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가 내는 신음이
나를 구원해주는 마법의 용솟음이다

신체성이 울부짖는 ‘신음'만이 ‘믿음’이다

신체가 내는 ‘신음’이 나를 구원해주는 마법의 ‘용솟음’이다

신체의 ‘신음’이 만들어낸 것만이 ‘믿음’이다


“신체에 현실적인 짐을 지우고, 근육에 신음소리(어떤 때는 비명을) 지르게 함으로써. 이해도(理解度)의 눈금을 구체적으로 조금씩 높여가게 하여, 가까스로 납득하게 되는 타입인 것이다”(45쪽).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나오는 명문이다. 신체가 짋어질 수 있는 짐이 바로 현실을 살아가는 마지노선이다. 신체가 현실적인 짐을 짊어질 수 없다면 나에겐 미래도 꿈도 없고 비전은 슬픈 비전(悲典)일 뿐이다. 신체는 이전보다 힘든 상황에서만 힘을 쓴다. 기존의 힘으로도 충분히 극복이 가능하다고 신체가 판단하면 신체는 힘을 쓰지 않는다. 힘을 쓸 필요가 없기 때문에 생각도 거기서 멈춘다. 신체가 힘든 상황에 놓였을 때 기존의 힘만으로는 지금의 상황을 극복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 때만 신체는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힘을 쓰기 시작한다. 힘든 상황에 직면할 때만 신체는 힘을 들여서 난국을 극복한다. 신체의 신음이 마음을 움직이고 더 힘든 위기 상황도 극복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만든다. 신음 없이 새로운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신체로 확인한 믿음만이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고 이전과 다른 물음을 제기하며 웃음 짓게 만든다. 몸이 관여해서 깨닫는 힘겨운 싸움이 나를 또 다른 세계로 발돋움하게 만드는 디딤돌이자 원동력이다. 운동의 ‘아픔’과 ‘고통’ 사이, 그 사이에서 생각의 차이가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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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하기에 달려 있다Pain is invitable, suffering is optional”(9쪽).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나오는 말이다. 아픔(pain)은 태생적이라서 불가피합니다. 태어날 때 산모가 겪는 아픔은 피할 수 없다. 정면으로 맞서는 게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산통이 주는 고통(suffering)은 내가 해석하고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고통은 아픔에 대해 사후에 내가 느끼는 주관적인 경험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볼 때 내가 겪는 고통은 고통도 아니라고 생각할 때 고통은 상대적인 느낌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5년 전에 내가 처음 조선일보 춘천 마라톤 훌코스에 출전했을 때 느꼈던 신체가 겪었던 아픔이나 통증은 피할 수 없는 신체 경험이었다. 마라톤이라는 힘든 운동을 선택해서 춘천까지 달려간 내 몸이 피할 수 없는 아픔이었다. 이 아픔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내 몸을 그런 경험을 하지 않는 상황으로 데려가는 길 뿐이다. 아픔이 없는 곳에는 아름다움도 없다. 아름다움은 아픔을 겪어내며 안간힘을 쓰면서 극복해내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람다움이기 때문이다. 아픔은 내 신체가 겪는 객관적 데이터이고, 고통은 아픔에 대한 주관적 데이터다. 사람들이 고통에 더욱 시달리며 몸부림치는 이유는 내 몸이 직접 경험하는 객관적인 통증이 아니라 내 몸으로 느끼는 주관적 고통을 쉽게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통증은 의료기술을 바탕으로 약을 통한 치료 대상이지만 주관적인 고통은 고통의 근원을 어루만져주면서 그것으로 지금 겪고는 그 사람의 진정한 고뇌가 무엇인지를 공감하고 감정 이입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도 고통은 치유되지 않는다. 다만 고통의 곁에서 고통과 함께 할 뿐이다. 우리가 진정한 치유자라면 그 사람의 아픔이나 통증보다 고통을 어루만져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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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를 견디는 신체의 ‘신음’은 마지막에 ‘웃음’을 주는 마법의 ‘용솟음’이다


스쿼트 바벨 양쪽에 20Kg의 무게를 달면 바벨 무게 20Kg을 합쳐서 60Kg의 무게가 된다. 이 정도 무게를 짊어지고 12회에서 15회 반복하기를 마치고 나면 허벅지 근육에 다가오는 적당한 아픔으로 근육이 겉으로 팽창하는 희열감을 느낀다. 이번에는 양쪽에 다시 20Kg씩 40Kg의 무게를 추가해서, 100Kg의 무게로 스쿼트를 시작한다. 5번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할 즈음에는 서서히 힘들어서 더 이상 못하겠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다. 참고 견디면서 다시 한번 두 번을 반복해서 8번 정도 했을 때 희망이 생긴다. 이제 힘내서 두 번만 하면 100Kg의 무게로 열 번 스쿼트를 반복하는 셈이다. 아홉 번째 성공하고 마지막 온 힘을 다해 열 번째가 남았다. 다시 호흡을 가다듬어 깊이 들이키면 아랫배에 강한 힘을 주고 반대편 기립근을 최대한 세운 다음 무게를 견디고 다시 앉는다. 100Kg의 무게로 나를 짓누를 때 앉았는 자세로 느끼는 허벅지와 허리 근육은 터지기 일보직전의 상태다. 이마에는 땀구멍을 헤집고 나온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한다. 들이킨 숨을 참고 견디다 온 힘을 다해 일어서며 숨을 내뱉는다. 이제 다시 양쪽 바벨에 15Kg의 무게를 각각 더 얹으면 이제 총 130Kg의 무게로 스쿼트를 마지막 10회 한 세트를 더 추가한다. 100Kg일 때 느끼는 중량감과는 확연히 다르다. 허리가 휘는 느낌이 들 정도로 130Kg의 무게는 매 순간 긴장감을 늦출 수 없을 정도로 나를 짓누르는 힘이 더욱 강하게 작용한다. 100Kg일 때보다는 허벅지와 땅과 수평이 될 정도로는 앉지 못하고 약간 엉거주춤한 자세로 내가 나의 힘으로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판단되는 정도까지만 앉았다 일어난다.


스쿼트 130Kg으로 완전하게 앉지 못하고 살짝 엉거주춤 자세로 ㅎ


대둔근이 허벅지 근육을 잡아당기는 기분이 들면서 아랫배와 기립근이 다 같이 앞 뒤로 강한 힘을 주고받으며 허리를 세워준다. 최대한 자세를 낮추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면서 이제 몸은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의 굵기에 비례할 정도로 뜨겁게 달궈지고 온 몸 구석구석으로 피가 흐르면서 신체적 신음은 주변의 소음을 모두 흡수해버린다. 강한 기합소리와 함께 10회를 마치는 순간, 허벅지 앞부분과 햄스트링은 펌핑이 최대한도로 되어서 가만히 서 있어도 내 몸이 육중해진 느낌이 든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말하고 싶은 입을 굳게 다물고 신체가 짊어질 짐을 한 번 더 지게 만든다. 그 순간 신체가 토해내는 신음과 근육의 떨림이 이전과 다른 근육을 만들어내는 안간힘이다. 내가 스쿼크를 통해 하체를 기르는 이유는 세상이 나에게 주는 짐의 무게를 견뎌내기 위해서다. 짓누르는 힘을 중력의 방향과 반대방향으로 들어 올리는 힘은 내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버티고 견뎌내야 하는 내공이다. 그게 없으면 나는 험난한 세상에 부딪히면서 견딜 수 있는 힘이 없는 것이다. 힘없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힘을 기르는 이유다. 130Kg이었던 바벨에서 다시 100Kg으로 스쿼트를 하면 처음 100Kg으로 시작했던 스쿼트보다 훨씬 가볍게 느껴진다. 무거운 바벨에서 약간의 무게를 절감해도 몸은 훨씬 가볍다고 착각한는 것 같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고난과 시련을 겪고나면 웬만한 어려움이 닥쳐와도 큰 두려움 없이 정면으로 맞서 위기를 극복해낸다. 운동이 주는 효과도 마찬가지다. 아픔을 겪을 수 있도록 강도를 높여가며 힘든 시간을 겪고난 신체는 수시로 찾아드는 괴롭고 힘든 일을 견뎌내는 면역체를 갖게 된다. 무게를 견뎌내며 아우성치던 신체의 신음은 울음을 웃음으로 바꿔내는 마법의 용솟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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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것만이 나다


“하늘은 잿빛이다. 그래서 더 멀고 더 깊어 보인다”(250쪽). 김진영의 《아침의 피아노》에 나오는 말이다. 죽음을 선고받고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 자신의 삶을 관조하면서 몸과 사람과 사회를 투시해본다. 그래서 미학자이자 철학자이며, 철학아카데미 대표였던 김진영 선생의 첫 산문집이자 유고집 《아침의 피아노》에는 매 순간이 절박하다. “그런데 지금 내게 시간은 더는 추상적인 길이가 아니다. 그건 구체적이고 체험적인 질량이고 무게이고 깊이다. 그러니까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것이다. 시간은 이제 내게 존재 그 자체이다”(249쪽). 시간이라는 존재가 점차 내 곁을 떠나려고 바둥거린다. 시간의 바둥거림을 붙잡기 위해 나는 안간힘을 쓴다. 그럼에도 시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음을 향해 달려란다. “살아있는 동안은 삶이다. 내게는 이 삶에 성실할 책무가 있다. 그걸 자주 잊는다”(24쪽). 살아있는 동안만 삶이라는 사실을 살아있는 사람들은 절박하게 느끼지 못한다. “자아를 규정하는 것은 고통과 감각이다. 당신이 느낄 수 없는 것은 당신이 아니다. 느껴지지 않는 것은 선뜻 돌봐 줄 수가 없다. 당신의 손발이 당신에게서 잊힌다. 반면에 고통은 지켜준다. 눈에 뭔가가 들어가면 즉시 그에 대해 대처하기 마련이다”(153족).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에 나오는 말이다. 고통을 통해 느껴지지 않으면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고통으로 느낌이 와야 비로소 나는 그 아픔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하물며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도 직접 몸으로 느껴지지 않으면 신경 쓰지 않는데 타자의 고통은 어떨까. 고통 체험을 내 몸으로 직접 해보지 않고서는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고뇌와 아픔에 대해서 공감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기 어렵다. 교육의 핵심은 타자의 아픔을 사랑하는 능력, 그 아픔이 나와 무관하지 않음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육성하는 데 있다. 하지만 우리 교육은 지나치게 책상 공부를 통해 지능을 연마하고 지식을 축적하는데 많은 관심을 쏟아부어왔다. 책상에서 이론적 지식을 가르치고 그걸 기반으로 일상에서 실천을 촉구하는 교육 패러다임은 앎과 삶이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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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공부는 앎과 삶이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진짜 공부는 사유가 먼저 있고 나중에 행동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다. “사유가 먼저 있고, 그 도달한 사유에 맞춰 거꾸로 체험을 구성할 경우 작품은 파탄을 면치 못한다. 사유로부터 경험이 도출되는 것은 마치 몸에 옷을 맞추지 않고 옷에 몸을 맞춘 것처럼 어색하다. 몸에 옷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규범이듯, 경험에 사유가 뒤쫓아 가 그 경험을 완전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예술적 창조의 원리다”(228쪽). 김상욱의 《다시 쓰는 문학 에세이》에 나오는 말이다. 몸으로 아픔이나 슬픔을 경험해봐야 어떤 사유의 옷이 내 몸에 맞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아픔이나 슬픔은 내가 예견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도 없다.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거나 과로로 몸이 고장 나면 그때부터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음을 느낀다. 느낌이 오는 순간 몸은 어딘가 아픈 경우가 많다. 아픈 몸에 대고 결코 그럴 수 없다고 안간힘을 써도 이미 몸은 고통의 심연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중이다. "슬픔은 결코의 무게다“(26쪽). 론 마라스코와 브라이언 셔프의 《슬픔의 위안》에 나오는 말이다. ‘결코’를 아무리 외치고 또 외쳐 봐도 이미 몸은 ‘결코’를 거부하고 고통이 몸 구석구석을 엄습하고 있다. 그 아픈 몸을 벗 삼아 나를 들여다보고 세상을 내다보며 몸으로 글을 쓴다. 폐부를 찌르는 묵직한 아픔의 언어가 몸에서 몸으로 전해진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텍스트가 있다. 이론과 지식에 전적으로 기대어 쓴 텍스트가 한편 에 있고, 또 다른 한편에는 이론과 지식에 선행하는 삶에 대한 성찰에서 나온 힘으로 쓴 텍스트가 있다. 이론과 지식으로 쓴 텍스트에는 논리적 엄밀성이 있지만, 머리가 아니라 살갗으로 파고드는 떨림이 없다. 삶을 회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대면한 후에 쓴 텍스트에는 논리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무게와 깊이를 담은 진심이 있다. 논리적 글은 두뇌로 쓸 수 있지만 진심이 담긴 글은 삶으로만 쓸 수 있다.” 사회학자 노명우 교수가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추천사에 쓴 말이다. 아픔이나 슬픔을 온몸으로 겪은 사람의 언어는 다가오는 톤이나 찌르는 충격이 다르다. 그냥 소름 끼치는 전율만이 감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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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해보지 않고서는 타자의 아픔에 공감할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이 잘 모르는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한심한 한계다. 경험한 만큼만, 느껴본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자의든 타의든 타인의 고통에 가까이에 있어본 사람, 많은 고통을 함께 느껴본 사람이 언제 어디서고 타인의 고통에 민감할 것이다(202쪽).”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 나오는 말이다. 슬픔과 아픔, 고통과 고난에 관련된 책을 읽으면서 어떤 고통은 직접 경험해보지 않아서 당사자의 말에 담긴 고통의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이 내 앎의 한계다. 앎의 한계가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에서 비롯된다는 깨달음은 관념의 한계를 지적하는 통렬한 죽비가 아닐 수 없다. 고통에 관한 다양한 책을 읽으면서 문학적이고 철학적이며 시적인 표현을 만나는 순간 고통을 표현하는 언어적 한계와 동시에 아름다운 묘사 능력에 감동을 받기도 했다. “간접 체험으로서의 문학은 다만 나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가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피 흘릴 필요가 없는 배움은, 이 배움 덕분에 내가 달라졌다고 믿게 할 뿐 나를 실제로 바꾸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아무리 읽고 써도 피는 흐르지 않는다”(176쪽). 신형철의 같은 책에 나오는 말이다. 고통을 체험한 사람들의 책을 읽으면서 내가 달라졌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나를 실제로 바꾸지 못한다는 일침에도 나는 여전히 마음이 아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저자가 쏟아낸 격정의 언어와 담론이 내 몸을 통과하는 희귀한 경험을 했음을 고백한다. 내가 직접 체험해보지 않고서는 타자의 아픔에 공감할 수 없다. 공감능력은 책상에서 배울 수 없다. 오로지 몸으로 체험해봐야 비로소 생기는 능력이 바로 공감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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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고 실제로 걸어 다녀보는 것은 중요하다. 배우자, 동료, 유권자 등 중요한 파트너를 대상으로 그렇게 역할 교체를 해보라. 역할 교체는 사로에 대한 이해를 도모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이고, 빠르고, 저렴한 방법이다”(279-280쪽). 롤프 도벨리의 《불행 피하기 기술》에 나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고 직접 그 들이 머무는 공간으로 이동해서 몸으로 직접 느껴보지 않고서는 그들의 신발로 일군 생각의 발로를 알길이 없다. 족적을 추적해서 따라가보지 않고서는 그들의 생각을 초월하거나 추월할 수 없다. 흔히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책상에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통경찰이 열십(十) 자를 보고 사거리라고 생각하지만 산부인과 의사는 배꼽으로 생각한다. 약사는 녹십자라고 생각하고 목사는 십자가라고 생각한다. 저마다 체험해본 범주 내에서 사물이나 현상을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산부인과 의사가 열십자를 보고 교통경찰처럼 사거리로 생각할 수 있을까? 그 반대의 경우도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역지사지가 말처럼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한 사람의 경험 속에는 이해할 수 없고 가 닿을 수 없는 익명인 채로 남아있는 감정이 때때로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실제로 그 순간에 어떤 느낌인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모릅니다”(72쪽)." 데이비드 리코의 《나는 왜 이 사랑을 하는가》에 나오는 말이다. 내가 직접 해보지 않고서는 저마다의 상황에서 몸으로 느끼는 감정은 일반화시킬 수 없다. 모두가 주관적인 체험이고 상황에 따라 고유함을 드러내는 특수한 자각이다. 그래서 신영복 교수님도 생각사(思)가 일반화시킬 수 없는 특수한 주관적인 경험이라고 한 것이다. 한 사람이 겪은 고통은 언어로 말할 수 없다. 다만 고통에 대해 고통의 당사자가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고통은 말할 수 없지만, 고통에 대해 여전히 우리는 말할 수 있는 존재다”(261쪽). 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에 나오는 말이다. 고통은 당사자의 극히 1인칭 경험이라서 내가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다. 다만 우리는 그 고통에 대해 낮은 자세로 들을 수 있고 공감할 수 있으며 해석한 고통에 대해 일부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신체적 경험은 관념적 언어로 번역해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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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앞에 언어는 벼랑처럼 끊어진다


“나는 죽음의 공포에 삶의 욕구로 반응했습니다. 삶의 욕구는 낱말의 욕구였습니다. 오직 낱말의 소용돌이만이 내 상태를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낱말의 소용돌이는 입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을 글로 표현해냈습니다.” 헤르타 뮐러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문의 일부다. 고통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도 그 아픔의 정중앙을 꿰뚫는 표현을 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진저리를 친다. 하지만 여전히 낱말에 담고 싶은 욕망은 한계가 있다. 고통의 언저리에서 맴돌 뿐이다. “고통을 마주할 때 우리의 언어는 거기서 벼랑처럼 끊어진다. 길을 잃는다. 그 이상의 언어를 알지 못한다... 사건이 풀리지 않을 때 현장을 다시 찾는 수사관처럼 내 언어가 끊어진 벼랑으로 돌아가 보자. 현장에 가는 이유는 그곳에 해결의 실마리가 있기 때문이다. 벼랑 끝에 선 사람에게 나는 어떤 말을 해줘야 하는가. 결론적으로 해줄 말이 필요치 않다”(107쪽). 정혜신의 《당신이 옳다》에 나오는 말이다.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을 담아 낱말의 욕구로 전환하려고 했지만 낱말은 태생적으로 내 고통의 의미를 고스란히 담아낼 수 없다. 말 그대로 고통 앞에서 언어는 무참히 무너지고 좌절하며 절망한다. 더 이상의 언어가 필요하지 않은 몸의 절규만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고통은 언어를 거부하지만 그럼에도 고통을 담아내는 언어는 부단한 욕망을 불사르며 오늘도 사투를 벌이고 있다. “삶을 살아내는 자들은 삶을 설명하거나 추상화하지 않는다. 그는 끝없이 짓밟히고 빼앗기는 일상의 현실을 견딜 수 없는 자이고, 그 야만의 현실에 대해 야만의 방법으로 대항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자이다. 그는 건설하는 자라기보다 거부하는 자이고,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삶의 정당한 자리를 확보하려는 자이다. 이념이나 추상이 얼씬거리지 못하는 자리에서, 삶의 구체성은 뒤엉켜 들끓고, 힘찬 무질서들로 생동한다”(46쪽). 김훈의 《바다의 기별》에 나오는 말이다. 삶을 살아내기 위해 언저리에서 진저리를 경험하는 사람에게는 하등의 추상성이 없다. 내 몸으로 지금 이 순간을 견뎌내는 사투와 그 혼적만이 살아 숨 쉴 뿐이다. 그들의 언어는 곧 삶이다. 언어에 자기 체중이 그대로 실려 있고 현장의 목소리가 아우성을 치며 생동한다. “현장 언어는 절대 언어다. 신은 그 소리를 듣고 어쩔 수 없이 도래할 것이다. 현장 언어는 신에게 향하는 언어가 아니라. 신을 왕진시키는 언어이다. 그것은 언제나 솔직해야 하며, 과장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저주하는 언어가 아니라, 개종하는 언어이다”(17쪽). 이성복의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에 나오는 말이다. 신이 언어를 통해 현장에 가지 않고 현장에서 언어가 신을 부른다. 그들의 삶에는 절규가 있고 갈망이 가로지르고 야망이 칼을 갈고 있다. 오로지 내 몸이 그걸 몸으로 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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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픔은 항상 있다. 늘 거기에 있으므로 제가 원할 때 원하는 방식으로 온다. 이 인과 법칙은 배고픈 천사의 손에서 탄생한 졸작이다. 배고픈 천사는 일단 나타나면 본때를 보인다. 정확도는 높다. 삽질 1회=빵 1그램”(96쪽).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에 나오는 말이다. 삽질 1회마다 빵 1그램이 생긴다는 절묘한 표현 속에 빵을 먹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한 인간의 처절한 배고픔이 뼈마디마다 숨어 있다. “사실 배고픈 설움을 표현할 적절한 말은 없다”(28-29쪽). 배고픔의 정도는 계량화시킬 수 없다. 오로지 배고픈 당사자가 몸으로 느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사자가 겪는 배고픔은 다양하게 표현될 욕망을 찾아 헤맨다. “배고픔을 더는 견딜 수 없을 때 입천장이 당긴다”(28쪽). 또는 “배고픈 천사는 입 안에, 내 천장에 오롯이 매달린다. 그건 배고픈 천사의 저울이다”(97쪽). 배고픈 천사는 나의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해 배고픔을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우아하게 다가간다. 게눈 감추듯 배고픔을 해소하는 음식을 먹어치운다. 하지만 먹어치울 정도의 음식은 언제나 일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배가 고플 때는 배가 고프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허기는 침대틀이 아니다. 침대틀은 셀 수 있다. 배고픔은 객체가 아니다“(102쪽). 배고픔은 내가 살아가면서 내 몸 안에 지니고 살아야 할 세상의 고통이다. 내 몸이 배고픔을 견디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지만 그 배고픔은 내 몸이 겪는 사회적 아픔이다. 내가 가난하기보다 나는 사회 안에서 가난의 구조 속에 내몰린 것이다. 나 혼자의 힘으로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인간의 몸에는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시간이 새겨집니다”(22쪽). 김승섭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 나오는 말이다. 몸은 내 몸이지만 내 몸에 새겨진 아픔은 내 몸이 살아가는 사회적 병인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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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고독한 1인칭 서술이다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27쪽).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 나오는 말이다. 슬픔을 과연 공부해서 배울 수 있을까? 당사자가 겪고 있는 슬픔은 정확히 일인칭 시점에서 겪는 고유한 정신적 고통이다. 미치고 팔짝 뛰는 그 슬픔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고 나 아닌 제삼자에게 전달할 수 없다. “비극은 남의 것을 대신 체험할 수 없고 단지 자기 것밖에 체험할 수 없는 고독한 1인칭의 서술이라는 특질을 가지며 바로 이러한 특질이 그 극적 성격을 강화하는 한편 종내에는 새로운 '앎' ― '아름다움' ― 을 마련해주는 것입니다”(283쪽).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나오는 말이다. 자신이 겪은 비극적 체험은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고독한 1인칭 서술이라는 사실, 그 사실을 이해할 때, 비로소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겪고 있는 고통이나 슬픔을 배우려고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접근할 수 없는 고독한 1인칭 서술 영역이 존재한다. 그곳은 과학적 탐구 대상도 아니고 언어적 표현을 거부하는 지극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공간이다. 그래서 그곳에는 빅터 프랭클의 《삶의 의미를 찾아서》에서 말하는 “삶의 보편적인 의미라는 것은 없으며 오로지 개별적인 상황이 지닌 유일한 의미만 있을 뿐, 그 의미는 첫째 사람마다 다르고 둘째 날마다 다르며, 정말로 시간마다 다르다”는 사실이 존재하는 난공불락의 지역이다.


“자연과학적으로 그 실체와 메커니즘이 파악된다 하더라도, 고통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고통을 겪는 사람이 경험하는 자기 고통의 절대성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그 고통이 가닿을 수 없다는 말이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이고,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은 말로는 보태고 나눌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고통이 무의미하다는 말의 뜻이다. 그 결과 고통의 절대성은 사람을 세계가 파괴된 ‘외로움’의 상태로 떨어뜨린다”(124쪽). 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에 나오는 말이다. 고통이 언어화되어 전달되는 순간 고통의 일면을 알릴 뿐이다. 미치고 팔짝 뛰는 고통은 전달하는 사람이 몸으로 겪는 아픔의 총체다. 듣는 사람은 그저 곁에서 몸으로 받아들일 뿐 어떤 말로도 상대방의 고통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다만 “내가 겪고 있는 ‘것'인 고통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지만 내가 겪고 있음에 대해서는 말한 수 있다”(114쪽). 엄기호의 같은 책에 나오는 말이다. 고통 그 자체는 말할 수 없지만 고통으로 살아가는 내 삶, 고통으로 겪고 있는 내 아픔에 대해서는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 “고통에 대해 말하는 것은 고통이 무엇인지와 그 의미 자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당한 사람이 그 고통과 거기서 비롯된 외로움에 의해 자신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 고통에 어떻게 맞서며 넘어서려고 했는지, 그 고군분투에 관한 이야기다. 자기의 겪음에 대한 기록이며 겪고 있는 자기에 대한 기록이며 겪고 있는 자기에 대한 고백이다. 이것이 통하게 된다”(1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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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병은 개별적 생명현상이자 실존적 고통이다


“나의 병은 다른 모든 유사한 병과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병을 치료한다는 것은 개별적 존재의 개별적 병을 치료한다는 말이 되어야 할 것이다"(147쪽).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에 나오는 말이다. 내가 겪고 있는 병은 다른 사람과 병명이 비슷하거나 같다고 하더라도 내 몸에서 내가 겪고 있는 나의 고유한 질병이다. “내 병은 나의 생명현상인 것이다. 나는 나의 병을 나 자신의 몸으로부터 분리시키지 못한다. 나는 나의 병을 객관화하지 못하고 대상화하지 못한다. 그러나 젊은 의사는 기어코 나의 병을 객관화하고 대상화하려고 덤빈다. 아마도 나의 병을 대상화시키지 않으면 의사는 나의 병을 손댈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옷을 치켜올리고 의사에게 내 맨몸을 맡길 때, 나는 내 병을 남에게 맡겨야 하는 나의 이 속수무책을 슬퍼한다. 나의 병은 나의 개별적 생명현상인 것이다. 나는 젊은 의사에게 이 운명의 개별성을 설명할 길이 없다”(39쪽). 김훈의 《바다의 기별》에 나오는 말이다. 개별적 생명현상은 모든 생명체가 겪는 고유한 구체성이자 단독성이다.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되거나 일반화시켜 설명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모든 인간은 저마다 다른 개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개별성을 범주로 나눠서 한 가지 잣대로 판단하고 판정하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자 공격이다. 질병은 나와 함께 동거하며 내가 겪는 고통만큼 의미를 지니는 개별적 속성이다. “의학 문명은 고통을 기술의 문제로 변모시켰고, 그때 괴로움으로부터 그 고유한 개인적 의미를 뺏는 경향이 있다”(42쪽). 이반 일리치의 《병원이 병을 만든다》에 나오는 말이다. 의학은 발달했지만 고통을 기술적 의미로 전락시켜 고통에 대한 개인적 아픔의 강도를 깨닫지 못하는 딜레마에 처하게 되었다. 사람의 몸이 기술적 탐구 대상으로 바뀌면서 인문학적 이해의 대상에서 제외되기 시작했다. 의학은 통증을 과학적 탐구 대상으로 본다. 탐구할수록 통증은 줄어들지만 통증이 내 삶에서 어떤 아픔을 갖고 나와 함께 살아가는지에는 관심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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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은 통증이 삶에서 갖는 의미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통증은 질환의 증상일 뿐이다. 의학은 아픈 사람의 통증 경험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며 치료법이나 관리법에만 관심을 둔다. 의학은 분명 몸에서 통증을 줄여주지만, 그러면 몸을 식민지로 삼는다. 이것이 우리가 의학의 도움을 구하면서 맺는 거래 조건이다”(28-29쪽).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살다》에 나오는 말이다. 그래서 의학은 질환(disease)에 관심을 갖지만 환자 개인이 겪는 질병(illness)에는 무관심하다. "질환은 체온, 혈압, 혈당 수치나 피부 상태를 생리학적으로 환원하여 제시하는 의학적인 용어라서 주로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수치로 환산된다. 반면에 질병은 질환을 앓아가면서 환자가 느끼는 공포와 절망, 희망과 낙담, 기쁨과 슬픔처럼 느끼는 주관적 감정이다. 똑같은 질환을 앓고 있어도 그것에 대해 환자가 느끼는 주관적 감정은 천차만별이다.”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살다》에 나오는 말이다. 현대의학뿐만 아니라 현대 과학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계량화의 마술로 계량화할 수 없는 삶의 세계를 제외시켜버렸다. 그리고 과학적 앎이 세상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라고 자만을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간은 질환보다 질병을 안고 살아가면서 아픈 몸을 사는 것이다. “질병은 질환을 앓으면서 살아가는 경험이다. 질환 이야기가 몸을 측정한다면, 질병 이야기는 고장 나고 있는 몸 안에서 느끼는 공포와 절망을 말한다. 질병은 의학이 멈추는 점에서, 내 몸에 일어나는 일은 내 삶에도 일어난다. 내 삶에는 체온과 순환도 있지만 희망과 낙담, 기쁨과 슬픔도 있으며, 이런 것들은 측정될 수 없다. 질병 이야기에 그 몸 같은 것은 없으며 오직 내가 경험하는 내 몸만이 있다”(28-29쪽). 아서 프랭크의 《아픈 몸을 살다》에 나오는 말이다. 질환은 일반화시킬 수 있지만 질병은 오로지 한 인간이 몸으로 느끼는 개별성에 진실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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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죽음은 일회적 존재의 영원한 소멸이다


“나의 마지막 연인, 그 남자 때문에 나는 세상을 등졌다. 나를 떠났을 때 그는 안경을 잊고 내 집에 두고 갔다. 나는 몇 년 동안 그의 안경을 썼다. 건강하던 내 눈을 그의 근시와 뒤섞어 흐릿한 눈으로 만들었다. 그것이 그의 곁에 머물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이었다”(10-11쪽).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에 나오는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그 사람을 추억하기 위해 그 사람의 안경 도수에 자신의 눈을 맞췄다. 그리고 그 사람의 눈과 뒤섞인 내 눈은 세상을 또렷하게 볼 수 없을 정도로 흐릿해졌다는 표현 뒤에 담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주인공의 애정의 강도가 숨어있다.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말은 결국 그가 남긴 자취를 따라 추체험하는 고통 체험의 과정이다. “인간이라는 주체 즉 고뇌하고 고통받고 병과 맞서 싸우는 주체를 중심에 놓기 위해서는 병력을 한 단계 더 파고들어 하나의 서사,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무엇이?'뿐만 아니라 '누가?'를 알게 된다. 병과 씨름하고 의사와 마주하는 살아 있는 인간, 현실적인 환자 개인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11쪽).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 나오는 말이다. 병을 보기 전에 병과 싸우는 사람을 봐야 왜 그가 그런 병과 싸우게 되었는지 서사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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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도중에 물웅덩이를 피하느라 살짝 옆으로 비켜갔다. 이상한 일이지만, 바로 그 순간까지 나는 건강하고 의식 있는 사람의 목숨을 끊어버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죄수가 웅덩이를 피하느라 몸을 비키는 것을 보는 순간, 한창 물이 오른 생명의 숨 줄을 뚝 끊어버리는 일의 불가사의함을, 말할 수 없는 부당함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는 죽어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가 살아 있듯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이었다”(26쪽).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에 나오는 말이다. 죽음을 앞둔 인간이라고 해서 보통의 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 자신의 안전을 위협하는 작은 걸림돌이나 웅덩이로 인해 고통을 겪고 싶은 심정은 다 마찬가지다. 인간의 개별적 존엄성은 어떤 정치권력이나 비도적적 힘으로 위협받아서는 안된다. 개별적 생명성은 그 자체가 존엄성의 실체다. 생명성은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구체적인 경험만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 “나는 죽음의 숫자를 합산해서 사태의 규모와 중요성을 획정하는 계량적 합리주의에 반대한다. 나는 모든 죽음의 개별적 고통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에 값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생명과 죽음은 추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회복이 불가능하고 대체가 불가능한 일회적 존재의 영원한 소멸이다”(175-176쪽).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에 나오는 말이다. 회복 또는 대체 불가능한 일회적 존재의 영원한 소멸은 논리적 설명의 대상이 아니라 감성적 체험의 대상이다. 그것도 누구도 반복할 수 없는 오로지 당사자만의 유일한 일회적 체험이다. 그래서 다시 김훈은 《자전거 여행 2》에서 이렇게 말하지 않던가. “나는 몸이 입증하는 것들을 논리의 이름으로 부정할 수 있을 만큼 명석하지 못하다”(141쪽). 몸이 입증한 깨달음은 수많은 말을 통해서 일부만 전달될 뿐이다. 그것도 듣는 사람은 느낌으로 짐작할 뿐이다. 몸은 언어 이전에 존재한다. 언어로 몸의 체험을 전달하는 순간 그 체험은 죽는다. 언어는 죽음을 운반한다. “언어라는 배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으므로 부재의 배이고 부재는 현존이 아니다. 내가 당신이라고 부를 때 당신은 이미 당신이 아니고 당신은 다른 곳에 있고 당신이라는 낱말만 종이 위에 뒹군다.” 이승훈 시인의 ‘문학의 공간’이라는 시에 나오는 말이다. 언어로 명명되어 전달되는 순간 명명 되기 이전의 사물이나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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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거리는 전문가는 서서 죽을 수 있다


“언젠가 땅속 저 깊은 곳에서 만난 우리는 서로 경험을 나누고, 고통을 공유하고, 아무 의미도 없는 역경의 연속인 줄 알았던 삶이 사실은 객관적인 가치를 생산하는 제법 흥미진진하고 고유한 삶이라는 확신을 가지기 시작했다. 수직으로만 파내려 가던 동굴은 이제 힘을 합쳐 수평으로 향한다. 곧 수직으로 내려오던 또 다른 동굴들과도 만난다. 격자무늬의 동굴들이 이제 나름의 구조를 이루고 세계를 형성한다. 한순간 여러 곳에 난 격자 구멍들로 햇볕이 들기 시작했다”(300-301쪽).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 나오는 말이다. 수직으로 떨어지던 고통(苦痛)이 고통(孤痛)이 되려는 순간, 땅속 깊이 내리쬐던 빛의 하강이 다른 수직에서 내려오던 또 다른 빛의 하강과 만나면서 수직은 수평의 연대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한 개인의 고통은 사회적 고난으로 승화되면서 아픔의 수평적 연대로 힘을 얻기 시작한다. 일회적 존재가 영원히 소멸하지만 소명은 한 개인의 죽음으로 세상에서 사라지는 고독한 부재가 아니다. 그 사람의 소멸은 그 사람과 연결된 다른 사람의 아픔을 흔적과 얼룩으로 남긴다. “나만을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약해진다. 타자를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확실해진다”(242쪽). 김진영의 《아침의 피아노》에 나오는 말이다. 나는 아프고 힘들지만 그 아픔의 수직적 깊이에서 조금만 옆으로 눈길을 돌리면 나의 아픔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 내가 겪고 있는 고통에 애도와 위로를 건네는 사람이 연대망으로 엮여 있다. 한 사람의 아픔은 개인의 아픔이 아니라 그 사람과 관계되어 있는 모든 사람의 아픔이다. 아픔은 지극히 개인적인 고통이지만 그가 겪는 고통은 고통과 연계된 또 다른 사람의 고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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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히 말해서 지식인이란 고통의 곁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고통의 곁에 잠시 머무르는 사람이다. 지식인들은 고통의 곁에서 연구하며 그 연구가 끝나면 언어를 회수해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 언어가 고통의 자리에,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아무리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도 지식인의 자리는 고통의 곁이 아니라 자신의 연구실이며 서재이다. 아무리 현장을 누비는 지식인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290쪽). 엄기호의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에 나오는 말이다. 지식인은 현장보다는 연구실에서 주로 연구를 한다. 연구가 끝나면 논문을 쓰고 또 다른 연구주제를 찾아 현장으로 내려가기도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삶의 무대는 연구실과 강의실이다. 현장에 내려가지만 전문가 대접을 받지 못하고 쫓겨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는 정혜신의 《당신이 옳다》에 따르면 “내 존재에 주목하지 않고 내 아픔에 마음을 포개지 않는 사람”(73쪽)이거나 “상대방의 고통에 눈길을 포개는 섬세한 뜨거움(12쪽)”이 없는 사람이다. 전문가로서의 연구자는 고통받는 사람 ‘곁’으로 가지 못하고 ‘옆’에서 서성이며 ‘도움이 되지 않는 도움을 주다가 현장에서 ‘도움이 되는 도움’을 더 이상 제공하지 못하고 쫓겨난다. 연구현장에서 생산된 이론으로 연구현장에 내려가 다시 검증하고 수정하는 작업을 하지 않고 논리적 이론을 연역적으로 도출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럴수록 이론은 실천과 분리되고 현장과 멀어지면서 연구와 실천은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먼 당신으로 전락한다. 연구자는 격전의 현장과 떨어져 관념적 이론이나 보고서만 양산하는 한 사람의 전문가가 아니다. 오히려 모든 연구자는 연구를 통해 세상을 바꾸고 연구현장에서 사투를 벌이며 몸으로 말하는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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