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생명력을 고양시킨 개념의 위력

자기만의 신념으로 세상을 창조한 철학적 개념사

생명력을 고양시킨 개념의 위력

자기만의 신념으로 세상을 창조한 철학적 개념사

 

사람은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내가 사용하는 개념만큼 세상은 보인다. 내가 사용하는 ‘개념’을 바꾸지 않으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바뀌지 않는다. 세상을 다르게 보고 봤던 세상을 이전과 다르게 정리하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이전에 몰랐던 개념을 습득해야 한다. 또는 내가 알고 있는 기존 개념을 다른 의미를 부여해서 재개념화 시키는 노력을 쏟아부어야 한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도 개념을 배우고 익히기 위해서다.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무수한 상념들이 일정한 논리체계를 띠고 단순하게 정리되기 위해서는 개념이 필요하다. 개념의 본래 뜻도 복잡한 것을 한 가지 본질로 꿰는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여기서는 철학자를 비롯해서 인문학자들이 자신의 생각과 문제의식을 표현하기 위해서 창조한 개념을 공부하는 과정에 대입해서, 공부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 바로 개념의 창조와 습득임을 예시로 보여주려고 한다. “철학의 과제는 개념 창조에 있다”고 말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철학자들은 저마다의 개념을 창조해왔다. 세상에서 발생하는 무수히 많은 사건과 사고, 매일같이 접하는 일상 속의 현상들, 거기서 경험하면서 드는 무수한 생각들을 하나의 개념으로 파악하려는 인간의 철학자들의 노력이 우리들의 사고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준 원동력인 셈이다.



그 개념 탐구의 여정을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나오는 ‘코나투스(conatus)’로 시작해본다. 코나투스는 자기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는 일종의 관성입니다. 사물이 본디부터 가지고 있고 스스로를 계속 높이려는 경향이다. 우리가 이전과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것은 코나투스를 찾아내서 그걸 더 강화시키는 공부를 하면서 자기다움을 강화시키는 욕망 탐구 여정이다. 자신이 하면 즐겁고 신나서 코나투스가 더욱 발현되는 길을 찾아간다. 공부는 나의 코나투스가 무엇인지, 그것을 찾아내서 코나투스가 관성을 따라가며 행복함을 욕망하는 길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공부의 길이다.



두 번 째는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에 나오는 ‘엘랑비탈(Elan Vital)’을 통해 생명이 약동하는 힘을 찾아가면 좋겠다. ‘엘랑비탈’에서 ‘에는’은 도전과 약동을 의미하고 ‘비탈’이란 생명을 의미한다. 따라서 엘랑비탈은 '생명의 도전과 약동을 일으키는 근원적 힘'이다. 베르그송은 ‘창조란 생명이 진화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질적 비약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엘랑 비탈은 모든 생명체가 주어진 조건에 관계없이 자발적으로 변화하기 위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살아있으려는 생명에너지다. 따라서 엘랑비탈은 물질과 생명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나를 비약적으로 약동시키는 엘랑비탈, 비탈길이 험난하다고 해도 위험을 무릅쓰고 내 생명의 꿈틀거리게 만드는 그 순간을 찾아 무한 탐구하는 과정이 바로 공부다.



세 번째 알아볼 개념은 마르셀 뒤샹의 '앵프라맹스'(inframince)다. '앵프라맹스'는 '아래'(infra)와 '얇음'(mince)의 합성어로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극미한 차이로서 겉으로 보기에는 거의 구분하기 힘든 창조물이다. 남자 소변기를 떼다가 ‘샘물’이라는 제목을 붙여 예술작품으로 출품했던 듀상의 파격적인 예술적 시도, 예술은 더 이상 시각적이고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 의도와 의미를 부여하는 개념적인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화장실에 있던 소변기와 작품 출품대 위에 있는 소변기는 극미한 차이를 지칭하는 앵프라맹스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예술적 차이를 발생시킨다. 우리가 하는 공부도 결국 평범해서 진부한 개념도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을 바뀌면 극미한 차이지만 의미심장한 차이를 지니는 전혀 다른 개념으로 탄생시키는 탐구과정이다.


네 번째 알아볼 개념은 르네 마그리뜨의 ‘데페이즈망((dépaysemen)’이다. 데페이즈망은 익숙한 이미지의 낯선 중첩으로 생기는 색다른 상상력의 산물이다. 그냥 내버려두면 익숙한 이미지이지만 그것을 낯선 방식으로 조합하면 색다른 상상력을 잉태하는 새로운 텃밭으로 변신한다. 미지(未知)의 세계를 꿈꾸는 이미지에서 미지(未地)의 세계로 달려가는 상상력을 잉태하는 과정, 내버려두면 익숙하지만 특정한 의도로 중첩시키거나 재배치하면 색다른 이미지로 탄생시켜 색다른 세상을 지향하는 상상력을 잉태하는 과정, 그 속에 공부하는 사람의 호기심과 질문이 살아간다. 상상력은 익숙한 것의 낯선 조합에서 비롯된다. 독립적으로 존재할 때는 무의미해 보이고 익숙했지만 누군가 의도를 갖고 낯선 방식으로 중첩시키거나 뒤섞어 보여주면 난생처음 보는 이미지가 낯선 상상력을 품고 다가온다.


데페이즈망과 연결시켜 생각해볼 수 있는 개념으로 레비스트로스이 《야생의 사고》에 나오는 ‘브리꼴레르(bricoleur)’라는 개념이 있다. 우연한 기회에 접목해보았더니 생각지도 못한 해결책이 나오고 시행착오 끝에 찾아낸 대안이 뜻밖의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다. 브리꼴레르는 사전에 계획된 방식을 그냥 따라가지 않고 주어진 매뉴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예측 불허의 상황에서 우발적 마주침을 통해 색다른 해결 대안을 찾아내는 임기응변의 명수, 맥가이버형 인재를 지칭한다. 공부도 브리꼴레르가 하는 것처럼 사전에 기획된 각본대로 앎이 생기는 체계적인 규칙 준수 과정이 아니다. 예측불허의 복잡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고 계획된 의도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이 더 많이 발생한다. 공부는 정해진 답보다 답이 없는 상황에서 어디에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현답을 찾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루한 연구를 반복하다 우연한 깨달음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마주침의 과정이다.



다섯 번째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에 나오는 ‘리좀(Rhizome)’은 중심이 없고 시작도 끝도 없는 항상 중간, 사물의 틈, 존재의 사이, 간주곡을 의미한다. 리좀은 체계성과 계획성보다 우연성과 무목적성을 선호한다. 리좀은 정해진 구조나 위계를 따라가지 않는다. 나무뿌리가 어디로 뻗어가서 또 다른 나무뿌리와 만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연한 접속을 통해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또 다른 결과를 부단히 창조하는 과정이 바로 리좀이다. 리좀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사이나 경계에서 꽃을 피운다. “’사이’라는 것. 나를 버리고 ‘사이'가 되는 것. 너 또한 ‘사이'가 된다면 나를 만나리라(149쪽).” 이성복의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에 나오는 말이다. 리좀을 통해 새로 태어나는 모든 창조는 사이와 사이가 우연히 접속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브리꼴레르의 우연성처럼 리좀도 다양한 개념과 우발적으로 만나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낸다. 전공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사이와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며 무한 리좀을 양산하는 과정, 그것이 바로 마음껏 즐겨야 되는 공부의 즐거움이다. 



여섯 번째,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힘에의 의지’는 발버둥 치며 성장하려는 의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저기로 가려는 상승작용의 의지, 나에게 없었던 힘을 주는 의지, 내가 하면 행복한 에너지가 솟아 나오는 것을 못하게 막는 구속과 저항을 극복하려는 의지, 나에게 힘이 되는 일을 하면서 힘이 되는 의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관계적 의지다. 나에게 힘이 되는 공부를 하면서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만드는 생명력을 고양시키는 공부를 통해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 과정, 여기에서 만족하는 공부가 아니라 아직 가본 적이 없는 저기로 가려고 발버둥 치며 동료들과 함께 서로에게 힘이 되는 과정이 공부의 참맛이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스피노자의 개인적 욕망을 추구함으로써 활력이 생기는 코나투스를 넘어선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서로가 서로에 힘이 되는 일을 통해 혼자 할 수 없는 새로운 생명력을 불러일으키려고 했다는 점에서 인간 존재의 생명력뿐만 아니라 관계와 공동체의 생명력을 창조하려는 의지로 발전시킨 것이다.



일곱 번째,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위버멘쉬(Ubermensch)를 지향하고 있다. 공부는 힘에의 의지를 통해 자기 변신을 부단히 반복하며 전투를 벌이며 살아가는 위버멘쉬(Ubermensch)의 삶을 따라가는 과정이다. 위버멘쉬는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인 초인이 아니라 지금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리고 운명조차 거부한다고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사투하면서 자신을 발견하고 넘어서기 위해 애간장을 태우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위버멘쉬는 공부를 통해 자신의 비극적 운명마저도 수용하고 사랑하면서 운명애(amor fati)를 지니고 끊임없이 자기극복을 시도하는 삶의 주연 배우다.


여덟 번째,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에 나오는 ‘아장스망(agencement)’은 영어의 배치(arrangement)가 시사하듯 기존 사물과 사물의 낯선 조합과 우연한 마주침으로 생성될 수 있도록 이루어지는 사물의 배치이자 그 배치로 생기는 흔적과 주름이다. 내가 다른 나로 부단히 생성되는 것도 아장스망 덕분이다. 공부는 다양한 개체들이 이전과 다른 배치를 통해 또 다른 개체로 생성되는 무한 반복의 과정 속에서 또 다른 나로 다시 태어나는 즐거운 탐구과정이다. 나는 내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마주친 흔적이나 주름으로 생긴 다중체(multiplicity)다. 다중체는 이제까지 내 몸에 각인된 다양한 흔적과 주름의 역사적 산물이다. 공부는 익숙한 주름을 제거하고 낯선 환경에 몸을 던져 배치를 바꾸고 없었던 흔적과 주름을 만들어가는 지난한 과정이다.



아홉 번째, ‘아비투스(habitus)’는 사회학자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구별짓기 상, 하》에 나오는 개념이다. 아비투스는 특정한 환경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면서 형성된 사고방식과 행동 체계를 의미한다. 결국 아비투스란 특정 환경으로 인해 개인 안에 내면화된 사회구조다. 내가 막걸리를 좋아하는 것은 개인적인 취향이 결정한 것이 아니라 내가 처한 사회 환경이 막걸리를 능가하는 고급술을 즐길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취향이다. 아비투스가 말해주는 것은 취향은 개인적인 산물이 아니라 사회적 계급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공부는 비록 나의 지금 취미와 성향은 내가 처한 계급적 구조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할지라도 구조를 다시 구조화시키는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을 배우는 성찰과 다짐의 여정이다. 아비투스는 나를 구조화시키는 구조지만 역으로 그 구조를 내가 다시 구조화시킬 수 있는 적극성을 함의하고 있는 개념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공부를 통해서 도달하고 싶은 경지 중의 하나는 실천적 지혜로 번역되는 프로네시스(phronesis)다. 프로네시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나오는 개념이다. 실천적 지혜는 이렇게 할 수도 없고 저렇게 할 수도 없는 회색지대에서 도덕적으로도 옳으면서 윤리적으로도 어긋나지 않는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올바르게 행동함으로써 사회적 공동선을 추구하는 지혜다. 실천적 지혜는 나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이기적 행동, 논리적 객관성에 매몰된 나머지 인간적 실존을 위협하는 편파적 이성, 전문 지식과 기술로 무장했지만 타자의 아픔에 눈감는 재수 없는 전문성에 경종을 울리는 지혜다. 공부는 책상에서 전문 지식을 습득하고 과학적 실험을 통해 객관적인 논리를 훈련하는 과정을 넘어선다. 진정한 공부는 비록 개인적인 공부로 자각에 이르렀지만 그 깨달음의 지혜를 타자의 아픔을 위해 기꺼이 사용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선(善)을 위해 자신을 불사르는 살신성인의 미덕을 배우는 과정이다.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에 보면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스투디움은 작품을 보는 사람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누구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공유되는 길들여진 감정이다. 이에 반해 푼크툼은 ‘작은 구멍’ 혹은 뾰족한 물체에 찔려 입은 부상‘이란 뜻으로,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끼는 감정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화살같이 날아와 폐부를 찌르는 낯선 자극이자 상처다. 익숙한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은 푼크툼의 세계로 보인다. 달리 보이는 것 없이 늘 세상과 일상은 정상적으로 보이고 다가온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익숙했던 현상이 낯설게 느껴지고 당연했던 세계가 다르게 보이면서 불편한 문제의식을 잉태한다. 툰크툼의 세계로 보이게 만든 낯선 개념을 습득해서 그저 그렇게 보였던 세계가 다른 자극으로 나에게 각인되면서 깊은 앎의 상처가 만들어진다.


“평소에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이런 모순에 갑자기 의문이 생기는 순간을 나는 문학적 시간이라고 부른다. 문학적 시간은 대부분 개인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지만, 사회적 주제와 연결될 때 그것은 역사적 시간이 된다. 그것은 또한 미학적 시간이고 은혜의 시간이고 깨우침의 시간이다(8쪽).” 얼마 전에 우리 곁을 떠나신 황현산 작가님의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에 나오는 말이다. 진짜 공부는 문학적 시간을 역사적 시간으로 승화시켜 미학적으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시간의 소중함을 나누는 깨달음의 시간에서 나온다.



매거진의 이전글 언어의 반대말은 살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