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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는 저물어가고
사제관계는 여물어가고

애정 하는 박사 제자들과의 앓음다운 만남을 보낸 후에

한 해는 저물어가고 사제관계는 여물어가고

애정하는 박사 제자들과의 앓음다운 만남을 보낸 후에     


한 해가 저물기 전에 만나는 모임이 많다. 대부분의 모임은 이제 가지 않고 그리움에 눈물겨운 몇 개의 만남만으로 한 해의 인간관계를 돌이켜 본다. 그중에 가슴 저미는 만남으로 그리움을 나누는 눈물겨운 만남이 있다. 나와 10년 넘게 공부하는 박사 제자들과의 만남이다. 어제는 그 모임을 집사람의 배려로 집에서 뜻깊은 모임을 가졌다. 모임에서 우리 모두는 한 해를 살아오면서 마음속에 간직한 생각 조각을 모아서 숨 가쁘게 달려온 한 해를 한 순간씩 드러내서 의미를 곱씹어보았다.     



다짐이 많으면 짐이 된다     



자기 몸무게를 견디며 무겁게 걸린 달력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자신의 몸무게를 가볍게 털어낸다. 12월에 이르면 더 이상 자신의 뒤를 받치고 있는 다른 그 무엇도 없을 달력도 깨닫는 모양이다. 그때부터 달력은 연말이 주는 다급함과 조급함에 휩싸여 몸을 떨기 시작한다.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며 숨 가쁘게 달려온 한 해를 애써 태연하게 되뇌어 본다. 하려고 했던 수많은 일, 하기고 결심하고 먹었던 수많은 다짐은 점차 더 무거운 짐으로 다가온다. 필요 이상으로 기대를 걸고 결심했던 많은 일들이 허사로 드러나면서 마지막 남은 달력은 허약한 자신의 마음가짐을 한탄하기도 한다. 벽에 걸린 12월 달력 한 장은 한 해를 살면서 온몸으로 겪은 희로애락의 인간사가 농축되어 마지막 몸부림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벽에 붙어 홀로 외로운 밤을 보낸 12월 달력을 바라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은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것도 12월이 주는 의미다. 힘든 일도 겪으며 한 해를 마무리하고 있지만 그리운 사람 생각하며 눈물짓는 경우도 많았다는 고정희 시인의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는 시가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길을 가다가 불현 듯/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연말에는 평소에 연락이 없다가도 갑자기 소식을 전해오는 사람이 많다. 평소에는 잊고 지내다가 올해가 다 가기 전에 그리운 얼굴이라도 봐야 힘든 한 해를 위로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용기를 내보는 것이다. 수많은 모임이 줄을 잇고 시끌벅적하고 왁자지껄한 모임이 이어지지만 모임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는 언제나 쓸쓸함과 허전함이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는다. 연말에 만나는 망년과 송년을 만나 누구나 보내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보내기보다 평소 돈독한 관계로 인간적 배려와 존중을 나누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보내며 새로운 여인, 신년을 맞이하는 게 몸과 맘의 건강에도 좋다. 물리적으로 정해진 객관적인 크로노스의 시간을 아무리 보내도 나에게 꽂히는 의미심장함은 없다. 하지만 똑같은 시간을 보내도 주관적 안녕감을 느끼면서 행복한 관계를 맺어가며 내가 살아간다는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깨닫는 카이로스의 시간은 인간 존재와 인간관계를 언제나 다르게 보고 깨닫게 만드는 소중한 순간의 흐름이다. 연말 모임을 최소화시키고 다수와 떠들며 크로노스의 시간을 보내기보다 소수와 어울리며 카이로스의 시간을 보내는 길이 한 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소중한 마음 자세다.  

   


가랑잎에서 따스함과 너그러움을 배우다     


카이로스가 아니라 크로노스의 시간을 보낼수록 관계는 작은 무관심으로 틀어지고 경계로 돌변하기 시작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상대는 세심한 배려 부족으로 상심할 수도 있다. 관계가 넘을 수 없는 경계로 바뀌기 전에 한 해 동안 내가 만난 사람, 그들에게 무의식 중에 했던 언행을 되짚어보면서 관계 속에서 성장했던 한 인간의 면모를 성찰하는 시간이야말로 인간이 사람으로 거듭나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성공은 혼자 이룬 독창성의 산물이 아니라 함께 성장하면서 이룬 사회적 합작품이다. 나는 전적으로 내가 만나는 사람의 도움으로 힘든 세상을 헤쳐나가는 지혜를 배운다. 내가 만난 사람, 그들과 함께 한 시간, 그리고 함께 일했던 공간 속에서 내 몸에 새겨진 카이로스의 흔적과 얼룩을 만나본다.      


‘가랑잎의 몸무게’라는 신형건의 시가 있다.     


가랑잎의 몸무게를 저울에 달면

'따스함'이라고 씌어진 눈금에

바늘이 머무를 것 같다.


그 따스한 몸무게 아래엔     

잠자는 풀벌레 풀벌레 풀벌레…

꿈꾸는 풀씨 풀씨 풀씨…


제 몸을 갉아먹던 벌레까지도

포근히 감싸 주는

가랑잎의 몸무게를 저울에 달면

이번엔

'너그러움'이라고 씌어진 눈금에

바늘이 머무를 것 같다.    

 


흩날리는 가랑잎으로 보고도 따스함과 너그러움을 읽어내는 시인의 상상력은 역시 놀라움 그 자체다. 자신은 흩날리는 바람을 맞아가면서도 자신의 밑에서 온기라도 느끼며 몸을 보호하려는 풀벌레를 위해 기꺼이 자기 몸을 내준다. 가랑잎은 따스함만 갖고 있지 않다. 배고파서 자기 몸을 갉아먹은 풀벌레까지도 포근하게 품고 감싸 안아주려는 가랑잎의 살신성인 정신에는 너그러운 관용의 미덕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한 해가 저물어가면서 추운 겨울, 정처 없이 떠도는 쓸쓸한 낙엽에게서 배우는 따뜻하고 포근한 인간관계의 미덕을 배운다. 혹한의 추위와 심한 눈보라가 몰아치더라도 스크럼을 짜고 돌면서 서로의 체온으로 한겨울을 견뎌내는 펭귄을 본 적이 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방향에 서 있는 펭귄들은 주기적으로 회전하면서 동료들을 추위에서 잠시 동안만이라도 보호해주려는 눈물겨운 사투가 아닐 수 없다. 내가 누리는 작은 행복은 누군가 덕분에 누리는 고마운 산물이다.     


인간적 삶의 질은 인간관계의 질에 좌우된다     


매년 만나는 제자들이지만 나와 같이 힘든 시기를 견뎌내고 공부라는 끈으로 동고동락하면서 맺어온 그들과의 인간관계는 각별하다. 인간적 삶의 질은 인간관계의 질에 좌우된다. 특히 대학원 박사 제자들과의 만남은 이제 단순히 사제간의 관계를 넘어서 함께 배우고 나누며 한 세상을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파트너들이다. 저마다의 위치에서 각자의 관심과 인식으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고 전문성을 발휘하며 자신의 영역에서 튼실한 자리를 만들어간다. 배경과 맥락은 다르지만 배움을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몸으로 부딪히며 닦아나간다는 점에서 우리는 관심과 인식을 같이 한다. 우리는 단순한 앎의 공동체가 아니라 행동을 통해 사람과 사람 관계를 바꾸고 어제와 다른 세상을 꿈꾸고 변화시켜나가는 실천 공동체다. 우리는 앎으로 삶을 재단하거나 평가하는 지행일치의 관념적 공부를 거부라고 몸으로 실천하며 삶으로 앎을 체화시켜나가는 지행합일의 공동체다. 생각의 교집합과 주관의 교류를 추구하는 간주관적인 앎을 넘어 저마다의 위치에서 몸으로 실천해본 깨달음의 결과를 나누고 공감하는 간신체적(間身體的) 앎을 추구한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전쟁터는 다르지만 배움의 끈을 놓지 않고 늘 반복되는 일상에서도 비상하는 상상력을 배우고, 그 상상력으로 나보다 힘든 위치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현장에 직접 나가서 현실을 만나고 몸으로 터득한 앎을 실천하면서 저마다가 품고 있는 진심을 진실로 구현해낸다. 단순한 객관적 사실(事實)은 없다. 모든 사실은 해석된 사실(私實) 일뿐이다. 나의 편견과 선입견이 반영된 의견(疑見)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오랜 기간의 실천과 연대 속에서 생긴 집단적 신념의 산물이라면 무시할 수 없는 진실로 판명된다. 한 사람의 외로운 주장과 주의가 아니라 여러 사람의 한결같은 주장의 주의라면 세상의 주목을 받는다. 목적성이 뚜렷하고 공부하는 과정에 담긴 진정성이 변하지 않을 때 어떤 사실을 해석하는 의도에는 불순한 동기가 개입될 수 없다. 물론 특정한 입장에 선호도가 있을 수 있다. 니체도 “모든 진리는 휘어져 있다”는 말로 진리와 결탁된 편리함을 무시하지 않는다. 주관적인 인간이 자신의 주관으로 특정한 사실과 현실을 자기 편의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인간의 치명적 한계다.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은 자기 편의가 자기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미덕이 아니라 타자를 향하는 결단과 결행으로 옮겨질 때 편의는 개인차원으로 전락하지 않고 공동체를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의로운 실천으로 변화된다. 이런 공부는 혼자 해내기 어렵다. 함께 공부하는 도반의 말없는 지원과 믿음으로 엮어진 연대가 그 어떤 책에서도 배울 수 없는 실천적 지혜를 잉태하게 만들어준다.     




다급한 관계가 다정한 관계로 변하다    

 

한 해는 저물어가지만 인간관계는 여물어갔으면 좋겠다. 서로의 필요로 한 때 만난 다급한 관계였지만 따뜻한 관심과 인식을 나누는 다정한 관계로 발전할 때, 그 관계는 어떤 경계도 무너뜨릴 수 있는 인간관계로 발전한다. 특히 배우고 가르치며 서로 성장하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의 미덕을 나누는 배움의 공동체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온기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도전하는 용기가 흐른다. 서로의 관심과 입장을 존중하고 언제나 겸손한 자세로 배우려는 만남과 관계는 시간이 흐를수록 카이로스의 의미는 언어적 설명을 거부한다. 이심전심으로 통하지만 그걸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어느 순간 둘 사이에 흐르는 교감을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상대방의 느낌을 읽어내면 조용히 타자의 입장이 되어 침묵이지만 우렁차게 손뼉 쳐주고 응원해주기 시작한다. 말로 표현하지 않지만 상대가 얼마나 나를 향해 관심과 애정을 품고 있는지 눈빛과 표정에서 읽어낼 수 있다. 그냥 옆에서 다가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따뜻한 위로가 된다. 김사인 시인의 ‘조용한 일’이라는 시는 그저 눈물겹도록 고마운 일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풀어낸다.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냥 ‘곁’에 와서 말없이 자리를 지킨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물도 그 사람 ‘곁’에 그냥 있어주는 거다. ‘곁’에 있을 기회가 점점 사라지면 ‘곁’은 ‘옆’으로 변한다. ‘옆’은 ‘곁’보다 물리적으로 떨어진 거리감이 반영된 말이다. 한두 번에 옆에 있다 이제 그것마저도 쉽지 않은 소원한 관계가 될 때 그 사람을 겉돌기 시작한다. 한 해가 다 가기 전에 함께 공부하는 대학원 박사 제자 모임에서 우리는 여전히 곁에서 농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힘든 한 해를 살아온 서로에게 큰 박수를 쳐주었다. 2020년엔 우리 모두 스무 살의 청춘으로 스무고개를 넘어서는 호기심 어린 질문으로 세상의 당연함에 시비를 걸면서 살아가자. 원래 그런 세계를 움직이는 원리를 파고들어 세상은 원래 그렇지 않음을 증명해보자. 물론 그렇다고 생각한 관성과 타성에 스무 살의 정신으로 새로운 관문을 찾아보고 작은 기적과 감동에도 탄성을 지르며 행복하게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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