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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색다르지 않으면
색다름이 드러나지 않는다

자기 언어가 있어야 자기다움이 드러난다

자기 언어가 있어야 자기다움이 드러난다


성공한 사람, 어떤 경지에 이른 사람, 남다르게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공통점을 지니고 있을까? 언어는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아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 언어로 판별하는 방법이 있다. 그 사람다움은 어디서 드러나는 것일까? 사람과 사람의 다름과 차이를 드러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기 있겠지만 뭔가 다른 사람은 뭔가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 즉 자기 생각을 갖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 생각을 자기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사람이 돋보인다. 자기만의 언어라고 해서 자기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는 물론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쉽게 찾아볼 수 없으면서도 그 사람의 독특한 칼라와 스타일을 담고 있는 언어가 바로가 자기 언어다. 자기 언어가 드러날수록 자기 정체성도 같이 드러난다. 자기 언어를 갖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거나 책을 읽고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생각해보고 재해석해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자기만의 언어는 다른 사람의 언어나 언어 사용 방식을 그대로 차용한다고 생기지 않는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어떻게 하면 색다르게 드러낼 것인지를 오랫동안 고심하는 가운데 그 일의 고유한 특성을 드러내는 언어가 문장 속으로 녹아든다. 예를 들면 한양대 정재찬 교수는 시를 가르치면서 이런 문장을 사용해서 자신이 하는 일의 어려운 과제를 다른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과 구분하면서 독특하게 표현한다. 부모는 I love children.“이라고 하고, 학자는 I study mathematics.”라고 하면 된다. 즉 대부분의 직업은 주어+동사+목적어 형태로 표현하면 자신이 하는 일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사는 목적어가 두 개다. “I teach my student poetry.” “나는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친다.” 간접 목적어인 학생들이 직접 목적어인 시를 좋아하게 하려면 숱한 고뇌를 거듭하면서 색다른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심 끝에 가르치는 사람이 하는 일은 간접 목적어가 직접 목적어를 좋아하는 일이라는 점을 깨달았을 것이다. 



자기 언어를 갖고 언제나 남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은 관성보다 관심을 갖고 언제나 자신이 하는 일을 다르게 시도해보려고 노력한다. 똑같은 일을 반복해도 그 일이 갖는 의미와 가치를 원점에서 다시 물어보고 또 물어본다. 관심을 갖고 물어보는 사람일수록 세상을 대하는 자세 또한 주체적 의지를 갖고 있다. 낡은 생각을 날조하기보다 익은 생각을 어떻게 하면 색다르게 창조할 수 있을지를 깊이 고뇌한다. 자기 언어를 갖고 있는 사람이 가장 경계하는 점은 진부한 언어를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순간이다.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언어적 관성에 발목이 잡히면 낯선 사유는 불가능해진다. 진부한 언어는 진부한 생각을 낳는다. 언어가 틀에 박히면 사고도 틀에 박힌다. 돋보이는 사람은 똑같은 걸 보고도 색다르게 표현한다. 일상에서 늘 만나는 숱한 사물이나 현상도 집요하게 묻고 관찰하면서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면 언어는 습관적으로 튀어나온다. 


하지만 우리와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의 언어는 남다르다. 대추 한 알을 보고도 시인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왜 대추가 빨개졌을까? 평범한 사람은 때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인은 다른 눈으로 다르게 보려고 노력한다. 대추가 빨개진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태풍 몇 개/저 안에 천둥 몇 개/저 안에 벼락 몇 개.” ‘대추 한 알’이라는 장석주 시인의 시다. 빨간 대추를 보면 먹고 싶다는 충동 밖에 들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의 언어는 대추는 가을이 되면 빨개진다는 틀에 박힌 생각을 할 뿐이다. 하지만 시인은 빨간 대추를 시인의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그 원인이나 연유를 캐물었을 것이다. 끈질기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 대추와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대추가 빨개진 원인을 찾았다. 태풍과 천둥과 번개 맞고 놀래서 빨개졌다는 자기만의 언어로 비범한 시 구절을 완성하는 순간 상상력을 비상하기 시작한다.



자기 언어는 체험적 각성과 고뇌의 합작품이다


‘국’. 아버지가 없는 밥상에서 더불어 없어졌던 메뉴. 

‘굴’. 아버지의 밥그릇 앞에만 놓여 있던 겨울철의 특식.

김소연 시인의 《한 글자 사전》에 나오는 ‘국’과 ‘굴’의 뜻풀이다. 한국인이 밥상에 오르는 무수한 국을 김소연 시인은 아버지가 즐겨 드셨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국도 함께 없어진 슬픈 사연을 안으로 삭히고 있다 ‘국’의 의미를 자신의 아픔 체험적 깨달음으로 재해석해냈다.  ‘굴’은 아무나 먹을 수 없는 그림의 떡이었다. 국과 굴에 관한 김소연 시인만의 언어가 탄생한 비결은 우리가 식사할 때 먹는 국과 굴이 아니라 자신을 아프게 했으면서도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가족들 간의 긴장된 관계의 일면을 놓치지 않고 가슴속에 품고 숙성시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먹는 국과 조금 비싸지만 마음먹으면 먹을 수 있는 굴을 일상에서 흔히 만나는 언어적 관성에서 벗어나 남다른 관심으로 관찰한 결과 얻은 자기만의 언어다. 나만의 언어를 창조하는 방법은 언어를 남들과 다르게 사용할 때 가능해진다. 모국어가 한글이 우리나라 사람은 자기 생각을 평상시에 우리말을 사용해서 표현한다. 그런데 똑같은 한글을 사용하는 대한민국 사람인데 어떤 사람은 왜 색달라 보일까?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을 사용하는 것은 똑같지만 한글을 사용해서 자기 생각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언어가 색다르기 때문이다. 


어도락가(語道樂家), 《언어의 우주에서 유쾌하게 항해하는 법》을 쓴 신견식 번역가의 다른 브랜드 네임이다. 주체적으로 해석할수록 자기만의 언어로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 있다. 주체적으로 해석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만의 언어가 부실하기 때문이다. 자기 언어를 가질 때 비로소 자기 세계가 열린다. 언어가 타자화되어 있으면 내 생각도 타자의 생각에 종속되어 있거나 기생(奇生)한다. 말을 해도 자신의 체험적 각성을 고뇌 끝에 선택한 언어로 표현하지 않고 늘 쓰던 방식대로 습관적으로 말하거나 남들이 자주 언급하는 언어를 무의식적으로 사용한다. 그럴수록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각과 언어에 종속된 식민지로 살아간다. “약자는 달리 약자가 아니다. 자기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갖지 못할 때 누구나 약자다...자기 언어가 없으면 삶의 지분도 줄어든다”. 은유의 《글쓰기의 최전선》 에 나오는 말이다. 내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없으니 남의 언어에 기대어 자기 삶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언어가 타자에게 종속되는 순간 내 삶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된다.



교수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지식생태학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교수라는 직업에 언어적 사유가 시작되면 연구실에서 진지하게 뭔가를 깊이 파고드는 탐구활동이 연상되고, 강의장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전공분야에 대한 연구결과를 전문용어를 사용하여 설명하고 설득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교수라는 직업으로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방법도 있지만 나는 평범한 교수에서 비범한 지식생태학자로 나의 정체성을 드러내기로 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19 위기도 결국 인간의 무자비한 자연개발과 자연 생태계 파괴가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참사다. 지금 당장 우리가 겪고 있는 힘든 일상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다양한 전문가가 모여서 해결방안을 찾기 이전에 이런 사태가 왜 발생했는지 비판적으로 분석해보고 성찰해보는 노력에는 생태학적 감수성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자연생태계와 생명체가 겪고 있는 아픔은 결국 인간과 자본주의가 합작한 효율과 소비 패러다임이 빚은 참사다. 이런 시기일수록 생태계가 겪고 있는 아픔을 나의 아픔처럼 공감하고, 그것이 어떤 연결고리를 통해서 무한 반복되고 있는지를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생태학적 언어가 없으면 생태계의 다양한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역동적인 방식을 이해할 수 없고 철학적 개념이 부족하면 복잡한 현실을 꿰뚫는 추상적 사유가 부족해진다. 인문학적 언어가 부족하면 사람의 아픔을 읽어낼 수 있는 감수성이나 공감능력이 현격하게 떨어질 수 있다. 다른 생각은 다른 언어를 매개로 생성되고 표현된다. 익숙한 언어 사용에서 벗어나 다른 분야의 낯선 언어를 사용하면 낯선 사고가 잉태되기 시작한다. 지식생태학적 언어는 생태학적 감수성으로 생명체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사고 과정을 촉진시킨다. 생태학적 감수성으로 포착된 생명체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순환고리의 힘을 파헤치는 생태학적 상상력의 언어가 필요한 것이다.



나의 체험을 나의 언어로 번역할 때 자기다움이 드러난다


표현은 언어를 매개로 이루어진다. 언어가 깊지 않으면 사고도 깊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영감을 주는 말을 할 수 없다. “벚꽃의 꽃말은 중 간고 사래.” 어느 여고생이 SNS에 남긴 말이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벚꽃 구경을 했을 것이다. 매년 봄에 만나는 벚꽃이지만 한 여고생은 벚꽃이 만발해도 그 아름다운 순간을 즐길 수 없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벚꽃이 만개한 봄날의 아름다움은 그 여고생에게 중간고사라는 현실적 장벽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벚꽃만 생각하면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던 그 여고생은 가슴에 맺힌 한을 자기 내면에 간직했다. 어느 순간 벚꽃은 잔잔한 울림으로 뇌리를 맴돌다가 중간고사와 연결시켜 자신이 겪고 있는 아픔을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 자기만의 언어는 이렇게 안타까운 현실을 몸으로 견뎌내면서 내면에 응어리진 아픔의 정체를 붙잡고 사투를 벌이다 어느 순간 표현하고 싶은 욕망의 그림자가 남긴 얼룩이자 무늬다. “모든 편견은 내장에서 나온다.”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에 나오는 말이다. 편견(偏見)과 내장을 연결시킨 생각이 신선하다, 편견은 편파적 의견(疑見)이다. 편견을 편파적 의견으로 관념적으로 정의하지 않고 오랫동안 앉아서 계속 비슷한 생각을 반복하면서 꼬인 내장에서 나온다는 발상 자체가 색다르다. 남들처럼 편견을 정의하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기 언어로 편견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드러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다른 사람의 관심을 받고 싶다면 남다른 관심과 애정으로 내 생각을 이전과 다르게 표현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식상한 표현은 식상한 사고의 반증이다. 자기만의 언어는 언어를 새롭게 창조하는 가운데 드러나기보다 똑같은 언어라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서 색다르게 사용하는 가운데 드러난다. 세상의 통념을 통렬하게 비틀어서 기대를 망가뜨리거나 생각지도 못한 깨우침으로 정문일침의 교훈을 줄 때 비로소 그 사람만의 특유한 언어적 문제의식이 드러난다. 자기 언어로 글을 쓰는 순간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나다운 글이 된다. 결국 나다움은 나의 체험을 나의 생각으로 해석해서 나의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놀랍게도 나의 언어로 쓰는 글은 가장 나다운 길로 안내해주는 나침반이자 등대와 같다. 글은 살아온 삶을 농축시키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내가 살아갈 삶으로 인도해주는 안내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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