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불우(不遇)한 삶이
불후(不朽)의 명작을 낳는다

불우(不遇)한 삶이 불후(不朽)의 명작을 낳는다    


불우한 삶과의 조우(遭遇)가 불멸의 작품을 낳는다   

 

불우(不遇)한 삶은 “재능이나 포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때를 만나지 못하여 출세를 못했거나 살림이나 처지가 딱하고 어려운 삶”이다.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 입장에서 볼 때 불우한 삶은 우연히 운이 나빠서 낯선 환경과 조우(遭遇) 하지 못한 삶이다. 그래서 불우하다. 사람은 흔히 세 가지 점에서 불우하다. 첫째, 낯선 체험을 하지 못해서 불우하다. 나는 내가 해본 경험이 다. 내가 해본 경험이 나를 만들어간다. 비슷한 일을 반복하면 비슷한 경험을 축적한다. 내 생각은 내가 경험하며 깨닫는 순간에 생긴다. 하지만 비슷한 경험이 반복되면 기존 생각에 충격을 주는 낯선 자극을 받을 수 없다. 경험을 바꾸지 않고 비슷한 경험을 반복하는 사람이 불우한 첫 번째 이유다. 둘째, 낯선 사람과 만나지 못해서 불우하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나다. 내가 불우한 두 번째 이유는 낯선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나의 사유가 새롭게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나에게 인간적 자극을 제공해주는 사람을 만나야 과거의 나에서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어제 만났던 사람을 반복해서 만나면 인간관계도 바뀌지 않는다. 인간은 관계가 바뀌어야 바뀐다. 셋째, 낯선 지적 자극을 받지 않아서 불우하다. 낯선 지적 자극의 원천은 책이다. 책 아예 읽지 않는 사람은 나와 다른 낯선 생각을 품은 사람의 흔적에 접선할 수 없어서 매우 불행한 사람이다. 책을 아예 읽지는 않는 사람에 비해 좀 덜 불우하지만 여전히 불우한 사람은 비슷한 책을 반복해서 읽거나 경계 너머의 낯선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다. 내 생각에 불편한 자극을 제공헤주지 못하는 책을 반복해서 읽는 사람도 참으로 불우한 사람이다.    


이상에서 말한 불우한 삶을 다른 각도로 해석해보면 전혀 다른 불우한 삶이 나온다. 첫째, 낯선 체험을 하지 못해서 불우한 것이 아니라 내가 시도하는 거의 모든 체험이 체념으로 돌변하는 좌절과 실패 체험 때문에 불우하다. 절망의 늪에서 간신히 헤어 나와 새로운 꿈과 희망을 품고 새로운 일에 도전했지만 또다시 도주하고 싶을 정도로 처참하게 실패 경험을 남길 때 불우하다. 하는 일이 설상가상으로 좌절과 실패로 얼룩질 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걸림돌에 넘어진 불우한 체험을 디딤돌로 바꿔내는 실패작을 반복해서 양산한다. 걸작도 처음에는 졸작이었다. 불우했던 실패작이 폭풍우가 쏟아지는 난국을 돌파하는 노하우로 변신하는 과정을 졸작에 담아낸다. 어느 순간 졸작이 졸지에 당대의 화제작으로 돌변한다. 둘째,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 불우한 삶이 아니라 내 삶을 불우하게 만드는 사람을 만나서 불우하다. 누군가에게 한 사람은 한 세상이지만 또 누군가에는 한(恨) 많은 세상이다. 반려자를 잘 못 만나서 불우한 이혼과 삶의 파탄을 가져온 사람이 많다. 불온한 뜻을 품고 접근한 사람이 사기를 쳐서 일어설 수 없는 피해를 본 사람도 있다. 내 삶이 불우한 이유는 인간관계를 불우하게 만든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불우한 인간관계에서 이상적인 만남의 의미와 가치를 반면교사의 교훈을 배운다. 셋째, 낯선 자극을 주는 책을 읽지 않아서 불우한 것이 아니라 낯선 자극을 주는 책을 사서 읽을 수 없는 불우한 환경이라서 불우하다. 책을 살 돈이 없어서 도서관에 파묻혀 하루 종일 책을 읽는다. 읽고 싶은 책을 마음 편히 읽을 수 없는 환경이 되지 않아서 불우하다. 하루 종일 극심한 육체노동에 시달리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 책을 잡는 순간 졸음이 쏟아진다. 그럼에도 한 글자라로 읽으려는 사투가 눈물겹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가로등 불에 비추어 읽은 불우한 독서경험 덕분에 절박한 독자의 마음을 헤아리는 혜안을 가질 수 있었다.    



뜻밖의 자극이 잠재적 가능성을 흔들어 깨운다    


경험이 쌓여갈수록 쌓인 경험으로 쌓인 경험으로 타인의 생각을 재단하고 평가하려는 시도를 조심해야 한다. 경험의 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나의 생각이 나도 모르게 사각지대에 갇혀 타인의 낯선 생각을 자신도 모르게 거부하거나 나의 관점으로 평가하려는 관성이 생기지 않았는지를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내 안에 쌓인 과거의 경험을 주도면밀하게 따져보거나 바깥의 다른 경험에 비추어 재해석해내는 노력을 게을리하는 순간 나도 ‘∼주의(主義)’에 빠지게 된다. 예를 들면 경험한 것만을 실제 진리로 간주하는 실증주의(實證主義)에 빠지면 모든 걸 실증주의라는 안경으로 바라보고 평가한다. 다른 경험은 실증주의에 싫증을 내면서 생기는 편견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주의(主義)’에 주의하지 않으면 주의(注意) 하지 않으면 경험적 관성의 늪에 빠져버린다. 아무리 색다른 ‘바깥’의 자극이 들어와도 ‘안’의 사유는 기성의 언어를 관습적으로 끌고 나와 표현하기 시작한다. 색다른 사유는 색다른 언어를 통해서만이 글로 표현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타성의 늪에 빠져 바깥의 낯선 자극이 들어와도 몸속에 대기하고 있던 관습의 언어가 거의 반자동적으로 쏟아지면 식상한 문장을 대량 양산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그런 관습의 언어, 타성의 언어라는 거미줄에 걸려 끈적한 언어적 점성과 밀도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알아채리지 못한다는 데 있다. 어지간한 노력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언어적 관성의 늪에서 좌정관천의 식견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바깥의 낯선 타자와 자주 만나는 마주침의 자극이 깨우침의 교훈을 전해주는 글을 낳는다. 모리스 블랑쇼가 말하는 ‘바깥의 사유’가 글 쓰는 사람에게도 중요한 의미로 다가오는 이유다. 경계를 넘어 바깥에 나가 살아보고 전공 바깥에 나가 다른 책을 읽어보는 사람만이 편안한 안의 사유에 머무르지 않고 바깥의 자극이 주는 마주침으로 뉘우침을 얻어내고 깨우침의 글로 독자에게 공감으로 다가간다. 글짓기와 책 쓰기가 오로지 글과 책을 짓고 써보겠다는 불굴의 의지만으로 가능하지 않은 이유다. 내가 생산하는 문장은 바깥의 자극이 내 안으로 들어와 숙성된 사유의 산물이다. 지금의 나를 벗어나 미지의 내가 되어보려는 몸부림은 느닷없이 나에게 다가온 낯선 마주침이 낳는다. 우연히 잡은 고시 체험생 수기집이라는 바깥의 자극이 현실에 안주하려는 나의 타성을 흔들어 깨운 것이다. 내 안에 들끓는 욕망이 잠재하고 있었지만 바깥의 자극을 만나지 못하면 내 안의 욕망은 잠자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높은 가능성이 잠재성으로 내 안에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 잠재적 가능성을 흔들어 깨우는 바깥의 자극을 만나지 못한다면 잠재적 가능성은 영원히 내 안에서 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헌 책방에서 쇼펜하우어의 책을 만난 니체 역시 목자의 길을 포기하고 철학자의 길을 걸어간다. 나의 바깥의 지평이 열리면 나의 안이 심화되고 확장된다. 잠자고 있던 내 안의 무의식적 자아가 바깥에서 들어온 뜻밖의 자극이 어떤 뜻을 품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밖으로 향하는 몸부림의 관문(關門)이 안으로 들어가는 입문(入門)을 바꾼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 역시 인식의 깊이와 넓이를 심화하고 확산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밖으로 향하는 몸부림의 관문이 닫히는 순간 아무리 주문(呪文)을 외워도 나에게 영감을 주는 그분은 다가오지 않는다.    



울부짖는 절규가 울림을 주는 글을 낳는다    


울림을 주는 글은 울림을 당해본 사람만이 쓸 수 있다. 흔들려본 사람만이 세상을 뒤흔드는 글을 쓴다. 울림은 나와 바깥의 자극이 만나 충돌하는 마찰음일 수도 있고 도덕적 분노나 지적 분개를 부르는 몰상식한 행동에 대한 나의 울음일 수도 있다. 마음에 들지 않지만 지금 상황으로는 어쩔 수 없어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겪는 감정적 소용돌이가 바로 울림이다. 힘들지만 버텨내야 하는 당위론적 사명 앞에서 나약한 내가 토해내는 울부짖음이 울림이다. 처절한 삶의 구절양장이 작곡하고 고단한 삶을 견뎌내는 의지가 작사한 울음이 세상을 향해 울려 퍼지는 문장으로 직조된다. 나의 울음이 울려 퍼지기 위해서는 나를 울렸던 좌절과 절망의 뒤안길에서 절치부심하며 겪어낸 우여곡절의 사연을 언어로 담아내는 문장에 녹여야 한다. 갈림길에서 고심 끝에 찾아냈다고 생각했던 나의 길이 나의 갈길이 아님을 다시 깨달았을 때, 언제 다시 찾을지 모르는 암담함과 불안감이 엄습해올 때, 스스로를 세상의 끝자락에 던져놓고 사라지지 않기 위해 전쟁 같은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몸으로 써낸 글이라야 세상의 기준과 표준에서 벗어나 나를 중심에 세울 수 있는, 내 삶을 그대로 대변하는 글로써 독자에게 울림을 준다. 나를 울렸던 현실과 맞서 싸운 얼룩이 무늬로 직조된 문장이라야 저자의 체험적 주장이 울림으로 다가온다. 이처럼 밖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사건과 사고는 내 안의 마음이나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일이다. 갑자기 천둥과 번개가 치고 멀쩡했던 날씨가 돌변하며 소나기를 몰고 온다. 비바람이 불다가 눈보라로 바뀌면서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폭설이 내리기도 한다. 현실은 언제나 사전 각본대로 결정론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느닷없이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나 어쩔 수 없는 사태를 만들어내는 통제할 수 없는 변수로 가득하다. 삻은 뜻밖의 일이 생각지도 못하는 사이에 일어나는 우발적 마주침이 각본 없이 연주되는 변주곡이다.  

   

“(연탄보일러에서 끓고 있는) 물은 불에 저항한 만큼 따뜻하다”(103쪽). 함민복 산문집, 《눈물은 왜 짠가》에 나오는 말이다. 나를 괴롭히는 상극의 힘과 맞서 싸우지 않으면 내 삶 역시 뜨거워지지 않는다. 나를 울리는 수많은 불안함이나 불편함과 맞서 싸운 만큼 내 몸도 거기에 상응할 정도로 사투의 흔적으로 휘감긴다. 그 흔적이 농축되고 숙성되면 심금을 울리는 글발로 발현되어 나온다. (백지 위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글은 삶에 저항한 만큼 농밀해진다. 아무것도 쓰기 전에는 내 머리도 하얀 백지였지만 나를 울렸던 수많은 사투의 흔적을 더듬어 겉으로 토해낸 만큼 하얀 백지도 단어의 무늬로 가득 차기 시작한다. 밋밋한 삶은 밋밋한 글을 낳는다. 어둠으로 얼룩진 고단한 삶이 독자의 어두운 길을 비추는 빛으로 다가간다. 삶의 소중한 의미와 가치는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사건과 사고가 품고 있는 사연은 어둠으로 가려져 있거나 정면의 반대편에 숨어 있다. 인생의 뒤안길에서 살아가며 버틴 고단함의 흔적이 살아 숨 쉰다. “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쪽만 보여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서 우리는 짐작으로 밖에 알지 못하는데 정작 단 하나 중요한 것은 그쪽이다”(90쪽). 장그르니에의 《섬》에 나오는 말이다. 작가는 감춰진 이면의 아픔을 드러내 파헤치는 글을 쓸 때 독자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간다. 눈물 흘리며 어둠의 터널에서 불안에 떨 때, 터널 끝에 이르면 비로소 서광이라도 빛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온 작가의 불우한 삶이 언젠가는 불후의 명작으로 세상 밖으로 나온다.    



언어로 삶을 죽이는 순간 문장이 탄생한다   

 

“나는 글쓰기를 통해서 다시 태어났다···. 나는 글을 씀으로써 존재했고 어른들의 세계에서 벗어났다. 나는 오직 글쓰기를 위해서만 존재했으며, '나'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할 따름이었다(166쪽).” 장 폴 사르트르의 《말》에 나오는 글쓰기와 존재와의 관계에 관한 글이다. 글 쓰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고민해야 할 화두와 질문은 지금 내가 쓰는 글은 나의 삶에서 건져 올린 생각의 정수가 담겨 있는가이다. 내가 쓰고 있는 글은 처절한 삶의 한 끝자락을 붙잡고 그것이 던져주는 의미의 실체를 반추하며 녹여내는 사유의 산물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인식체계 위에 지어 올린 사상누각인지를 끊임없이 반문해야 한다. 내 생각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생각이 나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와 내 생각인양 주인행세를 한다. 글을 쓰는 나는 얼마나 자주 나를 벗어나 내가 상상하는 미지의 세계 속의 나로 변신하는 경험을 하는가? 나를 옭아매는 언어적 그물에서 탈출하여 나의 바깥으로 탈주하는 경험만이 기존 세계에 안주하려는 나를 어제와 다르게 변신시키는 원동력이다. 내가 아닌 나로 생각해보게 만드는 바깥의 사유가 대체 불가능한 나를 만들어가는 변신의 힘이다. 대치 불가능한 존재라야 대치 불가능한 글이 나오고 책이 만들어진다. 나 말고 누군가가 쓸 수 있는 글이나 책은 내 삶을 담아내지 않아서 생기는 부산물이다. 똑같이 니체를 읽었지만 나의 체험적 틀로 재해석해내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다. 내가 만난 니체는 내 몸을 통과하고 나서 생긴 나의 니체다. 그 니체는 다른 사람의 몸을 관통하고 생긴 니체와 아우라가 다르다. “작가란 과거의 시간에 생명을 불어넣는 사람, 사라져 가는 시간에 거역해서 글을 쓰는 사람이다.” 독일의 소설가, 귄터 그라스의 말이다. 내 몸에 각인된 사건의 추억과 사고의 아픔이 사라지기 전에 언어를 매개로 체험을 붙잡아두려고 애간장을 녹인다. 그것이 언어로 포착되는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만 과거는 그 자리에서 언어로 위장된 문장을 남기고 사라진다.    



“결국 글쓰기란 감옥, 절대 석방되지 않을 것이지만 어찌 보면 낙원인 섬과 같다. 고독, 사색, 이 순간 이해한 것과 온 마음으로 믿고 싶은 것의 정수를 단어에 담는 놀라운 기쁨이 있는 섬”(11쪽). 제임스 설터의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에 나오는 말이다. 책이든 바깥의 사유든 내 몸을 통과하는 순간 그 경이로운 순간을 단어에 담아내려는 치열한 사투가 앓고 난 사람이 보여주는 인간다움, 즉 아름다움으로 아픔을 잊게 만든다. 작가는 사소한 일이라도 흔치 않은 문제의식으로 색다르게 해석해보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그 무엇인가에 끌려간다. 끌려가는 과정을 글로 담아내지만 글로 담아낸 문장이 탄생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다가온 그 무엇은 죽는다. 마치 순간 포착한 들판의 야생화를 사진을 찍어 액자 속에 가두는 순간, 액자 속의 야생화는 죽은 꽃이다. 사진으로 바깥의 꽃은 죽임을 당하고 액자 속 꽃으로 재탄생된다. 사진으로 찍히는 순간 꽃은 죽고 꽃이라는 사진을 낳는다. 마찬가지로 바깥에 존재하는 그분의 이끌림으로 따라가며 언어로 담아낸 문장이 탄생하는 순간 이끌림으로 다가온 영감은 죽는다. 사막을 붉게 물들이는 저녁노을의 감동을 언어로 담아내는 문장을 건축하는 순간, 문장 속의 저녁노을은 이미 죽은 상태다. 황홀한 저녁노을 언어로 빚어내려고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그 절경의 풍광이 언어에 담기는 순간 죽은 노을이다. 내 바깥의 낯 섬이 언어와 만날 때 낯선 언어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그 대가로 문장이 탄생한다. 고심 끝에 언어로 포착된 문장과 언어로 포착되지 않은 난감한 주장 사이에서 나는 오늘도 절치부심하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평범한 일상에서 문장 건축가로 비상하는 비밀 전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