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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은 사람과 다 읽지 않고 맛만 본사람의 차이

책을 다 읽은 사람과 다 읽지 않고 맛만 본 사람의 차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아는 전공능력과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아는 교양능력의 차이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깊이 파야 된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우선 그 분야의 깊이 있는 지식과 경험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는 전공 책을 주로 읽는다. 전공은 자신이 파고들어가면서 공부하는 전문 분야다. 전문가별로 자신이 전공하는 분야가 다 다르다. “전문가란 뭔가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지만 그 밖에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다(A specialist who knows everything about something and nothing about anything else).” 미국의 작가, 앰브루즈 비어스(Ambrose Bierce)의 말이다. 전문가는 자신이 전공하는  뭔가(something)에 대해서는 모든 것(everything)을 알지만 자신이 전공하지 않는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전문적으로 문외한인 사람이다. 전문가는 책도 전문적으로 읽는다. 즉 자신의 전공 분야 관련 책을 주로 읽으면서 깊이 파고든다. 전공 용어나 특수한 개념으로 지은 문장과 문장이 다시 특정 이론이나 모형을 만들어낸다. 해당 분야의 전공자가 아니고서는 범접할 수 없을 정도의 개념으로 문장을 건축하는 전공책은 잡는 순간 깊은 좌절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특수한 분야를 다루는 전공분야라고 어쩔 수 없다고 볼 수 있다. 일반인의 지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의 전문 특수 분야를 제외하고 우리들의 일상적 삶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전공분야는 문턱을 낮추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할 필요가 있다.



진정한 전문가는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설명한다


과학적 또는 기술적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대중과 소통하는 과학기술자가 있는가 하면 일상적 삶과 직결된 전공분야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난해한 전문 용어를 사용하여 자기 전공 분야 사람들끼리만 소통하는 학문적 논의를 전개하는 경우도 많다. 학문적 발전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문적 논의가 인간적 삶과 인류의 미래 문명 창조와 관련된다면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과도 적극적으로 소통하면서 모든 과학적 탐구가 결코 일상적 삶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줄 때 평범한 삶도 비범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을 지극히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다면 당신은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말이다. 어렵고 난해한 의미도 진짜 공부를 하는 사람은 비전공자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해서 설명할 수 있다. 자기 분야에 능통한 사람일수록 비전문가에게 자신이 무슨 공부를 왜 하는지를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복잡하고 난해한 내용을 전혀 다른 분야 사람이나 나보다 못한 사람을 대상으로 쉬운 언어로 단순하고 쉽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놀라운 지혜가 생긴다. 위대한 경지에 이른 사람은 단순하다. 그러나 단순하다고 위대해지지는 않는다. 자신의 복잡한 생각을 단순하게 표현하지 못하면 한 분야의 경지에 이르기 어렵다. 단순함은 치열함의 결과이고, 복잡함은 나태함의 산물이다. 아직 내 생각이 단순하지 않다는 의미는 그 의미를 단순화시키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전문가일수록 모르는 사람의 마음을 모른다. 전문용어를 사용하여 전문적으로 설명하는 전문가의 설명을 비전문가가 모르는 것을 몰라주는 게 지식의 저주다. 지식의 저주에서 벗어나는 게 전문가의 큰 숙제가 아닐 수 없다,


Kodak이라는 회사는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위해 필요한 필름을 만드는 회사였다. 찍고 싶은 장면을 카메라로 찍으면 이미지가 필름에 상으로 맺히고 그걸 현상하고 인화하면 보고 싶은 사진이 탄생되던 때의 이야기다. 필름을 만들던 이 회사의 스티븐 새슨(Steven Sasson)이라는 엔지니어가 있었다. 벤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유치원생들이 견학을 와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첫 질문은 “아저씨 여기가 어디예요?” 처음 듣는 질문이었지만 정성을 다해 대답했다. “응 여기는 필름 만드는 회사야.” 그러자 다른 아이가 “아저씨, 필름이 뭐예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한 번도 필름이 뭔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더욱 필름이 무슨 의미인지를 설명해본 적이 없는 스티븐 새슨은 당황하면서 어떻게 설명하면 유치원생이 알아들을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물론 대학생이나 성인이면 “필름이란 빛에 노출되면 이미지를 형상화하기 위해서 화학반응하는 물질”이라고 설명해도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유치원생은 필름을 설명하는 데 동원된 많은 개념, 예를 들면 형상화나 화학반응, 물질과 같은 개념 조차 처음 들어보는 말일 것이다. 스티븐 새슨은 고민하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필름은 그릇이야.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이미지를 다 담을 수 있으니까.” 필름이 유치원생이 알아들을 수 있게 그릇이라고 쉽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엔지니어는 놀라운 지혜를 터득하게 된다. 이미지를 담는 그릇이 필름이라고 재정의하는 순간 필름은 이제 세상의 모든 이미지를 담아내는 그릇으로 새롭게 다가온다. 필름에게 그릇이라고 불러주었을 때 이제부터 필름은 이미지를 형상화하기 위한 화학반응 물질이라는 난해한 과학적 설명 대상에서 벗어난다. “언어의 미래는 작가들이 어렵게 얻은 생각으로 우리를 이끄는 단어들을 찾아내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나가는 것과 함께, 독자들도 그에 맞춰 최선의 사고를 읽으려는 노력을 계속해나가는 것과 연결돼 있습니다(136쪽). 매리언 울프의 《다시, 책으로》에 나오는 말이다. 필름을 어떻게 하면 더 쉽고 와 닿게 설명할 수 있을지를 고뇌하는 엔지니어의 남다른 노력이 필름을 그릇이라고 생각하는 언어적 사유를 탄생시킨 것이다.



진정한 전문가는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다


“전문가가 되려고 노력해야 되지만 전문가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You must continue to gain expertise, but avoid thinking like an expert).” 미국의 연설가, 데니스 웨이틀리(Denis Waitley)의 말이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전문가의 깊이에 너무 빠져서 자신의 전문분야를 넘어서는 다른 분야와 부단히 소통하려면 자신이 판 우물에 매몰되어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필름을 어린아이들에게 전문가처럼 생각하면서 설명했다면 아이들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필름을 만드는 화학적 변화과정을 어린아이들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엔지니어의 애쓰는 과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생각의 지도가 탄생한다. “전문가란 자신의 분야에서 사람들이 범할 수 있는 실수를 이미 알고 있어서, 그것을 피할 줄 아는 사람이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의 말이다.


전문가가 뭔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범할 수 있는 전문적인 설명의 한계와 문제점을 미리 간파하고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가는 길을 선택하는 순간, 지금의 전문가는 예전의 그 전문가가 아니다.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단순한 일이나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은 복잡한 일이다. 다시 말해서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평범한 일이나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만드는 것은 비범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단순함(Simplicity)은 전체에서 본질을 꿰뚫는 지혜로움이며, 복잡함(Complexity)은 표면과 현상에서 겉도는 어리석음이다.” 《기획은 2 형식이다》를 쓴 남충식 작가의 말이다.


나의 전공 지식에 갇혀 전문용어만 반복해서 사용하거나 남발할 경우 전문가도 알아듣기 어려운 경우가 발생한다. 진짜 지혜는 체험적 깨달음을 일상 언어나 다양한 비유법을 사용하여 비전문가 이해하기 쉬운 논리로 설명하는 가운데 탄생한다. “전문가란 ‘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올바른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이다.” 이스라엘의 물리학자, 엘리야후 골드랫(Eliyahu M. Goldratt)의 말이다. 기존 지식에 갇혀 다른 가능성을 꿈꾸지 않는 전문가보다 다른 세상의 관점을 나의 전공분야를 들여다보면서 이런 방법 이외에 다른 더 좋은 방법은 없는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질 때, 나는 좌정관천의 어리석음이나 한계에서 벗어날 길이 열린다. 한 분야만 넘어서면 전혀 모르는 세계가 펼쳐지는 세상에서 전문가는 과연 자기 분야만 깊이 판다고 우리가 겪고 있는 복잡하고 난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딜레마를 벗어나기 위해 내가 전공하는 분야의 전문성은 어떤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지, 다른 전문 분야와 협업해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할 가능성을 찾아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가?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능력이 필요하다. “하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아는 것에 깊이 파고드는 능력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없는지, 누구와 협업할 필요가 있는지 파악하는 능력입니다”(229-230쪽). 우치다 타츠루의 《완벽하지 않을 용기》에 나오는 말이다. 저자는 이런 전문가의 두 가지 능력의 차이를 도서관의 책에 비유하여 쉽게 설명한다. 어느 한 선반에 있는 전공 책을 모조리 읽는 것은 아는 것을 깊이 파고드는 능력에 해당된다. 동시에 도서관의 지도를 갖고 어디에 어떤 책이 있는지, 아직 자신이 읽지 못한 책의 세계가 얼마나 방대한지, 어떤 책을 읽으면 자신이 모르는 분야를 알 수 있는지 알아내는 능력은 내가 할 수 없는 능력의 실체를 파악해서 어떤 사람과 협업하면 되는지를 알아내는 능력에 해당된다.



뭔가를 알기 위한 노력과 더불어 무엇을 모르는지를 아는 노력도 뒤따라야 한다


전문가가 되려면 자기 분야의 최근 트렌드나 이슈를 다루는 책을 깊이 읽어야 한다. 깊이 읽지 않으면 기피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전문가를 기르는 전문교육은 전공 분야 관련 도서를 깊이 파고들어 문제의 핵심과 이슈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요구된다. 한 분야의 경지는  경계를 넘나들기 전에 심지(心志)를 갖고 아래로 파고드는 노력을 반복할 때는 만나는 목적지다. 깊이 파지 않고 여기저기 얇게 훑어만 봐서는 한 분야의 본질과 핵심을 만날 수 없다. 깊이 없는 넓이 역시 기피 대상이 되는 이유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전공 관련 지식만으로는 볼 수 없는 안목과 식견은 나와 다른 전문 분야를 깊이 파고드는 다른 전문가나 전문성과 접속해야 한다. 내가 알고 있고 할 수 있는 일보다 내가 모르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다는 사실을 절감하지 않으면 다른 분야의 전문가나 전문성과 접속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앎과 능력의 한계와 무지가 다른 분야의 전문가나 그 사람이 쓴 책을 만나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이다.


“전문교육이란 도서관의 특정 선반에 있는 책을 전부 읽는 것이고, 교양교육은 도서관의 지도를 손에 넣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교양교육이란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것입니다. 얕고 넓은 것이지요. 교양이란 무언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230쪽). 역시 우치다 타츠루의 《완벽하지 않을 용기》에 나오는 말이다. 전문가는 자기 분야의 전문성으로 자신이 알고 할 수 있는 영역의 수준과 난이도를 더 높여 나가고 동시에 자신이 할 수 없는 영역은 어디서 누구와 협업하면 가능한지를 부단히 탐구하는 사람이다. 전문가일수록 자신이 모르는 영역을 의도적으로 찾아내고 해당 분야에 관한 안목과 식견을 얻으려면 어디서 누구와 만나고 어떤 책을 더 읽어야 할지를 염두에 두고 부단히 새로운 분야와 접속하지 않으면 좌정관천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날이 갈수록 전문분야는 늘어나고 한 사람이 많은 전문 분야를 섭렵하기에는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전문화는 세분화되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처럼 방대한 분야에 두루 해박한 식견과 전문성을 갖고 작품을 만들어내기에는 너무 복잡한 전문분야가 늘어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전문가는 자기와 다른 분야를 이해하려는 열린 마음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새로운 세계를 향하는 자세와 태도를 지녀야 한다. 전문교육을 통해 전문능력을 신장함은 물론 교양교육을 통해 내가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 내가 모르고 있는 분야의 어떤 전문가와 협업하면 시너지 효과가 날 수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어야 새로운 가능성의 꽃을 피울 수 있다. 한 분야를 깊이 파고드는 책 읽기는 전문성을 신장시켜 줄 수 있지만 내가 아직 얼마나 모르는 분야가 많은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최소한 내가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를 알려면 내가 아직 접해보지 않은 무수한 책의 세계가 얼마나 무궁무진한지를 깨닫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아주 간단하게 각성 체험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책을 다 읽지는 못해도 어떤 책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 가볍게 들춰보면서 만져보는 행위는 너무나 소중한 경험이다.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의 첫 페이지를 읽은 사람은 아직 그 뒤로 1000페이지가 넘는 존재와 무의 세계가 있음을 알고 좌절감을 느낄 수도 있다.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 I, II》라는 책은 I권과 II권을 합쳐 무려 2500페이지가 넘는다. 우선 두 권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사서 책 상위에 올려놓고 읽기 시작하는 것 자체가 두렵다. 저 방대한 저술 속에 벤야민은 어떤 사유체계를 구축해놓았는지 엄청난 호기심이 당기면서도 쉽게 완독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민음사에서 6권으로 분권 해서 나왔는데 총 2500페이지가 넘는다. 1권을 다 읽었어도 아직도 5권의 책이 나를 기다리는 중압감에 짓눌려 읽기도 전에 시간을 잃어버릴 정도다. 이처럼 내가 아직 읽어야 할 책의 세계가 무한하며, 그 속에서 나는 여전히 읽기를 위해 사투를 벌인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책을 다 읽고 깨닫는 것도 있지만 살짝 맛만 봐도 무지함을 깨닫는다


하지만 이런 책 자체를 만져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내가 모르는 세계가 끝없이 펼쳐지는 하늘과 땅 사이에 이렇게 방대한 지성의 산맥이 있음을 알 길이 없다. “조금씩 맛본다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맛만 살짝 본 사람은 그 너머에 엄청나게 방대한, 내가 모르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건드려 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런 영역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231쪽). 역시 우치다 타츠루의 《완벽하지 않을 용기》에 나오는 말이다. 어떤 세계를 조금이라고 맛본 사람은 나머지 세계가 무궁무진하며 그걸 모르는 나는 얼마나 무지한지를 뼈저리게 느낀다. 비록 지금 수준에서 두꺼운 책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내가 읽은 첫 몇 장을 통해서 앞으로 펼쳐질 저자의 사유체계가 얼마나 방대하게 남아 있는지를 마음속에 간직한다. 그 순간부터 언젠가는 내가 가보지 못한 지성의 숲 속으로 탐험을 떠날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본다.


책의 몇 장을 맛만 본 사람은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얼마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지를 뼈저리게 느끼고 무지함의 한계와 문제점을 극복할 대안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지금 내가 늘 고민하고 접하는 전공은 물론이고 전공의 경계 너머에 아직도 내가 파고들어가야 할 지적 사고의 깊이와 넓이가 끝이 없음을 자각하는 순간 자세를 낮추고 끊임없이 독서에 매진한다. 하지만 내가 늘 접하는 책 이외에는 다른 책을 만져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내가 모르는 분야가 그렇게 방대한 지를 깨닫지 못한다. 한 분야의 책을 통독하면서 무지를 깨우치는 노력 못지않게 내가 모르는 분야가 내가 아는 분야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 노력도 중요하다.


뭔가(something)에 대해서 모든 것(everything)을 아는 사람은 그 밖의 모르는 것(anything else)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뭔가(something)를 알고 싶은 호기심을 잃지 않아야 자기 지식과 경험의 틀에 갇히지 않는다. 지금 알고 있는 세계와는 조금이라도 다른 세계가 있으며, 그 세계를 탐구하는 사람들의 지적 산출물이 나의 전공분야에서 나오는 지적 산출물 못지않게 이 세상의 의미와 가치를 밝혀내는 치열한 노력의 산물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자기 전공 지식과 경험으로 다른 분야를 일방적으로 평가하고 재단하지 않는다. 다른 세계를 조금이라도 접해본 사람은 갈 길이 멀다는 점을 몸소 느끼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관문을 뚫고 색다른 가능성의 세계로 진출하려는 탐구욕을 불태운다. 지금도 나의 연구실에는 몇 년 전부터 나의 손길을 기다리며 서가에 꽂혀 있거나 다른 책에 짓눌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책들이 쌓여 있다.


예를 들면 한나 아렌트, 질 들뢰즈, 미셀 푸코, 프리드리히 니체, 헤르만 헤세와 괴테 등 다수 문학작품이 늘 내가 지나갈 때마다 아우성의 목소리가 들리듯 했다. 가끔은 첫 페이지와 목차를 열어보고 뒤 페이지에서 나를 기다리는 낯선 문장들이 일렬로 낮은 자세로 엎드려 있음을 목격한다. 그들은 내가 해당 페이지를 넘기기 전까지는 다른 페이지의 무게에 짓눌려 숨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오랫동안 나의 손길과 눈길을 기다리다 지친 친구들이다. 나는 그들 덕분에 누군가의 책을 읽었다고 자랑하지 않으며 해당 작가의 주장이 무엇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아마 조만간 내가 그 책이 쌓여 있거나 꽂혀 있는 곳으로 다가서지 않으면 그들은 어떤 방법을 쓰든지 간에 집단으로 몰려와 내 책상을 점거할지도 모른다. 그날이 오기 전에 그들과 상봉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려보면서 읽고 있던 책을 마저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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