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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곳에서 베끼지 말고
멀리서 훔쳐라(steal)

남의 글을 베끼는 ‘저자(著者)’는 ‘저 자(者)’다

가까운 곳에서 베끼지(copy) 말고 멀리서 훔쳐라(steal) 

    

피카소는 훌륭한 예술가와 위대한 예술가를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훌륭한 예술가는 가까운 곳에서 베끼고(copy) 위대한 예술가는 멀리서 훔친다(steal).” 나는 이걸 이렇게 표절했다. “석사는 가까운 곳에서 베끼고 박사는 멀리서 훔친다.” 석사와 박사의 차이점은 가까운 곳에서 베끼느냐 멀리서 훔치느냐의 차이라는 것이다. 베끼고 훔치는 것은 피카소가 주장한 말에서 갖고 온 단어다. 훌륭한 예술가와 위대한 예술가 그 자리에 석사와 박사로 바꿔치기 함으로써 피카소 주장에 근거했지만 피카소 주장과 다른 문장을 탄생시켰다. 그 비결은 이전 작품과 다른 표절이다. 표절이지만 그대로 베낀 도적질이 아니라 이전 작품과 다르게 표절한 또 다른 창작이다. “석사는 가까운 곳에서 베끼고 박사는 멀리서 훔친다”는 문장을 다시 한번 표절하면 이렇게 된다. “훌륭한 작가는 가까운 곳에서 베끼고 위대한 작가는 멀리서 훔친다.”  하나 더 표절하면 “이류는 이류는 티 나게 겉모습 베끼지만(copy), 일류는 티 안 나게 원리를 훔친다(steal)." 이런 방식으로 copy와 steal은 내버려 두고 앞에 문장을 다른 것으로 바꿔치기를 계속하면 엄청난 양의 색다른 표절로 창작이 이루어진다. “한 작가의 것을 훔치면 ‘표절’이지만 많은 작가의 것을 훔치면 ‘연구’다.”  미국의 극작가, 윌슨 미즈너의 말이다. 남들이 잘 보지 않는 멀리 있는 책, 예를 들면 난해한 고전이나 전문 서적에서 아이디어를 훔쳐오면 보통 사람들에게 들통날 확률이 낮다. 그것도 그대로 베끼는 것이 아니라 나의 문제의식과 목적의식에 비추어 뒤섞으면 이전 작품과 전혀 다른 놀라운 창작이 시작되는 것이다.     



남의 글을 베끼는 저자(著者)’는 저 자()’     


어떤 책을 다 읽었다. 어디서 많이 본 문장들이 곳곳에 나온다. 자세히 보니까 많은 부분이

내가 쓴 책에서 썼던 말이거나 강의 중에 청중에게 했던 말과 거의 비슷하다. 아니 똑같은 문장도 상당수 나온다. 그런데 놀랍다. 참고문헌은 어디에도 없다. 누군가의 주장을 참고해서 자기주장을 펼치는 게 작가의 기본적인 윤리의식이다. 도둑 중에 가장 심각한 도둑은 글 도둑이다. 고뇌를 거듭하다 생각해낸 생각의 정수가 한 문장으로 태어난다. 문장은 곧 한 작가가 사투 끝에 남긴 얼룩이자 무늬다. 거기에는 그 사람의 삶이 녹아들어 있다. 문장을 인용 없이 베끼는 행위는 한 사람의 삶을 그대로 훔치는 도적질이나 다름없다. 더구나 아무런 인용 없이 책을 내서 독자 앞에 내놓는 저술 행위는 ‘저자’가 아니라 ‘저 자’다. 무수히 많은 다른 사람의 말들이 향연이 이어지고, 인문학과 경영학의 융합 콘서트가 펼쳐진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하지만 정말 대단한 편집술로 다른 사람의 주장을 자기주장으로 교묘하고 절묘하게 편집해서 한 권의 책을 완성한 느낌이다. 저자의 치열한 고뇌가 엿보이지 않고 편리한 편집으로 진리를 주장하려는 속셈이 곳곳에서 보여 아쉬웠다.    

 


책은 온전히 자기 생각으로 쓰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자기 체험을 녹여서 토해낼 수 있지만, 체험과 연관된 모든 생각에는 이미 다른 사람의 생각과 뒤섞여 있다. 사실 진짜 내 생각은 어디까지인지 알 길이 없다. “내 머릿속에 들어온 오만가지 생각 중에서 몇 가지만 수태되어 새로운 생각으로 탄생한다. 생각은 본래 짝을 찾아 줄기차게 맞선을 보고 추파를 던지고 사랑을 나누기 때문에 부모가 정확히 누군지 모른다”(p.55). 시어도어 젤딘의 《인생의 발견》에 나오는 말이다. 세상에 오리지널은 없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이다. 모든 생각은 다른 사람의 생각과 뒤섞여 새로운 태어난 생각의 자손이다. 글을 쓰는 매 순간 어디까지가 순전히 내 생각인지를 구별하기는 쉽지 않다. 분명한 사실은 어디서 많이 봤다고 생각하는 명언이나 재미난 유머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야 한다, 대충 얼버무리며 자기 생각처럼 교묘하게 편집하면 그 글을 읽는 독자는 다시 교묘하게 편집한다. 국적 없는 글이나 문장이 SNS를 떠돈다. 아닌 글을 쓴 저자가 분명히 밝혀져 있는 책이나 SNS 글임에도 불구하고 글의 출처가 밝혀져 있지 않고 주인 없이 떠돈다. 어느 순간 자세히 보면 내가 쓴 글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경우가 많다. 이미 온 세상에 떠도는 나의 생각의 자손을 내가 낳은 생각이라고 일일이 대응하기도 귀찮다.     


저자(著者)’를 넘어 자기만의 문장을 창조하는 작가로 거듭나다     


안타깝고 아쉬운 점은 자기주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러 곳에서 자기주장처럼 글을 쓰는

저자의 윤리의식의 부재다. 저자가 작가가 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문제의식과 윤리의식이 부재다. 저자(author)는 누구나 될 수 있지만 작가(writer)는 아무나 될 수 없다. 저자는 넘쳐 나지만 작가는 그렇게 많지 않다. 책을 쓰면 누구나 저자가 되지만 책을 쓴다고 누구나 작가가 되지 않는다. 저자는 책을 쓰는 수많은 사람을 지칭하지만 작가는 자기만의 칼라와 스타일로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이다. 저자는 다른 사람의 글을 편집해서 글을 쓸 수 있지만 작가는 자신의 삶을 담아내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다. 모든 글쓰기는 그래서 애쓰기다. 저자는 삶과 글과 자신이 살아가는 길이 다를 수 있지만 작가는 자신의 삶과 글과 살아가는 길이 하나로 맞물려 돌아가는 사람이다. 저자는 차고 넘치지만 작가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작가는 예술가이며, 자기 자신을 쥐어짜 글을 쓰는 사람이다. 저자라는 말은 그 사람이 하는 일을 뜻하지만 작가라는 말은 그 사람 자신을 나타낸다“(6쪽). 리언 반스, 커트 보니것, 그리고 스티븐 킹의 《그럼에도 작가로 살겠다면》에 나오는 말이다.      



예술가로서의 작가, 내 삶을 담아내는 글, 그 글대로 살아가고 살아가는 방식이 그대로 내가 걸어가는 길이 되는 글을 위해 어제와 다른 오늘과 내일의 삶을 살아가야겠다. 작가의 삶은 그래도 작품이 된다. 저자는 자신의 삶이 그대로 글이 되지 못한다. 저자가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자기만의 스타일과 칼라를 문체로 탄생시켜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저자는 아직 그럴 만큼 작가적 문제의식이나 프로의식이 성숙되지 못한다. 초보 저자는 물론 기성 저자 역시 쉽게 범하는 오류나 실수가 바로 남의 글을 인용하면서 생기는 양심의 문제다. 심장을 파고들고 뇌리에 꽂히는 멋진 문장을 만나면 놀라운 감동과 함께 심한 좌절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 문장을 평생 인용하면서 살아야 하는 오리지널티의 부재를 느끼기 때문이다. 여기서 심리적 갈등과 윤리의식이 실종될 수 있는 유혹의 손길이 시작된다. 출처를 밝히지 않고 내 주장처럼 글을 쓰고 싶은 충동이 윤리의식의 실종을 부채질한다. “문장들로 온몸이 근질거린다”는 표현을 쓴 19세기 프랑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처럼 다른 문장을 훔쳐다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으로 온몸이 근질거릴 때일수록 근본에서 내가 쓰려는 문장을 점검해야 한다. 인두 같은 한 문장을 만나기 위해 활자의 바다를 항해하지만 문장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지 말아야 한다. 문장의 바다에서 나만의 체험적 깨달음이 가미된 나의 문장을 단어로 조합해서 창작해낼 때 비로소 나는 저자를 넘어 작가로 다시 태어난다.    

  


참조 없이 창조 없다     


한 권을 다 읽고 나서 묘한 데자뷰(deja vu)와 부자데(Vuja De')를 느꼈다. 처음 보는 데 익숙한 것처럼 느껴지는 기시감(旣視感) 또는 기시력(旣視力)을 데자부라고 한다. 반면에 익숙하지만 처음 보는 것처럼 느껴지는 신시감(新視感) 혹은 신시력을 부자데라고 한다. 모든 글을 데자뷰와 부자데의 절묘한 융합적 산물이다. 모든 예술적 창작이 이전 작품의 표절이듯, 모든 창작된 글은 이전 작품의 다른 버전이다. 참조 없이 창조 없다. 참고하지 않고 창조했다는 말은 신이나 할 수 있는 영역이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창작은 기존 작품을 참고하거나 참조해서 이루어진다. 여기서 문제는 참고한 문헌을 참조할 때 정확하게 어디서 어디까지 인용한 것인지, 직접 인용한 것인지 아니면 참고해서 작가의 문제의식으로 다시 녹여내서 제3의 창작물로 창조해낸 것인지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밝히지 않고 숨기면 언젠가는 들통난다. 내 글이 얼마나 표절한 문장이 많은지를 정확하게 검사하는 다양한 소프트웨어가 이미 개발되어 활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카피킬러라는 프로그램에 내 글을 집어넣어 돌려보면 어느 정도 표절한 문장인지를 정확하게 비율로 알려준다. 내 체험적 깨달음과 사유체계로 녹여낸 생각의 산물이 아니라면 검색 창에 집어넣고 판단해보라. 어디선가 비슷한 주장을 한 사람이 이미 어딘가에 숨어 있다.      



책은 제목과 목차, 그리고 독자를 유혹하는 카피 문장이나 띠지에 들어 있는 메시지를 보고 산다. 나도 제목과 출판사가 주장하는 카피 문장에 마음이 이끌려 책을 샀다. 처음에는 새로운 주장으로 신시감을 끌었지만 읽을수록 기시감에 사로잡혀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약간의 적개심과 더불어 분노가 생기기 시작했다. 어디서 많이 본 문장과 주장인데 마치 자기주장처럼 시종일관 주장하는 저자의 문장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가만히 유심히 어디서 많이 본 문장이 들여다봤다. 신기하게도 내가 쓴 책이나 어디선가 했던 강연 내용과 너무나 흡사한 주장이 곳곳에 나온다. 물론 그 주장도 순수한 나의 독창적인 주장이 아닐 수도 있다. 나 역시 다른 사람의 체험적 교훈과 저작물을 참고로 나의 주장으로 재가공한 창작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주장하는 어떤 체험적 교훈이나 깨달음의 원천이 내가 만든 것이 아니면 무조건 그 출처를 밝혀둔다. 나 역시 인용 없이 나의 주장으로 각색하고 희석시켜 보려는 유혹이 없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럴 때마다 출처를 분명하게 밝혀주고 해당 아이디어의 오리지널 창작자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시한다. 나 역시 창작의 고통을 경험하는 작가로 성장하는 꿈을 언제나 꾸면서 그 꿈을 향해 매일매일 어제와 다른 방법으로 노력을 거듭한다.     



4차 산업혁명 준비 보고서가 아니라 사차(死次실업 혁명 보고서다     


한 권의 책을 읽으면서 세상의 좋은 말들이 다 모여있다는 인상이 들었다. 거기에는 누구의 주장인지 출처를 밝혀놓은 익숙한 문장도 많다. 하지만 은근슬쩍 다른 사람의 오리지널 티를 무시하고 자신의 주장인 것처럼 편집되어 탄생된 문장이 책 곳곳에서 눈에 자주 띈다. 내 눈을 의심해서 다시 한번 읽어보고 이런 글을 내가 어디에 썼는지 블로그에 가서 검색해본다. 역시 내가 어떤 칼럼이나 책에서 주장한 문장과 주장이 그대로 드러난다. 이 책은 4차 산업혁명으로 포장한 자기 계발서지만 내가 보기에 사차(死次) 실업 혁명 보고서다. 구체적인 자기주장도 없을 뿐만 아니라 실행전략이나 구체적인 방법적 대안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듣기에 좋은 명언이나 주장을 경영학과 인문학에서 절반 정도씩 복사해서 뒤섞어 자기주장으로 만들어간다. 뒤로 갈수록 더욱 익숙한 문장이 자주 보인다. 체험적 깨달음으로 한 권의 책을 쓰기보다 다양한 사람의 주장을 어려가지 루트나 채널을 통해 가져와 비빔밥을 요리했지만 그냥 뒤범벅된 국적불문의 짬뽕밥이 되어버렸다. 남의 주장을 근간으로 논리적으로 설명을 거듭할수록 이해는 오지만 감동은 멀어진다. 체험적 깨달음의 얼룩과 무늬로 직조된 문장에는 그 사람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다. 머리로 짜 맞춘 문장이 아니라 몸으로 건져 올린 문장에는 피와 땀과 눈물이 뒤범벅되어 단도직입적으로 몸으로 파고든다.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서 마지막 장을 넘겼다. 온갖 잡다한 지식의 비빔밥처럼 느껴졌다. 이 책에 대한 마지막 느낌은 불쾌감이자 뒤끝이 깨끗하지 않은 허탈감이며 석연찮은 아쉬움이다. 자기주장이 아닌데 자기주장인 것처럼 주장하는 자기기만은 자기만이 안다. 피카소가 말한 것처럼 “훌륭한 예술가는 가까운 곳에서 베끼고(copy) 위대한 예술가는 멀리서 훔친다(steal).” 저자는 가까운 곳에서 너무 많이 베꼈다. 식상한 가운데 뭔가 다름을 보여주려고 시종일관 노력했지만 독자들의 색다른 깨달음에 다다르지 못했다. 멀리서 훔쳐 와서 내 것으로 편집했으면 많은 사람들이 창작으로 착각했을 텐데라는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어차피 모든 창작은 익숙한 것을 낯선 것으로 보여주는 데 있다. 무(無)에서 무(無)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유(有)와 유(有)를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편집하면 새로워 보일 뿐이다. 이전 작품을 단순히 나열하거나 적당히 편집하면 표절 죄로 걸린다. 표절을 하되 이전 작품과 다른 방식으로 즉 자기 방식으로 표절하면 창조적 표절이 되어 예술적 창작의 한 가지 방법으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저자는 누구나 다 아는 가까운 곳에서 베껴서 어설프게 편집하고 자기 것으로 주장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문장을 쓰는 일은 한 세상을 창조하는 일이다”(65쪽). 스탠리 피시의 《문장의 일》에 나오는 말이다. 한 세상을 창조하지는 못해도 이전 세상과 다르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과 식견을 제공하는 것 또한 문장의 중요한 기능이다. 어떤 문장을 쓰느냐에 따라 그 문장을 읽은 독자는 이전과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세상을 해석하는 안목을 습득한다. 하지만 비슷한 문장의 적당한 편집은 기시감과 신시감의 사이에서 독자들에게 실망감만 안겨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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