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믿을 건 너밖에 없다!

나는 몸이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몸, 믿을 건 너 밖에 없다!

나는 몸이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먼동이 터옴을 몸으로 느낀다. 알람시계가 곤히 잠자는 몸을 깨우다 나이가 들면서 몸 밖의 알람시계보다 내 몸에 장착된 신체 시계가 더 정확히 작동하기 시작한다. 아침에 운동을 가야 된다고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몸은 머리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 잠을 청한다. 머리가 명령을 내리기 전에 몸으로 일어난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바로 몸을 일으켜 운동하는 곳으로 몸을 이동시킨다. 생각이 몸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몸이 생각을 바꾼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몸이 생각할 겨를을 주지 않고 움직일 때 생각은 몸을 따라오기 시작한다. 그렇게 도착한 피트니스 센터에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유산소 운동을 시작하거나 근육 운동을 시작한다. 나의 경우 하루는 유산소 운동에 집중하고 근육 운동을 부분적으로 하거나 근육운동을 집중적으로 하는 날에는 유산소 운동을 거르는 운동 스케줄대로 움직인다. 유산소 운동에 집중하는 날은 러닝 머신을 경사도 14 정도에 걷는 속도 5.8Km로 약 40분을 속보로 걸으면 500∼600Kcal가 소모된다. 40분 동안 귀로는 유튜브 강의를 비롯, 동영상 강의를 들으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 지루하지 않다. 아니면 자전거를 타는 날은 책을 자전거 손잡이 거치대에 올려놓고 40분 정도 타면 러닝 머신 위에서 걷는 것보다 칼로리 소모량은 적지만 허벅지 근력운동을 함께 하는 일거양득의 효과는 있다. 이렇게 몸을 강제로 움직이면 가장 먼저 이마에 땀이 피부를 뚫고 겉으로 빠져나오며 흐르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경우도 있다. 아침 40분의 유산소 운동은 내 몸을 날아갈 듯 상쾌하게 만드는 나의 중요한 습관이 되었다.


근육운동을 하는 날에는 크게 세 가지 분야로 나누어서 움직인다. 첫째는 약 100Kg 내외의 바벨을 짊어지고 스쿼트를 한다. 복부에 힘이 들어가고 기립근과 대둔근이 강하게 당기며 허벅지 근육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몸으로 느낀다. 10회씩 5세트를 하고 나면 이마에 땀이 송글 송글 맺힌다. 둘째는 데드 리프트 역시 약 100Kg 내외의 무게가 되는 바벨을 들고 역시 기립근과 복근을 긴장시킨 다음 어깨와 가슴 근육을 최대한 핀 상태에서 허리와 무릎을 굽혔다 폈다를 반복한다. 등근육이 강력하게 쪼여옴을 몸으로 느낀다. 10회씩 5세트를 하고 나면 역시 온몸에 전율하는 근육 팽창감과 함께 땀으로 운동의 대가를 증명해준다. 세 번째 중점을 두는 근육 운동은 가슴 근육을 단련시키는 벤치 프레스다. 스쿼크와 벤치 프레스에 비해 벤치 프레스는 아직 무게를 많이 올리지 못하고 7∼80Kg 정도의 바벨을 15회 내외로 5세트 정도를 반복한다. 이렇게 세 가지 근육운동을 큰 축으로 삼고 틈틈이 중간중간에 이두박근과 삼두박근 단련을 위한 팔운동, 허벅지와 햄스트링 근육을 위한 레그 프레스, 가슴 근육을 위한 아령으로 누워서 올리로 내리기 등을 주기적으로 반복한다. 몸이 바로 나라를 걸 실감하는 근육 팽창감이 전율하는 감동으로 온몸을 휘감는 느낌을 받는다. 시간이 정 부족하다고 판단할 경우 유산소 운동과 근육 운동을 동시에 그것도 짧은 시간에 해결하는 방법은 케틀벨 24∼28Kg 정도의 무게로 스윙 100회와 스쿼트 100회를 자신의 신체적 한계에 따라 적당히 횟수를 배분해서 반복 운동을 하고 나면 심장 박동은 거의 격동 수준이며 허벅지는 딴딴해지고 어깨와 등근육은 뻐근하지만 즐거운 고통으로 다가온다.


데드 리프트 100Kg


몸을 사유(思惟) 하지 말고 사용(使用)해라


매일 내 몸은 나와 함께 24시간 같이 생활한다. 내 몸이 가는 곳이 내가 가는 곳이고 내 몸이 서 있는 곳이 내가 일하는 곳이다. 내가 멈추는 곳이 몸도 멈추는 곳이며 내가 움직이는 방향이 몸도 따라서 같이 가는 방향이다. 몸과 나, 나와 몸은 언제나 한 몸으로 움직이다. 생각하는 머리와 뛰는 심장도 내 몸이다. 몸 없이 생각할 수 없고, 몸 없이 느낄 수 없다. 몸과 생각과 마음은 모두 한 몸이다. 몸은 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실체이자 내가 누구인지를 항상 증명해주는 본질이다. 몸은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사용의 대상이다. 내 몸을 아무리 오랫동안 생각해도 몸은 바뀌지 않지만 몸을 어떻게 움직여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지금의 내 몸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변한다. 나는 90년대 초반 유학시절부터 운동을 시작했다. 잘 들리지 않는 영어로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이중고 속에서 공부 부담을 줄이고 잘 버티기 위해서는 뇌력보다 체력이 더 소중함으로 몸으로 느끼고 깨달았다. 그때부터 시작한 운동을 특별한 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운동을 한 지 약 30년은 된 거 같다. 몸을 철학적 탐구 대상으로 삼아 사유를 하면 몸을 바라보는 시각과 몸을 움직이는 접근을 바꿀 수는 있다. 몸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이나 통념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원동력은 몸에 대한 깊은 철학적 사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몸이 바뀌지 않는다. 몸을 사유의 대상에서 사용의 주체로 바꿔야 비로소 내가 원하는 몸으로 바뀐다. 내가 만약 30년간 몸을 연구하면서 내 몸의 신체적 기능과 철학적 의미를 깨달았다면 과연 내 몸은 바뀌었을까? 몸은 연구나 탐구 대상이기도 하지만 움직이는 주체다. 움직이지 않는 몸은 죽은 몸으로 변해간다. 몸의 존재 이유는 움직이는 가운데 드러난다. 움직이지 않는 몸에서 낡은 사유가 탄생하고 현장과 무관한 관념의 파편이 생긴다.


머리로 뭔가를 알 수 있지만 몸이 없이는 그런 앎은 뭔가를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전환되지 않는다. 나는 자전거 타는 방법을 머리로 알지만 몸으로 자전거를 타보지 않고서는 실제로 자전거를 탈 수 없다. 몸이 동반되지 않는 모든 '앎(knowing)'은, 즉 몸의 움직임인 ‘함(doing)’이 따르지 않는 '앎'은 '삶(living)'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앎'은 '함'이고 '함'은 곧 내 '삶'과 연동되지 않을 수 없다. 앎과 함과 삶의 주체는 바로 머리나 정신이 아니라 몸이다. 몸이 없이는 어떤 앎도 불가능하고 함은 실체를 잃어버리고 삶은 허공을 떠다닌다. 영어로 ‘body’는 살아 있는 ‘몸’이기도 하고 몸이 죽은 ‘시체’를 의미하기도 하다. 육체나 신체는 실체다. 신체가 죽으면 실체가 없어지고 시체가 된다. 실체와 시체는 한 몸인 셈이다. 살아 있을 때는 몸(body), 즉 신체이자 실체이고 죽으면 시체(body)가 된다. 태어날 때부터 몸을 갖고 살아가다 죽을 때 역시 몸을 갖고 저 세상으로 돌아간다. 신체와 시체 사이는 바로 탄생과 죽음이 마주하는 사이다. 그 사이에도 몸이 존재한다. 사람은 몸으로 태어나서 몸으로 살다가 몸으로 돌아간다. 몸은 삶의 중심이자 출발이며 종말을 함께 하는 나의 존재론적 근거다. 다시 나는 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내 몸은 지식과 생활의 주체이자 그것들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나는 몸속에 세상을 새겨넣음으로써 세상을 알고, 몸을 통해 세상을 만나며, 몸과 더불어 세상을 살아간다. 곧, 나는 몸인 것이다”(13쪽). 강신익의 《몸의 역사》에 나오는 말이다. 사람을 바꾸는 것은 인식이 아니라 몸이다. 몸으로 말해요. 몸은 말보다 진실하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지만 생각은 거짓말을 한다. 문제는 몸이 아니라 언제나 앉아서 오랫동안 고민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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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편견은 내장에서 나온다


지행의 격차는 언제나 존재한다. 진짜 착하게 살아가려면 착하게 사는 방식을 몸에 배게 만들어야 한다. 실제 행동은 몸에 밴 행동 지식이 바꾼다. 니체는 《아침놀》 116절에서 “모든 행위들은 본질적으로 미지의 것”(133쪽)이라고 하면서 “어떤 행위에 대해 알 수 있다는 것이 행위로 바로 이어지기에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것. 인식에서 시작해 행위로 이르는 다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놓인 적이 없었다”(133쪽)고 말한다. 올바른 인식에는 올바른 행위가 반드시 뒤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식이 행동을 보장하지 않지만 행동은 반추와 성찰이 뒤따른다면 이전과 다른 인식을 가져온다. “사람들은 많은 것이 정신의 결단에 달려 있다고 말하지만, 경험은 반대로 신체가 활발하지 못할 때 정신이 적합한 사유를 하지 못함을 보여주지 않는가? 신체의 능력에 대해 알지 못하면 우리는 계속해서 술주정뱅이가 자유의지로 떠들고, 겁쟁이가 자유의지로 도망치며, 젖먹이가 자유의지로 젖을 원한다고 말할 것이다.”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나오는 말이다. 몸으로 터득하는 인식에는 언제나 기쁨이 뒤따르지만 머리로 증명한 인식에는 몸의 기쁨이 동반되지 않는다. 몸으로 깨달은 앎이라야 머릿속의 기억이 사라져도 몸에 각인된 기억으로 시간이 지나도 다시 되살려낸다. 몸으로 깨달은 앎에는 당시 상황에 대한 풍부한 느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앎이 느낌과 결부될 때 느낌에서 느낌으로 공감되는 깨달음을 전해준다. 신체성으로 깨달은 앎이라야 행위로 이어질 가능성도 높아진다. 그런 앎은 삶이라는 구체적인 맥락성을 띠고 탄생한 깨달음이기 때문에 다시 삶으로 연결되는 앎이다. 즉 앎이 삶에서 이루어지는 함과 삼위일체를 이루는 앎이다. “앎이란 우리의 인식 행동방식, 곧 행동 지식이다. 행동 지식이 곧 앎이며, 앎은 곧 행동 지식이다”(340쪽). 김광식의 《김광석과 철학하기》에 나오는 말이다.


지행합일은 인지 생물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와 프란시스코 바렐라가 《앎의 나무》에서 주장했던 철학과 일맥상통한다. “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함이다”(34쪽). 행동하지 않고 머리로 이해하는 앎은 다시 효과적인 행위로 연결되지 못하고 결국 삶과 분리된 관념적 앎으로 전락한다. “가능한 한 앉아있지 말라: 야외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생겨나지 않는 생각은 무엇이든 믿지 말라-근육이 춤을 추듯이 움직이는 생각이 아닌 것도 믿지 말라. 모든 편견은 내장에서 나온다. -꾹 눌러앉아 있는 끈기-이것에 대해 나는 이미 한 번 말했었다-신성한 정신에 위배되는 진정한 죄라고”(353). 니체의 《바그너의 경우. 우상의 황혼. 안티 크리스트. 이 사람을 보라. 디오니소스 송가. 니체 대 바그너(1888~1889)》의 ‘이 사람을 보라’에 나오는 말이다. 놀라운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움직이지 않고 책상에 앉아서 생각을 반복하니 거기서 생각의 부산물로 편견이 양산된다는 이야기다. 나가서 해보면 내 생각이 얼마나 편협한 의견이었는지를 몸소 깨달을 수 있었는데 너무 오랫동안 생각만 거듭하니 편견만 나온다. 신체를 무시하고 모든 걸 머리를 써서 해결하는 공부를 습관적으로 반복하니 이제 우리 몸은 머리가 명령을 내려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편안한 관성에 길들여져 움직이는 것 자체를 귀찮아한다. 몸이 움직여 뭔가를 시도하려고 준비를 하면 머리는 기존 지식이나 자신의 신념으로 안 되거나 해도 잘 되지 않는다는 핑계나 합리화를 시작한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니 더불어 가슴으로 다가오는 감각적 깨달음도 모두 줄달음치고 도망가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관념적으로 사유하는 머리의 고민과 걱정이다. 신체는 체념을 거듭하는 머리에 종속된 몸뚱이로 전락한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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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성을 경멸하니 주체성도 없어졌다


신체는 그냥 몸의 크기를 좌우하는 신장이 아니라 자기만의 신념으로 무장된 체격이다. 그런 체격이 전하는 인격과 인품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신뢰를 받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하지만 신체가 침체되는 순간 인간은 몸과 맘과 머리의 조화로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체인지(體仁智)의 지혜는 무너진다. ‘신체성(身體性)’을 경멸하거나 무시하니 신체로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주체성(主體性)도 없어진다. ‘주체성’은 신체가 주인일 때 비로소 드러나는 한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正體性)’이다. 그래서 신체성의 상실은 주체성은 물론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증명하는 정체성도 지워버리고 인간을 몸뚱이로 움직이는 하나의 개체성이나 객체성으로 파악한다. 주체 없는 개체나 정체 없는 객체는 모두 있으나마 나한 존재다. 모든 존재는 신체성을 담보로 자기중심을 갖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며 자기 특유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신체가 마음이나 정신과 분리되어 물건처럼 취급되는 개체나 객체로 전락할 때 정신은 더욱 극성을 부려 신체를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야망을 꿈꾼다. 서구 철학의 역사가 이를 반증해준다. 변덕스러운 신체를 무시하고 논리 정연한 이성을 중심에 세운 철학의 역사를 뒤집은 사람이 나타났다. 바로 니체다.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게 나 나의 말을 하련다. 저들로서는 이제 와서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전과 다른 가르침을 펼 필요가 없다. 그 대신 자신들의 신체에게 작별을 고하고 입을 다물면 된다”(51쪽).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말이다. 신체가 동반되지 않는 앎은 우선 신뢰가 생기지 않는다. 누구의 지식을 어떤 방식으로 편집했는지 알 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 신념이 거세된 상황에서 관념으로 만든 지식이기 때문이다.


내 몸을 투자해서 만들어낸 지식은 지식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직접 보고 느끼고 깨달은 바라 많다. 구체적인 사례나 증거로 당시에 겪었던 아픔이나 어려움을 내 몸이 직접 겪었기 때문에 강력한 주관을 갖고 열변을 토해낼 수 있다. 니체는 같은 책에 이어서 신체를 커다란 이성으로 부각한다. “영혼이란 것도 신체 속에 있는 그 어떤 것에 불과하다고. 신체는 커다란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를 지닌 다양성이고, 전쟁이자 평화, 가축떼이자 목자이다. 형제여, 네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너의 작은 이성, 그것 또한 너의 신체의 도구, 이를테면 너의 커다란 이성의 작은 도구이자 놀잇감에 불과하다”(51쪽). 사하라 사막 마라톤에 도전했던 2013년,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40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을 뚫고 하루 40Km 강행군을 하다 보면 힘들고 지치기도 하지만 무거운 배낭이 짓누르는 무게는 더욱 감당하기 어렵다. 그래서 잠시 쉬면서 배낭을 살짝 두 팔로 깍지를 끼고 들어 올리면 배낭의 어깨끈이 어깨에서 살짝 들리면서 그 사이로 바람이 지나간다. 사막 레이스는 사투 끝에 스며드는 오르가슴이다. 혹독한 폭염, 달아오른 사막의 모래, 흘러내리는 땀방울, 짓누르는 배낭의 무게, 그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바람 덕분에 느끼는 시원함, 뼈와 살을 저미는 사막 레이스의 쾌감을 무슨 수로 설명하고 무슨 수로 맛보게 하랴! 신체성을 거세하고 사막 마라톤에서 느낀 나의 감정과 주관을 객관성이라는 칼로 거세한다면 사막 마라톤의 고통과 희열은 몸으로 와 닿지 않고 허공으로 산산이 부서진다. 사막 마라톤의 결과는 그저 사막에서 달리면서 체지방 몇 %가 연소될 것이고 체중은 어느 정도 감량되어 몸의 신체조건은 놀라울 정도로 좋아질 것이라는 과학적 진술로 둔갑해버린다. 사유와 낭만의 모래 바다인 사막에서 몸으로 느낀 신체성을 객관성이라는 이름으로 재단하면서 모든 감정을 거세할 때 남는 것은 건조한 이성들이 펼치는 지루한 담론이다. 몸으로 터득하면서 깨달은 지혜는 몸으로 쓰고 몸으로 느낄 때 그 지혜가 담고 있는 본래의 의미와 가치가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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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너 밖에 없다!


“기다리면 늦어지고 생각하면 어긋난다”(27쪽). 이성복의 《무한 화서》에 나오는 말이다. 지금보다 좋은 상황이 되기를 기다리다가 기회를 영원히 놓칠 수도 있고 장고(長考) 끝에 악수(惡手)가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문제는 몸이 동반되지 않는 머릿속 생각이다. 걱정하고 고민하는 생각은 두통을 야기할 뿐이다. 그럼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라는 말인가. 사실 생각한 대로 바로 행동으로 나오지 않는다. 멋진 여인을 앞에 두고 한 번쯤 말을 걸어볼까 생각만 하다가 아름다운 여인은 이미 다른 것으로 가버렸다. 생각한 대로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놓치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생각한 대로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게 당연하다. 생각을 바꿔 먹으면 행동도 바뀐다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말이다.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살기 어렵다. 폴 발레리의 명언은 오히려 “생각하는 살기 어렵다. 사는 대로 생각하자.”가 맞다. 사람은 사는 대로 생각이 바뀐다. 내 몸이 움직이는 데로 그것에 따라서 내 생각도 바뀐다. 생각은 내 삶의 결론으로 생긴 소산이다. 생각은 내 몸이 움직여서 이루어지는 삶의 산물이다. 우리가 살아는 “현실은 물질이고 희망은 생각이다”(94쪽).정희진의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에 나오는 말이다. 현실은 희망이 바꾸지 못한다. 생각으로 만들어진 희망이 물질로 이루어진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몸은 물질이고 정신은 생각이다. 정신과 생각이 몸과 물질을 바꿀 수 없다. 몸은 오로지 지금 여기서 현실을 살아갈 뿐이다. 내가 믿을 건 오로지 몸 밖에 없다. 몸으로 바꾸는 현실만이 진실이다. 오로지 현실만이 몸으로 바꿀 수 있다. 그것이 과거를 아름답게 떠올리는 추억을 만들고 다가오지 않은 미스터리인 미래도 가슴 뛰는 상상으로 바꿔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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