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하다고 생각한 운동,
시(詩)에서 살며시 깨우침을

‘멸시’당한 운동, 시를 통해 그 의미를 시나브로 ‘중시’ 하다

시시하다고 생각한 운동, 시(詩)에서 살며시 깨우침을 얻다:

‘멸시(蔑視)’당한 운동, 시를 통해 그 의미가 시나브로 ‘중시(重視)’되다


“바람이 인다. 살아야 한다.”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 일부다. “바람이 분다. 운동하러 가야겠다.” 유영만이 지을 ‘운동의 묘미’ 일부다. “바람이 분다. 술 마시러 가야겠다”는 유혹이 스멀스멀 스며든다. 거기다 내 주변은 온톤 유혹의 천국이다. 조금만 생각을 바꿔 먹으면 운동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다. 내가 아는 한 운동하는 시인은 많지 않다. 근육이 넘치는 박력 있는 시인, 상상하기 쉽지 않다. 물아일체를 벗 삼아 측은지심으로 시적 감수성을 키워가는 시인들의 몸은 아프다. 아픔이 시인들의 글감이다. 아픈 시인의 몸이 쓴 시에는 운동의 묘미가 살아 숨 쉰다. 시에 담긴 운동의 매력이 마력으로 다가온다. 운동하러 가야겠다는 다짐을 안도현 시인의 ‘스며드는 것’에 비추어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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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며드는 것 -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쩔 수 없어서

살 속에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스며드는 것’은 운동에 비추어 보면 가만히 살들에게 말하는 경고 메시지가 ‘파고드는 것’이다


파고드는 것 - 유영만


몸무게가 피땀 속에 반쯤 몸을 버티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땀방울이 비 오듯 쏟아질 때

몸무게는 뱃살을 움켜쥐고

흐느적거리다가 더 무겁게

더 바닥 쪽으로 주저앉았으리라

비틀거렸으리라

비틀거리다가 어쩔 수 없어서

뱃살 속으로 파고드는 뼈아픔을

한때의 피고름을

몸무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피부가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살들에게 말했으리라


아침이야

불 켜고 운동할 시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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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짐이 많아지면 짐이 된다


소주 한 병이 공짜/임희구


막 금주를 결심하고 나섰는데

눈 앞에 보이는 것이

감자탕 드시면 소주 한 병 공짜란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삶이 이렇게 난감해도 되는 것인가

날은 또 왜 이리 꾸물거리는가

막 피어나려는 싹수를

이렇게 싹둑 베어내도 되는 것인가

짧은 순간 만상이 교차한다

술을 끊으면 술과 함께 덩달아

끊어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 한둘이 어디 그냥 한둘인가

세상에 술을 공짜로 준다는데

모질게 끊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있는가

불혹의 뚝심이 이리도 무거워서야

나는 얕고 얕아서 금방 무너질 것이란 걸

저 감자탕집이 이 세상이

훤히 날 꿰뚫게 보여줘야 한다

가자, 호락호락하게


다이어트하기로 그 어느 때보다 큰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마음을 먹은 바로 그날 동네 한 바퀴 돌다가 감자탕집 앞에 붙은 유혹의 문구가 내 마음을 사정없이 후려친다. 거기다 날까지 꾸물거리지 않는가. 소주 한잔 당기지 않으면 뭔가 죄를 지을 것 같은 그런 날 저녁, 공짜로 주는 술을 굳이 오늘 끊어야 할 모진 이유를 어디서 찾으란 말인가. 술을 끊고 몸을 위해 운동하기로 결심한 바로 그날, 굳은 마음으로 결심한 뚝심은 뚝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나기 일쑤다. 오늘은 공짜로 주는 술과 감자탕을 먹자. 그리고 내일부터 진짜 운동하기로 결심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이미 탈선의 길로 벗어난 나를 합리화시킨다. 그런 게 인생이라고, 그러니 인간적으로 살아가면서 감자탕에 주는 공짜 소주 유혹에 넘어가는 것도 당연하다고. 나는 또다시 좌절의 늪으로 빠져든다. 나란 인간은 도대체 얼마나 굳은 마음을 먹으면 마음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기적이 실현될 수 있을까. 먹은 마음이 소화가 잘 되어 내 몸을 움직이는 에너지 원천으로 쓰인다면 얼마나 좋을까. 작심삼일은 작심일일도 못 가는 허망한 결심은 어디서 구원받을 수 있을까. 어차피 계획과 목표는 그대로 실현되지 않아서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계획했던 일이 그대로 풀리고 목표 설정한 대로 아무런 문제 없이 달성이 된다면 우리 삶은 무의미하지 않을까. 물론 거기서도 의미를 찾아내거나 부여할 수 있다.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잘 안 될 때 사람은 비로소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머리를 쓰면서 난국을 돌파하는 마음가짐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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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하러 간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안아주기/나호열


어디 쉬운 일인가

나무를, 책상을, 모르는 사람을

안아준다는 것이

물컹하게 가슴과 가슴이 맞닿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대, 어둠을 안아보았는가

무량한 허공을 안아보았는가

슬픔도 안으면 따뜻하다

미움도 안으면 따뜻하다

가슴이 없다면

우주는 우주가 아니다.


운동을 시작할 수 없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를 가슴에 품고 있을 것이다. 운동을 시작했다가 여러 가지 여건상 지속할 수 없는 일이 생겼을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운동을 하지 못하고 자괴감에 빠진 사람의 어둠을 안아주자. 어둠의 뒤안길에서 울고 있을 그들의 슬픔을 감싸 안아주자. 언젠가는, 아니 가까운 시일 내에 그들 역시 따뜻한 가슴을 품고 세상으로 나올 것이다. 그들의 운동은 피트니스 센터에서 땀을 흘리는 게 아니라 일상에서 고된 노동을 하며 땀을 흘리는 것이다. 그들에게 일상의 노동은 활동이며 활동이 곧 운동이다. 몸을 움직여 내 삶을 책임지는 모든 활동은 다 운동이다. 우리가 운동하는 이유는 일상의 리듬을 잃지 않고 따뜻한 가슴으로 다른 사람의 아픔을 안아줄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다. 아니 나부터 내 몸을 지켜야 내 몸으로 다른 사람의 한 겨울 추위를 품어줄 수 있지 않은가. 어찌 보면 우리가 운동하는 이유는 지극히 이기적이다. 이기적인 사람만이 타인을 위해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내 몸은 나이기도 하지만 나의 몸은 타인의 어려움을 도와주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몸이기도 하다. 사람은 나와 너, 우리가 만들어가는 공동체와 사회 속에서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운동하는 이유도 나의 몸을 넘어 함께 만들어가는 우리의 건강한 연대를 위해서다. 더불어 살아가려는 이타심의 발로에 이기심이 숨 쉬고 있다. 궁극의 이타심에는 이기심이 꿈틀거린다. 황지우 시인은 ‘산경山徑’이라는 시에서 말했다. “이타심利他心은 이기심利己心이다. 그러나 이기심은 이타심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이타심은 결국 나의 행복한 이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욕망이다.


“달은 윙크 한 번 하는 데 한 달이나 걸린다.” 이정록 시인의 ‘더딘 사랑’이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다. “사람은 운동 한 번 하는데 일 년도 넘게 걸린다. 유영만이 지을 ‘더딘 운동’이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다. 내 몸을 돌보기 위해 운동하기로 결심했는데 비가 온다. 비가 나를 보우하사 내일부터 해야겠다고 별다른 고민 없이 결심은 순식간에 미뤄진다. 늘 살아가던 방식과 결별을 선언하고 운동하기로 결심했지만 그 결심을 무심하게 만드는 상황과 여건이 주변에 즐비하다. 큰 맘먹고 운동하기로 결심했는데 전날 회식을 해서 속이 안 좋다. 어디선가 들은 의사의 충고도 한 목 거든다. 음주 후 다음 날 아침에 운동을 하면 오히려 안 좋다고. 그래서 오늘도 운동을 못하는 합리적인 이유가 생겼다. 간신히 원상 복귀된 몸으로 다음 날 운동하려고 일어났지만 운동화가 마땅하지 않다. 퇴근 무렵 운동화를 사 갖고 집에 오지만 내일부터 운동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부장님의 문자 메시지가 심야의 종소리로 울린다. 갑자기 사장님이 출장 일정이 바뀌어서 원래 보고하려던 일정이 바뀌어서 평소보다 한 시간 출근하란다. 아 운동은 이렇게 달이 바뀌어도 물 건너가 버리고 나를 버리며 떠나는 것일까. 내일부터 해야겠다는 다짐은 다시 짐이 된다. 다짐만 쌓이고 몸은 움직이지 않을 때 더 무거운 짐으로 변한다. ”운동하러 간다는 일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정현종의 ‘방문객’을 패러디한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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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실천의 진지한 반복이 반전을 일으킨다


숱한 결심 끝에 나도 운동하러 피트니스 센터에 나왔다. 그 전에는 나 역시 하루에도 수십 번 마음을 고쳐먹었다. 반복해서 먹어도 마음은 늘 변하지 않는다. 마음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앉아서 마음을 고쳐먹는 게 아니라 마음먹은 대로 무조건 그냥 이유 없이 몸을 움직이는 거다. 몸은 가만히 앉아있고 마음을 고쳐먹어도 마음만 포만감을 유지한 채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몸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생각할 필요는 없다. 몸이 움직이는 사이에 생각이 개입되기 시작하면 이유를 따져 물어보고 위험요인은 없는지, 하게 되면 얼마나 비용이 들어가는지, 해야 되는 이유가 그만큼 절박한 지 등 숱한 질문을 계속 던지면서 몸은 움직임을 멈추고 안 해도 되는 이유나 핑계를 찾기 시작한다. 마음이 몸에게 부탁한다. 이제 마음먹은 대로 몸을 움직여 달라고, 그때 몸은 마음에게 일침을 날린다. 몸은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몸이 움직이는 대로 마음을 먹는 거라고. 부탁은 큰 맘먹고 결심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간절한 도움이다. 아무 때나 부탁하지 않는다. 늘 생각은 하지만 입 밖으로 바로 나올 거 같은 부탁도 쉽게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대단한 결심을 해야 비로소 작은 부탁을 마지못해서 한다. 마음이 몸에게 부탁한다. 이제 제발 마음먹은 대로 몸을 움직여 달라고. 몸은 바로 되받아서 재질문을 퍼 붙는다. 나는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는 몸이 아니라 움직이는 몸의 강도와 방향에 따라 마음이 달라진다는 점을 믿는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일찍이 말하지 않았던가. 탁월함은 행동이 아니라 습관이라고. “제대로 된 공부는 몸에 관성을 새겨 넣는 것이다”(41쪽). 이원석의 《공부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말이다. 몸에 관성이 새겨지면 대단한 결심을 하지 않고도 습관적으로 운동하는 장소로 몸이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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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적으로 자기 일에 몰두하는 사람은 자신의 좌표와 방향을 점검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인다. 다른 사람이 어떤 동선으로 어떻게 움직이는지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 생각과 행동은 주변 환경이나 사람에게 영향을 받는다. 하고 싶은 운동은 나의 결심과 의지만으로 시작해서 지속적으로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내가 운동을 결심만 하고 계속하지 못하는 원인은 나의 결심 부족이나 의지 결핍보다 나로 하여금 운동을 지속하지 못하게 막거나 의욕을 지속적으로 감소시키는 환경적 요인이 더 크다. 잘못은 나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며 위안을 삼아도 좋다. 오랫동안 운동하지 않는 습관은 운동이 아무리 중요하고 좋다고 해도 귀를 막는다. 나에게 유리한 소리만 골라서 듣고 습관 유지에 방해가 되는 목소리는 가급적 차단하거나 들었어도 못 들은 척한다. 내가 운동을 시작할 수 있도록 촉진하고 고무하는 상황을 만들고 운동하는 습관으로 나를 이끌고 가는 동력이나 동인을 내 주변에 장착하는 게 중요하다. 이런 요인이 운동하겠다는 의지나 지속하려는 열정을 무력화시킬 수도 있고 오히려 반대로 탄력을 받게 만들 수 있다. 상황의 힘을 빌려 시작한 운동은 수시로 그만두려는 일상의 습관으로 되돌아가려는 관성과 맞서 싸운다. 기존 습관의 과감한 포기와 더불어 새로운 습관의 시작은 그만큼 늘 언제나 긴장과 전쟁의 사이에서 절치부심하며 양자를 오고 가다 나를 과거로 다시 데리고 가든지 아니면 미래의 새로운 나로 이끌고 가든지 결정될 것이다. 어렵게 시작한 운동을 계속 유지하는 유일한 비결은 오늘의 행동을 내일도 반복하는 것이다. 어제 시도했던 행동을 오늘도 반복한다면 오늘은 어제보다 훨씬 쉽게 시작할 수 있고, 내일도 반복한다면 오늘보다 더 쉽게 시작할 수 있다. 가급적 작은 실천의 진지한 반복을 꾸준하게 이어가기만 한다면 당신은 오늘과 다른 내일의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습관의 길목으로 들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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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이란 생각의 분량이 아니라 움직임의 분량이다


이문재 시인의 ‘농담’에는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근육에 가해지는 강도를 견뎌낸 만큼, 근육에 생긴 상처만큼 근육은 더 강해진다. “근육이 더 풍부해지기 위하여 몸은 더 고통스러워야 한다.” 정호승 시인의 ‘상처가 스승이다’처럼 힘든 고통이 근육의 스승이다. “항구에 있는 배는 안전하지만 그것이 배를 만든 이유는 아니다. 사람은 실패를 통해 다시 태어난다. 감사함을 통하여 부유해질 수 있다. 돈은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마르다.” 상처가 스승인 이유다. “집안에 있는 내 몸은 안락하지만 그것이 내 몸을 만든 이유는 아니다. 내 몸은 끊임없는 움직임을 통해 다시 태어난다. 운동을 통하여 건강해질 수 있다. 편안함은 설탕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몸에 해롭다.” “천국의 완전한 행복을 알려면 영혼은 반드시 고통부터 경험해야 합니다.” 알렉산드로 솔제니친의 《수용소의 군도》에 나오는 말이다. “운동의 완전한 쾌감에 빠지려면 몸은 반드시 고통의 바다를 건너야 합니다.” 유영만의 ‘헬스장의 기도’ 나오는 말이다. 그냥 저절로 근육이 생기지 않는다. 내가 흘린 땀방울만큼 내 몸에 생기는 근육의 강도는 달라진다. “인간이 변하는 경우는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상대방이 저항할 때이고, 나머지는 자신이 고통받을 때다”(81쪽). 정희진의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에 나오는 말이다. 근육도 마찬가지다. “근육이 변하는 경우는 두 가지 밖에 없다. 하나는 힘든 운동에 저항할 때이고, 나머지는 근육이 힘든 운동에 고통받을 때다.” 돈 들여서 다이어트로 살은 뺄 수 있지만 아무리 돈을 들여도 근육은 생기지 않는다. 근육량은 내가 난관을 돌파하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물리적 강도를 판가름하는 기준이다. 근육은 오로지 땀과 노력의 산물이다.


사랑론(論)이라는 허형만 시인의 시가 있다. “사랑이란 생각의 분량이다. 출렁이되 넘치지 않는 생각의 바다, 눈부신 생각의 산맥, 슬플 땐 한없이 깊어지는 생각의 우물, 행복할 땐 꽃잎처럼 전율하는 생각의 나무, 사랑이란 비어 있는 영혼을 채우는 것이다. 오늘도 저물녘 창가에 앉아 새별을 기다리는 사람아. 새별이 반짝이면 조용히 꿈꾸는 사람아.” 운동론(論)으로 바꿔서 생각해도 동일한 시적 상상력이 발동된다. “운동이란 생각의 분량이 아니라 움직임의 분량이다. 격렬하게 움직이되 다치지 않는 움직임의 바다, 눈부신 움직임의 산맥. 힘들 때 한 없이 깊어지는 포기의 생각, 행복할 때 꽃잎처럼 전율하는 근육의 떨림, 운동이란 빠져나가는 근육을 붙잡는 것이다. 오늘도 창밖을 내다보며 운동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아. 먼동이 터오면 다시 내일을 기약하는 사람아.” 주용일 시인의 ‘내 마음에 별이 뜨지 않는 날들이 참 오래되었다.’라는 시에 보면 “별이 뜨지 않는 밤하늘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노래가 없는 생을 한 번도 떠올려보지 않았는데 그런 날들이 참 오래되었다”는 구절이 나온다. “운동하지 않고 하루를 보낸다는 걸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운동의 즐거움을 맛보지 않고 하루가 간다는 걸 한 번도 떠올려보지 않았는데 그런 날들이 참 오래되었다.” 익숙한 생활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어주지 못한다. 낯선 마주침이나 뜻밖의 부딪힘이 어제와 다른 생각을 품게 만든다. 안주하려는 몸에게 자극을 보내야 한다. 활동을 하든 운동을 하든 몸은 움직이는 가운데 기쁨의 노래를 맛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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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어가지 않고 생기는 근육이 어디 있으랴


나태주 시인의 ’ 풀꽃‘이라는 시는 짧지만 의미 심한 의미를 담고 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 “천천히 운동해야 힘들어 간다. 오래 버텨야 근육이 생긴다. 네 근육도 그렇다”. 유영만이 지을 ’ 근육의 꽃‘이라는 시다. 운동의 목적은 여러 가지, 사람마다 다르다. 유산소 운동을 통해 심폐 지구력을 기르고 체지방량을 줄이는 반면에 근육 운동을 통해 근육량을 늘려 체지방 비율을 줄이는 게 운동의 기본 목적이다. “힘들어가지 않고 생기는 근육이 어디 있으랴,” 유영만이 지을 ‘후들거리며 피어나는 근육의 꽃’의 일부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의 ‘흔들리며 피는 꽃’의 일부를 패러디한 시 문장이다. 운동에 몰두하다 보면 점차 힘든 고통도 참아내는 인내심이 자기도 모르게 생긴다. 한번에 스무번 하기도 힘든 스쿼트를 한 번에 100회까지 하는 놀라움도 반복이 가져온 반전의 기적이다. ‘얼음의 온도’라는 허연 시인의 시 구절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얼음을 나르는 사람들은 얼음의 온도를 잘 잊고, 대장장이는 불의 온도를 잘 잊는다. 너에게 빠지는 일, 천년을 거듭해도 온도를 잊는 일, 그런 일.” 운동하는 사람들은 운동으로 달궈진 몸의 온도를 잘 잊고, 운동에 열중하는 사람은 열정의 강도를 잘 잊는다. 운동에 빠지는 일, 천년을 거듭해도 운동하는 사람의 온도를 잊는 일, 그런 일이 바로 운동이면 좋겠다.


서안나 시인의 곡선의 힘이라는 시가 있다. “나는 모서리처럼 몸을 세우고 곡선의 격렬함과 싸운다. 내 몸에서 중심을 붙잡으려 손길들이 뛰쳐나온다. 모든 것을 움켜쥐려 하던 수많은 내가 와르르 쏟아져 내린다. 나에게서 내가 이탈된다……나의 슬픈 배후까지 슬쩍 엿보게 하는 부드러운 곡선의 힘,” 운동은 직선으로 변해가는 몸을 곡선으로 돌려주는 회복운동이다. 본래 모든 생명체와 자연은 다 곡선이다. 인간이 문명을 발달시킨다는 명목으로 곡선을 직선으로 바꾸면서 불행이 시작된 것이다. 뻣뻣해지는 몸이 아우성을 친다. 사회가 요구하는 속도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전속력을 다해 직선으로 달려가야 한다. 달려가는 사람 역시 역시 단거리 경주 선수처럼 직선주로를 빠르게 달린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멀리 오래가는 것들은 모두 곡선으로 돌아가는 걸 우리는 언제부터 잊고 살아간다. 지름길은 직선이 아니라 돌아가는 우직지계(迂直之計)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도 곡선으로 날아가고 총구를 떠난 총탄도 포물선을 그리며 과녁을 향한다. 운동은 내 몸의 곡선성을 회복하기 위한 자신과의 격렬한 싸움이다. 직선의 바벨을 들고 오르락내리락 하지만 그 직선의 운동기구가 내 몸에 남긴 흔적이 곡선의 근육이다. 허리의 곡선이 사람을 오랫동안 버티게 만들어주고, 유려한 엉덩이의 곡선이 만드는 애플힙이 오랫동안 버틸 수 있는 기본기를 닦아준다. 무엇보다 운동을 하면 힘든 일 앞에서도 성급하게 직선으로 결정하지 않고 곡선으로 우회하는 회복탄력성이 생긴다. 그래야 사람을 안아줄 수 있는 포근한 곡선의 미덕을 쌓을 수 있다.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이 바다에 이르러 휘몰아치는 파도를 만들 듯 곡선으로 다져진 몸과 맘이라야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세상을 뒤흔들 수 있다. 운동하는 과정도 우여곡절의 곡선입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널브러져 하늘을 바라보고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기도 하며 절치부심하는 즐거운 고통의 곡선이 몸과 맘을 부드럽게 단련시켜 준다. “돌아보면 모든 속도가 슬프다.” 김주대 시인의 ‘슬픈 속도’의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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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면 흔들리는 살들, 멈추면 느껴지는 지방들


‘평범한 사물의 인내심’이라는 팻 슈나이더의 시가 있다. “그것은 일종의 사랑이다. 그렇지 않은가? 찻잔이 차를 담고 있는 일. 의자가 튼튼하고 견고하게 서 있는 일. 바닥이 신발 바닥을, 혹은 발가락을 받아들이는 일. 발바닥이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아는 일. 나는 평범한 사물들의 인내심에 대해 생각한다……”내가 매일 신는 신발도 신방장 안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밥을 먹을 때 사용하는 수저도 수저통에서 조용히 기다린다. 피트니스 센터에 가면 나를 조용히 기다리는 수많은 기구와 장비가 있다. 바벨은 어서 들어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아령은 왜 자기에게 아랑곳하지 않느냐고 저쪽에서 큰 소리로 아우성을 친다. 러닝(running) 머신은 자기 위에서 달려봐야 인생이 고달프다는 사실을 러닝(learning)할 수 있다고 소리쳐 나를 부른다. 벤치 프레스와 버터 플라이는 자기를 들어주지 않으면 가슴을 펴고 살 수 없다고 내 손목을 잡아끈다. 레그 프레스와 레그 익스텐션은 오늘 자기를 거쳐 가지 않으면 허벅지와 엉덩이 근육이 부실해지고 가는 길에 발목 잡힐 수 있다고 경고 메시지를 날린다. 덤벨은 오늘 자기와 놀아주지 않으면 앞으로 살아가면서 덤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하이 폴리는 자신을 오늘 당겨주지 않으면 역삼각형의 몸매가 아니라 삼각형 몸으로 바꿔주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숄더 프레스는 자신으로 오늘 어깨 근육을 단련시키지 않으면 홍두깨로 온몸을 두들겨 맞을 수 있다는 무시무시한 겁을 준다. 모두가 저마다의 위치에서 조용히 나를 기다리며 자신과 한 몸이 되는 순간을 고대하고 있다. 나는 기구와 장비를 이용해서 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 이들과 함께 혼연일체가 된다. 그것은 일종의 사랑이다. 나는 이들의 인내심을 또한 사랑한다. 내가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는 모두가 침묵을 유지한 채 가만히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나에게로 와서 사무치게 춤을 춘다. 격렬한 춤의 흔적이 몸으로 각인된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운동을 하지 않을 수 없을까.


운동기구와 단판씨름을 하고 잠시 멈춰 내 몸을 보면 근육들이 살과의 전쟁을 치른 흔적들이 역력하다. 여전히 살들은 살살 빼 달라고 아우성이다. 지방은 여전히 불태워달라고 불호령이다. 몸은 정직하다. 움직인 만큼 쓰임을 받고 쓰임을 받은 만큼 몸은 내 인생을 책임지는 몸은 대답한다. 몸은 잔머리로 움직이지 않는다. 몸은 언제나 머리의 명령을 거부할 자세로 대기 중이다. 머리가 아무리 논리적으로 운동 효과에 대해 설명해도 몸은 말을 듣지 않는다. 아예 들을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 몸은 생각의 놀라운 아이디어를 거부한다. 육체노동은 대강 대충 하면 바로 겉으로 드러난다. 정신노동은 누가 보지 않을 때 살짝 거드름을 피우면서 대충 하려는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한다. 하지만 육체노동으로서의 운동은 운동에 임하는 몸의 움직임을 보면 열심히 하려는 자세인지를 금방 눈치챌 수 있다. 실제로 운동하는 도중에도 그 사람의 몸동작만 봐도 얼마나 열심히 몸으로 대응하는지를 몸으로 감지할 수 있다. 육체노동은 잔머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아니 아예 잔머리가 들어설 틈이 없다. 땀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아무런 변화를 보여주지 않는 게 몸이다. 힘든 노동일수록 시작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그 과정에 빠져들면 빠져나오지 못한다. 노동으로서의 운동이지만 하면 할수록 더욱 내 몸에 기쁨을 안겨주는 즐거운 고통이다. 고통으로 몸에 흔적을 남겨야 그 흔적이 근육으로 변화되어 나와 소통을 시작한다. 힘들게 운동했지만 그 결과는 말할 수 없는 뿌듯함을 가져다준다. 뭔가를 바라고 하는 운동이 아니라 운동 그 자체를 조금이라고 더 잘해보기 애쓰는 마음이 《장인》의 저자, 리처드 세넷이 말하는 장인의 본질이다. 장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지기 위해 어제와 다른 방법으로 일하는 노하우가 뭔지를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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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근육은 다 어디 가고 지방만 남았을까


하지만 무조건 반복한다고 탁월함에 이르지 않는다. 연습만 반복한다고 탁월한 전문가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어주지 못한다. 매일 세수를 하고 양치질하지만 우리는 세수하고 양치질하는 탁월한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 매일 출근하고 친구들과 사귀며 밥을 먹고 술을 마시지만 우리는 여전히 인간관계의 탁월한 달인은 되지 못했다. 어제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비슷한 방식으로 습관적으로 반복했기 때문이다. 습관적으로 반복하면 습관은 이제 사회적 관습이 되고 사회적 관습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관성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관성대로 움직이며 타성에 젖어 살아가는 것이다. 어제와 다른 반복, 어제보다 나아지려는 안간힘, 좀 더 잘하고 싶은 마음가짐으로 다르게 노력하려는 애쓰기가 탁월함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 지속적으로 운동하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어떤 목표를 갖고 시작했지만 그다음부터는 심사숙고하지 않고 어떤 보상이 주어지지 않아도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운동하는 습관 열차에 몸을 싣는다. 여기서 생각이 깊어질수록 온갖 핑계와 이유가 꼬리를 물고 늘어지면서 운동하러 가는 행동을 막아버린다. 《해빗》의 저자 웬디 우드에 따르면 습관적인 마음은 철저한 무관심한 마음이고, 습관은 애쓰지 않으며 투쟁하지 않는다. 그래서 운동 습관이 어느 정도 생기기 시작하는 사람은 운동을 통해 뭔가를 달성하겠다는 다짐이나 목표보다 특정한 상황이 닥치면 정해진 반응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다. 사람을 바꾸는 것은 생각하는 머리가 아니라 바로 몸에 밴 습관이나 행동 지식이라는 점이 증명되는 이유다. “연습은 정신력으로 몸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정신(적 실수)를 ‘없애는 방식이다”(292쪽). 정희진의 《정희진 처럼 읽기》 중에 나오는 말이다. 습관이 몸에 배면 정신이 몸을 통제하는 게 아니라 몸에 밴 습관이 정신을 통제한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까레니나》에서 유래한 안나 까레니나 법칙에 따르면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고 한다. 이 법칙은 운동에도 적용된다. “운동하는 사람은 모두 엇비슷하지만 운동하지 않는 사람은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이라는 반칠환 시인의 시가 있다. “보도블록 틈에 핀 씀바귀 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개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너무 아름다운 문장 아닌가. 멈춤이 전진이고 진보다. 멈춤이 없는 전진이나 진보는 퇴보다. 운동도 마찬가지다. 유영만의 ‘나를 운동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났더니 현기증으로 가누지 못하는 몸이 나를 운동하게 만든다, 앉았다 일어나는 순간 별이 빛나는 밤으로 보이는 한낮의 암담함이 나를 운동하게 만든다. 얼마 되지 않는 계단을 오르는데 숨이 차서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숨 가쁨이 나를 운동하게 만든다. 어쩌다 쇼핑을 갖다가 무겁지도 않은 짐을 들고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후들거리는 다리가 나를 운동하게 만든다. 만원 버스 안에서 3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서 있기 조차 힘들어지고 쓰러질 거 같은 기분이 나를 운동하게 만든다. 어쩔 수 없이 어제 하루 야근을 했는데 퇴근길 밤하늘의 빛나는 별이 가물가물해지는 눈빛이 나를 운동하게 만든다. 나는 언제나 나를 운동하게 만든 힘으로 다시 살아간다. “ 이문재 시인의 ‘사막’에는 “사막에 모래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모래와 모래 사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유영만 시인의 ‘막막’에는 “몸에는 살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살과 살 사이의 지방이다.” 그 많던 근육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남은 건 지방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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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지 않으면 시작할 수 없다


엘렌 코트의 ‘초보자에게 주는 조언’이라는 시는 “시작하라. 다시 또다시 시작하라.”로 시작해서 “완벽주의자가 되려 하지 말고 경험주의자가 돼라.”는 구절로 끝난다. 운동도 마찬가지다. 유영만의 ‘운동 초보자에게 주는 조언’이라는 시도 “시작하라. 다시 또다시 시작하라. 운동을 시작하지 않는 유일한 이유도 시작하지 않기 때문이다……완벽주의자가 되려 하지 말고 경험주의자가 되라.”로 끝난다. 시작하는 방법은 그냥 시작하는 것이다. 시작하면 방법이 생긴다. 니체도 말하지 않았던가. “모든 것의 시작은 위험하다. 그러나 무언가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고. 사실 운동을 시작하는 것은 위험하지 않다. 시작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는 몸이 더 위험하다. “아마추어가 영감을 기다릴 때 프로는 작업한다.” 사실주의 화가, 척 클로스(Chuck Close)의 말이다. “방법은 실행 속에 있다”(197쪽).“ 이영광의 《나는 지구에 돈 벌러 오지 않았다》에 나오는 말이다. 방법을 찾은 다음 실행하려다 시작도 못하고 포기한다. 일단 가볍게 시작하면 무거운 체중도 가벼워지고 몸도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주는 충고’를 ‘운동하려는 사람에게 주는 충고’로 바꿔 읽으며 시시하다고 생각했던 운동을 시를 통해 다시 시작하는 희망과 용기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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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주는 충고’


마음속의 풀리지 않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 인내를 가지라.

문제 그 자체를 사랑하라.

지금 당장 해답을 얻으려 하지 말라.

그건 지금 당장 주어질 순 없으니까.

중요한 건모든 것을 살아 보는 일이다.

지금 그 문제들을 살라.

그러면 언젠가 먼 미래에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삶이 너에게 해답을 가져다줄 테니까.


운동하려는 사람에게 주는 충고/유영만


몸에서 빠지지 않는

모든 지방에 대해 인내를 가지라.

지방 그 자체를 경멸하라.

지금 당장 지방이

빠지지 않는다고 낙담하지 말라.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면

지방 감량은 언제나 지지부진하니까.

중요한 건모든 노력을 통해 시도해보는 일이다.

지금 살과의 전쟁을 시작하라.

그러면 가까운 미래에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매력적인 몸이 너에게

아름다움을 선물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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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미래를 위해 운동하지 마라.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지금 여기 서 있는 내 몸을 위해 운동하자. 그게 바로 미래를 위한 투자이기도 하다. ‘업어준다는 것’이라는 박서영 시인의 시가 있다.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희고 눈부신 그의 숨결을 듣는다는 것. 그의 감춰진 울음이 몸에 스며든다는 것. 서로를 찌르지 않고 받아준다는 것. 쿵쿵거리는 그의 심장에 등줄기가 청진기처럼 닿는다는 것.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약국의 흐릿한 창문을 닦듯 서로의 눈동자 속에 낀 슬픔을 닦아주는 일. 흩어진 영혼을 자루에 담아주는 일,” 운동하려는 나를 업어주자. 운동하고 돌아온 나를 업어주자. 내가 나를 업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힘든 노동을 하고 돌아온 나의 몸을 스스로 어루만져주는 나의 마음이다. 몸과 함께 돌아온 마음이 몸을 업어주는 것이다. 다독거리며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땀 흘린 내 육신의 아픔을 몸소 들어보는 것. 숨넘어갈 정도로 뛰던 심장 박동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 것. 근육이 찢어질 듯 아픈 몸에 생긴 상처를 보듬어 주는 것. 매일 달라지는 내 몸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 몸으로 살아갈 암담한 미래지만 그래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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