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한자漢字를 알면
한 전문가의 한 세상을 만날 수 있다

어휘력과 사고력을 늘리고 싶은가? 한자(漢字)를 한 자씩 공부해라!

한자(漢字)를 알면 한 전문가의 한 세상을 만날 수 있다:

어휘력과 사고력을 늘리고 싶은가한자(漢字)를 한 자씩 공부해라!


공업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용접 기능사 2급 자격증 시험을 치렀다. 첫 번째 시험은 온도 조절 실패로 철판에 구멍이 뚫어지는 바람에 불합격의 고배를 마셨다. 다시 재수를 시작했다. 용접기가 넉넉하지 못해서 실습을 하려면 기다렸다가 자기 차례가 되면 실습을 하는 시간이 반복되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지루해서 시작한 공부가 한자 공부다. 상용한자 3000자 책을 사서 틈틈이 반복해서 한자를 익혔다. 어떤 시점이 되자 일기를 한자로 쓰기 시작했다. 우리말의 대부분이 한자어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일기를 써보면 알 수 있다. 접속사나 조사 등 한자어로 옮길 수 없는 말을 빼고 모조리 한자로 써보았다. 용접하면서 기다리는 시간에 한자를 반복해서 빈 노트에 쓴 덕분에  일기를 한자로 쓰는 능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친구(親舊)를 만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미래(未來)를 구상(構想)하면서 서로의 우정(友情)을 나눴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각자(各自)의 꿈을 토대로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갈지, 그 일이 나에게 던져주는 의미(意味)가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하며 복잡(複雜)한 심정(心情)을 정리(整理)해보는 시간(時間)을 가졌다. 이런 식으로 한자로 표현 가능한 모든 단어는 한자로 쓰면서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따져보며 공부했던 체험이 지금까지도 나의 어휘력 신장과 개념 창조 능력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으로 끝나는 직업과 ()’로 끝나는 직업의 차이는?


언어, 특히 한자어는 우리말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한자는 표의문자(表意文字)이기 때문에 한자의 의미를 이해하면 해당 단어가 품고 있는 의미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한 가지 예로 직업을 보면 회사원(會社員)과 예술가(藝術家), 대사(大使), 판검사(判檢事)와 변호사(辯護士), 그리고 교사(敎師)는 각각 원(員)과 가(家), 다른 의미의 사(使, 事, 士, 師)로 끝나는 한자를 지닌다. 이런 직업의 보편적 차이를 알기 위해서는 한자의 차이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우선 원(員)으로 끝나는 직업, 예를 들면 회사원(會社員), 공무원(公務員), 종업원(從業員), 세관원(稅關員), 임직원(任職員), 미화원(美化員), 경비원(警備員), 특파원(特派員), 상담원(相談員), 판매원(販賣員), 안내원(案內員), 승무원(乘務員), 은행원(銀行員), 교환원(交換員), 취재원. 집배원(集配員)은 특정 조직에 소속되어 있어서 일정한 시간에 출근해서 주어진 시간 동안 일을 하고 퇴근하는 직업이다. 한 마디로 특정 조직이나 기관의 일원(一員)이 된 사람이다. 일원이 된 사람은 반드시 남의 집으로 출근해야 된다는 부담감이 있다. 물론 남의 집으로 출근하는 일이 즐거운 사람도 있겠지만 일원이 된 사람은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과 의무가 있고 책임을 지고 일정한 기간 안에 주어진 목표를 달성해야 된다. 일원이 된 사람은 각자 맡은 분야에서 독창성을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지만 어느 정도 매일 반복하는 일을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이다.



이에 반해서 ‘가(家)’로 직업은 ‘원(員)’으로 끝나는 직업과 어떻게 다른가? 평론가(評論家), 소설가(小說家), 문학가(文學家), 사상가(思想家), 연출가(演出家), 비평가(批評家), 작곡가(作曲家), 예술가(藝術家), 성악가(聲樂家), 조각가(彫刻家), 건축가(建築家), 미식가(美食家), 탐험가(探險家), 수필가(隨筆家), 여행가, 저술가(著述家), 전문가(專門家), 역사가(歷史家), 만화가(漫畵家), 무용가(舞踊家), 연설가(演說家), 서도가(書道家) 등 무수히 많은 직업이 가(家)로 끝난다. 이들은 원(員)으로 직업에 비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특정 기관에 소속되어 활동하기보다 한 분야의 일가(一家)를 이룬 사람이라 자기 집이(家) 있는 사람이 많다. 일원(一員)이 된 사람과 일가(一家)를 이룬 사람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내 일인지 아니면 남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일인지의 차이에 달려 있다. 일원이 된 사람은 소속된 조직이나 기관에 이미 결정된 일을 일정한 방식으로 해내야 되는 일이지만 일가를 이룬 사람은 저마다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자기 색깔과 스타일을 드러내지 않으면 자기다움을 상실하고 곧 존재 이유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들은 비교 기준이 밖의 다른 사람이 아니라 어제의 나다. 예를 들면 빈센트 반 고흐가 피카소 스타일과 비교하거나 소설가 밀란 쿤테라가 톨스토이 스타일을 모방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창작 스타일을 더욱 독창적으로 개발하는 일에 몰두한다. 오로지 경쟁상대는 어제의 나다. 나아지기 위해 다른 방법으로 개발하지 않으면 경지에 다다르지 못한다.



판검사(判檢事)와 변호사(辯護士)는 왜 다른 한자 (와 )’자를 쓰는가?


또 다른 이유로 직업 중에 ‘사(使, 事, 士, 師)’로 끝나는 직업이 의외로 많다. 한글로는 똑같은 ‘사’지만 한자 ‘사’는 의미가 다르다. 우선 시킬 사(使)자로 끝나는 직업은 대사(大使)나 칙사(勅使)와 같은 직업이다. 대사는 국가를 대표하여 한 나라의 의사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고, 칙사는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는 사신이다. ‘사(使)’자가 붙은 직업은 본인의 의지보다 상관이 지시하거나 명령하는 일을 그대로 수행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어서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업무보다 정형화된 일을 어긋나지 않게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일을 담당한다. 다음은 일 사(事)자로 끝나는 직업이다. 판사(判事), 검사(檢事), 형사(刑事), 감사(監事)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일 사(事)가 품고 있는 일의 의미는 전혀 다른 일이 예측불허의 상태로 발생하는 일이라기보다 어느 정도 일정한 패턴과 규칙에 따라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일을 의미한다. 동일한 일도 어제와 다른 방법으로 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은 물론 열려 있다. 하지만 그 일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어제 했던 방식을 반복한다고 크게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반복한다. 이런 일에는 공통적으로 지켜야 할 원칙과 규칙이 있고 일정한 방식대로 따라가면 의도했던 결과가 발생하는 매뉴얼이 비교적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매뉴얼에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보기 드물 정도다. 이들에게 일 잘한다는 의미는 이미 발생한 문제를 잘 해결하거나 주어진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해서 입력 대비 출력이나 성과가 높은 경우를 말한다.



내가 궁금한 점은 판검사(判檢事)와 형사(刑事), 그리고 감사(監事)는 일 사(事)를 쓰는데 변호사(辯護士)는 선비 ‘사(士)’자로 구분하는 이유다. 똑 같이 국가가 주관하는 자격증 시험을 통과한 사람이며 해당 분야의 일정한 전문지식을 갖고 있는지의 여부를 판정받은 사람이다. 보통 형사가 추적 조사한 범죄 사실을 검사가 법리(法理)를 적용하여 해석하고 범죄 유형과 형량을 따져 구형(求刑)하면 다양한 판례, 검사의 구형과 변호사의 변론을 참고로 최종 형량을 선고(宣告)한다. 변호사에 비해 형사, 검사, 판사는 어떤 범죄 유형에 속하고 어느 정도의 형량을 결정할지의 여부는 이 잘 정리된 법조문과 법리해석 유형, 그리고 과거의 판례를 참고로 조사하고 검사해서 판결하면 된다. 물론 죄목이 어디에 해당하며 그것이 어느 정도의 형량을 주어야 적합한지를 쉽게 결정할 수 없는 딜레마 상황도 발생한다. 범죄 유형에 없는 새로운 범죄가 나타나 법의 테두리 안의 논리로는 적용할 수 없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범죄행위는 기존 법체계를 적용하면 죄목과 형량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아마도 그런 일을 반복하는 형사와 검사와 판사가 일 사(事)자를 쓰지 않았을까라는 추측이다. 이에 반해 변호사는 형사나 감사, 그리고 판검사와 다르게 다양한 경우의 수를 고려하여 시나리오 기반 사유를 통해 판사로 하여금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릴 수 있도록 치밀한 논리로 구상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판검사에게 요구되지 않는 또 다른 전문성을 습득해야 한다는 점에서 선비 ‘사(士)’자를 쓰지 않았을까.



운전사(運轉士)와 요리사(料理師)는 왜 다른 한자 (와 )’자를 쓰는가?


변호사 이외에도 선비 ‘사(士)’자를 쓰는 직업은 대부분 해당 분야의 전문가로 발돋움하기 위해 일정한 국가자격시험이나 특정 기관에서 주관하는 자격검정을 통과한 사람을 지칭할 때 사용한다. 예를 들면 석박사(碩博士), 운전사(運轉士), 노무사(勞務士), 장학사(奬學士), 통역사(通譯士), 세무사(稅務士), 회계사(會計士), 법무사(法務士), 영양사(營養士), 운전사(運轉士)는 자신이 보유한 전문성이 일정 수준에 이르러서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활동해도 된다고 인정받은, 그것도 국가나 특정 기관과 단체가 공인한 자격증을 보유한 사람이다. 문제는 이들이 보유한 전문성이 실전 경험이라기보다 지필검사를 통해 머릿속 전문성을 검증받은 절반의 전문성이라는 점이다. 진정한 전문성은 이런 자격증을 보유한 이후 해당 분야에서 어느 정도의 체험적 깨달음을 축적했는지의 여부에 따라서 결정될 수밖에 없다. 동일한 전문가라고 해도 어느 정도 현장 경험을 했는지, 그 경험을 통해 무엇을 깨달았는지에 따라 전문성의 수준은 천차만별의 차이가 난다. 예를 들면 운전면허 시험에 통과해서 운전면허증을 교부받은 운전사라고 할지라도 산전수전 다 경험하면서 예측불허의 상황에서 임기응변력을 발휘해서 대응 운전을 할 수 있는 운전사의 전문성과 면허증 취득 후 불과 몇 개월 정도의 운전경험을 가진 운전사의 전문성과는 천지차이가 난다. 이런 점에서 ‘사(士)’자가 들어가는 직업의 전문성은 본래는 책으로 공부하면서 책상에서 축적한 지식이나 기술이다. 하지만 해당 분야의 진정한 전문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다양한 딜레마 상황을 몸소 겪으면서 체험적으로 깨달은 다양한 노하우나 통찰력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전문적으로 문외한인 전문가로 전락할 수 있다.



정해진 매뉴얼을 관례적으로 사용하거나 일정한 패턴으로 발생하는 정태적인 문제를  기존 지식을 활용하여 반사적으로 활용하는 전문가는 치명적인 한계와 약점을 지닐 수밖에 없다. 세상은 어제와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코로나 19처럼 예고 없이 발생해서 우리들의 일상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매뉴얼에 없는 사건과 사고가 예측할 수 없는 패턴으로 발생하는 불확실한 세계에서 ‘사(使, 事, 士)’자가 들어가는 전문가는 위기와 난국 앞에 풍전등화(風前燈火)나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살펴본 ‘사(使, 事, 士)’가 아니라 스승 ‘사(師)’자가 들어가는 직업군이 있다. 이들은 자신의 전문성을 갖고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전해주는 사람이다. 그 가르침이 언어를 매개로 전달될 수도 있고 언어화시킬 수 없는 전문성일 수도 있다. 의사(醫師)나 수의사(獸醫師), 약사(藥師), 교사(敎師), 강사(講師), 목사(牧師), 간호사(看護師), 사진사(寫眞師), 요리사(料理師), 미용사(美容師),  장의사(葬儀師), 조경사(造景師), 원예사(園藝師), 마법사(魔法師), 퇴마사(退魔師) 같은 직업이 스승 ‘사(師)’자로 끝나는 직업군에 해당된다. 요리사가 다양한 요리를 배우면서 터득한 노하우는 초보자 일 때는 선배 요리사들이 만든 매뉴얼을 참고했을 것이다. 초보자가 일정한 수준까지 전문성을 배우는 데에는 매뉴얼을 효율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의 경지에 이르는 전문성은 언어로 번역이 불가능하다. 



안다고 스승이 제자에게 가르칠 수도 없는 전문성이다. 오로지 스승과 제자가 동고동락하면서 장기간의 인간적 접촉과 시행착오를 통해 몸으로 배우는 수밖에 없다. 선비 ‘사(士)’자로 끝나는 직업이 갖고 있는 공인된 자격증으로 검증될 수 없는 육화(肉化)된 전문성이다. 이들은 매뉴얼로 기초 지식을 습득한 다음 감각적 체험을 자기만의 독창적인 노하우로 축적해간다. 매뉴얼이 아니라 리뉴얼(renewal)을 통해 해당 전문성이 발현되는 특정한 맥락에서 늘 긴장과 충격 속에서 낯선 우발적 마주침을 즐긴다. 시시각각 변화되는 수많은 변수들 간의 동태적 관계에 주목하면서 미세한 손놀림의 차이가 위대한 전문성의 깊이를 전혀 다르게 만들어간다. 전문성은 어떤 상태를 결과적으로 이야기하는 명사가 아니다. 똑같은 전문성도 누가 어떤 상황에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서 매번 다르게 다가오는 과정적인 흐름이자 동사다. 모든 전문성은 결정된 결과를 누군가 습득하는 정형화된 산물이 아니라 전문성이 발휘되는 특정 상황에서 미세한 차이를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맥락적 감수성이자 특수성이다. 이런 전문성은 어떤 정형화된 체계로 정리될 수도 없고 언어로 번역될 수 없는 체화된 노하우다.


강사(講師)의 6단계나는 지금 어느 단계에 속하는 강사(講師)인가?


지금까지 설명한 다양한 ‘사’자의 한자 유형(使, 事, 士, 師)’을 참고로 강사(講師)라는 직업에 대입해서 한자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서 전문성 수준이 달라지는 점을 알아보려고 한다. 물론 강사(講師)의 ‘사’자는 스승 ‘사(師)’자다. 여기서는 강사의 ‘사’자를 지금까지 설명한 ‘사’자로 끝나는 직업의 ‘사’자와 몇 가지 한자어를 추가해서 강사의 수준을 6단계로 나눠보려고 한다. 우선 강사는 자신의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다. 강사는 더욱이 얼마 안 되는 지식으로 잘난 체하는 사람도 아니다. 강사는 자신만의 전문성이나 독창적인 칼라로 남을 감동시키는 사람이다. 감동적인 강사는 감동받은 청중이 만든다. 강사의 업의 본질은 감동 창출업이다. 감동받은 사람은 행동한다. 행동하게 하려면 나만의 독창적인 체험과 다양한 이론적 근거로 녹여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강사의 업의 본질은 감탄사 연발업이다. 하찮은 일상에서도 비상하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쓸 모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쓸 데가 있다는 믿음을 주는 사람이다. 강사는 당연과 물론, 원래 그런 세계에 안주하는 사람들에게 지적 충격을 선물로 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세상은 살만하고 살아가지 않으면 사라질 수 있다는 강렬한 자극을 선사하는 사람이다. 강사는 한 마디로 삶을 감탄사의 바다로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첫 번째 강사는 하수 강사(下手 講使, 講事)라고 쓴다. 정해진 일만 갑이 요구해서 강의할 경우 강사는 강사(講使)다. 나의 주관성이 반영되지 않고 주최 측이 요구하는 내용을 전달하는 강사다. 한 편 강사(講事)는 강의를 노동으로 생각해서 억지로 남 앞에 서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이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칼라는 온 데 간 데 없고 아무 강의나 닥치는 대로 하면서 밥 먹고 살기에 급급한 강사다. 강의를 어쩔 수 없이 하는 일로 생각하기 때문에 보람과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 예기치 못한 질문이 나오면 둘러대기 바쁘고 내공이 없다 보니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기 일쑤다. 강의를 하는 목적이 수단과 분리되어 있는 사람이다. 강의는 생계수단의 일환이다. 목적과 수단이 분리되어 있으면 노동이다. 그것이 하나로 합쳐져 구분이 불가능해질 때 놀이가 된다. 



두 번째 강사는 사이비 강사(似而非 講似)다. 강의를 좀 하기는 하지만 아직 강의를 전문직으로 생각하지 않고 강사 인척 하는 사이비 강사다. 여전히 자기주장이 없고 남의 이야기를 마치 자기 이야기인 것처럼 포장하는데 귀재다. 강사(講似)는 자신의 독창적인 내용을 가꾸기보다 남의 콘텐츠를 모방해서 꾸미기에 바쁘다. 나의 이야기가 없다. 사이비 강사 역시 강의를 아직도 밥 먹고 살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강사다.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기교와 편법으로 무장해서 청중을 현혹하기 바쁘다. 남의 이론과 주장을 장황하게 늘어놓다 보니 핵심이 없고 기교와 재치를 부리다 보니 알맹이가 없는 경우가 많다. 강의를 들었지만 끝나고 나면 내 몸을 관통하는 메시지가 없다. 는데 역점을 둔다. 사이비 강사는 자신의 콘텐츠를 개발하기보다 남의 이야기를 편집하고 각색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세 번째 강사는 전문 강사(전문講士)다. 강의할 수 있는 전문 자격증은 땄지만 이론적 지식으로 무장한 책상 지식인에 가깝다. 전문 강사 역시 여전히 강의를 숙명적인 업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논리를 앞세워 자기주장을 펼치는 데 바쁜 사람이다. 강의하는 콘텐츠의 소스가 주로 책이며 체험적으로 깨달은 통찰력이나 자기만의 필살기가 없다. 나의 체험적 스토리가 없기 때문에 남의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감동보다는 이해를 촉진하는 강사다. 이런 강사의 강의를 계속 듣는 시간은 지루할 수밖에 없다. 강의를 듣는 사람은 강사 자신의 체험적 해석을 듣고 싶어 한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경험한 내용이 없기 때문에 남의 이야기를 인용하는 경우가 많다. 앎으로 삶을 재단하고 평가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해는 되지만 가슴으로 와 닿지는 않는다. 옳은 이야기를 하지만 먹히지는 않는다.



네 번째 강사는 지존 강사(至尊 講師)다. 전문 강사처럼 이론적 지식도 무장하고 있지만 더욱 중요한 차별화 포인트는 체험적 깨달음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콘텐츠를 개발하고 활용한다는 점이다. 지존 강사는 강사가 되려는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강사다. 강의를 하는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이며, 강의를 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을 정도로 강의를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강사이기 때문에 자신과 같은 강사를 양성해서 세상으로 내보내는 일이 가장 소중한 과업이라고 생각하는 강사다. 지존 강사는 독창적인 칼라와 스타일로 청중을 감동시키는 강사다. 이들에게 강의는 놀이로서의 일이다. 논리적으로 설명해서 의미를 이해시키려는 전문 강사에 비해 지존 강사는 자신의 체험적 스토리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녹여서 의미를 심장에 꽂는다. 지존 강사의 강의가 의미심장한 이유다. 강의를 하는 매순간이 삶의 마지막 순간이라고 생각하며 정열적으로 강의하는 사람이다. 강의가 없으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는 강사다.



다섯 번째 강사는 절대 강사(絶對 講死)다. 절대 강사는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강사다. 강의를 통해 한 사람을 전혀 다른 길로 인도할 수도 있고 기존의 자기를 죽이고 새로운 나로 변신하게 만드는 신통력을 지닌 강사다. 일반 사람들이 도달하기에는 참으로 어렵고 지난한 강사이자 유일무이한 최고봉에 해당하는 강사다. 독일 국민에게 고했던 피히테나 한 때 로마를 뜨겁게 달구었던 브루투스가 절대 강사다. 또한 민족의 염원을 부르짖은 백범 김구 선생님이나 도산 안창호 선생님, 그리고 광야의 세계로 민족을 이끌었던 모세처럼 말 한마디로 혼탁한 세상에 한 줄기 서광을 주고 민족의 앞날을 선견 하는 강사다. 절대 강사는 작은 지식 속에서도 전체를 아우르는 조망력과 통찰력으로 대오각성을 선물해주는 강사다. 이들은 강사를 직업적 소명으로 받아들인다. 강의는 단순한 직업을 넘어선다. 강의를 통해 비로소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존재 이유이자 내가 살아가는 가치다. 자신의 안위보다 공동선을 위해 백절불굴하는 인류의 스승이다. 



여섯 번째, 신격 강사(神格 講辭)다. 사전(辭典)에 나올법한 설법을 전파하는 강사다. 신의 경지로 격상된 강사로서 그 누구도 감히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말씀을 전파하는 강사다. 신격 강사는 사후에도 인종과 국경을 초월하여 전 인류에게 빛과 소금과 같은 구원의 메시지를 던져 주었던 예수, 석가모니, 마호메트, 소크라테스 같은 스승이 여기에 속한다. 신격 강사는 사후에 더 유명세를 떨치는 강사다. 살아생전 전했던 말씀이 일정한 형태의 경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면서 특정한 종교적 계명으로 작용한다. 일반 강사로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지고의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강사의 무림지존이다.  



마지막으로 직업을 뜻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특정 분야나 위치에서 뭔가를 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한자가 ‘자(者)’라는 글자로 끝나는 직업이다. 예를 들면 기자(記者), 과학자(科學者), 기술자(技術者), 연구자(硏究者), 연기자(演技者), 교육자(敎育者), 저자(著者)나 필자(筆者), 노동자(勞動者)나 근로자(勤勞者) 등은 일정한 분야에서 하는 직업을 지칭한다. 하지만 사용자(使用者), 소비자(消費者), 시청자(視聽者), 초보자(初步者), 책임자(責任者), 생산자(生産者), 소유자(所有者), 약혼자(約婚者), 토론자(討論者), 참석자(參席者), 피해자(被害者), 담당자(擔當者), 가입자(加入者) 등은 직업을 지칭하지 않고 직업에 관계없이 특정 분야나 영역에 관여되어 뭔가 활동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예를 들면 소비자는 물건을 사는 사람을 지칭하지 그 일 자체가 직업은 아니다. 연구자도 소비자고 연기자도 소비자다. 토론자 역시 마찬가지다. 토론 자체가 직업인 사람도 물론 만들면 있겠지만 직업을 불문하고 어떤 이슈를 놓고 다른 입장과 견해를 주고받는 과정에 참석하면 토론자가 된다. 하지만 기자는 기사를 전문적으로 쓰는 직업이고 기술자는 분야에 관계없이 과학적 지식을 적용해서 일상적 삶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 편리함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이처럼 ‘자(者)’라는 한자는 사람을 좀 낮잡아 이르거나 일상적으로 이를 때 사용하는 말이지만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직업을 지칭하는 말이 되기도 하고 특정한 활동을 전개하는 사람의 이름을 지칭하기도 한다.



한자를 알면 한자로 이루어진 단어의 깊은 뜻을 간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새로운 개념을 창조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체인지(體仁智)’라는 단어를 발음하면 체인지, 영어의 ‘Change’와 발음이 같다. 나를 비롯해 세상을 ‘체인지’하려면 우선 몸으로 체험(體)해보면 가슴으로 공감(仁)되며 머리로 정리가 되어 지혜(智)가 탄생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변화는 책상에 앉아서 머리로 지식을 습득해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직접 내가 몸을 움직여 시행착오도 겪어보고 가슴으로 느껴봐야 깊은 깨달음이 다가오면서 지혜가 체화된다. 체화된 지혜만이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이 사용하는 언어가 곧 당신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