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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일상에서
문장 건축가로 비상하는 비밀 전략

글짓기는 집 짓기이자 짝짓기다

평범한 일상에서 문장 건축가로 비상하는 8대 비밀 전략

글짓기는 집 짓기이자 짝짓기다


문장은 집 짓기처럼 다양한 재료가 필요하다. 우선 문장에는 적확한 단어가 자기 자리를 잘 찾아가 들어앉아야 한다. 자기 자리를 잘 못 찾아간 단어는 다른 단어와 어울리지 못한다. 예를 들면 ‘비참한 자태’보다는 ‘비참한 몰골’이 더 어울린다. ‘천사처럼 고운 모양’보다는 ‘천사처럼 고운 자태’가 어울린다. 이처럼 형용사와 명사는 어울리는 짝이 있다. 짝이 맞지 않는 단어 배치로 건축한 문장은 무너진다. 이런 점에서 글짓기는 단어들의 짝짓기다. “어느 날 길에 모인 명사(名詞)들. 형용사 하나가 지나간다. 짙은 아름다움을 간직한 여인. 명사는 충격과 감동으로 변화를 겪는다. 이튿날, 동사가 이들을 몰아 문장을 창조한다”(65쪽). 스탠리 피시의 《문장의 일》에 나오는 말이다. 문장을 잘 짓는 일이 글을 쓰는 비결로 연결되고 그런 글이 묶여서 한 권의 책으로 탄생한다. 시작은 문장이다. 하지만 문장을 건축하는 기술을 배운다고 바로 심금을 울리는 문장 건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낱말은 외로운 그 몇 사람처럼/아직 날지 못하는 새를 기르며/단절된 시간을 한 장씩 넘기고 있다.” 오규원 시인이 ‘현상 실험 別章’이라는 시의 일부다. 낱말을 낱낱이 조사해서 제 위치에 갖다 놓아도 다른 낱말이 새로 들어오는 낱말을 거부한다. 자기들이 대화를 나무며 웅성거리다 받아주기로 한다. 그렇게 낱말은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낱말과 어울려 살아간다. 내 생각에 어울리는 단어를 집어넣었지만 기존의 단어가 거부할 수도 있다. 나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기득권을 쥐고 있는 단어가 열렬히 환영해서 자기편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저자의 한숨은 깊어지고 시간의 페이지는 자꾸 다음 장으로 넘어가려고 한다. 



“몇 줄을 쓴 다음엔 단어들이 다시 자신들이 속한 언어 생명체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게 내버려 둔다. 그러면 거기에서 한 무리의 다른 단어들이 그 말을 알아보고 맞아준다. 그들 사이에 의미의 유사함, 반대 의미, 비유, 운율이나 리듬 같은 것들이 생겨난다. 나는 그들이 나누는 담소에 귀를 기울인다. 그렇게 함께 단어들이 내가 자신들에게 부여하기로 한 의미를 놓고 경쟁한다. 그들은 내가 부여한 역할에 대해 질문한다. 그러면 나는 문장을 다듬고, 단어를 한두 개 바꾸어서 다시 밀어 넣는다. 다시 담소가 시작된다. 잠정적인 동의를 나타내는 낮은 웅성거림이 들릴 때까지 그 과정은 계속된다. 그러고 다음 문단으로 넘어간다. 다시 담소가 시작된다”(10-11쪽). 존 버거의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에 나오는 말이다. 단어들이 나누는 담소가 모습에 그려지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는 문장이다. 이렇게 문장은 단어들의 각축전으로 서서히 모습을 갖춰가면서 문장과 문장이 이어지면서 글짓기를 점차 완성되어 간다. 모든 문장의 재료는 단어지만 단어와 단어를 연결시키는 접착제는 저자의 깊은 사색과 고뇌에 찬 결단이다. 사색의 강물에서 노니는 생각의 재료들이 주어진 단어와 만나 절묘한 궁합이 맞을 때 아름다운 문장이 탄생된다. 


여기서는 문장을 건축하기 위해 사용하는 8가지 전략을 살펴본다. 첫째 문장은 자신이 겪은 사례나 에피소드와 관련된 경험을 반추하면서 얻는 각성과 교훈으로 건축된다. 둘째, 문장은 다른 사람의 주장을 직접 인용하거나 내 경험에 비추어 해석하는 간접 인용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셋째, 문장은 명언이나 속담, 문장이나 사자성어를 비틀어 의미를 변주하는 가운데 만들어지는 경우도 많다. 넷째, 다양한 소재나 주제를 상징하는 키워드와 동사를 무작위로 연결시키는 가운데 상식을 뒤집는 문장이 창조되기도 한다. 다섯째, 언어 감옥을 탈출하기 위해 명사와 동사를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연결시켜 시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가운데 짝퉁 시인의 문장이 탄생되기도 한다. 여섯째, 다양한 은유법을 사용하면 문장도 탄생하고 은유 덕분에 이전과 다른 사유를 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린다. 일곱 번째, 기존 개념을 나의 신념을 추가해서 새롭게 정의를 내리는 방식이다. 여덟 번째, 색다른 생각을 표현할 적당한 언어가 없을 때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는 방식이다.  



경험 반추사례나 에피소드를 통한 각성과 교훈


경험 반추는 저자가 겪은 사례나 에피소드에 의미를 부여해서 어떤 깨달음과 교훈을 끄집어내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문장이다. 성공한 사례에서도 배울 점이 많지만 사람에게 더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사례는 실패 사례다. 누구나 실패하는 경험을 하지만 거기서 소중한 교훈을 배우면서 색다른 실력을 쌓는 사람도 있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 실패해본 경험이 있다. 그걸 끄집어내서 왜 실패했는지, 실패를 통해서 깨달은 교훈이 무엇인지를 복기하면 다른 사람에게도 공감되는 문장을 건축할 수 있다. 에피소드는 글감의 중요한 원천으로 사용된다. 예를 들면 나는 트위터에 지식산부인과 의사라고 자기소개란에 써 놨는데 여러 번에 걸쳐 임신한 여성들에게 상담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 임신 관련 본인이 겪는 문제나 애로 사항에 대해서 잠깐 상담해줄 수 있느냐는 문의를 많이 받았다. 절박한 사람에게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지식산부인과 의사를 산부인과 의사로 착각한 것이다. 앞의 지식은 보이지 않는다. 간절할수록 그리고 절박할수록 주변의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볼 때 내 눈에 써진 편견과 선입견의 안경을 끼고 바라보지는 않는지 살펴볼 일이다. 경험의 늪에 빠지지 않으려면 비슷한 경험을 반복하는 관성에서 벗어나 비슷한 일이라도 다르게 추진하는 방식을 자주 사용해볼 필요가 있다. 



문장 인용다른 주장을 직접 인용하거나 간접 인용


글을 쓰기 위해서는 문장을 만들어야 한다. 모든 문장은 단어와 단어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똑같은 현상도 거기에 동원되는 단어가 어떤 단어를 만나 조합을 이루어내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표현이 가능해진다. 책을 읽다 보면 정말 뜨거운 인두에 데듯이 심장에 뜨거운 열기 가득한 강렬한 자극을 주는 문장을 만난다. 이런 문장은 무조건 별로도 메모해놓았다가 비슷한 주장을 하고 싶을 때 그 문장을 인용하면 글의 맛도 살아나고 내가 주장하는 문장도 힘을 받는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건 나의 일이었다”(228쪽). 김연수의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에 나오는 문장이다. 자주 이문장도 간단하게 패러디해서 써먹는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책을 읽는 건 나의 일이었다.” "창작이라는 것은 본래 왼쪽에서 뛰는 심장이 시켜서 하는 일입니다(p.189).”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에 나오는 말이다. 그래서 모든 예술가는 왼쪽 심장이 더 좌파라고 할 수 있을까. 좌파라는 생각을 왼쪽 심장이 시켜서 하는 일라는 발상이 특이함이 담긴 문장이다. 감동적인 문장은 시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어쩌면 모든 시는 주옥같은 문장으로 지은 한 채의 멋진 집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해서 종은 더 아파야 한다.” 이문재 시인의 ‘농담’이라는 시의 일부다. 우리는 더 내면적으로 아파야 보다 많은 사람에게 알릴 수 있는 나의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의미 변주명언속담사자성어문장의 글자 바꿔치기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프랑스 문학자 폴 브루제의 명언이다. 내 경험상 인간은 생각하는 대로 살기 어렵다. 그래서 이 명언을 이렇게 바꿨다. “생각하는 대로 살기 어렵다. 사는 대로 생각하자.” 다른 사람의 명언을 기반으로 내 생각을 추가해서 변형하면 훌륭한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고진감래(苦盡甘來)는 “고생 끝에 통증밖에 오지 않는다”로 바꿔치기를 하면 사자성어로 고진통래(苦盡痛來)로 바꿀 수 있다. 파란만장(波瀾萬丈)이라는 사자성어를 파란문장(波瀾文章)으로 바꿔서 책 제목으로 쓴 적이 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산 한 사람이 남긴 한 문장, 파란문장이 다른 사람의 삶에도 파란을 일으킨다. 문장은 책상에 앉아서 관념적으로 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고단한 인생을 살면서 온몸으로 느끼고 깨달은 교훈을 촌철살인의 감각으로 포착해서 만들어낸 고뇌의 산물이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 구절도 단어만 바꿔도 의미가 심장해진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백지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시험지가 되었다.



일상 관찰익숙한 일상에서 비상하는 상상력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잘 때까지 하루 일과는 언제나 틀에 박혀 있다. 만나는 사람도 한정되어 있고 출퇴근하는 길도 정해져 있다. 먹는 음식도 비슷하고 일하는 공간도 언제나 어제와 같다. 내가 보내는 시간이 비슷한 인간과 만나 비슷한 공간에서 지낸다면 내가 일상을 소재로 쓸 수 있는 글도 틀에 박혀 있을 것이다. 작가는 쓰레기 더미에서도 쓸 이야기를 찾아내는 사람이다. 반복되는 익숙한 일상도 낯선 시간과 관점으로 바라보면 일상은 상상력이 자라는 텃밭이다. 늘 나의 글쓰기를 말없이 지원해주는 노트북의 날을 만들어보자. 그는 언제나 전원을 연결하면 잠시 후에 어김없이 파란불을 깜빡이며 키보드로 나의 손가락을 끌어당긴다. 키보드가 안내해주는 대로 자음과 모음을 조합해서 단어를 만들고 단어가 단어와 만나 문장을 만들어가는 놀라운 문장 건축 기계가 바로 노트북이 아닌가. 나는 노트북 덕분에 복잡한 생각을 글로 표현해서 하얀 백지 위에 매일 문장으로 무늬를 만들어가는 문장 건축가다. 퇴계가 좌우명으로 삼고 늘 일상에서 경각심을 갖게 해 준 문구가 바로 무불경(無不敬)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공경하지 않을 게 없다. 그러니 경각심을 갖고 경건하게 대하면서 나에게 전해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성찰하라는 말이다. 풀 한 포기가 계절을 잘 못 알고 꽃을 피웠다 된서리를 맞았다. 깜짝 놀란 그 식물은 열었던 꽃 봉오리를 닫고 다시 따뜻한 온기를 기다리는 모습이 처연하다. 일상의 모든 사물도 저마다의 존재 이유가 있다. 달리던 차의 속도를 멈추게 하는 스피드 범퍼는 오늘도 무수한 차의 무게에 짓눌리면서도 여전히 거기서 나에게 경고장을 날린다. 속도를 줄이라고. 



언어 변주언어적 감옥 탈출과 짝퉁 시인되기


한겨레 신문에 연재했던 김진해 교수의 [말글살이] ‘짝퉁’ 시인되기에서 배운 문장 건축 방법이다. 이 문장 건축은 틀에 박힌 언어적 관성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단어와 단어를 조합해, 특히 명사와 동사를 조합해 새로운 언어의 그물을 치며 문장을 건축하는 방식이다. 시인들은 일반 사람들이 사용하는 일상 언어 방식을 거부한다. 그렇게 해야 나도 모르게 내 몸에 새겨진 언어 사용 문법이나 규칙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언어의 세계로 인도하는 언어적 리더다. 타성에 젖은 관습 언어에 싫증이 난다면 ‘짝퉁’ 시인이 되어 새로운 언어로 색다른 문장을 건축해보자. 예를 들면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명사와 동사를 다섯 개씩 써보자. 이를테면 ‘책상, 커피, 신발, 우산, 도시락’ ‘두드리다, 펄럭이다, 달리다, 먹다, 날다’. 명사와 동사를 자유롭게 섞어 예상치 못한 문장을 만들어보자. ‘커피가 책상 위를 날다’ ‘우산이 책상 위에서 도시락을 먹다’ ‘책상이 신을 두드리다’ 식으로. 이런 생각지도 못한 단어 조합이 예상 밖의 의미심장한 문장을 건축한다. “책상이 신발을 두드리다 우산과 함께 하늘을 날다.” 기성 언어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문장이다. 사물이 의인화되어 자신의 욕망을 발산하는 새로운 문장이 탄생된다.



은유 활용은유를 사용하여 발전하는 사유


겉으로 보기에는 닮지 않았지만 자세히 보면 닮은 점이 있다. 관계없는 두 가지 단어가 관계있는 단어로 연결되면서 이전의 개념에 대한 정의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열린다. 예를 들면 “공부는 망치다”다 은유적 문장이다. 공부는 뭔가를 깨닫기 위해 새로운 사실을 하나둘씩 깨우치는 정신노동이다. 이렇게 정의한 공부에 관한 문장은 국어사전이나 어떤 교과서에 나오는 틀에 박힌 개념 정의다. 공부에 관한 새로운 사유가 촉발되지 않는다. 공부라는 추상명사는 정의를 내려도 여전히 추상적이다. 추상명사인 ‘공부’와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보통 명사 ‘망치’를 연결시켜 “공부는 망치다”라고 은유적 문장을 쓰면 추상명사 ‘공부’는 갑자기 보통명사 ‘망치’로 의미가 이전된다. 왜 공부는 망치일까? 겉으로 보기에 공부와 망치는 닮은 점이 없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닮은 점이 많다. 공부를 통해 고정관념을 깨부수듯, 망치도 건축된 기존의 것을 깨부수는 도구다. 공부가 잠들어 있는 타성을 흔들어 깨우듯, 망치도 굳어있는 시멘트 바닥을 흔들어 깨부순다. “A는 B다”라는 형식을 띄는 은유적 표현의 강점은 추상명사 A가 보통명사 B로 의미가 전환되면서 추상적인 의미가 갑자기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의미로 쉽게 포착된다.



개념 재정의(재개념화): 기존 개념 정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의미 부여하기


문장이 식상해지는 이유는 누군가 이미 정의한 개념을 그대로 답습하기 때문이다. 색다른 문장은 이미 정의한 방식과 다르게 기존 개념을 정의하면 신선하게 와 닿는다. 예를 들면 교육은 사전에 찾아보면 “지식과 기술 따위를 가르치며 인격을 길러 줌”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지식과 기술을 가르쳐 인격을 기르는 의도적인 행위를 교육으로 본다. 새로운 문장은 기존 개념에 대해 나의 체험적 깨달음을 추가해서 신념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탄생된다. 내가 생각하는 교육은 결핍된 지식과 기술을 충족시켜 인격을 연마하는 행위라기보다 “익숙한 세계에 머무르려는 사람에게 불편한 자극을 제공함으로써 편안했던 삶을 힘들게 만들어주는 죽비”라고 생각한다. 교육은 뭔가를 채유는 소유와 습득보다 갖고 있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익숙한 세계로부터 버리고 떠나게 만드는 비움과 버림의 개념에 더 가깝다. 커피는 식전이나 후에 마시는 차의 종류가 아니라 창작 작업에 앞서서 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준비하는 의식행위에 필요한 각성제다. 사랑은 “두 사람이 주고받는 애정”이라는 추상적 정의보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주인공으로 대접받는 만남”이다. 사랑한다는 이야기는 내가 만나는 사람은 내 인생의 주연 배우로 등장시키는 나의 희생이기 때문이다.



개념 창조기존 개념의 조합 또는 신개념 창조


학습건강 전문의 사라는 직업이 있다. 기존 전문의 사라는 직업에 학습과 건강을 융합, 학습 질환을 규명하고 사전에 예방-처치-치료하는 학습분야의 건강을 증진시키는 전문 의사다. 공부는 수험생은 물론 뭔가를 배우고 익히는 모든 사람들이 쉽게 걸니는 병명을 찾아내서 그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예방 조치를 취해야 할지, 그리고 각각의 학습 질환이 보여주는 증상과 치료방안, 병을 치료하는 데 필요한 학습 신약을 개발하는 데 전문적인 식견과 경험을 갖고 있는 의사다. 학습건강전문의사라는 직업이 생기면 병원과 약국이 의약분업 원칙에 따라 의사와 약사가 독립적인 업무 영역을 갖듯이 학습 병원과 학습 약국을 설립하고, 학습 의사와 학습 약사를 별도로 양성할 수 있다. 새로운 개념이 조합되면 거기에 걸맞은 새로운 사유가 시작된다. 한편 기존 개념의 재조합으로도 자신의 문제의식을 표현할 수 없을 때는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는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철학자가 자신만의 독특한 철학적 문제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철학적 개념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면 니체는 아모르 파티(amor fati)를 만들어 운명애라는 의미를 부여했고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은 엘랑비탈(Elan Vital)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생명이 도약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질적 비약을 설명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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