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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없는 길을 가야
새로운 지도를 그릴 수 있다

2021년, 일상과 함께 비상하는 7가지 화두의 상상

지도 없는 길을 가야 새로운 지도를 그릴 수 있다

2021일상과 함께 비상하는 7가지 화두와 상상 


오늘의 나는 과거에 내가 했던 생각과 행동의 산물이다. 오늘의 나를 바꾸고 새로운 나로 변신하기 위해서는 오늘과 다른 생각과 행동으로 오늘 하루를 보내야 한다. 오늘 내가 무엇을 했는지에 따라 내일 오늘과 다른 나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모든 존재는 저마다의 경이로운 이유가 있다. 돌멩이도 살아온 이유가 있고 살아가는 이유도 있다. 화려했던 단풍잎을 다 떨구고 나목으로 한겨울을 버티는 나무의 존재 이유가 있다. 새봄의 희망을 싹틔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냥 겨울이 왔기 때문에 혹한의 추위와 싸우며 살아남는 것이다. 뭔가를 달성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인간과 다르게 자연의 모든 생명체나 비 생명체는 있는 그대로 거기에 존재한다. 다만 존재하는 방식과 원리가 다르고 저마다의 존재 이유가 다를 뿐이다. 그 이유는 자신만 안다. 목적지에는 목적이 없다. 목적지를 향해서 지도가 인도하는 대로 길을 떠났지만 정작 목적지에 도달하면 목적이 없음을 통달하는 깨달음을 얻는다. 비상한 깨달음은 목적지에 있기보다 목적지로 가는 여정에서 부딪치는 우발적 마주침에서 나온다. 목적지는 사전에 정할 수도 있지만 길을 가는 와중에 목적지를 수정할 수도 있고 새로운 목적지를 정할 수도 있다. 몸으로 겪은 체험적 각성이 책상머리에서 머리로 계산하고 예측했던 목적지를 바꾸는 경우 더 깊은 앎이 발생한다. 목적지로 가는 도로를 지도대로 따라갈 때 생기는 앎은 사건과 사고가 없는 표준화된 앎이다. 진짜 앎은 목적지로 가는 여정에서 만나는 장애물이나 장벽을 넘어서는 과정에서 생기고 생각지도 못한 사고를 당할 때 생각지도 못한 생각의 지도(地圖)가 생긴다. 


지도 없이 길을 떠나야 새로운 지도를 그릴 수 있다. 세상에는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 길이 더 많다. 지구 상에는 모르는 별의 수만큼 못가 본 일이 많다는 이야기도 있다. 못가 본 길을 가는 여정에 진정한 모험이 있고 그런 모험이 색다른 체험적 앎을 선물로 준다. 지도에도 없는 길을 걸어갈 때 우리는 이전과 전혀 다른 관계를 만들 수 있다. 낯선 환경이나 낯선 사람, 그리고 경계 밖의 낯선 책과의 만남이 바로 색다른 관계를 낳게 한다. 앎이 앎으로 끝나지 않고 나를 바꾸고 관계를 바꾸며 세상을 바꾸는 삶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제와 다른 방식으로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배움은 이전과 다른 상황에서 다른 만남이 이루어질 때 발생한다. 더 큰 배움은 더 큰 위기 속에서 시작된다. 정상적인 상황, 어제와 비슷한 상황이 내 앞에 놓일 때, 나는 어제와 비슷한 방식, 정상적인 방식으로 상황에 맞서 적응한다. 앎은 상처 위에서 자란다.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면 경이로운 깨달음의 즐거움도 오지만 한편으로는 알게 됨으로써 아픔도 함께 겪는다. “앎은 우리를 앓게 하지만 누군가는 그렇게 앓으며 세계를 바꿔왔다”(261쪽). 앎이 깊어질수록 자신도 감당하기 어려운 아픔이 다가온다. 모든 앎은 앎음을 통해서 깊어지는 이유다. 몰랐을 때는 편안했던 속이 앎의 깊이가 심화되고 넓이가 확산될수록 걷잡을 수 없는 당혹감과 더불어 어찌할 수 없는 불편함이 물밀 듯이 다가온다. 당사자가 겪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고통이 몸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럴 때 사람은 심각한 심장 박동이 시작되고 쓰라림과 저림이 동시에 다가오면서 견딜 수 없는 긍휼감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우선 나에게 자문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쓴다. 내가 알고 있는 앎의 원천은 어디인가? 나의 앎은 무엇을 위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이런 앎이 과연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서 왜 앎의 행진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뭔가를 배우려고 하는가? 앎을 통해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며, 내가 얻은 앎으로 나는 어떤 삶을 지향하려고 하는가? 이런 자문은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나의 질문이 다른 사람에게 탐문을 통해 뭔가 비밀을 알아내거나 심문을 통해 불편함을 파헤치려는 의도가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한 해를 돌이켜 과거를 정리하면서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내가 그동안 추구해왔던 앎의 성격과 방향을 가늠해보고 다가오는 미래에도 여전히 계속될 앎의 여정을 점검해보기 위해서다. 한 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전망하며 글을 쓰는 이유가 있다. “기존의 경계 너머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을 가로지르는 경계선의 배치를 바꾸고자 한다”(6쪽). 경계 너머를 꿈꾸며 낯선 세계와 부단히 접선하는 것도 중요한 공부지만 더 필요한 공부는 자의 반 타의 반 그어진 기존의 경계선에 의문을 던져보고 그것이 과연 누구의 의도가 반영된 경계선인지를 생각해보는 공부다. 무의식적으로 구분해온 범주나 나도 모르게 그은 선으로 인해 선 밖에서 선 안을 사유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만든 경계선은 없는지 사유하는 공부가 필요하다. 관심 있는 주제를 연구하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갈라놓은 독립변수와 종속변수의 경계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세상은 독립변수와 종속변수가 정해 단선적 인과관계로 연결되는 단순한 현상은 아니다. 오히려 세상은 인위적으로 독립변수와 종속변수로 구분해서 경계 지을 수 없는 복잡한 관계 안에서 언제나 한계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치열한 전쟁터다.


생명이라는 추상명사와 생활 속에서 만나는 보통명사보다 나는 생존하기 위해 매일 안간힘을 쓰는 모든 동사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하지만 사실은 실존보다 생존이 문제다. 생존은 매일매일 내가 온몸으로 버티고 견뎌내야 비로소 얻어낼 수 있는 삶의 존재 기반이 때문이다. 당나라 임제선사의 글 한 구절을 떠올려본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을 올 한 해의 마지막이자 새해를 맞이하는 경계선에서 음미해보려고 한다. 수처작주(隨處作主)는 어느 곳이나 곳에 따라 자기의 주체성을 잃지 않는다는 뜻이고, 입처개진(立處皆眞)은 바로 서 있는 그 자리의 모든 것이 진리라는 말이다. 언제 어느 곳이든 스스로 주체가 되어 살기 위해 노력하면 지금 있는 곳이 참된 진리의 세계라는 의미가 심장에 꽂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코로나 난국으로 생존 자체를 위협받고 있는 2020년을 보내며 새해를 맞이하지만 절망 속에서 희망에 기대를 걸기에는 여전히 힘겹기만 하다. 아픈 현실을 몸으로 겪어내며 힘겨운 하루를 보내면서도 견딜 수 있는 원동력은 지금의 고난과 시련이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악화일로를 거듭하는 코로나 난국에서 우리는 과연 내년에도 희망을 걸고 새해를 맞이할 수 있는가? 성장이나 성과를 내려는 노력보다 작은 일이나 평범한 일상에서도 성취감을 느끼고 성숙할 수 있는 배움의 터전으로 지금 나의 자리를 점검해보면 좋겠다. 주어진 자리는 생존문제를 걸고 사투를 벌여 지켜 내야 할 살 자리이자 내 힘으로 생존문제를 걸고 차지해야 할 설 자리다. 내가 그 자리에 서서 살아갈 때 가장 아름답게 돋보이는 제 자리다. 생존으로 실존의 의미를 남기기 위해 7가지 화두와 함께 한 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맞이해본다.



❶반성과 성찰: 개인차원의 반성을 넘어 사회구조적 각성이 따르는 성찰이 성숙으로 연결된다

❷경청과 긍휼: 역지사지로 타자의 아픔을 귀 기울여 들어봐야 애가 타기 시작한다

❸인정과 포용: 다름과 차이를 끌어안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때 관문이 열린다

❹겸손과 배려: 배우는 자세로 낮추고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보살펴준다

❺존중과 환대: 다름과 차이를 인정해주고 따뜻한 가슴으로 품어준다

❻위로와 연대: 체중을 실은 관심과 진심으로 희망의 공동체를 구축한다

❼융합과 창조: 기득권을 버리고 전혀 다른 분야와 만나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



반성과 성찰개인차원의 반성을 넘어 사회구조적 각성이 따르는 성찰이 성숙으로 연결된다


개인적 잘못을 뉘우치고 앞으로 동일한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한 반성도 필요하다. 더 소중한 개선과 인간적 성숙은 성찰에서 일어난다, 성찰은 개인 차원의 뉘우침을 통해 자각하고 다짐하는 반성을 넘어선다. 나의 작은 생각과 행동이 내가 만나는 타자는 물론 공동체의 성장과 발전에 미치는 파급효과나 영향력을 고려하는 거시적 차원의 사회구조적 관계 속에서 갖게 되는 의미와 시사점까지 생각해보는 노력이 성찰이다. 반성이 반복되지만 성숙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의 작은 생각과 행동이 자신과 연결되는 타자는 물론 다른 사람과 공동체에 어떤 구조적 접속이 되는지, 그것이 거꾸로 나에게 어떤 영향력으로 돌아오는지를 깊이 그리고 넓게 성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성은 개인적이고 미시적인 일이고 성찰은 구조적이거나 거시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사소하고 하찮은 일이라도 그것이 일어나기까지는 생각보다 복잡하고 다양한 원인들이 작용하는 구조적인 일이다. 성찰은 사소함이나 당연함에 의문을 던져 나와 관계되는 다양한 변수들 간의 구조적 관계를 깊이 생각해보는 사유의 한 가지 방식이다. 의미 없이 발생하는 산만한 현상을 관찰하고 그 결과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고찰할 때 갑자기 큰 깨달음의 문이 열리면서 통찰이 온다. 통찰은 다시 한번 다른 문제 상황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큰 배움을 얻기 위해서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지식을 축적하는 과정을 반추하는 성찰이 뒤따를 때 체험적 지혜가 생긴다. 


성찰은 원래 그런 세계, 물론 그렇다고 생각하는 세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통념을 통렬하게 부정하고 물음표를 던지는 과정이다. 내가 보기에 당연한 현상은 세상에 너무도 많다. 복잡성 보존의 법칙이라는 걸 알면 내가 경험하는 당연한 현상이 당연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예를 들면 마트에서 쇼핑을 할 때 우리는 입구에 정렬되어 있는 카트를 끌고 다닌다. 쇼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주차장까지 카트를 끌고 가서 물건을 차에 실은 다음 주차장 적당한 곳에 두고 간다. 다시 마트에 쇼핑을 가면 입구에 질서 정연하게 정렬된 카트는 누구의 수고 덕분인가? 내가 경험하는 편리함과 단순함은 나 대신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불편하고 복잡한 일을 대신 해준 덕분에 누리는 행복이다. 성찰은 바로 이런 지점에서 필요한 각성의 계기다. 보이는 것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힘, 현상의 이면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구조나 관계를 꿰뚫어 통찰하는 힘은 당연함을 부정하고 물음표를 던지는 성찰에서 나온다. 코로나 위기를 몰고 온 원인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던지고 성찰하는 과정에서 생태학적 각성이 일어난다. 나의 하루 일과를 돌이켜 보면서 내가 취한 작은 행동이 얼마나 환경을 오염시키고 생태계를 파괴하는 공범으로 가담했는지를 반성하고 성찰하면서 작은 변화라도 어제와 다른 움직임을 보일 때 우리들의 일상은 조금씩 회복될 것이다.  



❷ 경청과 긍휼(矜恤): 역지사지로 타자의 아픔을 귀 기울여 들어봐야 애가 타기 시작한다


아픔을 사랑하는 일은 머리가 아니라 심장이 담당한다. 머리는 요리조리 머리를 쓰지만 심장은 이리저리 몸을 움직인다. 수전 손택에 따르면, 연민은 타인의 아픔을 머리로 계산하는 능력이지만 공감은 타인의 아픔을 가슴으로 생각해서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는 능력이라고 구분한다. 연민에는 머리가 관여하고 공감에는 가슴이 관여한다는 이야기다.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이 맞물려 생각할 때 세상을 바꾸는 참신하면서 현실적인 생각이 나온다. 문제는 주로 따뜻한 가슴이 실종된 상태에서 차가운 머리가 관여해서 나오는 생각과 행동에서 비롯된다. 머리는 체험하지 않고 책상에서 얼마든지 다양한 생각을 해낼 수 있다. 하지만 체험하지 않고 가슴은 감각적으로 느낄 수 없다. 내가 해본 것만큼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귀를 기울이는 일은 물리적으로 귀의 각도를 변경하는 일이 아니라 마음을 한 곳에 모아 상대의 심장과 포개는 일이다. 경청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의도(意圖)하는 바를 미루어 짐작해보고 의중(意中)이 무엇인지를 헤아려봐야 한다. 의중의 일부만이 언어로 번역되어 의사(意思)로 표시되기 때문에, 얼굴 표정은 물론 손짓과 발짓도 함께 포착해봐야 한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듣는 거 같지만 온 마음 다해 상대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어가 심장박동을 들어보는 길이 경청이다. 그래야 심장(心)이 흘리는 피(血)를 보고 긍휼감(矜恤感)을 느낀다. 긍휼의 휼(恤)은 바로 심장(心)이 흘리는 피(血)를 보고 안절부절못한 애타는 심정(心情)을 말한다.


긍휼감은 가슴으로 상대방의 아픔으로 공감하는 수준을 넘어선다. 깊은 긍휼감을 지닌 사람은 더 이상 관람객의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몸을 던져 당사자의 입장이 되어 곤란함에서 벗어나도록 도움을 제공하는 행동을 머뭇거리지 않고 한다. 타자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보살펴본 사람만이 누군가 아픔을 경험하는 걸 보면 체감한다. 아픔은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것이다. 체감의 경험이 없으면 공감되지 않고 긍휼감을 가질 수 없다. 누군가 깨달은 체험적 의미는 머리로 이해되기 전에 몸으로 다가와 반응하는 이유다. 타인의 아픔을 보면 머리가 아프지 않고 가슴이 아픈 이유는 의미가 머리로 이해되는 게 아니라 애간장을 녹이며 안간힘을 쓰면서 몸으로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어머니가 아프면 머리가 아프고 친정 엄마가 아프면 가슴이 아픈 이유는 무엇일까. 나와 관계없는 사람일수록 머리가 관여하고 나와 관계가 가까운 사람일수록 가슴이 관여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나와 관계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무리 곤란한 일에 처해도 심장이 움직이지 않는다. 나와 관계가 깊은 사람은 사소한 곤란함에 처해도 마치 나의 아픔처럼 가슴이 아파온다. 하지만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할지라도 상대가 겪고 있는 곤란함을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곤란함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일어설 수 없는 장애인이 휠체어에 앉아 승강기 버튼을 누르려고 안간힘을 쓰는 상황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그에게 1Cm의 차이는 상상할 수 없는 불편함을 가져올 수도 있음을 정상인들은 쉽게 느끼지 못한다. 역지사지가 말처럼 쉽지 않은 이유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경험 영역 내에서 옳다고 믿는 신념체계 내에서 주어진 현상이나 사람의 입장을 해석하는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정과 포용다름과 차이를 끌어안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때 관문이 열린다


인정(認定)은 사람이 본래 가지고 있는 감정이나 심정을 떠나 사실이 진실이거나 수용할만한 가치가 있음을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뭔가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인정을 기다리고 있는 존재의 본질을 감지하고 그것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숙지해야 될 점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가치를 드러내는 인간은 물론 비인간 행위자(actor)를 인정하는 문제다. 특히 인간 행위자의 행위능력에 영향을 행사하는 수많은 비인간 행위자의 다양한 영향력, 예를 들면 운전수의 운전 속도와 습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각종 교통 신호등이나 스피드 범퍼 등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인정할 때 행위자들의 역학관계가 만들어가는 네트워크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브뢰노 라투르의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이다. 어떤 행위자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면서 다른 행위자에게 자신의 존재가치를 적극적으로 알리지만 다른 행위자는 조용히 다른 행위자의 능동적인 행동에 수동적으로 맞서면서 묵묵히 겪어나가는 존재가 있다. 예를 들면 환자(patient)는 의사나 간호사 등 적극적인 행위자의 진단과 처방과 같은 치료 행위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믿고 맡긴 채 묵묵히 견뎌나간다. 이런 수동적 겪음의 상태를 적극적 행위능력을 의미하는 에이전시(agency)에 비해 페이션시(patiency)라고 한다. 그동안 인정받지 못했던 수동적인 행위자의 어쩔 수 없이 견뎌내야 하는 삶을 적극적으로 인종하고 포용할 때 우리 삶의 능동성과 수동성은 역동적인 네트워크로 다가온다.


나와 다른 차이를 인정하고 수용하기 위해서는 인정할 안목과 식견이 필요하다. 상대의 의견이 그냥 나온 깨달음의 산물이 아니라 온몸으로 사투를 벌인 결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체험적 각성의 산물임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나 역시 그런 딜레마적 상황에서 사투를 벌이며 경험한 역사가 있어야 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이유보다 인정할 수 없는 이유가 중요하다. 인정할 수 없는 이유는 인정할 수 있는 내재적 역량이 부족하거나 아예 행위자의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나다움을 알리고 다른 나에게 나의 영향력을 행사는 과정도 인정하고 포용해야 되지만 능동적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안간힘을 쓰면서 겪어내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자기다움도 인정하고 포용해야 한다. 그 자리는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 예를 들면 환자가 육체적으로 앓고 있는 질환(disease)에 대해 마음으로 느끼는 질병(illness)에 대한 심리적 충격과 아픔을 견뎌내면서 겪어야 하는 그 자리는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 그 자리에서 환자가 사투를 벌이며 속절없이 겪어내는 역할은 대체 불가능한 나의 일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자(것)들은 행동하는 자들이 아니라 감당하는 자(것)들이다”(274쪽). 결국 많이 감당해본 사람(것)이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감당하는 사람(것)의 안간힘과 침묵을 인정하고 포용한다. 



감당하는 사람(것)은 자신의 존재를 잘 드러내지 않고 침묵하며 묵묵히 자신의 본분을 다한다. 우리가 감당 자하는 사람(것)이 침묵상태로 존재하면서 살아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써왔던 과정을 인정하고 포용하지 못한 것이다. 포용은 수용과 다르다, 수용은 수동적으로 어쩔 수 없이 용인하는 움직임이다. 이에 반해서 포용은 포괄적으로 상대방의 의견을 수용하면서 그 생각의 씨앗을 틔우기 위해 분투노력했을 타자의 모습을 뜨거운 마음으로 감싸 안는 것이다. 바다는 산을 포용해도 산은 바다를 포용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수용은 자신이 능력이 있으면 상대를 받아들일 수 있지만 포용은 능력이 있어도 상대를 받아들일 자세와 태도, 더 근본적으로 애정과 관심이 없으면 거부할 수도 있다. 포용은 사랑이 밑바탕에 깔린 수용이다. 포옹도 마찬가지다. 사랑하지 않고 가시적으로 포옹할 수 있다. 사랑이 전제된 포옹만이 포용으로 나아갈 수 있다. 수용이 상대를 수동적으로 ‘안다’에 해당되는 말이지만 포용은 상대를 적극적으로 ‘껴안다’에 해당되는 말이다.


겸손과 배려배우는 자세로 낮추고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보살펴준다


왼손과 오른손 사이에 겸손이 살아간다. 왼손과 오른손만 믿고 겸손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높은 성취를 해냈어도 사람들은 존경하지 않는다. 겸손은 겸손이 ‘humilitas' ’후밀리타스‘라고 하는데, 이것은 'humus' 후무스, 땅, 흙, 먼지라는 뜻의 어원을 갖고 있다고 한다. 흙에서 겸손의 의미가 파생된 것은 언제나 겸손은 높은 곳을 지향하기보다 낮은 곳을 지향하면서 자세를 낮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흙은 자신의 존재 이유보다 흙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 자신은 언제나 타자의 배경으로 살아간다. 겸손은 전경에 드러나 자신을 자랑하는 게 아니라 언제나 보이지 않는 배경에서 타인을 묵묵히 도와주는 미덕이다. 지위가 높거나 실력이 출중해서 경지에 이른 사람에게 특히 겸손함을 요구하는 이유다.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사람 역시 자기 혼자 힘으로 노력해서 경지에 이른 사람이 아니다. 궁지에 몰렸을 때 그들 역시 덕분에 역경을 극복하고 경력으로 만든 사람이다. 겸손은 나의 힘으로 세상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깨달음이 올 때 생긴다. 나의 실력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돈만 벌면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는 자만과 착각이 어느 순간 깨질 때 사람은 깊은 반성과 함께 겸손해지기 시작한다. 갖은 고생 끝에 일정한 경지에 이른  겸손한 사람은 자세를 낮추고 덕분에 잘 되었다고 생각한다. 겸손한 사람은 세상은 언제나 나 혼자의 힘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성취한 모든 성취물은 나를 오늘의 나로 만들어준 모든 사람의 사회적 합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배려하는 마음이 상대에게 전달되고 그것이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평소에도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잘 살펴봐야 한다. 살피지 않고 보살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어떤 궁지에 몰려 있는지를 살펴보지 않고서는 긍지로 삼으며 자부심을 느끼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적절하게 찾아낼 수 없다. 깊은 관심을 갖고 궁지에서 벌이는 사투를 벌이는 모습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이 바로 염려이자 배려다. “살피지 않으면 보살필 수 없는 것이다. 무엇을 살피는가? 다가올 시간이 초래할 결과를 살핀다는 것이다”(110쪽). 박준의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의 발문, 신형철의 ‘조금 먼저 사는 사람’ 중에 나오는 말이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신형철 작가는 돌보는 사람의 진정한 배려를 상대방의 미래는 내가 먼저 살아보는 사람이고 한다. “돌보는 사람은 언제나 조금 미리 사는 사람이다. 상대방의 미래를 내가 먼저 한 번 살고 그것을 당신과 함께 한 번 더 사는 일”(110-111쪽). 배려는 지금 여기서 타자의 입장을 헤아리는 수준을 넘어 그 사람이 겪게 될 앞으로의 아픔이나 슬픔과 같은 곤란함을 미리 경험해보고 그것이 가져올 파급효과까지 헤아려보는 마음 씀씀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마음이 불편해서 자신이 먼저 상대에서 손을 내밀어 따뜻한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존중과 환대다름과 차이를 인정해주고 따뜻한 가슴으로 품어준다


존경하는 마음에 체중을 실어 표현하면 상대방도 존중 받고 있음을 몸으로 안다. 머리로 깨달은 앎으로 잔머리를 굴리지 않고 진심을 담아 온몸으로 전달할 때 참을 수 없는 무거운 사랑의 무게가 느껴진다. 존중은 무거운 체중이 실려 있는 존경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타인을 존중하려면 그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과 조건에서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일하고 살아가는지를 알아야 한다. 존중은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매일 만나는 사소한 일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그것의 존재를 배우려는 마음이 앞설 때 생긴다. 존중은 결과보다 과정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는 가운데 발휘된다. 예를 들면 쌀 한 톨을 생산해내기 위해서 이른 봄부터 늦가을 수확하기까지 농부가 쏟아부은 땀과 정성을 생각할 대 우리는 먹고사는 밥 앞에 한 없이 겸손해진다.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자연의 흐름을 감당하면서 어렵고 힘든 시기를 버텨왔을 벼 이삭의 무거운 삶을 존중해주고 환대해주려는 마음이 저절로 나온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그 사람이 만들어낸 성과나 산물보다 그런 결과를 만들어내기까지 어떤 노동의 아픔을 경험하면서 살아내고 있는지를 알아봐야 한다. 직접 당사자 입장에서 경험해보기 전에는 그 사람이 겪고 있는 고통을 아는 방법은 없다. 고통을 이해할 수 있지만 고통을 당사자 입장에서 겪을 수 없을 때 여기서 파생되는 앎은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피아노 치는 사람의 연주와 피아노 고치는 사람의 기술은 다르지만 자신의 일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는 저마다의 이유로 최선을 다해 몰입하는 것이다. 피아노를 배우면서 겪었을 다양한 고생과 피아노 고치면서 직면했던 숱한 난관은 경험의 종류는 다를지 몰라도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면서 배운 삶의 지혜는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 존중하고 환대하는 이유는 내가 겪어보지 못한 아픔과 고통을 저마다의 특수한 상황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겪으면서 깨달은 삶의 지혜가 소중하기 때문이다. 나의 존재가 고유하고 특이한 것처럼 나 이외의 모든 사람도 저마다의 이유로 소중하다는 생각, 그들의 생각과 행동에도 특별한 사연이 있어서 그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입장에서 사유해야 된다는 생각이 바로 존중과 환대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이 갖고 있는 재산이나 성취한 업적 또는 지위에 관계없이 그 사람의 존재 자체에 말을 걸어주고 인정해줄 때 상대는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전혀 알지도 못한 생면부지의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나에게 다가온 이유를 생각해보고 말하고 싶은 바가 무엇인지를 귀담아 들어줄 때 그 사람은 또한 존중받고 환대받고 있다고 느낀다. 낯선 환경에서 감당하기 힘든 상황과 맞서 싸우면서 힘겹게 버티며 견뎌내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주는 사람은 존중과 환대가 몸에 밴 사람이다. 저마다의 이유로 살아가기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살아가는 이유를 깨닫게 해 줄 때 상대는 자신의 존재 이유와 가치를 새롭게 깨닫고 분투노력을 계속한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가는 방식도 충분히 다른 사람에게 존중과 환대 속에서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삶임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남의 일이 아니라 내일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존중과 환대 속에서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고 연대를 맺어나가는 것이다.



위로와 연대체중을 실은 관심과 진심으로 희망의 공동체를 구축한다


위로는 말로 하지만 사실 말로 하는 게 아니다. 진정한 위로는 말에 담긴 진심이 상대방에게 다가갈 때, 즉 체중이 실린 격려와 위로만이 몸의 반응을 유도한다. 진심이나 진실은 말이나 언어로 정리된 주장 속에 있지 않다. 진심이 진실을 만든다. “진실은 잘 정리된 핵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사람과 대답하는 사람의 사이에서 새롭게 태어남을 배운다”(132쪽). 홍은전의 《그냥, 사람》에 나오는 말이다. 진심인지의 여부는 그 사람이 하는 말의 논리적 완결성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진심은 오로지 위로를 건네는 사람의 심장이 상대방의 심장을 건드릴 때 다가오는 느낌으로 안다.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얼마나 상대방의 마음을 건드리는지에 따라서 대답하는 사람도 진심을 담아 답을 찾아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내가 건네주는 위로가 상대방에게 위안의 메시지로 다가가려면 상대방이 어떤 아픔을 겪고 있는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정확한 위로 이전에 상대의 아픔을 이해하는 노력이 선행돼야 하는 이유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질문을 통해 상대방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야 한다. 마음을 열기 위해서는 질문이 뭔가를 따져서 캐묻는 심문(審問)이나 알려지지 않는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 조사하는 탐문(探問)처럼 느껴지지 않아야 한다. 관심과 애정을 담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질문을 통해 상대가 겪고 있는 아픔과 함께한다는 느낌이 들 때 상대는 비로소 마음의 문을 열고 자기 내면세계로의 여행을 받아들인다. 


힘든 세상을 함께 살아간다는 동질감을 기반으로 나보다 더 힘든 상황에서 사투를 벌이는 사람에게 건넨 진정성 있는 위로는 사람의 마음을 열게 만드는 열쇠나 마찬가지다. 내가 건네는 한 마디에 담긴 무게감은 입바른 소리로 하는 동정심이 아니라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겪어내는 힘겨움이다. “진정성을 술어로 놓고 그 주어를 찾으려는 모든 시도는 위선이다. “A는 진정하다”는 문장을 만드는 게임에서 A의 자리에는 결국 가면을 겹겹이 쓴 ‘자신’이 온다. 진정성을 술어로 처리하는 모든 담론은 결국 ‘나는 진정하다’라는 말을 하기 위한 은밀한 우회다(265쪽). 김홍중의 《은둔기계》에 나오는 말이다. 나는 진정성이 있다고 진심을 담아 어떤 말을 반복해서 강조해도 결국 그 말은 나는 진정성이 없다는 걸 반증한다는 이야기다. 진심이 통하면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생기면 강한 신뢰의 연대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연대가 맺어지려면 우선 관계가 있어야 한다. 관계없는 데 연결된 사람은 너무나 많다. 특히 SNS로 연결된 사람은 많은 데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접속되어 있지만 접촉해보지 않아서 그 사람에 대한 느낌을 공유해본 적이 없을 때 연결되었지만 관계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전과 다른 앎으로 거듭나는 경우가 있다. 나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과 뜻밖의 인연이나 우연한 사건으로 관계가 맺어질 때 나는 전혀 다른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그때 사람은 지금까지 쓰지 않던 생각 근육을 작동해서 낯선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전개한다. 



❼ 융합과 창조기득권을 버리고 전혀 다른 분야와 만나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


융합은 나와 다른 분야의 사람과 만나 다름과 차이를 존중하고 재배치하면서 이전과 다르게 생각하는 힘에서 비롯된다. 이런 융합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통합되기 이전에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감정적 교류가 활발하게 일어나야 한다. 나와 다른 분야가 나의 인식과 관심으로 융합되기 위해서는 그렇게 되는 것이 새로운 가능성의 텃밭을 일군다는 느낌이 공유되어야 한다. 융합의 필요성에 대한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설명은 이해는 되지만 와 닿지 않는 이유는 융합으로 인해 특정 타자가 우월적 권력을 지니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융합이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포섭하고 통합해서 새로운 권력을 차지하려는 숨은 의도로 읽힌다면 성공하기 어렵다. 자세를 낮추고 내 분야 이외의 다른 사람과 마음을 열고 배우려고 하려는 자세가 융합의 첫걸음이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내가 모르는 분야와 만나 배우겠다는 열린 마음과 열정, 그리고 다름과 차이를 존중하며 소통하고 공감하면서 서로의 문제와 한계를 인정하고 수용할 때 진정한 융합의 씨앗은 발아되기 시작한다. 융합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이질적 분야의 만남 이전에 나와 다른 분야를 기꺼이 공부해서 배우려는 다짐과 의지가 필요하다. 나아가 내가 알고 있는 전문분야의 핵심 지식도 과감하게 폐기하겠다는 대담한 용기와 전혀 다른 미지의 세계와의 낯선 마주침도 기꺼이 수용하겠다는 자세가 전제될 때 융합은 그만큼 성공 가능성도 높다. “평생 동안 확신해왔던 자기 인식과 기득권을 포기해야 하는, 새로운 진실에 맞닥뜨리는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 한겨레신문에 연재하는 정희진의 융합에 나오는 말이다.


융합은 진행되는 과정에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농후하다. 예를 들면 생각보다 많은 부분을 내가 몸담고 있는 분야가 포기하고 전혀 다른 분야를 주축으로 융합이 전개될 필요성이 제기될 수도 있다. 이럴 때는 기꺼이 융합의 방향과 흐름을 거부하지 않고 대세가 요구하는 방향으로 융합의 길목을 터줘야 융합을 통해 전혀 다른 가치가 창조될 수도 있다. 융합이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의 향연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더 이상 자기 힘으로는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열어갈 수 없다는 판단이 들 때 깊이 파고든 사람이 깊이 파고든 다른 깊이에 이른 전문가와 만나야 한다. 깊이가 전제되지 않는 융합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엉뚱한 결과만을 초래할 뿐이다. 넓이를 추구하지 않는 깊이 또한 자신이 판 우물에 매몰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깊이 파고들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이질적 분야가 폭넓게 만날 때 융합의 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진다. 깊이 없는 넓이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고, 넓이 없는 깊이는 견딜 수 없는 답답함이다. 융합으로 가는 길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거의 모든 분야의 팔방미인형 대가가 되기는 불가능한 시대, 차선책은 모든 사람과 자세를 낮추고 소통하는 방법이다. 한 사람이 모든 분야에 능통할 수는 없지만 한 사람이 모든 사람과 소통할 수는 있다. 



우리는 한 해를 전대미문의 코로나 19가 일으킨 고난과 난국을 감당하면서 살아냈다. 저마다의 위치에서 무겁게 내리누르는 삶을 잘 감당해준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여전히 지속되는 코로나 위기를 감당해내고 있다. 삶은 언제나 감당하고 버티는 사람들을 서로 지지하고 응원하는 가운데 지나가는 여정의 반복이다. 난국을 견뎌내면서 감당해온 안간힘으로 우리는 또 한 해를 보내야 한다.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 우리 모두의 지혜를 모아 난국을 돌파해낼 혜안과 대안이 부각되기를 기대한다. 기대는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기댈 때 현실로 보다 빠르게 구현된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은 멀리서 오지 않고 가까이서 온다. 믿었던 사람이나 기대했던 사람이 신의와 기대를 저버렸을 때 감당하기 어려운 난국에 처할 수 있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저마다의 위치에서 감당해야 할 몫을 인식하고 감당해내는 가운데 또 한 해를 감당하며 살아내야 한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이 시련을 극복하는 길인지 특단의 비책은 없다. 어떤 길을 가야 올바른 길인지를 알려주는 지도도 없다. 지도 없는 길을 걸어가야 길을 잃기도 하고 새로운 길을 만나 전에 없었던 새로운 지도도 만들 수 있다. 지도에 없는 길을 걸어가는 여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지도자가 탄생한다. 모든 지도자는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새로운 지도를 제작하는 사람이다.



지도자는 관행이나 관습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는다. 낯선 상황은 지금까지 살아온 익숙한 상황에서 배운 지식이 통용되지 않는다. 그동안 통용되어 왔던 상식을 반복해서 먹으면 식상해진다. 이전까지의 배움에 얽매이지 말고 새롭게 다가올 문제 상황 속에서 사투를 벌이며 새로운 배움을 얻어야 한다.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관성에 젖어 사는 학자는 자기가 쌓아온 학문적 아성에 머무르는 아류작밖에 양산할 수 없다. 내가 구축한 학문적 탐구결과가 나를 특정한 시선과 관점을 중심으로 통념에 갇히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부단히 반성하고 성찰할 필요가 있다. 학자는 현장에 답이 있음을 믿고 끊임없이 어제와 다른 질문의 그물을 던져 경이로운 깨달음을 얻는 학생이다. 학자(學者)가 배움과 연구를 멈추지 않고 정진하는 학생이기를 포기한다면 자학(自虐)할 수밖에 없다. 2021년에는 어떤 문제가 우리를 엄습할지 모른다. 언제나 최악의 문제 상황은 오지 않은 상태로 미래에 머물러 있다. 전대미문의 새로운 문제는 언제나 발생하지 않은 상태로 미래의 세계에서 잠자고 있다. 문제는 언제나 우리들의 능력의 한계를 시험할 것이다. 한계를 초월하는 비정상적인 문제에 직면할 때 인간 역시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문제 상황에 뛰어들어 이전과 다른 지혜를 개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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