다가온다. 언제 소나기가 올지 기상관측을 통해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갑자기 쏟아지는 예측불허의 소나기도 자주 만난다. 특히 산행을 하다 보면 맑은 날 출발했지만 산 중턱에서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면서 소나기도 내리고 갑자기 우박도 쏟아질 때가 있다. 글감도 마찬가지다. 언제 나를 급습할지 모른다. 목욕하는 와중에 꼬였던 아이디어가 실타래처럼 풀리면서 갑자기 밝은 서광이 미소 지으며 내 곁으로 다가올 때도 있다. 막히는 도로에서 앞차를 바라보다 먼 산을 바꿔가며 바라보다 갑자기 터지는 영감님의 목소리를 디지털 녹음기로 붙잡아놓기도 한다. 분명한 사실은 땀을 흘리지 않고 앉아서 침을 흘리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아이디어도 흘리지 않는다. 부단한 육체노동과 발품을 팔아서 곳곳을 누비며 고단한 노력을 반복하는 사람 앞에 정전기(靜電氣)가 일어나듯 어느 날 갑자기 전광석화(電光石火) 같은 영감의 선물을 던져 놓는다.



글쓰기는 사진기다; 사진기는 찌르기다

마음에 드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마음에 새기듯, 익숙한 세상을 낯설게 쓴다


글쓰기는 사건과 사고 중에서 기억하고 싶은 특정 장면을 포착해서 영원한 추억으로 간직하려는 몸부림이다. 모든 사진은 사심(邪心)이 담긴 사기(詐欺)일 수 있다. 사진은 무수히 많은 현상 중에서 특정 장면에 주목, 그 부분만 집중적으로 부각하려는 작가의 불순한 의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다른 각도에서 사진을 바라보면 내가 담고 싶은 특정 장면을 포착, 거기에 나의 주관과 의도를 반영해서 포착해낸 창작이기도 하다. 결정적인 순간, 삶의 모든 순간은 글쓰기의 재료이자 영감을 부르는 글감이다. 결정적인 순간은 세상과 주변에 널려 있다. 누가 어떤 눈으로 익숙한 세상을 낯선 생각의 씨앗을 품은 호기심의 대상으로 포착하느냐의 문제다. “평생 삶의 결정적 순간을 찍으려 발버둥 쳤으나 삶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프랑스 사진작가,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의 말이다. 매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이다. 글 쓰는 사람은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다. 하찮고 사소한 일은 없다. 틀에 박힌 익숙한 일상을 얼마나 낯선 시각으로 포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생각의 씨앗을 품은 글이 탄생될 수 있다. 롤랑 바르트가 《밝은 방》에서 말하는 것처럼 틀에 박힌 스투디움(studium) 방식의 사진이 아니라 사진 속의 특정 이미지가 느닷없이 나에게 달려와 깊은 상처를 남기는 푼크툼(punctum)처럼 말이다. 스투디움은 작품을 보는 사람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누구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공유되는 길들여진 감정이다. 이에 반해 푼크툼은 ‘작은 구멍’ 혹은 뾰족한 물체에 찔려 입은 부상‘이란 뜻으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화살같이 날아와 폐부를 찌르는 낯선 자극이자 상처다. 익숙한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푼크툼의 세계로 보인다. 글쓰기는 스투디움의 세계에서 푼크툼의 세계로 진입하는 안간힘이다.



글쓰기는 수화기다; 수화기는 청진기다

세상의 아우성을 수화기로 귀담아들으면서 청진기로 진찰하듯 글을 쓴다


글쓰기는 내가 쓰고 싶은 말을 혼자 중얼거리는 독백이 아니다. 오히려 글쓰기는 세상이 나에게 들려주고 싶은 화제가 무엇인지를 귀를 기울여 들어보며 상기(想起)하는 이야기다. 쓰기 이전에 듣기나 읽기가 먼저다. 많이 들어본 사람이 많이 쓸 수 있고 많이 읽어본 사람이 이전과 다르게 쓸 수 있다. 글쓰기는 토해내기 이전에 귀담아듣기이자 눈여겨보고 색다르게 읽기다. 귀담아 듣는 사람은 듣는 가운데 현상이나 대상에 대한 상상력을 발동시킨다. 눈여겨보는 사람은 어제와 다른 관점을 세상을 들여다본다. 깊이 세상을 읽어내고 책을 남다르게 읽어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도 색다르게 읽어낼 수 있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은 상상하기 어렵다. 내가 들을 수 있는 한계도 내가 해석할 수 있는 경험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글쓰기는 스스로에게 귀를 기울여 무엇을 쓰고 싶은지를 귀담아 들어보며 문장으로 담아내는 애쓰기다. 글쓰기는 쓰기 이전에 귀 기울이기가 먼저다. 많은 들어본 사람이 남과 다르게 말할 수 있다. 쓰기도 말하기 이전에 듣기와 같은 맥락이다. 쓰기 이전에 내가 뭘 쓰고 싶은지 열린 마음으로 들어봐야 한다. 내가 뭘 쓰고 싶은지 잘 듣지 못하면 쓰기는 정말 쓰다. 글쓰기 전에 수화기로 세상의 아우성을 잘 들어봐야 할 이유다. 수화기의 질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청진기(聽診器)로 상대의 마음속 꿈틀거림을 잘 들어봐야 한다. 귀담아듣다 보면 내 글에 무엇을 담아내야 할 지 어렴풋하게나마 짐작이 오고 그 순간이 바로 작품이 잉태되는 순간이다.



글쓰기는 보자기다; 보자기 는 감싸기다

보자기로 타자의 아픔을 감싸 안 듯 측은지심으로 어루만지며 글을 쓴다


글쓰기는 자신의 아픔을 감싸 안아주는 돌봄이자 보살핌이며 타자의 슬픔도 위로해주는 마사지다. 글쓰기는 가방처럼 내 입장을 일방적으로 표명한 다음 타자로 하여금 내 입장에 맞춰서 가방 속으로 들어오라는 일방향적 호소나 절규가 아니다. 오히려 글쓰기는 글을 쓰면서 내가 겪은 아픔은 물론 타자가 직면한 고통을 덮어 씌워주며 어루만지고 위로해주는 보듬어주기다. 보자기는 철저하게 타자 지향적이다. 보자기는 가방과 다르게 내가 중심에 서 있지 않고 타자를 중심에 세우고 자세를 낮추며 품어주는 미덕의 상징이다. 글쓰기는 쓰는 과정에서 겪는 힘든 고통을 감내했을 때 어느 순간 찾아드는 희열감 덕분에 힘들어도 또다시 도전하는 마약과도 같은 유인체제가 있다. 보자기는 펼치면 밥상을 덮어 씌우는 덮개가 되고, 책과 필기구를 집어넣고 둘러싸면 책보자기가 된다. 머리에 두르기도 하고 허리둘레를 묶어주는 벨트로도 쓰일 수 있다. “가방에 집어넣다”는 표현처럼 가방은 “동사가 집어넣다”는 표현밖에 없지만 보자기는 싸다, 덮다, 둘러메다 처럼 무한 변신이 가능하다. 가방이 자기중심적인 데 반해 보자기는 타자 중심적이다. 가방형 글쓰기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무조건 써 놓고 읽고 싶은 사람은 읽으라고 호통을 치는 갑의 글쓰기다. 반면에 보자기형 글쓰기는 측은지심과 역지사지로 타자의 아픔을 감지하고 그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건드려주는 을의 글쓰기다. 글은 자기 내면의 아픔으로 토해냄으로써 위로받는 자기 치유를 목적으로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 글이 다른 사람의 심장을 박동시키지 못하면 허공을 향해 소리치는 외로운 함성에 지나지 않는다. 글쓰기는 보자기처럼 세상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감싸기다.



글쓰기는 생채기다; 생채기는 각성기다

내가 받은 상처처럼 내 생각에 생채기를 내면서 각성하는 글을 쓴다


상처(傷處)는 도처(到處)에 있다. 정처(定處) 없이 떠 돌 때는 부처가 던져주는 인연도 들리지 않았다. 세상은 나 혼자라고 생각했고 슬픔과 아픔도 모두 내 것이라고 생각했다. 긴 방황 끝에 찾은 익숙한 근처(近處)라 안심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부딪힘, 느닷없는 마주침으로 다시 상처(傷處) 하나 생겼다. 어제 생긴 상처에 미처 대처(對處)하기도 전에 오늘 또 다른 상처가 온몸을 휘감는다. 상처 받은 삶을 온몸으로 그리며 그림 속에 아픈 과거를 송두리째 드러낸 화가, 프리다 칼로의 '상처받은 사슴'을 보면 섬뜩한 기분이 들다가도 저 사슴이 바로 힘든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라고 생각하면 왠지 모를 위안도 받는다. 상처가 외로운 아픔이지만 겉으로 드러내 놓고 공감할 때 설명할 수 없는 공명(共鳴)의 장이 마련된다. 글쓰기가 그렇다. 저마다 겪은 인생의 아픔과 슬픔을 힘들게 쓰면서 독백하지만 그 글을 누군가 읽어주거나 같이 읽어 가면 자신도 모르게 위안을 받고 희망과 용기를 얻기고 한다. 상처를 드러내는 쓰기는 정말 쓰기 어렵다. 사르트르가 이야기하는 지옥으로 생각되는 타자의 눈이 두려워서이고 발가벗긴 나의 모습을 뒷수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상처의 깊이가 내 삶의 깊이가 될 때까지 참고 견디며 의도적으로 지우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 있지만, 몇몇은 별을 바라보고 있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다. 시궁창이라는 상황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삶의 현장보다 삶의 현장에서 일하는 내 생각이다. 글쓰기는 살아가면서 받은 상처를 드러내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의도적으로 멀쩡한 생각에 시비를 걸어 생채기를 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내 생각은 각성하고 다시 태어난다. 생채기를 만드는 시기는 그래서 각성기다.  



글쓰기는 본보기다; 본보기는 돋보기다

본보기로 보여주듯 돋보기로 디테일을 드러내면서 글을 쓴다


본보기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세 가지 의미로 나온다. 첫째, 본을 받을 만한 대상. 둘째, 어떤 사실을 설명하거나 증명하기 위하여 내세워 보이는 대표적인 것. 셋째, 어떤 조치를 취하기 위하여 대표로 내세워 보이는 것. 이걸 글쓰기에 대입해보면 첫째, 글쓰기는 내 삶을 드러내서 세상에 알리는 용기 있는 고백이다. 글을 통해 내가 다른 사람에게 본을 받을 만한 대상으로 드러낼 수도 있다. 나의 경험과 체험적 교훈이 다른 사람의 삶에 한 가지 좌표나 이정표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험의 일반화는 어려울 수도 있지만 비슷한 상황에서 의사결정을 할 때 필요한 지침이나 처방전으로 작용한다. 글은 자신의 경험으로 깨달은 특수한 일리를 다른 사람에게도 비슷한 깨달음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글쓰기는 본보기기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본보기는 글쓰기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글쓰기는 객관적 사실에 나의 주관적 해석을 담아내는 과정이다. 다양한 사례를 들어 예시로 보여주기도 하고 복잡한 생각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단적인 예를 대표로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이라는 말은 다양한 차이가 존재하고 저마다의 개성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집단의 가장 공통적인 특징을 대변한다는 말이다. 글쓰기는 나의 구체적인 경험을 일반화시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과정이다. 나아가 글쓰기는 가장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경험이나 사례를 통해 한 사람의 평범한 삶의 단명을 본보기로 드러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내가 놓여 있는 특수한 상황을 돋보기로 확대해서 들여다보면 다른 상황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전형적인 장면이나 현상도 보인다. 글쓰기는 돋보기로 일상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서 본보기로 내세울 만한 특징을 찾아서 보여주는 드러내기다.



글쓰기는 도자기다; 도자기는 만지기다

도자기를 만지면서 자기의 특성을 드러내듯 글도 매만지면서 완성해나간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세상을 향해 질문의 그물을 던지지 이전에 나에게 던져야 한다. 세상이 원하는 내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세상을 알기 위해서는 내면으로 향하는 질문의 마중물을 집어넣어야 잠자고 있는 가능성의 실체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세상의 모든 도자기 역시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도자의 색깔과 스타일을 결정한 다음 지난(至難)한 공정을 거쳐 특유의 자태와 멋을 품은 도자기가 탄생된다. 원하는 칼라와 스타일을 결정하는 과정은 길고 까다로우며 세심한 주의가 집중되는 과정이다. 특히 도자기 원형을 만들어 불가마에 집어넣기 전에 오랜 시간 반복해서 회전시켜 도자기의 우아한 자태를 수려한 곡선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한두 번에 완성되지 않고 돌아가는 회전 속도와 각도, 손으로 만지는 강도와 접촉의 방향의 미묘한 차이가 절묘한 곡선미를 완성하는 과정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로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에 비유할 수 있다. 글을 쓰기 전에 글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의 색깔과 스타일을 결정하고 여기에 맞는 주제나 소재를 찾아서 오랫동안 쓰고 또 쓰면서 다듬고 어루만져주어야 한다. 자기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도공의 부주의나 실수로 본래의 자기를 드러내지 못하는 도자기 형태로 드러나면 과감하게 깨뜨리고 다시 원형을 제작한다. 마찬가지로 글쓰기도 작가가 본래 의도했던 메시지 칼라나 스타일이 드러나지 않으면 지우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적당한 수정이나 개정보다 지우개로 싹 지운 다음 새로운 도화지에 작품의 성격과 방향을 구상한 다음 다시 쓰기 시작해야 한다. 도자기(陶瓷器)는 제2의 자기(自己)이자 자기(自記)다. 도자기는 특유의 칼라와 스타일을 드러내는 자기(自己)이자 자신의 탄생과정이 고스란히 몸에 기록된 자기(自記)이기도 하다. 도자기는 도공의 철학과 혼이 손으로 전달되어 절묘한 만지기 기술로 완성된 자기(瓷器)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로 초고로 완벽한 작품을 완성하는 번갯불에 콩 구워 먹기가 아니다. 오히려 글쓰기는 진심과 정성을 담아 쓴 글을 만지면서 수정하고 탈고하면서 해탈의 과정에 이르는 자기 수련이다.  



글쓰기는 뚝배기다; 뚝배기는 견디기다

뚝배기에 담긴 글감이 열기를 견디듯 다양한 재료를 뒤섞어 숙성하면서 글을 쓴다


글쓰기는 글과 쓰기의 합작품이다. 글이 써지려면 글감이 일정기간 숙성되어야 한다. 뚝배기는 일정기간 열을 가하는 동안 서서히 뜨거워지고 한 번 뜨거워지면 오랫동안 뜨거움을 품고 유지하려는 속성을 지닌다. 글감을 통해 어떻게 글을 쓸 것인지 영감을 받으려면 글의 다양한 재료들을 뚝배기 안에 집어넣고 열을 가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침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뚝배기 안에는 내가 읽었던 책, 우연히 봤지만 깊은 감동의 여운이 남아 있는 영화, 누군가 만나서 나도 모르게 깊은 대화를 하면서 흠뻑 빠져들었던 어떤 사람과의 마주침, 친구들과 작심하고 떠난 여행이었지만 계획에도 없던 낯선 곳에서 만나 아름다운 풍광 등이 모두 뚝배기 안에서 글감으로 탄생하기 위해 열을 견디면서 화학적으로 융합되는 영감의 원천들이다. 윌리엄 워즈워스의 《서곡》에서 말한 시간의 점(spot of time)처럼 내 몸에 각인된 세월의 흔적, 직간접적인 경험의 총체가 뚝배기에서 숙성되면서 한 사람의 성장과 성숙과정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글은 사람이 성장하고 성숙하면서 겪은 숱한 사건과 사고의 흔적과 얼룩을 언어로 전환시키거나 특정한 개념으로 번역해내는 과정이다. 많은 책을 읽었고, 산전수전 숱한 체험을 해봤지만 여전히 입에서만 감돌고 겉으로 표현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적확한 언어가 없어서도 그렇겠지만 아직 영감을 불러일으킬만한 글감으로 숙성되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쓰고 싶은 주제와 관련된 가용한 자원을 모두 뚝배기에 집어넣고 서서히 열을 가하면서 뚝배기 속의 다양한 자료나 재료들과 얽히고설킨 나와의 사연을 생각하며 생각의 뜸을 들여 보자.



글쓰기는 전투기다; 전투기는 버티기다

전투기처럼 버티듯이 고통을 자기 방식으로 해석하면서 글을 쓴다


글쓰기는 시작부터 끝까지 전쟁이다. 글쓰기는 쓸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싸우는 치밀한 밀당이며, 어느 정도 치부를 드러낼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고뇌하는 눈치작전이다. 글쓰기는 어떤 단어를 사용해서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를 놓고 하루 종일 단어 선택을 두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사투다.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를 두고 그 차이점에 대해 하루 종일 사투를 벌였던 김훈 작가처럼, 모든 작가는 생각의 특이함을 적확하게 묘사하거나 표현하는 단어 선택을 놓고 처절한 싸움을 벌인다. 그렇게 완성한 한 문장이 다행스럽게 다음 문장을 불러오면서 서서히 글의 윤곽을 잡아간다. 글쓰기는 전쟁과 같은 삶 자체를 글감으로 포착해서 혼자 겪은 체험적 각성과 교훈을 다른 사람에게 노출시키는 위험한 결단이기도 하다. 살아오면서 직면했던 진퇴양난의 딜레마 상황에서 어떻게 탈출했는지, 시시각각 찾아오는 위기상황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독백처럼 쏟아낸다. 하지만 결국 글에 담긴 나만의 사투의 흔적을 누군가가 보면서 독자와 저자는 어디선가 다시 만나 사유의 악수를 나눈다. 전쟁과 같은 삶을 녹여내는 글쓰기도 전쟁이다. 전쟁 같은 삶이 곧 전쟁 같은 글쓰기의 원료로 작용한다. 버틸 수 없는 상황에서도 힘겹게 버텨낼 때 인생의 버팀목도 생긴다. 그 버팀목이야말로 바로 전쟁 같은 글쓰기를 지탱하는 디딤돌이다. 글쓰기 전투를 시작하려면 전쟁 같은 삶을 살아본 체험이 있어야 한다.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기만의 삶은 자신의 고유한 생각과 언어로 번역해내는 지난한 고통의 과정, 즉 글쓰기를 통해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 “모든 고통은 해석된 고통”이라고 니체가 말했듯이 내가 살아온 삶과 살아갈 삶을 내가 어떻게 해석해내느냐에 따라서 나의 삶은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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