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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읽지 않으면
‘기피’ 대상이 된다

‘영상’만으로는 ‘비상’하는 ‘상상력’이 날개를 달지 못한다

깊이’ 읽지 않으면 기피’ 대상이 된다

영상만으로는 비상하는 상상력이 날개를 달지 못한다


우리는 지금 귀를 기울이지 않고 수없이 떠도는 메시지와 이미지의 바다에 표류하고 있다. 책을 읽지 않고 영상을 보는 사람이 많아졌다. 읽는다는 행위는 겉으로 보기에는 이해가 가지 않기 때문에 숨겨진 의도나 행간의 의미를 끄집어내서 이리저리 따져보며 주어진 맥락에서 어떤 시사점을 지니는지 캐묻는 활동이다. 깊이 읽지 않으니 타성에 젖은 생각의 텃밭을 일궈낼 계기가 없어지고 쓰지 않으니 내 생각이 얼마나 조잡한지를 확인할 길이 없다. 읽는 대신에 보는 영상은 많아진다. 읽는 시간은 이제 아예 없어져 가는지도 모른다. 늘 뭔가를 본다. 주의를 기울여 보지 않고 그냥 관람한다. 유람하면서 바깥 풍경을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 스쳐 지나가는 듯 본다. 깊이 읽지 않으니 사고의 깊이도 미천해진다. 모두가 기피 대상이다. 읽으면서 캐묻지 않으니 흐르는 시류에 묻히고 떠내려간다. 한편 책을 읽는 독자는 사라지는 대신 저자는 늘어나고 있다. 읽는 독자(讀者)는 없어지는데 쓰는 저자(著者)는 점차 많아진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읽지 않는데 과연 무엇을 쓸 수 있을까. 그것도 엄청나게 빨리 쓰는 비결을 알려준다는 책 쓰기 공작소가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는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깊이 읽는 고독한 독자(讀者)와 기피 대상이 된 외로운 독자(獨者),

당신은 지금 외로운가요아니면 고독한가요?


“타인의 지배 아래에 놓여 있는 일상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온 유한하고 고독하며 불안으로 가득 찬 세계, 그곳이야말로 우리의 본래적인 세계이며, 그곳에서 비로소 우리는 존재의 의미를 밝힐 수 있다”(579쪽).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나오는 말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진짜 내가 성장하는 시기는 시끌벅적한 일상에서의 다양한 만남이 아니라 불안하지만 혼자 있으면서 나의 존재의 의미를 생각해보고 성찰하는 고독(solitude)한 시간이라고 한다. 하지만 현대인은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을 때 불안하지 않고 혼자 떨어져 있으면 외로움(loneliness)을 느낀다. 시간이 날 때마다 SNS에 연결되어 있는 나를 확인하려는 이유다. 이처럼 현대인들이 극도로 외로움을 느끼는 이유는 내가 맺고 있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소외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가 뭔가를 필요로 할 때 거절당하지는 않을지를 생각하면서 불안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혼자 있는 시간에 뭔가를 깊이 사색하고 성찰하는 생산적인 시간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거절당한 소외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이데거의 말대로 복잡한 관계에서 스스로 벗어나 ‘자발적인 자가 격리’를 통해 나의 내면과의 대화시간을 갖지 못하면 영원히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떠내려는 안타까운 현실이 반복될 뿐이다. 외로움은 나는 원하지만 타인이 나를 버린 관계로 내가 느끼는 정신적 공허감을 지칭하지만 고독은 타인이 원하지만 내가 먼저 관계 속에서 떨어져 나와 스스로의 마음을 다독이며 반성하고 성찰하며 보내는 적극적인 자아발견 시간이다. 



외로움과 고독의 차이는 콜린스(Collins) 영어 사전을 보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외로움은 대화할 상대나 친구가 없어 느끼게 되는 불행한 감정(Loneliness is the unhappiness that is felt by someone because they do not have any friends or do not have anyone to talk to)이고, 고독은 혼자 있어 특히 평화롭고 즐거운 상태(Solitude is the state of being alone, especially when this is peaceful and pleasant)를 뜻한다. 외로움은 관계로부터 단절되어 느끼는 부정적 감정이지만 고독은 관계를 스스로 단절시켜 느끼는 긍정적 감정이다. 같은 맥락에서 정신분석학자 해리 스택 설리반(Harry Stack Sullivan)은 ‘관계로부터 격리된 부정적 혼자됨’을 외로움으로, ‘스스로 선택해 나다움을 찾는 긍정적 혼자됨’을 고독’으로 구분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는 외로움과 고독의 현격한 차이를 대조하고 있다. “외로움으로부터 도망치는 사람은 고독의 기회를 놓친다. 사람이 생각을 ‘그러모아‘ 숙고하고 반성하고 창조하는 능력, 그 마지막 단계에서 타인과의 대화에 의미와 본질을 부여하는 능력에 바탕이 되는 숭고한 조건을 잃는 것이다. 그러나 고독을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박탈당했고 무엇을 버렸고 무엇을 놓쳤는지조차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21쪽). 외로운 사람은 점점 더 외로움에 휩싸여 본래의 자기를 찾아가지 못하지만 고독한 사람은 자기 내면과의 침묵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중심성을 잃지 않고 참 나를 찾아가는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외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기피 대상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책을 기피 대상으로 생각한다. 외로운 감정으로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기쁨을 건네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혼자 있는 시간에도 책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깊이 읽지 않으면 기피대상이 된다 1

https://www.youtube.com/watch?v=6ePaTrQbEqE&list=PLQPWN3o_AOIoxus36hOm8aHQnwX0yQT4k&index=6&t=4s




책 읽기는 아무리 힘들어도 혼자 고독을 벗 삼아 읽어야 된다. 외로운 사람은 책을 읽지 않고  SNS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타임라인의 쪼가리 글을 읽는다. 그것마저도 읽지 않으면 외로움을 달랠 길이 없고 불안감이 가중되기 때문이다. 외로운 사람은 뭔가를 읽어도 집중에서 읽지 못한다. 아마 읽는다는 말보다 훑어보다 아무 곳이든 자신의 마음을 끄는 어떤 구절이나 이미지에 잠시 머무를 뿐이다. 외로움을 견뎌내지 못하는 사람은 그래서 뭔가를 읽고 거기에 담긴 의미를 읽어내기 어렵다. 읽는다는 행위는 눈으로 시작하지만 읽은 내용으로 시각을 통해 뇌로 입력되는 순간 생각이 시작된다. 그것도 깊이 생각하려면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저자가 말하는 의도의 뒤안길을 걸어 들어가 의미의 껍질 속으로 파고들어가야 한다. 저자의 의미가 묻혀 있는 책이라는 광산에서 어떤 의미를 전달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지를 캐물어야 한다. 캐묻는 행위 자체가 깊이 캐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행위다. 깊이 읽어내려는 모든 독자는 철저하게 고독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다. 고독(孤獨)한 독자만이 저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해독하고 독해해낼 수 있다. 외로운 독자는 생각이 책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겉만 맴돈다. 몸은 여기 있지만 생각은 딴 곳을 지향한다. 외로운 사람은 몸이 정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정신이 또한 몸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언제나 깊은 자괴감에 빠져든다. 고독한 독자만이 저자의 깊은 사유체계 속으로 잠입해서 지적 유영을 즐길 수 있고, 다시 그 속에서 빠져나와 나를 되돌아보며 성찰하는 독서를 독하게 해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괴테는 “영감은 오직 고독 속에서만 얻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읽고 쓰는’ 시대에서 보고 찍는’ 시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읽고 쓰지 않으면 쓰러지는 이유는?


“지금은 정보를 ‘읽고 쓰는’ 게 아니라 ‘보고 찍는’ 것으로 바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보를 습득하고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이 바뀌고 있는 것이죠”(30쪽). 김성우, 엄기호의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에 나오는 말이다. 반복해서 사용하면서 습관의 일부가 된 미디어는 기술적 발달의 결과지만 인간의 몸도 기술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는 경우가 많다. 종이에 인쇄된 문자를 해독하고 손으로 글씨를 쓰는데 익숙해졌던 인간의 몸은 어느 사이 책은 여전히 종이매체로 읽지만 글은 노트북이나 컴퓨터로 쓴다. 책을 읽고 생각한 바를 손으로 종이 위에 쓸 때와 컴퓨터 키보드를 통해 워드 문서로 글을 쓸 때의 차이는 촉감의 차이뿐만 아니라 쓰는 속도와 효율면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 생각해서 글을 쓰기보다 글을 쓰면서 생각이 난다. 한 문장을 쓰면 그 문장이 생각을 낳고 그 생각이 다른 문장을 몰고 온다. 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쓰는 일이 동시다발로 이루어지는 글쓰기가 가능해졌다.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점차 두꺼운 책을 읽기보다 SNS를 통해 끊임없이 흐르는 조각 글이나 짤막한 영상을 수시로 본다. 깊이 읽지 않고 대강 훑어본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대신에 영상을 보고 찍고 올린다. 읽는 행위가 보는 행위로 바뀌고 쓰기가 찍기로 바뀌면서 인지 양식은 물론 사물이나 현상을 이해하는 방식에도 혁명적인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책을 읽을 때는 동영상을 볼 때와는 다르게 적극적인 개입 없이는 의미 파악이 쉽지 않다. 예를 들면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일체의 글 가운데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63쪽)는 말이 나온다. 피로 쓴 글은 어떤 글일까? 여기서 말하는 피는 무슨 함의를 품고 있을까? 단어 그대로 혈서를 쓴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문장을 읽고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웬만한 경험과 독서 이력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여기서 피는 작가가 직접 몸으로 겪은 체험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감지했을 것이다. 결국 니체가 이 문장을 통해서 주장하려는 의도는 남의 생각에 기생해서 머리로 관념적으로 쓴 글보다 내 몸을 던져 산전수전 다 겪어가면서 깨달은 체험적 글쓰기만을 사랑하겠다는 선언이다. 이 문장을 읽고 머릿속에서 어떤 시물레이션을 하는지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의미가 다를 수 있다. 


깊이 읽지 않으면 기피 대상이 된다 2

https://www.youtube.com/watch?v=ijmcdh07TaM&t=9s


문자로 전달되는 텍스트를 그것이 쓰인 맥락 속에서 해석해내야 되는 이유다. 텍스트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그래서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관여하지 않으면 의미 파악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영상 이미지는 그냥 가만히 있어도 그것이 전하려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볼 수 있다. 물론 어떤 영상 이미지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저마다 다른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도 없지 않다. 영화를 통해 전해주는 이미지는 그나마 관객으로 하여금 풍부한 상상력을 불러오는 기반이 되지만 구독자수를 늘리기 위해 혈안이 된 몇몇 유튜버 영상은 자극적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전달한다. 별 다른 해석의 가능성이 없다. 이미지가 전해주는 의미와 의도를 해석하지 않고도 단도직입적으로 무슨 의미를 담아내려고 하는지가 보인다. 메시지가 품고 있는 이면의 의도를 파고들지 않고서도 표면에 드러난 피상적 의미만으로도 작가의 의도를 간파할 수 있을 때 적극적으로 의미 해석 과정에 개입하지 않고도 의미를 간파할 수 있다.



텍스트와 영상가까이하기엔 너무나 먼 당신?

참을 수 없는 영상 메시지의 가벼움과 견딜 수 없는 텍스트 문자의 무거움


김성호와 엄기호(2020)에 따르면 텍스트 매체의 경우 추상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수많은 텍스트를 모으고 변형해서 다른 텍스트로 만들어내기가 비교적 수월한 데 비해 구체적인 방법이나 예시를 보여주는 영상의 경우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영상을 묶어서 또 다른 영상으로 만들기가 쉽지 않다. 추상성이 높을수록 텍스트로 메시지로 담아내기 쉽고 눈으로 확인하면서 금방 따라서 해볼 수 있는 구체적인 동작은 영상이 훨씬 효과적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텍스트의 추상성과 영상의 구체성은 “영상이 재현(represent)하는 미디어라면 언어는 어떤 세계의 사태나 사건, 현상이나 대상을 상징(symbol)”(98쪽)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영상은 구체적인 모습 그대로 일대일로 담아서 실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지만(represent) 언어로 이루어진 텍스트는 비둘기를 평화의 상징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인 사물에 빗대어 의미를 전달(symbol)하는데 익숙하다. 추상적이라는 말은 일상적 삶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례나 의미를 보다 큰 범주로 묶어서 통합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준다. 추상적일수록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만큼 복합적인 의미를 담아낼 수 있다. 예를 들면 “관계가 존재를 규정한다”는 추상적인 명제를 유튜브 영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는 어렵다. 왜 관계가 존재보다 앞서 존재를 규정하는지, 모든 존재는 존재 자체의 의미와 가치보다는 다른 존재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는지는 상대적으로 긴 글을 통해 논리적으로 증명하고 예증하며 우리가 겪은 체험적 깨달음과 더불어 비로소 이해되는 주장이다. 추상적 사유가 발달할수록 개별 사례를 묶어서 통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고력이 늘어난다. 역으로 추상적인 사유가 일상에서 어떤 방식으로 적용되고 실천되는지는 구체적인 경험적 사례를 통해 보다 쉽게 이해된다. 서점에서 독자를 기다리는 수많은 책을 하나의 존재로 본다면 그 책 존재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종이 책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서점에 시간을 보내기 위해 들른 한 독자와 눈이 맞는 순간 그 책은 독자에게 간택당하면서 운명적인 만남을 기약한다. 똑같은 책이지만 어떤 문제의식을 품고 있는 독자와의 관계를 맺는지에 따라서 한 권의 책은 한 사람의 한 평생을 바꾸는 운명적인 책으로 거듭난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나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와 같은 장편 소설을 텍스트로 읽었을 때와 영화로 만났을 때의 차이는 사람마다 다르다. 다만 언어적 텍스트로 전달하는 소설과 영상 이미지로 전달하는 영화는 그걸 보는 독자와 관객의 상상력에 차이가 난다. 예를 들면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 나름으로 불행하다”(p.11)를 영화에서는 과연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소설에서는 행복한 가정과 불행한 가정을 매개로 독자를 상상력의 무대로 초대하지만 영화에서는 행복한 가정과 불행한 가정을 구체적인 예시로 보여주고 그걸 비교해서 관객이 알게 해 준다. 텍스트는 묘사나 기술, 상징이나 추상을 통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지만 영상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구체적인 이미지로 보여준다. 영상은 상상력을 자극하지 않고 구체적인 이미지를 보여주고 그렇게 믿으라고 강요한다. 한 권의 책을 읽고 저마다 다른 상상력으로 다르게 해석해내는 독자가 존재하지만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책을 읽은 만큼 다양하게 해석하는 관객이 나올 수 있을까. 물론 똑같은 영화를 보고도 호불호가 극명하게 가리며 다른 차원과 수준의 감동을 주지만 텍스트만큼 다른 상상력을 자극하지는 못한다. 김성호와 엄기호(2020)에 따르면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해야 하는 문자라는 매체와, 외부에서 거의 완제품으로 들어오는 영상이라는 매체는 당연히 머릿속에서 돌아가는 방식이 같을 수가 없어요”(127쪽). 영상은 시각적 이미지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별다른 생각 없이 인지되지만 텍스트 메시지를 뇌가 받아들여서 다양한 시뮬레이션을 하면서 자신의 경험과 기존 지식에 비추어 다양한 해석 활동을 전개한다. 예를 들면, 《로미오와 줄리엣》을 100만 명이 텍스트로 봤다면 “셰익스피어가 각본을 제시하고 이에 기반해서 우리 뇌가 연기를 하는 셈”(126쪽)이라고 저자들을 말한다. 즉 100만 개의 로미오와 줄리엣의 연기 방식이 생기는 법이다.



아무리 영상 미디어가 대세를 이루고 텍스트를 대체하는 이미지 시대가 펼쳐진다고 해도 심오한 학문적 이론과 난해하고 복잡한 과학적 발견을 모두 이미지가 첨부된 동영상으로 편집해서 전달할 수가 없다. 촌찰살인의 설명력을 지닌 뛰어난 연사가 복잡하고 심오한 과학적 발견이나 이론체계를 아주 쉽게 설명했다고 할지라도 그건 나의 노력을 통해서 단순해진 설명 체계가 아니라 전달자의 고단한 노력 덕분에 듣는 청자가 덕분에 누리는 감지덕지(感之德之)의 혜택이다. 나의 수고스러운 노동으로 복잡하고 난해한 의미망이 단순한 의미로 해석되는 것과 해당 분야의 전문가의 쉬운 설명력으로 쉽게 이해한 내용 간에는 현격한 차이가 존재한다. 글쓰기에 관해 많은 경험과 탁월한 지혜를 지니고 있는 작가가 나타나 자신이 대중적인 글을 그것도 빨리 쓰는 비결을 동영상으로 아무리 감동적으로 전달한다고 해도 그걸 내 몸이 직접 겪어보지 않는 이상 대중적인 글을 쓰는 비결은 절대로 내 몸에 체화되지 않는다. 내 몸이 움직여 겪어낸 복잡함의 단순화나 불편함의 편안함이 아니라면 여전히 나의 체험적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다, 나의 신념이 추가되지도 않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나의 철학과 가치관도 반영되지 않았다. 


참을 수 없는 영상의 가벼움과 견딜 수 없는 텍스트의 무거움. 텍스트를 버리고 영상에 빠진 당신에게 던지는 따끔한 정문일침

깊이 읽지 않으면 기피 대상이 된다 3

https://www.youtube.com/watch?v=5H5u9-oqqH8&t=45s



영상을 보기만 해서는 말하는 사람이 주장하는 메시지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다. 오직 읽기를 통해 깨달음을 정련하고 쓰기를 통해 사유를 체계화 해야 비로소 내 것으로 체화된다. 읽고 쓰지 않으면 남에게 읽히고 쓰임을 받지 못하는 이유다. 소설 원작이 전해주는 중후한 상상력의 깊이가 영화로 볼 때 느끼는 참을 수 없는 영상의 가벼움으로 다가온다. 영상만으로는 비상하는 상상력의 날개를 달지 못한다. 저자의 텍스트 메시지를 읽고 독자마다 다르게 해석하는 보이지 않는 메시지의 이미지가 끝없이 펼쳐지는 상상력의 텃밭이다.



읽기의 길이가 사유의 길이다


영상과 이미지가 대세인 시대, 우리는 왜 아직도 굳이 긴 글을 읽어야 될까.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긴 글을 읽지 않으면 우리의 사유도 거기에 상응해서 사유의 길이도 길어지지 않는다. 즉 짧은 동영상이나 짧은 글만 보면 내 사유의 길이도 짧아진다. 사유가 짧아지면 시야가 좁아지고 복잡한 문제를 끌어안고 긴 호흡으로 미래를 전망하고 현재를 들여다보면 깊게 생각할 수 있는 사고력이 실종되기 시작한다. 긴 글을 읽어본 적이 언제인가? “긴 글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누군가의 요약본을 원하죠. 이제 그들의 머리는 ‘요약하는 사람들’이 점령하게 되고요. 장문을 읽을 수 있느냐 없느냐는 단순히 인내력의 문제가 아닌 거죠. 긴 글을 쓰고 읽어내는 건 어쩌면 요동치는 사회의 흐름을 이해하는 실천적 행위인지 몰라요. 인간과 사회, 세상사는 언제까지나 복잡할 테니까요”(269쪽). 김성우, 엄기호의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에 나오는 말이다. 긴 글은 읽는 독서(讀書)라기보다 읽어내는 독해(讀解)나 해독(解讀) 필요하다. 긴 글 속에서 작가가 도대체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주의를 기울여 집중하지 않으면 글의 요지나 저자가 전달하려는 의도 또는 의지를 간파해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들의 뇌는 이미 짧은 글을 대충 보고 빨리 판단하는 습관에 이미 관성이 생겼다. 습관적으로 훑어보고 빨리 다른 곳으로 넘어가려는 속독이 이미 독서의 관성으로 자리 잡아서 긴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능력은 이제 소수의 전문가나 지니는 능력이다. 긴 글을 읽고 나의 관점에서 발췌하고 요약하는 능력은 독서의 기본기이자 필살기다. 요약하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나 남의 사고에 종속되어 살 수밖에 없다. 장문의 글을 읽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읽어도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핵심을 잡아내서 요약할 수 없다. 이런 사람은 남이 요약한 문장에 의존해서 복잡한 세상을 단순하게 이해하며 살아가야 한다. 내 사고의 진원지가 나에게 나오지 않고 남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 평생을 사고의 식민지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까. 



“텍스트는 역사적 길이뿐만 아니라 사유 자체의 길이가 굉장히 길어지게 만들었습니다……텍스트라는 게 사람을 체계적으로 사고하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체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거죠. 사실 글을 쓰는 것뿐 아니라 사회를 만들어내는 데 있어서, 시스템을 어떻게 짤 것인가의 문제는 정말로 중요합니다. 시스템을 짠다는 것은 사유로써 가능한 것이지, 말로써는 부분밖에 못 써내요”(110쪽). 텍스트를 읽는 이유는 텍스트는 저자가 자신이 생각하는 의미를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해 치밀하게 고민한 사고의 흔적을 논리적 구조로 체계화시킨 산물을 거꾸로 추적해서 생각의 흔적을 어떻게 체계화시켜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펼쳐나가는지를 배우기 위해서다. 그렇게 저자의 논리적 구조를 따라 텍스트를 읽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저자가 주장하고 싶은 메시지의 흐름을 익혀서 자연스럽게 글의 구조와 체계를 배우는 효과를 본다. 특히 등장인물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며 스토리가 전개되는 장편 소설 한 편을 읽어내면 다른 건 다 기억나지 않아도 한 권의 책 속에 저자가 어떤 논리적 구조로 자신의 주장을 체계화시키고 있는지 어렴풋이나마 이미지로 남는다. 내가 읽은 글의 길이만큼, 그 속에서 내가 얼마나 치열한 사유를 깊이 파고들어갔느냐의 정도에 따라 나의 사유의 깊이와 길이도 결정된다. 읽은 길이만큼 머릿속에 사유의 흔적으로 남을 것이고 그것이 나중에 내가 글을 쓰는 길이를 결정한다. 글을 길게 쓰지 못하는 이유는 길게 쓸 재료가 없기 때문이다. 긴 글 속에는 저자 특유의 신념으로 정리된 다양한 개념이 등장한다. 독서는 어떤 면에서 저자들이 강조하거나 새롭게 창조한 개념의 향연을 즐기는 행위다. 하지만 영상이 대세인 요즘 개념적 사유가 실종되고 단어에 담긴 단편적 생각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면서 편파적으로 자극한다. 깊은 사유와 사색의 고뇌 끝에 자신의 신념을 담아낸 개념을 근간으로 말하고 글을 쓰지 않고 자극적인 단어와 표현으로 독자들의 순간적인 주의를 집중시키는데 집중적으로 관심을 쓴다. 뭔가에 집중하고 몰입해서 글을 읽고 쓰면서 작가가 생각해낸 개념을 나의 삶에 비추어 반추하면서 나의 사색과 고뇌를 담아내는 또 다른 개념으로 재정의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생각에 기생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말이다. 이말은 영상과 텍스트 메시지에 대입해서 바꿔 써봐도 재미있는 의미가 탄생된다. 관이불독심망(觀而不讀深罔) 독이불작즉혼(讀而不作則混). “보기만 하고 읽지 않으면 생각이 깊어지지 않고, 읽기만 하고 쓰지 않으면 생각이 혼탁해진다.” 아무리 영상 매체가 세상을 이끄는 주도적인 미디어라고 해도 사유의 깊이는 텍스트의 바다에서 길러진다. 텍스트(text)의 바다는 콘텍스트(context)다. 콘텍스트는 텍스트를 잉태하는 산모이자 텍스트 메시지를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상상력의 텃밭이다. 모든 텍스트는 탄생배경과 사연을 품은 콘텍스트에서 태어난다. 텍스트를 읽어내되 그것이 탄생될 수밖에 없었던 콘텍스트를 배경과 사연으로 같이 읽어낼 때 텍스트는 마르지 않는 영혼의 샘이 될 것이다.


깊이 읽지 않으면 기피 대상이 된다 끝판왕 

https://www.youtube.com/watch?v=sZDXQOV81V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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