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해석'을 바꾸면 해법이 보이고
‘해답’도 달라진다

《그래도 사람은 달라질 수 있다》를 읽고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면서

해석을 바꾸면 해법이 보이고 해답도 달라진다

그래도 사람은 달라질 수 있다를 읽고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면서



해석을 해석한다해석에 반대한다를 해석한다


“사실은 없다. 해석이 있을 뿐이다.” 니체의 말이다. 객관적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객관적 사실을 누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사실은 별 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는 중립적 현실이 될 수도 있고 진심이 담긴 진실이 될 수도 있다. 세계는 해석자의 관점적 차이에 따라 사실을 넘어 사기가 담길 수도 있고 진실이 담긴 진리가 될 수도 있다. 모든 진리는 그래서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뜨거운 열정과 철학, 신념과 가치로 이미 오염된 편견의 산물이다. 그래서 니체는 모든 진리는 곡선으로 휘어져 있다고 했다. 진리는 직선으로 목표에 도달하는 객관적 지식의 과학적 표현이 아니라 주관적 신념의 산물이다. 동일한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누가 어떤 관점으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니체는 사실은 없고 해석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이야기한 것이다. 그런데 니체의 이런 주장에 정면으로 반론을 제기한 학자가 있다, 바로 수전 손택이다. 그녀는 《해석에 반대한다》는 책에서 해석에 대한 그녀의 독특한 주장을 엿볼 수 있다. “해석은 지식인이 예술에 가하는 복수다. 아니, 그 이상이다. 해석은 지식인이 세계에 가하는 복수다. 해석한다는 것은 ‘의미’라는 그림자 세계를 세우기 위해 세계를 무력화시키고 고갈시키는 짓이다”(25쪽). 해석이라는 이름으로 작품을 평가하지만 그런 해석은 예술작품을 창작한 예술가의 창작 의도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편집하려는 불온한 음모에 불과하다. 작품을 창작한 예술가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예술작품을 자신의 이론적 신념으로 해석하는 행위는 창작자의 의도를 왜곡하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



“해석은 예술작품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잔인한 호전 행위”(26쪽)이거나 “해석자는 예술작품을 그 내용으로 환원시키고, 그다음에 그것을 해석함으로써 길들인다. 해석은 예술을 다루기 쉽고 안락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26쪽). 예술작품을 창작한 예술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해석자는 작품성을 자신의 입장으로 재단하고 평가하는 해석 행위를 거듭할수록 예술적 의미와 가치와는 무관하게 창작자의 의도를 왜곡하거나 희석시켜 오히려 예술작품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호전 행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해석은 그래서 “작품에 대한 불만사항, 그래서 그것을 무언가 다른 것으로 바꿔놓고픈 희망 사항”(28쪽)이다. 예술작품을 창작한 사람은 본래 그런 의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석자가 자기 주관대로 작품성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희망하는 사항을 편파적으로 주장함으로써 해석은 작품에 대해 해석자가 지니고 있는 불만사항을 전달하는 방편으로 작용한다. “우리의 임무는 예술작품에서 내용을 최대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에 있는 것 이상의 내용을 더 이상 짜내지 않는 것이다”(34쪽). 해석을 거듭할수록 작품을 창작한 오리지널 예술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해석자의 다양한 의지가 반영됨으로써 순수한 예술작품은 본래의 색깔과 의도를 잃어버리고 해석자의 해석적 판단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정치적 입김에 수전 손택은 강력하게 반대하는 것이다.



해석을 바꾸면 능력도 바뀐다


해석의 부정적 역기능에도 불구하고 해석은 여전히 순기능을 갖고 있다. 똑같은 사실도 그걸 누가 어떤 관점으로 해석해내는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니체가 사실은 존재하지 않고 사실에 대한 해석만 존재할 뿐이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런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해석을 바꾸는 방식을 통해 이끌어낼 수 있는 것은 새로운 능력이다……새로운 해석도 그 사람의 새로운 능력을 이끌어내고 결과적으로 사람을 바꿀 수 있다”(97쪽). 누가 어떻게 해석해내는지에 따라서 그 사람의 보잘것없었던 능력도 새로운 능력으로 다시 태어난다. 능력은 해석자가 어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서 어떻게 해석해내느냐에 따라서 다른 능력으로 인정된다, 부정적인 기운에 휘둘려 늘 골방에 처박혀 역기능과 폐해로만 보였던 능력이 우연한 기회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는 순간 자신의 능력을 고루하게 해석했던 틀에 박힌 한계를 깨달을 수 있었다. “새로운 해석을 발견해내고 자신과 주변을 바꾸기 시작할 때까지 사람은 고루한 해석 안에서 고민하고 발버둥 치며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내야 한다. 고루한 해석으로 도저히 자신이 직면해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일종의 절망감 속에서 마음은 새로운 해석을 낳는다. 새로운 해석은 고루한 해석 안에서 숙성되고 절망이라는 현실적 검증을 견뎌내며 탄생하는 것이다”(98쪽). 해석이 고루해질수록 해답은 지루해진다. 해석을 바꿔야 해법을 찾는 접근 논리도 달라지고, 접근 논리가 달라져야 거기서 얻을 수 있는 해답도 바뀐다.


해석은 언제나 또 다른 해석과 싸운다. 새로운 해석은 고루한 해석으로 더 이상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주지 못하는 한계에 직면할 때 탄생된다. 고루한 해석이 새로운 해석을 낳는 법이다. 평온했던 해석의 세계에 타자의 새로운 해석이 불법침입할 때 낯선 해석의 씨앗이 잉태된다. “사유는 비자발적인 한에서만 사유일 수 있고 사유 안에서 강제적으로 야기되는 한에서만 사유일 수 있다. 사유는 이 세계 속에서 불법침입에 의해 우연히 태어날수록 절대적으로 필연적인 것이 된다. 사유 속에서 일차적인 것은 불법침입, 폭력, 적이다” (310-311쪽).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에 나오는 말이다. 기존 해석으로는 새로운 가능성의 관문을 열 수 없다는 판단이 들 때 전대미문의 질문이 시작된다. 고루한 해석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만들어낸 성인이 되기 위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해석이며 하루하루를 보다 효율적으로 보내기 위한 해석이었다”(103-104쪽). 고루한 해석에 머무는 사람은 사고가 고리타분하다. 변화보다 안정, 도전보다 안주를 택한다. 기존의 해석을 능가하는 색다른 현상의 출몰에 관심이 없거나 두려움을 느낀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안빈낙도의 삶에 물들어 있고 타성과 관성에 빠져 식상함과 통념을 주로 먹고 산다. 하지만 성인의 해석에 변화가 불가피한 이유는 이제까지 오르막길을 힘겹게 뛰어오르는 목표 달성과 성과를 놓고 투쟁하는 삶을 살았다면 이제부터는 내리막길에서 추락하지 않고 인생 후반부를 맞이하는 삶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오르막을 해석하는 방식과 내리막을 해석하는 방식에 차이가 없다면 내리막길에서 추락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세가 고루하면 살아가는 자리도 지루하다


성인 이후 걸리는 마음의 질병은 주로 고루한 해석이 낳은 질병이다. “마음의 질병은 고루한 해석 안에 갇혀 있었다는 데 원인이 있다. 마음의 질병을 해결하려면 자신이 직면해있는 새로운 사태에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111쪽)”. 해석이 고루하니 마음도 고루하다. 해석이 지루하면 사고도 지루하다. 내 생각으로 해석할 때 등장하는 고정관념과 타성, 통념과 관례가 고루할수록 생각도 낯선 사유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해석이 틀에 박혀 있으니 생각도 마음도 다른 대안을 찾아 탈출할 방법이 없다. “’ 자신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기를 멈추고 ‘타인의 사고방식’에 상상으로 동조할 수 있는 능력, 이를 ‘논리성’이라 부른다”(113쪽). 우치다 타쯔루의 《말하기 힘든 것에 대해 말하기》 에 나오는 말이다. 내 생각으로 주어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 때 한시라도 빨리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내 생각에 접목해서 새로운 생각의 씨앗을 잉태해야 한다. 새로운 생각이 잉태되어야 새로운 해석이 나온다. 고루한 해석에서 벗어나 새로운 해석으로 낯선 사유체계가 구축되기 위해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가 바뀌어야 한다. 대형사고로 한쪽 다리를 절단할 수 없었던 사람은 내 인생은 이제 끝이라고 단정하고 시종일관 부정적인 자세와 태도로 삶을 일관해왔다. 하지만 어느 날 창문으로 들어온 한 줄기 빛에서 희망을 보았고 그 빛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라는 순간적인 충동이 충격적으로 다가온 사건을 경험한다. 불치의 질병이라고 해석하고 더 이상 떨어질 수도 없는 나락의 끝자락에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이 책에서는 ‘질병 수용’이라고 한다. 질병을 수용하고 살아갈 자세와 의지를 고쳐먹을 때, 불행한 사건은 과거로 흘러가고 이제 앞으로 살아갈 새로운 자세와 의지가 생긴 것이다. 그 순간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며 해석하는 프레임에도 혁명적인 변화가 동반된다. 


“고루한 자세는 풍요롭고 자유로운 마음의 움직임을 수용할 수 없기 때문에 새로운 것으로 치환해야 한다. 고루한 자세는 새로운 상황 아래에서도 마음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124쪽). 자세가 고루하니 살아가는 자리도 지루할 뿐이다. 새로운 해석을 낳을 터전이 생기지 않는 법이다. 남루한 환자복을 입고 지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자세가 고루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 자세를 바꾸는 계기를 맞이하는 순간 나와 내가 살아가는 삶을 새롭게 바라볼 해석이 인생의 새로운 해법을 제시하며 나타나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사람이 기존의 고루한 해석을 넘어 새로운 해석 능력을 가질 수 있는 원동력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능력을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은 슬프지만 슬픔을 반추해보고 성찰하면서 지금의 나 자신에게서 벗어나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능력, 진퇴양난의 위기 상황에서 주어진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미래는 전망하되 현재는 절망하는 능력, 과거의 상식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마음으로 세상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다. 첫째, 슬픔의 뒤안길을 오솔길로 만들어 걸어가면서 지금 당장의 아픔을 초극하려는 능력이 바로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다. 벗어나려면 내가 입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관성의 옷을 벗어던져야 한다. 두 번째 절망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붙잡고 아등바등 대지 않고 깨끗하게 야망을 내려놓고 미래를 전망하며 새로운 욕망을 키우는 능력이다. 절망은 주로 고루한 성인의 해석이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졌을 때 탄생된다. 마지막으로 순수성을 느끼는 능력은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마음을 쓰면서 즐겁고 기쁜 방향으로 마음이 흐르려는 성향을 따라가려는 능력이다. 마음은 밝고 따뜻하며 기운이 넘치는 방향으로 흘러가려는 성향이 있는데 이걸 따라가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능력이다. 



주관성(主觀性)은 나를 세상의 중심에 세우려는 주체성이다

     

저자가 말하는 새로운 해석이란 “우리가 잃어버린 주관성을 되찾을 수 있는 해석”(146쪽)이다. 갓 태어난 유아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세상이 움직이는 주관적인 세계였다. 배고프면 울고 욕구가 극에 달하면 또 울고 그럼 바로 엄마가 나타나 자신의 불편함이나 불안함을 해소해주었다. 점차 세상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사람은 성인으로 성숙해간다. 30세의 성인이 되기까지 나의 주관대로 움직이지 않는 수많은 다른 객관적 존재나 실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을 거친다. 저자는 객관적 현실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고 유아기처럼 모든 걸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지만 성인의 해석은 다시 주관성을 회복할 때 새로운 해석 능력으로 무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주관성은 말 그대로 내가 세상의 주인이 되어 주체적인 판단에 근거해서 나의 정체성을 확립해나가는 주도적인 삶을 살 때 생기는 긍정적인 의미의 관성이다. 관성(慣性)에 매몰되면 타성에 젖어 틀에 박힌 고루한 삶을 살지만 주인의 마음으로 세상을 관통(貫通)하는 마음으로 올곧게 세상을 바라볼 때 주관성(主觀性)은 나를 세상의 중심에 세우는 주체성이자 주춧돌이다. 주관성이 고집으로 전락하면 순식간에 쉽게 바꿀 수 없는 관성으로 타락한다. 관성은 생각하지 않아도 반자 동적으로 몸이 움직이는 습관의 산물이다. 반면에 주관성은 의도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수많은 다른 주장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둘릴 수 있다.


저자의 인간의 마음은 5가지 위계로 계층화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얕은 층이 없으면 깊은 층은 발휘될 수 없고, 깊은 층은 얕은 층을 자유롭게 조종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의미다. 가장 밑바닥의 원초적 감정은 감각이다. 어린 시절 주로 발달하는 1차원적 신체적 움직임, 예를 들면 배고프면 엄마 젖을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울면 뭔가 새로운 가능성의 문이 열린다는 점을 몸으로 알게 된 것이다. 감각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층위에 존재하는 감정이 욕구다. 감각적 깨달음을 몸으로 터득한 사람은 이제 자신이 원하는 대상을 갈망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욕망하는 대상을 지향하는 본능이 생긴다. 사람은 모든 욕구를 충족해서 살아갈 수 없다. 그걸 인식하고 통제하며 조정하는 높은 마음의 계층이 지성이다. 욕구는 나를 끌고 가지만 지성은 나를 거기서 떨어져 나와 냉정한 자세를 유지하려고 한다. 식욕이 강하게 발동하지만 지성은 그만 먹으라고 끊임없이 명령한다. 성욕이 치솟지만 자제하지 않으면 치명적인 손상이 올 수 있음을 지성은 끊임없이 이성적으로 경고장을 날린다. 지성과 욕구가 충돌하는 사이,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만 마음으로 이해되지 않는 감정이 존재한다. 시어머니가 아프면 머리가 아프지만 친정 엄마가 아프면 가슴이 아프다. 시어머니는 논리적으로 차가운 지성이 작동하고 친정 엄마는 지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뜨거운 감정이나 타자의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가슴으로 생각하는 감성이 작동한다. 머리로 이해는 가지만 가슴으로 와 닿지 않을 때 사람은 행동하지 않는다. 논리적 설명으로 이해시키지만 가슴에 와 닿지 않으면 사람은 행동하지 않는다. 사람은 감성적으로 설득당할 때 감동받고 감동받으면 행동한다. 세상은 머리를 움직이는 사람보다 심장을 움직이는 사람이 의미심장한 변화를 일으키고 리더십을 발휘한다. 



지성은 밖의 기준에 따라 흔들리지만 감성은 안의 기준으로 중심을 잡는다


저자의 주장 중에서 흥미로운 점은 감정과 감성의 구분, 감성과 지성의 구분이다. 저자는 감성은 감정보다 성숙한 단계의 마음이라고 이해한다. 감정이 상황적 분위기나 사람의 기분에 흔들리기도 하지만 감성은 타자의 아픔에 깊이 공감할 때 생기는 측은지심이라고 생각한다. “지성은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가치 판단의 기준을 참조해야 한다. 법률에 합치되거나 윤리에 근거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를 참조해야 한다. 그러나 감성은 그것이 발생했을 때부터 자신의 가치 판단을 가지고 있다. 외부에서는 감성의 가치를 매길 수 없다. 그리고 감성은 누구나 부정할 수 없는 주관성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189쪽). 가치 판단을 내부와 외부의 기준 중에서 무엇을 판단기준으로 삼는지에 따라 지성과 감성이 구분된다. 외부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지성은 논리적이지만 판단 기준이 외부에 있어서 언제나 다른 사람을 주시한다. 반면에 감성은 직감적이지만 판단의 기준이 내부에 있어서 언제나 다른 사람을 주시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감정적 흐름에 주목한다. “지성은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판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자신의 판단이 올바른 것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려면 외부의 다양한 기준에 비춰보아야 한다”(213쪽). 지성은 판단기준을 늘 안이 아니라 밖에 찾기 때문에 지성적인 사람은 환경 의존적이며 자신감이 없다. 판단을 내렸어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를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여전히 불안하다. 반면에 세련된 감정과 직감적으로 다가오는 감성에 비추어 사물이나 현상 또는 관계를 판단하는 주관성이 높은 사람은 주변의 판단과 주장에 흔들리지 않는다. 가치 판단 기준이 흔들리지 않는 심연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환경 독립적 사유를 즐긴다. 이들이 내리는 “판단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성과 감성의 모든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자신의 온 힘을 다 쏟아부은 것이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214-215쪽). 


“감성은 언어를 넘어 언어와 기존의 개념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을 느낄 수 있다. 반면, 지성은 언어라는 도구를 사용하므로 언어로 표현될 수 있는 것만 다룰 수 있다”(189쪽). 감성으로 다가온 느낌은 언어화를 거부한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느낌은 말로 다할 수 없다. 그냥 육감적으로 다가온 느낌이 나의 믿음과 신념을 부추긴다. 객관적 자료도 없고 논리적 검증도 없다. 그냥 저 사람 정도면 되겠다는 판단이 든다, 그 논리적 근거는 없다. 느낌이 나를 확신에 찬 신념으로 무장시킬 뿐이다. 지성은 논리적 언어로 설명력을 지닌다. 설명이 강해질수록 이해도는 높아지지만 확신에 찬 신념으로 가슴에 꽂히지 않는 경우도 있다. 설명자 본인이 체험적으로 느낀 점을 설명문으로 담아내지 못하거나 아예 설명할 느낌조차 없기 때문이다. 설명이 관계를 이해시키지만 설득은 관계를 뜨겁게 달군다. 설명이 (인과) 관계 안에서 꼬리를 물고 어떤 관계인지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애쓰지만 설득은 관계 밖에서 뜨거운 연대를 맺을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설명하는 두뇌는 허공을 맴돌 때 설득하는 심장은 동공을 파고든다. “지성이 자신의 틀 안에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을 때, 그 경계를 넘어 새로운 지성이 활동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주는 것이 감성과 직감이다”(190쪽). 지성은 한계에 직면했을 때 한탄하지만 감성은 한계를 넘어 경지에 이르렀을 때 감탄과 경탄을 금지 못한다. 한계를 책상에서 논리적으로 넘으려는 지성은 일상에서 한계를 몸으로 넘으며 온몸으로 겪으려는 감성에 언제나 뒤흔들릴 수밖에 없다.



주관성(主觀性)을 넘어 간주관성(間主觀性)으로:

주관이 객관을 지배하지 않고 주관이 다른 주관을 만나 합의를 이룬다

     

감정이나 감성보다 더 깊은 심연에 바로 주관성이 존재한다. 주관성은 지금까지 설명한 감각, 욕구, 지성, 감정 등 네 가지 수준을 자유자재로 통제하고 조율해낼 수 있다. 주관성에 도달한 사람은 주변의 감정 변화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주장의 무게중심을 잡고 나와 맺고 있는 관계를 객관적으로 관찰한다. 객관적인 관찰능력은 사실 주관을 배제한 독립적인 능력이 아니라 내 입장만 고수하지 않고 타자의 입장에서도 생각하며 편파적 의견을 넘어서려는 안간힘이다. 복잡한 관계에서 빠져나와 멀리서 우리를 바라보며 세상을 관조하는 능력이다. 객관적인 관찰 능력을 지닌 사람은 유머감각이 풍부하다고 한다. “유머란 보통 무언가를 믿고 그 세계 안에 몰입하고 있는 자신을 외부에서 바라보았을 때 만들어진다. 무엇인가를 믿고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된 자신의 모습과 그런 모습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212쪽). 주관성의 깊이에 이른 사람은 몰입과 이완, 지성과 감성, 내부와 외부, 음지와 양지, 오르막과 내리막을 오고 가면서 체험적으로 깨달은 각성과 촌철살인의 지혜를 몸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는 적재적소에서 다른 사람을 관찰하면서 언제 어떤 표현을 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잠시 여유를 갖고 자신을 돌보게 할 수 있을지를 꿰뚫고 있는 사람이다. 그 순간의 포착과 적확한 언어구사는 사람들에게 혀를 내두르는 촌철살인의 지혜로 죽음에 이를 정도로 큰 깨달음의 미소를 전해준다. “성숙한 사람은 자신을 현실로부터 일단 분리시킬 줄 안다. 유머는 행동의 필연성을 분리시켜 관찰하는 여유와 포기의 입장에서 탄생한다. 즉, 주관성과 객관성 사이에 존재하는 작은 틈새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탄생하는 것이 바로 유머다”(213쪽). 유머가 있는 사람은 세상이 아무리 바쁘게 돌아가도 여유만만하고 긴장 속에서도 한 템포 늦춰 살아가며 사람들에게 틈새를 제공해주는 사람이다. 틈새를 통해 추임새를 넣어 줌으로써 힘든 삶 속에서도 미소를 잊지 않게 만들어준다. 


“자신의 주관성을 확립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마음의 교류를 추구하게 되고 그것은 인생의 중요한 가치가 된다. 그들은 자신이 태어난 시대의 상대성을 이해한다”(224쪽). 주관성이 상대성을 이해한다는 말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주관성을 확립한 사람은 자기 주관에 빠져 나와 다른 주관을 인정해주지 않을 때 주관은 독단이나 고집이다. 나의 주관이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장단점을 보유한 것처럼 나와 다른 주관의 고유한 특성과 다른 측면에서의 장단점이 있음을 인정할 때 주관은 독립된 주관이 아니라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 또는 간주관성에 비추어 주관의 공동체가 될 가능성의 문이 열린다. 이런 점에서 주관성의 깊이는 혼자 파고들어간 자기주장의 깊이나 넘볼 수 없는 내공의 높이라기보다 다른 주관과 만나 사회적으로 상호작용한 합작품의 깊이다. 함께 깊이 파고든 이력이 솟아오른 경력의 높이인 셈이다. 주관의 깊이는 주인 혼자만의 외로운 투쟁의 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전문성은 주관과 주관이 만나서 이루어진 사회적 관계의 합작품이다. 진공관 속에서 혼자 외롭게 전문성을 연마한 결과 생긴 산물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주관적인 전문성은 또 다른 주관적인 전문성과 갈등과 충돌, 대화와 합의를 통해 형성된 간주관적(間主觀的) 합의의 산물이다. 주관은 주인의 관점이지만 주인이라는 인간이 혼자 외롭게 쌓아 올린 독립적 성과가 아니라 다른 주관과 만나서 합작한 사회적 산물이다. 하지만 그런 주관도 주관이 만나 만들어가는 간주관성도 환경과 무관하게 주관적으로 생길 수 없다. 주관을 둘러싼 다른 주관뿐만 아니라 주관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영향력을 주고받는 모든 사물이나 환경과 같은 비인간과의 부단한 네트워크의 산물이 바로 간객관성(interobjectivity)이다. 



간주관성(間主觀性)을 넘어 간객관성(間客觀性)으로:

세상은 오로지 객체와 객체가 만나 영향력을 주고받는 행위자 네트워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의지라는 주관성과 운명이라는 객관성을 이원론적으로 분리해놓고  주관성이 객관성을 지배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나의 의지라는 주관성이 운명이라는 객관성 안에 모두 갇혀 있지 않고 운명으로부터 벗어나 운명을 이해하고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자신을 바꿀 수 있다”(256쪽). 신체라는 객관성은 의지라는 주관성이 통제를 받는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신체는 객관적인 법칙, 화학반응 법칙, 물리학 법칙에 움직인다. 다양한 세포작용과 음식의 화학적 분해로  얻은 영양소를 활용하여 모든 근육과 뼈의 동작을 물리적으로 움직이는 신체는 “나의 의지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성”(262쪽)이다. “나의 의지가 없으면 신체의 복잡한 메커니즘은 발생하지 않는다. 내가 원할 때에만 나의 신체는 움직이고 원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262쪽). 객관적 실체로서의 신체는 주관성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 주관성의 통제 아래 객관적인 신체가 움직인다는 사실을 우리는 과연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는 진실일까? 주관적 의식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체가 가능할까? 주관과 객관은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확연하게 구분되는 두 개의 독립적인 실체일까? 의식과 마음은 이미 몸이라는 신체 안에 존재한다. 몸이라는 신체성 없이 의식과 마음이라는 주관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주관성은 신체 안으로 침투해 손가락을 움직인다. 나의 의지에 따라 신경세포가 움직이고, 운동신경이 움직이고, 근육이 움직이고, 그 결과 모니터 화면에는 문자가 나타나고, 문장이 완성된다”(264쪽). 주관성이 신체성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신체성이 주관성을 움직인다. 한계 상황에 직면하면 주관적 마음이 객관적 신체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신체가 마음을 지배한다. 몸이 부실해지면 몸속에 거주하던 마음도 같이 부실해진다. 몸과 독립적으로 마음이 주관적 행세를 할 수 없는 지경이 온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신체성을 통과한 문장이 또 다른 문장을 불러오면서 나의 주관적 신념을 바꾼다. 주관적으로 생각한 대로 쓰는 게 아니라 쓴 대로 주관이 움직인다. 생각하면서 쓰는 게 아니라 쓰면서 생각한다. 쓴 문장이라는 객관적 실체가 쓰려고 안간힘을 쓰는 주관적 의식에 영향을 미친다. 쓰려는 주관적 의지가 아무리 강해도 한 문장(객관적 실체)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한 문장을 일단 쓰면 그 문장이 다른 문장을 물고 나오면서 없었던 생각도 생기기 시작한다. 



주객의 전도가 아니라 주객의 구분이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 행위자(actor)로 등극한다. 인간만 행위자가 아니라 비인간인 노트북과 문장, 기타 환경도 행위자다. 주관적인 인간만 객관적인 비인간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체가 아니라 인간도 비인간에게 영향력의 지배를 받는 네트워크의 한 행위자일 뿐이다. “스스로 바꿀 수 없는 운명이라는 객관성과 자신을 바꾸고 싶다는 주관성이 마음속에서 정면으로 맞설 때 이 두 성질의 관계가 밝혀진다. 운명을 자각하는 시점 그것은 주관성과 객관성이 교차하는 시점이다. 이 교차점에서 주관성은 운명의 내부에 침투해 운명을 움직이기 시작한다”(265쪽). 하지만 주관성이 객관성과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있다가 객관성으로 침투하는 게 가능할까. 객관과 주관은 이분법적으로 구분되지 않고 객체도 객관이고 주체도 또 다른 객관과 연결되어 있는 객체라는 게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의 골자다. 운전하다 만난 스피드 범퍼는 생명체가 아닌 신호에 불과한 물체지만 인간 생명체의 운전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자(actor)로 작동한다. 인간만 주관을 갖고 있는 행위자가 아니라 인간의 주관과 무관하게 밖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객체도 인간 행위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행위자다. 주관적인 인간이 객관적인 스피드 범퍼를 일방적으로 통제하고 조정할 수 있다는 생각도 위험한 발상이 아닐까. 객관적 실체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주관도 없을 뿐만 아니라 주관적 주체와 독립적으로 떨어져 밖에 존재하는 객관적 실체도 없다. 주체와 객체, 안과 밖, 중심과 변방, 주관과 객관이 이분법적으로 구분된 상태에서 주체가 객체를 지배하고 안이 밖을 통제하고 중심이 변방을 움직이며, 주관이 객관 속으로 침투할 수 있다는 생각도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에 비추어 보면 나름의 한계와 문제를  태생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해석을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서 한 개인의 능력이 혁명적으로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을 열어 놀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똑같은 능력의 소유자라고 할지라도 해석 능력과 방식에 따라 전혀 다른 능력으로 부각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을 열어놓았다. 나아가 지성과 감성을 구분하고 언어화시킬 수 없는 감성이 오로지 언어를 통해서만 작동하는 지성 간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고 있다. 나아가 감성이 이성을 움직이는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이 양자를 포섭하는 주관성이 사람의 마음을 심층적으로 움직이는지를 보여준 혁명적인 책이 아닐 수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유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