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경멸’의 대상에서
‘존경’의 주체로

사체(死體)에서 신체(身體)로, 신체에서 다시 전체(全體)로

‘몸’, ‘경멸’의 대상에서 ‘존경’의 주체로:

사체(死體)에서 신체(身體)로, 신체에서 다시 전체(全體)로



몸이라는 말은 ‘ㅁ’이 아래위로 나뉘어 오묘한 형상을 띠고 있다. 생각만 해도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몸은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함께 하는 내 삶의 동반자다. “우리가 가장 믿고 사는 이것. 우리가 가장 숭배하고 사는 이것. 우리에게 가장 큰 실망을 주는 이것. 우리에게 가장 다양한 실망을 주는 이것. 우리에게 변함없이 새로운 실망을 주는 이것. 그리하여 가장 연연하는 이것. 하여, 몸은 우리에게 말한다. 몸의 언어로. 몸의 방식으로. 몸으로써, 몸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 '감각'이며, 감각에 기대어 몸의 언어를 듣는 일이 '아픔'이며, 몸의 언어에 화답을 하는 일이 '통증'이며, 몸이 자신의 언어에 귀를 기울여준 고마움을 표하는 일이 '회복'이다”(148쪽). 김소연의 《한 글자 사전》에 나오는 말이다. 몸은 나와 함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넘어 육정(六情)을 담고 있다. 사람의 여섯 가지 감정인 희(喜), 노(怒), 애(哀), 낙(樂), 애(愛), 오(惡)는 몸을 매개로 일어나는 육욕(肉慾)이기도 하다. 몸은 언제나 뭔가를 욕망하는 주체이자 잠시도 시들지 않고 에너지를 발산하는 욕정(慾情)의 중심이다. 몸은 단순히 육신(肉身)이나 육체(肉體)를 넘어 세상을 몸으로 느끼고, 몸으로 생각하고, 몸으로 읽고, 몸으로 바라보며, 몸으로 반응하는 감정이나 감각적 깨달음을 통합하고 있다. 본래 몸이라는 말은 그래서 신체와 정신이 나눠지지 않고 하나로 통합된 실체다. 즉 몸에는 물리적 신체와 심리적 마음이 결합되어 내 삶을 주관하는 주체다. 그래서 몸값은 단순히 나의 신체에 대한 물리적 가격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 몸으로 체화(體化) 또는 육화(肉化)시킨 체험적 노하우를 환산했을 때 받을 수 있는 가치가 몸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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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가장 먼저 몸을 풀면서 세상으로 나온다. ‘몸풀이’라는 말은 ‘해산하다’, ‘아이를 낳고 몸조리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즉 몸을 푼다는 말은 “뱃속의 생명이 세상 밖으로 나온다”는 의미다. 그만큼 몸은 태어날 때 한 사람의 생명성을 그대로 지니고 나온다. 몸은 태어날 때부터 정신과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결합체로 세상 밖으로 나온다. 더불어 ‘몸풀이’는 아이를 낳는 순간부터 산후조리를 하는 단계를 두루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참고 박남일의 《우리말 풀이사전》). 우리 몸에는 약 206개의 뼈와 650개의 근육, 1백 개 이상이 관절로 이루어졌다고 한다(참고 오동환의 《우리 삶에 가장 소중한 것은 모두 한 글자로 되어 있다》). 몸은 뼈와 뼈 사이를 관절로 연결하고, 뼈를 다시 살로 뒤덮어서 만들어졌으며, 살 속을 수많은 핏줄로 연결하여 죽을 때까지 피를 운반하면서 하나의 온전한 생명체로 나와 함께 살아간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몸의 탄생과 유지는 과학의 힘만으로 풀 수 없는 신비 그 자체다. 이런 몸을 너무 심하게 쓰면 몸살로 신호를 줘서 몸을 살살 쓰게 만들고, 절박한 순간에는 몸을 낮추고 몸소 나타나 몸으로 말하는 진정성을 보여준다. 입으로 담아낼 수 없는 절절함으로 몸으로 말하고 그걸 상대방이 몸의 눈, 즉 육안(肉眼)으로 확인할 때, 상대가 간절한 몸부림에 담긴 진정성을 알아준다. 몸으로 말할 때, 몸으로 자신의 안타까움을 호소할 때, 입으로만 말하는 사람보다 진심이 담긴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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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위기를 감지하거나 심각한 문제 상황에 직면했을 때 사람은 몸을 사리지 않고 발 벗고 나서서 상대방을 도와주는 미덕을 발휘한다. 몸으로 보여주는 모든 움직임은 거짓이 없다. 다급할 때는 몸을 던져 물불 가리지 않고 일을 하지만 나의 한계라고 생각될 때는 몸을 사리기도 하며 몸을 관리한다. 몸은 언제나 나와 함께 살아가며 내가 돌보고 보살피는 나의 동반자였다. 멀리 떠나는 사람에게 “몸조심하세요”라고 인사한다. “머리나 정신 조심하세요”라고 하지 않는다. 몸조심은 건강관리에 각별히 신경 쓰라는 의미가 있다. 또한 몸조심은 곧 말과 행동을 조심하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그만큼 몸은 곧 한 사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실체이자 본질이며 핵심이다. 이제 더 이상 몸은 뼈와 살과 피로 이루어진 육체나 신체를 넘어선다. 몸은 마음이 거주하는 우주이자 그 마음으로 세상과 만나는 뜨거운 접경지대다. 이처럼 몸은 사람이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를 구분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됨에도 서양 철학사 전반은 인간의 몸을 무시하고 정신을 우위에 두었던 반지성적 철학의 역사였다. 철학 자체가 앎을 사랑하는 학문이었지만 몸으로 체득하는 앎보다 순수한 영혼이나 정신으로 깨닫는 이성적 앎을 사랑했다. 그래서 철학은 사실 철이 들지 않은 학문이었다. 살아 숨 쉬는 몸이 구체적인 삶의 맥락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면서 깨닫는 감각적 앎이야말로 오감으로 깨닫는 살아 있는 앎이었지만 철학은 그런 몸을 천시해왔다. 그 극단을 달렸던 두 명의 철학자가 바로 플라톤과 데카르트다. 이들은 몸을 무시하고 영혼이나 정신만으로 순수한 앎에 도달해야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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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플라톤(Plato)의 오판,

육체는 영혼을 더럽히는 불결한 존재다


플라톤에 따르면 “몸은 영혼의 감옥이다.” 육체는 영혼을 더럽히는 불결한 존재다. 플라톤은 영원불멸하는 이데아를 찾아 나서기 위해서는 회로애락을 겪다가 결국은 병들어 죽어서 없어지는 불결한 육체를 순수한 영혼에서 분리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육체가 순수한 영혼을 유혹하고 자극해서 탐욕과 욕망의 길로 타락시키기 때문이다. 진정한 철학적 사유를 통해 이데아에 이르기 위해서는 육체가 영혼을 탐욕으로 물들게 하거나 부패시키는 방해와 간섭으로부터 엄격하게 통제하거나 차단해야 된다는 주장이다. 단순히 육체와 영혼을 분리시키자는 주장이 아니라 육체를 죽여야만 영원불멸하는 정신이 되살아나 절대불변의 진리를 탐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무 살에 생을 마감한 천재 작가 레몽 라디게가 17세에 발표한 심리 소설의 역작, 《육체의 악마(Le Diable au corps)》에서처럼 플라톤에 육체는 가까이할수록 해로운 악마였다. 육체가 병이라도 든다면 영혼은 순수한 진리탐구에 방해를 받을 것이고, 육체가 품고 있는 욕정과 욕망들은 영혼을 온갖 환영(幻影)에 빠뜨린다는 것이다. “몸으로 인해서 참된 것을 볼 수 없게 되고 말지……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되도록 몸과는 전혀 같이 지내지도 함께 하지도 말며, 몸의 본성으로 영향을 받는 일도 없게 하되. 신이 몸소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줄 때까지는, 우리가 자신을 몸에서 순수한 상태로 유지할 때에나 말이지”(66-67쪽). 플라톤의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 플라톤의 네 대화 편》에 나오는 말이다. 육체가 없는 영혼은 과연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육체는 영혼이 거주하는 우주다. 자신이 거주하는 집을 경멸하고 무시하는데 과연 그 집 속에서 살아가는 영혼은 맑은 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과연 육체를 죽이면 정신이나 영혼은 순수하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영혼 없이는 존재 자체가 문제가 되는 육체는 이성을 방해하는 원천이자 위협이며 영혼에 이르기 위한 수단으로만 가치가 있을까. 영원히 풀리지 않는 의심이자 의문이다. 경멸의 대상 육체는 이제 데카르트에 이르러 정신과 완전히 분리되어 존재 자체가 무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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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오만,

몸에 대한 무지가 무리한 철학을 탄생시키다


몸이 가장 무시받았던 시기는 플라톤에서 데카르트에 이르기까지다. 이들에게 몸은 언제나 정신에 종속된 부속품일 뿐이다. 데카르트는 《성찰》에서 사람은 육체와 정신, 두 가지로 분리되어 구성된다고 하면서 심신(心身) 이원론(二元論)을 주장했다. 이때부터 의문 투성이인 몸을 배제하고 오로지 정신만으로 순수한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을 연구하는 서구 철학의 한 획을 긋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순수한 진리에 이르는 길에 방해물이나 장애물이 몸이라고 생각했다. 몸이 없이 어떻게 철학을 한단 말인가. 몸은 데카르트에 이르러 정신과 분리된 객체로 전락한다. 몸은 정신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조각난 몽뚱아리다. 몸에 대한 무지(無知)가 몸을 무시(無視)하고 무리(無理)하게 몸을 사용해서 결국 몸을 무용(無用)하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데카르트다. 그는 나를 몸으로부터 구분하고, 몸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허황된 주장을 펼친 장본인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말은 생각하는 이성이 몸을 지배하면서 존재의 성격과 방향도 결정한다는 무지막지한 관념적 선언이다. 육체는 변덕스럽고 감정적이어서 믿을 수 없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순순한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육체를 배제하고 오로지 정신으로 생각해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해낸 사상이야말로 진짜 사상이라고 생각했던 데카르트의 철학은 그 후 서구 철학을 이성 중심 철학으로 흐르게 만든 장본인으로 작용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머릿속 생각으로 구축한 사상만이 진짜 사상이라고 했던 데카르트의 철학은 사실 죽은 사상(死想)이나 마찬가지다. 데카르트 덕분에 우리는 이처럼 사상을 몸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 머릿속에서 만들어지는 작용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으니 사상은 당연히 현장과 무관하며 현실을 몸으로 느끼는 감각적 깨우침도 반영되지 않는다. 몸이 없는 정신만의 존재, 몸이 동반되지 않는 순수 이성만의 앎이 우리 삶을 얼마나 해명해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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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바뤼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의 일갈,

육체가 욕망하는 재능은 몸이 안다


서구 철학은 플라톤 이래 근대철학을 연 데카르트까지 의식만을 중시했고, 몸은 본질적이지 않으며 죄악의 근원인 ‘느낌과 감정’이 속한 곳으로 보았다. 서구 문명의 핵심적 믿음 중 하나인 ‘심신 이원론(心身二元論)’이다. 데카르트나 칸트가 바로 심신 이원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철학자다. 그들은 인간의 육체보다는 정신을, 감정보다는 이성을 중심으로 철학적 사유체계를 정립했다. 반면에 스피노자는 이와 정반대 되는 길을 걸어갔다. 그는 이전 철학자들이 외면하거나 무시 심지어는 경멸했던 ‘몸’이나 육체적 ‘욕망’, 신체 상태에 따라 변덕스럽게 변하는 ‘감정’이 오히려 인간의 본성을 파악하는 핵심 개념이라고 했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심신 이원론을 부정하고 “몸과 마음은 하나”라는 심신(心身) 일원론(一元論)을 펼쳤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심신 일원론을 근간으로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 아니라 ‘감정의 동물’이라고 선언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가 맞다. 이런 차원에서 그가 창안한 개념이 ‘코나투스(conatus)’다. ‘코나투스’는 자아를 보존하고 발전하며 완성하려는 욕구 내지 노력이다. 이것과 통하는 사람과 만나면 기쁨과 행복이 배가된다. 코나투스가 통하는지 안 통하는지는 머리가 아니라 몸이 감각적으로 알아낸다. 코나쿠스가 맞으면 만나도 또 만나서 기쁨을 나누고 싶지만 그렇지 않으면 만날수록 관계는 슬픈 관계다. 스피노자는 타자와 몸으로 마주쳤을 때 우리 몸에는 자연스럽게 기쁨과 슬픔이라는 감정의 흔적이 남는다. 기쁜 마주침은 삶에 활력을 주고 더 잘하고 싶은 욕망을 부추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재능도 몸으로 해보면 안다. 내가 하면 재미있는 능력은 책상에서 머리로 알 수 없고 몸으로 부딪혀봤을 때 직감적으로 알게 된다. 반대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할 때 신체는 활기를 잃고 사기가 떨어진다. 재능은 육체가 욕망하는 일이다. 육체가 욕망하는 일을 할 때 코나투스가 극대화된다. 그때 삶은 기쁨이 넘치고 다시 살고 싶은 욕망이 선순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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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선언,

신체는 이성을 지배하는 커다란 이성이다


니체는 데카르트의 심신 이원론(心身二元論)에 바탕을 둔 이성과 주체 중심의 서양철학에 반기를 들고 오히려 그동안 정신의 시녀나 영혼의 껍데기로 전락했던 몸을 철학적 사유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아예 이런 경고로 자신의 신체 중심 철학을 전개한다.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게 나 나의 말을 하련다. 저들로서는 이제 와서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전과 다른 가르침을 펼 필요가 없다. 그 대신에 자신들의 신체에게 작별을 고하고 입을 다물면 된다”(51쪽). 서구 철학이 무시해왔던 신체를 오히려 커다란 이성으로 격상시키고 지금까지 주체를 이끌어왔던 이성을 작은 이성의 전락시킨다. “"나는 신체이자 영혼이다." "나는 전적으로 신체일 뿐.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며, 영혼이란 것도 신체에 붙인 말에 불과하다"라고. 신체는 커다란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를 지닌 다양성이고, 전쟁이자 평화, 가축 떼이자 목자이다“(51쪽). 그동안 이성으로 주인 대접을 받았던 이성은 작은 이성으로 격하시켜 커다란 이성의 작은 도구이자 놀잇감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형제여, 너의 생각과 느낌 배후에는 더욱 강력한 명령자, 알려지지 않은 현자가 있다. 이름하여, 자기가 그것이다. 이 자기는 너의 신체 속에 살고 있다. 너의 신체가 자기인 것이다. 너의 신체 속에는 너의 최고의 지혜 속에서보다 더 많은 이성이 들어 있다”(52쪽). 자기, 나는 신체 속에 살고 있다. 신체 속에 살아가는 자기야말로 더 많은 이성을 품고 있고 최고의 지혜를 낳는 원동력이다. 니체에 와서 드디어 천대받았던 신체는 커다란 이성이라는 이름을 달고 철학적 탐구 대상에서 철학적 탐구를 주도하는 주체로 떠오른 것이다. 신체를 무시하고서는 그 어떤 위대한 업적도 쌓을 수 없다. 커다란 이성인 신체를 단련하는 길이 곧 작은 수많은 이성이 들어와 저마다의 장기를 자랑하며 니체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인간상, 위버멘쉬를 향해 진군할 수 있는 길이다. 신체 없는 자기 창조와 변신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함으로 니체에게서 배울 점이다. 운동을 통해 신체를 단련하는 길이야말로 주체성을 회복하는 근원적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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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 Ponty)의 통찰,

몸이 없는 지각은 몰지각한 생각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세계는 몸으로 경험하며 지각된 세계다. 몸이 없는 지각은 몰지각한 생각이다. 몸은 세계 밖에서 판단하고 지각하는 주체가 아니라 세계를 직접 경험하는 세계에 속해 있는 주체다. 모든 지각이나 의식 활동은 몸 없이 불가능하다. 세계를 지각하는 몸이 곧 나다. 나는 세계를 몸으로 지각하는 신체적 존재다.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 퐁티는 자신이 주저, 《지각의 현상학》에서 그동안 논의되어 왔던 몸에 관한 전통 철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급진적 관점을 제시했다. 그는 우선 세계를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주체 상정을 거부한다. 세계를 관찰하는 주체가 따로 세계 밖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세계 내의 일부로서 내 몸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면서 지각한다고 주장한다. 몸은 순수한 인식을 방해하는 욕망 덩어리나 불순한 욕정의 주체가 아니라 세계를 있는 그대로 지각하고 경험하는 살아 있는 육체이자, 사랑하고 미워하며 기뻐하고 노여워하기도 하는 관능적 신체다. 이런 점에서 메를로 퐁티는 몸이 대상에 관여해서 직접 경험을 통해 이해하는 과정을 관능적 지각 또는 관능적 이해라고 했다. 그는 이미 몸이 담고 있는 욕망을 대상에 투여해서 내 몸이 느끼는 바대로 세계를 지각하고 인식한다는 주장을 펼친 것이다. 메를로 퐁티에게 모든 앎은 육화(肉化)이자 체득(體得) 또는 체화(體化)다. 자전거를 타는 방법을 익히는 과정을 예로 들어보자. 자전거를 몸으로 타지 않고 앉아서 머리로 이렇게 타는 것이 좋을까 저렇게 타는 것이 좋을까를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전거 타는 능력을 습득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외부세계와 내 몸이 직접 만나 부딪히면서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 없이 그 과정에 완전히 미쳐버릴 때 몰입하는 내 몸은 대상이나 세계와 한 몸이 된다. 메를로 퐁티에 따르면 우리가 하는 모든 경험은 몸을 매개로 이루어진다. 운동하는 과정도 기구와 내가 무아지경으로 빠져드는 몰입 경험에서 신체와 정신은 구분되지 않고 혼연일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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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푸코(Foucault, 1926~1984)의 반박,

몸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권력이다


푸코에게 몸은 메를로 퐁티와 다르게 살아 있는 몸이 아니라 특정 정치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몸이며, 의미를 만들어가는 주체가 아니라 의미가 부여되는 권력이다(강미라, 2011). 푸코에 따르면 몸은 자연적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며, 모태에서 저절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권력 집단의 규율과 권력에 의해서 일정한 방식으로 가공되고 구성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푸코는 내 몸이 주체적으로 세계에 참여하는 게 아니라 몸 바깥의 권력 작용이 내 몸의 안과 밖을 일정한 방식으로 바꿔나간다고 한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에 따르면 직업별 사회가 요구하는 몸가짐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군인은 “머리를 뽐내듯이 꼿꼿이 세우고, 등을 굽히지 않은 채로 똑바로 서고, 배를 내밀고, 가슴을 펴고 등을 당기는 자세에 익숙해져야 한다”(214쪽). 이런 몸가짐을 가질 수 있도록 특정한 방식으로 훈육이 이루어지고 그렇지 않으면 감시와 처벌을 통해 원하는 방식으로 몸가짐을 바꾸는 규율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한다. 학교에 입학하면 “조용히 해.” “자리에 앉아.” “입 다물어.”와 같은 말을 반복적으로 듣는다. 작란을 치며 때로는 난장판이 되도록 놀아가면서 자기 길을 찾아가는 모험생의 신체보다 시키는 일이나 잘 따르고 선생님의 말을 잘 듣는 모범생의 신체로 길들여진다. 특정 기관마다 제도적인 규율이 만들어져 나도 모르게 내 신체에 각인되면서 내 몸은 그렇게 권력 집단의 의도대로 만들어진다. 주체가 몸으로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규율 권력이 내 몸을 일정한 방식으로 통제하고 조정함으로써 길들여진 내 몸이 탄생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병원에 입원한 환자는 병원의 규율을 따라야 하고, 공장에 취업한 육체 노동자는 공장의 근로기준과 규율에 따라 몸을 움직여야 한다. 여기서 나의 주체적 의지로 내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여지는 극히 미약하다. 더구나 감옥의 죄수는 엄격한 신체 통제를 가함으로써 내 몸이 더 이상 내 몸으로 부각되지 않고 맡겨진 신체로 전락한다. 규율이 규칙을 만들고 규칙은 내 몸을 움직이는 법칙을 낳는다. 그 법칙대로 평생을 살아가는 내 몸은 칸트와 같은 근대 철학자가 주창했던 주도적인 주체가 아니라 규율 권력이 마음대로 구성하는 주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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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과 마크 존슨(Mark Johnson)의 반론,

모든 ‘사유’는 신체적 경험을 기반으로 이해되는 ‘은유’다


조지 레이코프와 마크 존슨의 《몸의 철학》은 세 가지 혁명적인 주장을 앞세우며 전통적인 심신 이원론에 반론을 제기한다. 첫째, 마음은 본유적으로 신체화되어 있다. 인간의 마음은 신체적 경험, 특히 감각운동 경험에 의해 형성된다. 몸에 의해 형성된 이성은 추상적 개념들로 표현되는데 그 것 자체가 이미 몸이 경험한 의미의 연결과 관계를 기반으로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절대 자유와 초월적 이성을 갖고 딜레마 상황에서 도적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자율적인 칸트적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성적 판단과 개념체계 역시 몸을 근간으로 몸이 움직이면서 형성된 신체화된 경험의 산물이다. 신체능력과 독립적인 이성적 판단과 개념적 작용은 없다. 한 마디로 조지 레이코프와 마크 존슨의 체험주의(experientialism)는 “몸을 통해서만이 개념을 형성”(801쪽)할 수 있고, “진리와 지식은 신체화된 이해에 의존”(801쪽)한다. 심지어 영성(靈性)도 신체적 욕망과 독립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영성이 갈망하는 정열적인 꿈과 그걸 달성하는 가운데 느끼는 고통과 환희 역시 몸이 관여하는 감각적 경험이다. 둘째, 인간의 인지는 대부분 무의식적이다. 보이지 않는 95%의 무의식적 사고가 보이는 5%의 의식적 사고를 결정한다. 따라서 의도적으로 인식하고 자각해서 일어나는 의식적 사고는 거대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생각해서 행동하기 보다 몸이 의식하기 전에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더 많다. 셋째, 우리의 사고는 대부분 은유적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은유적 개념들, 예를 들어 “공부는 망치다”라는 은유적 표현도 망치로 뭔가를 깨부셔본 감각적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다. 은유적 표현도 모두 신체화된 경험에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의 이면에는 은유적 개념은 자의적이거나 주관적이지 않고 한 사람의 몸이 직접 경험하면서 생긴 감각적 깨달음이 축적되고 그것이 공유되지 않고서는 은유적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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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플라톤의 오판으로 ‘경멸’의 대상에서 전락하면서 몸에 관한 잔혹사가 시작되었다. 영혼의 시녀로 전락한 몸은 갖은 모욕과 괄시를 받아가며 근근이 목숨을 이어가다 데카르트의 오만으로 다시 깊은 상처를 받는다. 인간의 몸은 플라톤과 데카르트에 의해서 사체(死體)로 전락했다. 몸에 대한 무지, 몸을 무시한 대가로 무리한 철학을 전개했던 이성 중심 철학은 스피노자에 이르러 결국 무용하다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나는 생각하는 이성적 동물이 아니라 육체적 욕망을 쫒아가는 감정의 동물이라고 스피노자는 데카르트를 반박한다. 오로지 몸으로 부딪혀봐야 육체가 욕망하는 재능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육체가 욕망하는 재능을 찾아갈 때 인간은 기쁨이 넘친다. 우리 신체도 마찬가지다. 신체가 즐거운 고통을 호소하지만 결국 몸이 기뻐하는 운동을 반복할 때 내 삶은 행복한 중심을 찾아 올곧게 세워진다. 니체는 이성중심의 서구철학을 망치로 깨부수고 신체 중심의 디오니소스적 욕망의 철학을 정면에 내 세운다. 고로 니체는 신체다. 사체였던 인간의 몸은 다시 신체(身體)로 격상되었다. 신체가 오히려 이성을 지배하는 커다란 이성이라고 주장한다. 메를로 퐁티는 니체와 다른 연장선상에서 몸으로 매개되지 않는 모든 경험은 허황된 관념임을 몸으로 증명함으로써 몸이 없는 지각은 몰지각한 생각이고 주장한다. 모든 경험은 신체가 관여되어 각인된 경험이다. 푸코는 퐁티가 주장했던 경험의 주체로서 신체를 권력의 객체로 다르게 개념화시킨다. 즉 푸코는 인간의 신체가 어떤 기관에서 누구의 권력에 의해 규율로 통제되고 조종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르게 구성된다고 한다. 내 몸은 내가 마음대로 구성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신체 권력이라는 것이다. 퐁티와 푸코에 의해서 인간의 몸은 신체에서 한 사람의 경험이 고스란히 축적되어 흔적으로 각인되는 역사적 전체로 재탄생된다. 그 사람의 몸은 그 사람 전부를 담고 있는 전체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조지 레이코프와 마크 존슨에 의해 모든 인지는 신체화되어 있으며, 신체가 개입되는 감각적 경험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면서 우리는 높은 사유체계를 구축할 수 있음이 밝혀지고 있다. 이제 몸은 곧 나이자 내가 만나는 관계이며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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