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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사용하는 언어가
곧 당신이다

삶의 얼룩과 무늬가 언어의 비늘로 몸에 새겨진다

당신이 사용하는 언어가 곧 당신이다


 삶의 얼룩과 무늬가 언어의 비늘로 몸에 새겨진다

    

어린 시절을 충북 음성에서 자랐다. 중학교 때까지 학교 가는 시간을 빼고는 논과 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고 겨울에는 비닐하우스로 상추와 토마토, 오이와 각종 야채와 과일을 재배하면서 농경체험을 몸으로 익혔다. 소를 들판으로 끌고 나아가 풀을 뜯어 먹이는 동안 나는 풀밭에 누워 맑은 하늘을 보며 무한 상상을 즐기기도 했다. 호미로 밭을 매고, 쟁기로 밭을 갈고, 낫으로 풀과 벼를 베고, 삽으로 흙을 고르는 일을 하며 몸으로 농기구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때 배웠던 수렵, 어로, 채취, 농경 관련 언어는 나의 유년시절 언어적 비늘을 만들어 내 몸에 각인시켰다. 나의 생태학적 상상력을 잉태한 언어적 사유도 이 당시에 자연과 함께 지냈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새겨지는 것처럼 사람의 몸에는 언어의 비늘이 새겨진다. 삶의 얼룩과 무늬가 언어의 비늘로 몸에 새겨진다. 내가 어떤 환경에서 누구와 무슨 경험을 축적하며 살아왔는지에 따라 내 몸에 새겨지는 언어의 비늘도 달라진다. 그때마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는 나의 삶과 무관하게 사용하지 않는다. 내가 사용한 언어는 내가 어떤 환경에서 무슨 일을 하면서 자라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언어는 삶과 유리되지 않고 언제나 맞물려 돌아간다. 언어의 비늘은 내가 살아가면서 경험한 슬픔이나 아픔의 얼룩과 즐거움과 기쁨의 무늬로 직조된다. 내리막과 오르막, 실패와 성공, 절망과 희망, 혼돈과 질서, 밑바닥과 정상, 걸림돌과 디딤돌, 배경과 전경, 어둠과 밝음처럼 삶은 음양(陰陽)이 연주하는 이중주곡이다. 



수렵과 어로, 채취와 농경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언어는 그들의 삶과 직결되어 당시의 문제의식이나 삶의 양식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삶의 무대가 바뀌면 무대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도 바뀐다. 농업을 주로 생계수단으로 살아가던 사람이 어느 날 도시로 이주하면서 공장 노동자로 살아간다면 일상적으로 만나는 언어도 바뀐다. 나 역시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학업생활을 병행하다 갑자기 전기를 생산하는 기업이 만든 공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하루아침에 사용하는 언어가 바뀌기 시작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국비로 운영되는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새로운 언어를 익히지 않으면 우선 일상생활은 물론 공부하는 과정이 괴로울 수 있다. 새로운 언어를 익히는 과정에서 내 몸에 새겨진 언어적  상처가 회색빛 청춘을 용접하면서 보낸 아픔의 증표다. 한국전력에서 운영하는 특성화 공고라서 학교에서 배우는 거의 많은 언어가 전기를 만들고 공급하며 통제하고 조정하는 언어였다. 특히 그중에서도 전기 용접을 전공으로 선택하면서 몸으로 용접기술을 익혔다. 전기용접과 가스용접, 용접할 때 용접봉을 녹여 철판을 붙일 때 위에 생기는 슬래그(slag), 용접 시 사방으로 튀는 불꽃을 스패터(spatter)라는 용어를 배운 것도 용접을 했던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용접 작업에서 용착 부분에 생기는 띠모양의 볼록하게 된 얼룩과 무늬를 비드(bead)라고 한다. 용접이 얼마나 정교하게 잘 되었는지를 판단할 때 겉으로 드러난 비드를 보면 알 수 있다. 비드는 물고기 비늘처럼 생겼다.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새겨지고 용접한 흔적에 비드가 얼룩이나 무늬로 새겨지듯, 사람의 몸에는 그가 경험하면서 배운 언어적 얼룩과 무늬가 몸에 상처로 아로새겨진다.



용접공의 세계에 고시 언어가 각인되다


“내 유년 생활을 떠받치고 있는, 그리고 누구든 자신이 되기 전에 깨뜨려야 하는 큰 기둥에 그어진 첫 칼자국이었다. 우리들 운명의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선을 아무도 보지 못한 이런 체험들로 이루어진다. 그런 칼자국과 균열은 다시 늘어난다. 그것들은 치료되고 잊히지만 가장 비밀스러운 방 안에서 살아 있으며 계속 피 흘린다”(26쪽).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서문에 나오는 말이다. 나 역시 운명의 칼자국과 방황으로 생긴 균열은 깊은 감정의 골로 내 몸의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 하지만 내가 만난 한 권의 책은 그 어떤 칼로 새긴 자국보다 강렬했다. 고시 체험 수기집이었는 데 그 속에 공고생이 고시 패스한 수기를 읽고 지금까지 생각했던 운명의 향방이 하루아침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길로 좋아하던 술을 끊고 모든 인간관계를 단절했다. 고시를 합격하기 위해 대학을 가겠다는 결단을 내리고 나의 사고체계에 고시 관련 언어들이 입력되기 시작했고 대학입시를 위해 공부해야 될 수많은 과목을 접하면서 새로운 언어를 익히기 시작했다. 대강 배웠던 국영수는 물론이고 고문(古文)이라는 과목은 나에게 그야말로 고문(拷問)의 언어로 다가오면서 심한 언어적 상처를 남겼다. 전기용접과 발전소 관련 언어로 가득 찼던 내 머리는 종교적 개종을 하면서 새로운 언어가 입력되는 것처럼 하루하루가 온통 혼돈의 도가니였지만 고시 합격 후에 펼쳐질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상상력의 날개를 달고 벌써 하늘을 날고 있었다. 중학교 실력에 미치지 못했던 국영수 과목 실력은 독학으로 새로운 언어를 익히면서 실력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내용을 이해한다는 것은 해당 분야에서 통용되는 언어를 이해한다는 말이다. 분야별로 상식에 가까운 공통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면 해당 분야에 진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관련 분야 사람들과 어려운 소통을 할 수밖에 없다.



우여곡절 끝에 한양대학교 교육공학과에 입학한 사건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방향 전환의 계기이자 이전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운명이 바뀌는 디딤돌이었다. 사실은 법학과에 진학해서 사시 공부를 하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대학 입학학력고사 점수가 나오지 않아서 교육분야 행정고시를 보려고 교육 관련 학과를 찾다가 만난 학과가 교육공학과였다. 공돌이 생각을 표현하는 언어는 교육공(工) 학과의 ‘공(工)’을 보는 순간 말없는 교감이 이루어지면서 포근한 연대를 나 혼자 생각하게 되었다. 때로는 잘 못 탄 기차가 올바를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는 파울로 코엘료의 말이 생각난다. 진로를 결정하고 진학을 결심한 게 아니라 내 학력고사 점수로 갈 수 있는 곳을 찾다가 교육공학과로 진학하게 된 운명적인 판단과 선택이 오늘의 나를 만드는 우발적 사건이었던 셈이다. 진로에 맞는 진학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 진학 후에 진로를 찾아가는 결정적 사건이 오늘의 나를 한양대학교 교육공학과 교수의 길로 안내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를 한양대학교로 이끌었던 고시를 향한 집념은 복학 후에 다시 한번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공부를 해도 진도는 나가지 않고 재미없는 공부를 계속해서 합격한 들 내 인생이 과연 행복할 것인지 의문을 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인생의 두 번째 운명을 바꾸는 역사적 사건을 감행한다. 고시 공부하던 책을 달밤에 밖에 쌓아놓고 기름을 부어서 불살라 버리는 일명 분서갱유 사건을 감행한다. 그 사건 이후로 내 머릿속에 박혀있던 고시 관련 각종 법률용어가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대신 그때부터 읽고 싶은 책을 마음대로 읽으면서 인문학적 사유를 기르는 텃밭에서 새로운 언어적 상처를 만들기 시작했다. 



https://youtu.be/SfQ0-hnQF68


언어는 생각의 옷이다


고시를 포기한 이후 내 머리는 교육으로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학문적 접근으로  물갈이를 시작했다. 사람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교육학 분야는 폭넓은 인문사회과학적 접근과 맞물려 있다. 가르치는 사람의 교육방법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이슈는 배우는 사람의 심리적 자세와 태도, 배움으로 이끄는 몰입과 동기, 생각과 행동을 바꾸는 교육적 변화 전략에 관한 다양한 생각을 교육과 관련된 언어로 옷을 입기 시작했다. 언어는 생각의 옷이 되는 이유다. 똑같은 생각을 해도 그 생각에 어떤 언어로 옷을 입고 나타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생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평범한 생각도 위대한 언어를 만날 때 더욱 빛이 난다. 똑같은 생각도 어떤 언어로 옷을 입고 표현되느냐에 따라 전혀 사유의 무늬로 탄생된다. 읽고 싶지 않았던 고시 관련 책을 읽으면서 법률적 언어로 구축된 나의 사유체계는 어느 사이 교육을 매개로 사람과 세상을 바꾸는 언어로 집을 짓기 시작했다. “꿀벌은 밀랍으로 집을 짓고 살지만 사람은 개념으로 집을 짓고 산다.” 니체의 말이다. 내가 집을 지을 때 사용하는 개념이 내 생각을 결정하고 조종하는 이유다. 교육 관련 과목을 공부하면서 나의 언어는 교육학적인 언어가 편파적으로 작용하면서 내 사유체계도 교육언어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교육을 매개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공부에 재미가 붙기 시작했고 그걸 매개로 사람과 세상을 바꾸는 일이 가치 있는 일임을 몸으로 깨닫기 시작했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안경은 교육학 또는 교육공학적 관점으로 처리된 패러다임이었다. 용접공이 주로 보고 듣고 배웠던 언어의 세계에서 고시의 세계로 탈바꿈을 하면서 청소되었던 내 머릿속은 이제 또 다른 언어로 물갈이를 시작했다. 교육언어로 지은 집 속에서 나는 한 동안 지금 여기서 저기로 사람과 세상을 바꾸는 언어적 사유를 거듭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교육관으로 채색된 전공서적은 저마다의 관점으로 교육을 바라보는 색깔 있는 렌즈를  배우는 매개체였다. 똑같은 교육이라는 개념을 써도 그것을 누가 어떤 관점에서 정의하는지에 따라 천차만별의 의미 차이가 난다. 전공 용어는 물론이고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도 누가 어떤 맥락에서 사용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앎은 상처다. 몰랐던 의미를 깨닫는 순간 기존 앎에 생채기가 생긴다. 앎은 몸에 몸으로 직접 감각적 느낌으로 전달되기도 하지만 언어를 매개로 보다 구체적인 모습으로 전수되기도 한다. 교육을 비롯해서 우리가 경험하는 사회, 경제, 경영, 문화, 예술, 스포츠, 자연, 과학, 기술 등에 관련된 모든 분야는 저마다의 언어로 깊은 사유체계를 구축하고 특정한 개념으로 자기들만의 고유한 사고방식을 암암리에 주고받는다. 교육학은 물론 경영학, 철학, 사회학, 인류학 등 인문사회과학적 책을 통독하면서 좁은 시야에 머물렀던 나의 시선은 더 넓어지고 깊어지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윤석철 교수의 《삶의 정도》를 통해 경영학적 상처를 받았으며, 윤노빈의 《신생 철학》을 통해 관념적인 철학자에게 날리는 통렬한 피와 땀과 눈물의 철학적 상처를 받았다. 박이문 교수의 《하나만의 선택》과 일련의 시리즈 전집을 통해 오로지 공부 그 자체의 의미를 두고 재미있게 공부해가는 철학도의 가슴 뛰는 탐구 여정을 고스란히 맛보았다. 김영민 교수의 글쓰기 철학이 담긴 《탈식민성과 우리 인문학의 글쓰기》을 통해 서구적 형식 중심의 논문 글쓰기 방식에서 탈피하여 잡된 글쓰기 방식을 통해 사유체계를 구축해나가는 인문학적 다른 글쓰기의 전형을 배웠다. 신영복 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강의》, 《담론》, 《처음처럼》 등을 통해 제시하는 개인과 사회의 역사적 관계를 꿰뚫는 동양고전의 지혜는 언어적 사고 혁명을 불러왔다. 신영복 교수의 저작으로부터 배운 언어적 충격은 관계가 존재를 결정한다는 말이다. 세상에는 순수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개체는 없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고 관계가 있다. 모든 존재는 관계 속에서 그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언어를 매개로 변화된 놀라운 사유체계의 혁명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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