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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전달할 수 있지만
지혜는 스스로 통달해야 한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고

지식은 전달’ 할 수 있지만 지혜는 스스로 통달할 수밖에 없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고


‘싯다르타’는 오늘날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의 이름이다. 헤르만 헤세의 책 제목 《싯다르타》는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라 아니라 이 소설의 주인공 이름이다. 싯다르타는 시작부터 궁극적인 질문 속으로 독자를 깨달음의 여정으로 안내한다. 진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무엇을 찾으려고 그렇게 오랫동안 나는 지금까지도 뭔가를 끊임없이 공부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찾고 있는 궁극의 진리는 어디에서 어떤 방법으로 찾을 수 있는가?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나의 미래를 열어가는 데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깨달음의 경지라는 열반이 진짜 존재하는 것일까? 그 열반의 경지에 이르려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일까? 헤세는 《싯다르타》에서 “진리는 가르칠 수 없다는 것. 이 깨달음을 나는 일생에 꼭 한 번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했다. 그 시도가 바로 ‘싯다르타’다라고 말한다. 



전체 줄거리를 요약하면 바라문(브라만)의 아들 싯다르타는 현실 생활에 불만을 품고 아버지를 설득해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죽마고우 고빈다와 함께 사문(沙門)(승려)을 따라 수행하기 위해 과감하게 출가한다. 수행 중 인구에 회자되던 고타마(석가모니)를 만나지만 그의 가르침에 몇 가지 결정적 한계를 있음을 깨닫고 다시 수행의 길을 떠난다. 하지만 같이 수행의 길을 떠났던 고빈다는 고타마의 제자로 남기로 하고 이별한다. 그 후 싯다르타는 기생 카말라와 사랑의 쾌락에 빠지고 부유한 상인, 카마스와미를 만나 장사를 통해 세속적 욕망을 즐기다가 어느 날 환락과 쾌락에 빠져 살아가는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끼고 그동안 축적했던 부를 버리고 다시 수행의 길을 떠난다. 그 후 이름 모르는 사이에 만났던 바주데바와 다시 만나 함께 강가에서 뱃사공이 되어, 흐르는 강물에서 우주 자연 삼라만상의 희로애락과 진정한 깨달음의 희열과 법열을 느낀다.


헤세는 싯다르타에서 제시하는 깨달음에 이르는 여정은 그 내용과 시기별로 3단계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경전과 교리 해석에 몰두하는 바라문의 정신적 세계에서 머물러 살아가는 자아 추구의 단계다. 두 번째 단계는 세속적 세계에서 연인과 장사꾼, 노름꾼 등 세속적 인간의 다양한 경험을 누리며 자아의 죽음을 체험하는 단계다. 마지막 3단계는 긴 우회도로를 통해 깨달음의 목적지에 다다르며 자아가 새롭게 탄생하는 열반의 경지다.



정신적 세계자아의 추구

경전과 교리 해석에 몰두하는 바라문의 정신적 세계


바라문(婆羅門)의 아들 싯다르타는 어린 시절을 부유한 부모님의 기대와 보살핌으로 별 다른 문제나 애로사항 없이 자랐다. 역시 같은 바라문의 아들인 고빈다와는 우정 이상을 나누는 죽마고우의 전형처럼 서로의 고민을 이야기하면서 친구로서 동반자로서 그리고 호위병이자 그림자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절친한 친구관계를 유지하면서 성장했다. 하지만 모두가 싯다르타를 사랑했고 모든 사람에게 즐거움의 원천이었지만 싯다르타 자신은 스스로에게 기쁨은 물론 즐거움의 원천이 되지 못했다. 이때부터 싯다르타는 부모님을 비롯하여 친구 고빈다를 포함,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자신을 영원토록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는 못한다고 깨닫기 시작했다. 세상의 많은 스승들이 깨달은 숱한 지혜의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늘 허망했으며 영혼은 불안감에 휩싸여 진정되지 않았다. 제사를 지내면서 숭배해야 될 유일자인 아트만은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 아트만의 영원한 심장은 어디에서 고동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혹시 각자 내면에 지니고 있는 가장 내적이자 불멸의 것, 즉 바로 자기 자신의 자아 속에서 고동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15쪽) 도대체 이런 자아를 품고 있는 내적인 것, 궁극적인 것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런 길이 어떤 길인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고, 그 길을 아는 사람은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점을 깨달은 싯다르타는 궁극적으로 이런 의문을 품게 된다. “오직 하나밖에 없는 유일자, 가장 중요한 것, 오로지 딱 한 가지 중요한 것을 모른다면, 다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을까?”(16쪽)



안락한 바라문에서 고단한 수행이 시작되는 사문의 길로 접어들다


수많은 성현들이 깨달은 저마의 말씀이 마법의 언어로 적힌 책과 경전들이 넘쳐나지만 아트만 속에 잠들어 있는 비밀의 지혜들을 구체적인 삶의 현장으로 다시 살려내는 사람은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순수하고 박학다식한 아버지는 경탄할만한 존재이자 존경의 대상으로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고 살아가시지만 왜 날이면 날마다 죄업을 씻어내고 스스로를 정화시키려는 갖은 노력을 반복해야만 했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풀리지 않은 의문에 휩싸인 싯다르타는 근원적인 앎에 대한 목마름을 가실 길이 없었다. 언젠가 사문(沙門), 즉 탁발승이 싯다르타가 살고 있는 도시를 지나간 적이 있는데 너저분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소리 없는 정열의 향기가,  자기를 파괴하는 헌신의 향기가, 가차 없는 자기 초탈(自己超脫)의 향기”(20쪽)를 느낀 적이 있었다. 과거 어느 한 시점에서 받은 사문에 대한 인상이 지워지지 않고 싯다르타 내면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친구 고빈다에게 고백하고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아버지에게 우여곡절 끝에 사문의 길을 가겠다는 결연한 각오로 마침내 허락을 받아낸다. 이른 아침 편치 않은 몸으로 사문의 길을 떠나는 순간 고빈다가 어느 사이 함께 깨달음의 여정에 합류하기로 결심했다. 사문의 길에 들어서는 싯다르타의 인생길은 스스로 안락한 삶과 결별하고 고행길을 가 위해 운명적으로 선택한 첫 번째 깨달음의 여정이다. 바라문의 아들로서 부유한 삶을 살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수행을 통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고 결연한 각오로 출발하는 인간의 욕망을 엿볼 수 있다. 



궁극적인 그 무엇을 찾기 위해 고행의 길을 떠난 싯다르타는 겨우 치부만을 가릴 정도로 흙빛의 베를 걸쳐 있고 무려 스무 여드레나 단식을 해서 몰골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의 눈에는 모든 것이 부패였고 극심한 고통의 연속이었다. 싯다르타에게는 오직 한 가지 목표가 있었다. 세상의 모든 갈증과 욕망과 꿈과 번뇌로부터 벗어나 마음을 비우고 평정심을 찾는 것, 나아가 자기를 초탈하는 사색을 통해 마음속에 있는 모든 욕망과 충동을 비워내고 자기 자신을 멸각시키는 것이다. 싯다르타는 스스로 고통을 극심하게 느끼는 체험을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삼라만상에 존재하는 낯선 형체, 예를 들면 나무, 돌, 물, 썩은 고기 등으로 변신해서 물아일체가 되는 과정을 겪어보았다. 고통을 통하여 고뇌를 감내함으로써 굶주림과 갈증과 피로와 권태를 스스로 극복하는 자기 초탈의 길을 걸어갔다. 자기 자신을 떠나 비아의 경지에 머물러 보기도 하고 무의 세계 속으로 잠입해보기도 했다. 고통 체험을 통해 현재 자신이 품고 있는 세상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에 대해 자주 고빈다와 대화를 나누곤 했다. “우리가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도대체 인식에 접근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도대체 해탈의 경지에 접근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그러니까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상상하였던 우리가, 혹시 윤회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안에서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33쪽)



해탈은 가르침으로 해설하거나 해석할 수 없는 당사자의 경험이다


근원적인 의문이 들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지만 싯다르타가 원하는 답은 언제나 미궁 속에서 유영하고 있었다. 수행을 시작한 지 3년 정도 지났을 무렵 당시 인구에 회자되던 고타마라는 세존 부처를 우연히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고타마는 석가 종족의 현인이자 부처이며 싯다르타가 고민하고 있었던 윤회의 수레바퀴를 정지시킨 부처로도 유명하다. 고타마가 기적을 행하였다거나 악마를 물리쳤다거나 신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는 소문에 찬반양론이 갈렸다. 세상의 곳곳에서 고타마가 펼치는 설법에 마력을 느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죽마고우인 고빈다 마저 고타마의 위력에 매력을 느끼고 있을 즈음 싯다르타는 고타마의 설법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고타마의 설법은 불교에서 주장하는 근본적인 진리의 원천은 물론 일상적 번뇌에서 벗어나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방법을 부드럽지만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대중을 압도하고 남음이 충분할 정도였다. 고빈다가 마침내 고타마의 설법을 듣고 그분의 제자로 귀의하기로 결심한 순간 여전히 싯다르타는 고타마의 설법에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음을 간파하였다. 


고타마의 설법이 갖고 있는 두 가지 치명적인 약점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고타마는 모든 것을 인과의 사슬로 묶어 설명할 수 없는 우연한 틈이 있음을 간과했다. “결코 어디에서도 끊기지 않은 하나의 사슬, 즉 인과응보로 묶인 하나의 영원한 사슬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러한 사실이 이토록 분명하게 보여준 적은, 그리고 이토록 이론의 여지없이 설명되었던 적은 여태껏 한 번도 없었습니다. 만약 당신의 가르침을 통하여, 이 세상을 완전한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인정하게 된다면, 그러니까 이 세상이 아무런 빈틈이 없고, 마치 수정처럼 맑고, 우연이나 신들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면, 사실 그 어떤 바라문이라 할지라도 몸뚱이 속에 있는 심장이 더 높게 고동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52-53쪽). 빈틈없이 철저한 인과관계로 돌아가는 세상은 없다. 우연한 기회와 계기에 생각지도 못한 틈새로 우발적 사건이 침범할 수도 있다. 질서 정연하게 돌아가는 인과의 사슬이 끊어지면서 새로운 가능성의 문이 수시로 열리는 것이 인생사다. “하지만 당신께서 가르치신 동일한 설법에 따르면, 이 만물의 단일성과 시종일관함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군데에서 중단되어 있으며, 한 조그마한 틈새를 통하여 이 단일성의 세계 속으로, 어떤 낯선 것이, 어떤 새로운 것이, 그러니까 일찍이 존재한 적이 없었으며, 밝혀질 수도 증명될 수도 없는 어떤 것이 흘러 들어오고 있습니다”(53쪽). 삶은 원인과 결과가 단선적으로 연결된 기계가 아니다. 삶은 복수의 연(緣)들이 우발적으로 마주치면서 다양한 존재가 원인과 결과를 주고받으면서 만들어가는 연기(緣起)의 끊임없는 연장(延長)이다. “이 조그만 틈새가 있음으로써, 이 조그만 균열이 있음으로써, 영원하고 단일한 세계 법칙의 전체 구조가 다시금 파괴되고 폐기되어 있는 셈입니다”(53쪽). 조그만 틈새와 균열은 질서 정연하게 돌아가던 연기의 수레바퀴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멈추게 하거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 있는 복수의 인연 중에 하나다.


고타마의 두 번째 한계는 해탈은 가르침을 통해서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간파하지 못한 데사 찾을 수 있다. “누구에게도 해탈은 가르침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55쪽). 해탈은 가르침의 언어로 번역되지 않는다. 따라서 해탈은 해설이나 해석의 경지가 아니도 해명의 목적지도 아니다. 해탈은 몸으로 겪은 사람만이 알고 있는 체험적 전율이자 경이로운 깨달음의 경지다. 그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지만 설명으로 온전히 전달할 수 없는 해탈의 깨달음은 오로지 몸으로 익히는 수밖에 없다. “이토록 명백하고 이토록 존귀한 가르침이 빠뜨리고 있는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세존께서 몸소 겪으셨던 것에 관한 비밀, 즉 수십만 명 가운데 혼자만 체험하셨던 그 비밀이 가르침 속에 들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55쪽).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해박한 불경 지식과 그 속에 담긴 부처님의 진리를 현란한 언어로 설명하지만 정작 자신이 수행하는 과정에서 깨달은 진리 체험은 없다는 것이 싯다르타의 고타마에 대한 아쉬움이다. 싯다르타에게는 일생일대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라고 볼 수 있는 세존 부처, 즉 고타마와의 만남에 희망과 기대를 걸었다. 많은 사람들이 고타마의 설법에 감복하고 감동했지만, 정작 싯다르타가 고뇌하는 궁극의 진리와 본질을 해명하는 데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었다. 고빈다가 스스로 고타마의 제자가 되기를 수용하면서 거기에 머무르기로 결정하지만 싯다르타는 다시 자신의 내면에 깊은 물음표를 품고 홀로 외로운 수행 길을 다시 떠난다.



깨달음이 오면 이전과 차이가 드러나는 다름이 온다 


“도대체 가르침으로부터, 스승들한테서 네가 배우려고 하였던 것이 무엇이며, 너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던 그들이 도저히 가르쳐줄 수 없었던 것이 무엇이지?(60쪽)” 싯다르타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보지만 여전히 자신이 기대하는 해답이나 현답은 구할 수 없었다. 그런데 밖으로 향하면서 궁극의 진리를 찾아 나서던 싯다르타에게 한 줄기 희망과 서광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진실로 이 세상이 어떤 것도 나의 자아만큼, 내가 살아 있다는 이 수수께끼, 내가 다른 모든 사람들과 구별이 되는 별다른 존재라는 이 수수께끼, 내가 싯다르타라고 하는 이 수수께끼만큼 그토록 많은 생각에 몰두하게 한 것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나 자신에 대하여 싯다르타에 대하여 가장 적게 알고 있지 않은가?”(60-61쪽) 무수한 가르침과 책과 말씀을 듣고 내가 추구하는 길의 목적과 방향을 물었지만 그 누구도 그 어디에서도 답을 찾지 못했던 싯다르타는 갑자기 자신이 추구하던 물음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할 단서를 발견한다. 바로 그런 물음을 추구하는 나 자신에 대해서 내가 아는 바가 가장 적다는 점을 깨닫는다. “아트만을 나는 추구하였으며, 바라문을 나는 추구하였으며, 자아의 가장 내면에 있는 미지의 것에서 모든 껍질들의 핵심인 아트만, 그러니까 생명, 신적인 것, 궁극적인 것을 찾아내기 위하여, 나는 나의 자아를 산산조각 부수어버리고 따로따로 껍질을 벗겨내는 짓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나 자신이 나한테서 없어져 버렸던 것이다”(61쪽). 아트만(atman)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질적 자아', 예를 들면 육체, 생각, 마음과 대비해 절대 변치 않는 가장 내밀하고 '초월적인 자아나 영혼을 말한다. 불현듯 싯다르타는 지금까지의 고된 수행이 멀쩡한 자아를 사정없이 부숴버리고 따로따로 껍질을 벗겨내는 어리석은 행동이었음을 깨닫는다. 싯다르타 생각에는 이런 노력이 물론 진정한 자아나 궁극적인 본질을 찾아내기 위한 올바른 길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으로 인해 정작 나 자신을 잃어버린 아이러니를 경험한 것이다. 


싯다르타는 “이제 다시는 나 자신을 죽이거나 산산조각 내어, 그 파편 뒤에 있는 비밀을 찾아내려고 하는 따위의 짓은 하지 말아야지...나 자신한테 배울 것이며, 나 자신의 제자가 될 것이며, 나 자신을, 싯다르타라는 비밀을 알아내야지”(62쪽)라고 다짐하며 다시 길을 떠난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깨달음의 희열을 맛본 싯다르타에게 모든 삼라만상이 수수께끼이고 호기심의 원천이며 경이로움의 천국이다.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다. 모두가 낯선 현상의 새로운 출몰이며, 아름다움의 발로다. 당연하게 보였던 일상이 갑자기 비상하는 상상력의 텃밭으로 변하고 모든 마주침이 깨우침의 원천이다. “이것이야말로 깨달음의 마지막 전율, 탄생의 마지막 경련이었다”(66쪽). 고빈다와 함께 만났던 고타마의 설법에 빠져들지 않고 스스로 고행의 길로 박차고 나온 싯다르타가 온몸으로 깨달은 삶의 메시지는 “의의와 본질은 사물들의 배후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들 속에, 삼라만상 속에 있었던 것이다”(63쪽) 였다. 내가 찾는 궁극적 진리는 사물과 현상의 세계 너머에 존재하지 않고 내가 늘 만나는 사물이나 현상 그 자체 안에 존재한다는 깨달음은 싯다르타에게 더할 나위 없이 즐겁고 기쁜 날개를 달아주었다. 하지만 그런 깨달음의 천국도 곧 타락과 태만의 지옥으로 전락할 줄 누구 예상할 수 있을까?



II. 세속적 세계-자아의 죽음

연인과 장사꾼노름꾼 등 세속적 인간의 다양한 경험을 누리다


“본질적인 것이란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세계 너머 저편 피안(彼岸)에 있다고 생각한 싯다르타의 눈으로 볼 때에는 이 모든 것들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예전에는 이 모든 것들이 불신의 눈으로 관찰되었으며, 철저한 사유에 의하여 무화(無化)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깨달음을 얻어 자유로워진 그의 눈은 차안(此岸)의 세계에 머무르게 되었으니, 그는 가시적인 것을 보고 인식하였으며, 이 세상에서 고향을 찾았으며,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피안의 세계를 목표로 삼지 않았다. 이처럼 무언가를 추구함이 없이, 이처럼 단순소박하게, 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세상을 바라보니, 이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다”(72쪽). 늘 만나던 햇볕도 어제와 다르게 느껴지고, 시냇물 소리도 오늘따라 유난히 한 편의 변주곡처럼 들렸다. 매일 마시던 물맛도 전혀 다르게 느껴지면서 물이 나에게 오기까지의 지난한 여정을 잠시 생각하면서 내가 접하는 결과나 산물의 뒤안길에 저마다의 사연과 사유를 품고 있음을 깨달았다. 늘 나와 함께 있었지만 틀에 박힌 눈으로 바라볼 때는 식상했지만 어제와 다른 눈과 감각적인 오감으로 감지하는 노력이 전개될수록 세상은 경이로운 신비의 세계로 뒤덮인다. “이 모든 것은 예전에도 항상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여태 그것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런 것에 끼어든 일도 없었다. 이제 그는 그런 것에 끼어들었으며, 그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73쪽).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진리를 지금 여기서(차안의 세계) 찾지 않고 현상과 실체 너머의 세계(피안의 세계)에서 찾기 위해 끊임없이 뭔가를 배우고 추구했던 자신의 사문 여정에 대한 성찰적 반성의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내가 매일 만나는 삼라만상에 마음의 문을 열고 그들과 호흡하고 영혼의 메시지를 주고받는 가운데 경이로운 깨달음의 세계는 무한대로 열리는 것이다.


자기가 바로 아트만이며, 바라문과 똑같은 본질에서 생긴다는 범아일여(梵我一如)다. 우주의 최고 원리인 범(梵, brahman)과 개인의 본질인 아(我, ātman)는 같다는 우파니샤드(upaniṣad)의 교리다. 범아일여는 자연과 나는 별개의 독립적 실체가 아니라 본래부터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사유체계다. 깨달음의 기쁨으로 오두막집에서 하룻밤을 잔 싯다르타는 아침 일찍 뱃사공에 부탁해서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오랫동안의 숲 속 생활을 청산하고 마침내 사람을 그리워하던 싯다르타는 대도시 근처에서 카말라의 정원에 당도한다. 여기서는 싯다르타는 돌이킬 수 없는 쾌락의 사랑으로 이끄는 기생 카말라를 만나 뜨거운 사랑에 빠진다. 카말라는 싯다르타에게 멋진 옷을 입고 예쁜 신발을 신지 않으면 안 되고  지갑에 많은 돈을 갖고 오지 않으면 자신을 만날 수 없다고 강변한다. 오랫동안 숲 속에서 심신수련을 하다 사랑을 배우기 위해 나온 사문에 불과한 싯다르타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서 오로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장기는 사색과 기다림, 그리고 단신이라고 항변한다. 결과적으로 카말라는 싯다르타를 쫓아내면서 장사의 신, 카마스와미에게 소개해준다. 



장사의 신카마스와미에게 배우면서 카말라와 사랑의 합주곡을 연주하다


카말라의 소개로 만난 카마스와미는 자신이 하는 사업의 종류와 사업방식을 열심히 싯다르타에게 설명해주었다. 카마스와미에게 장사하는 방법을 배우면서도 그에게 종속당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요구를 주장하는 방식을 굳건하게 유지해나갔다. 카마스와미에게 사업을 배우는 동안 싯다르타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어린 아이나 짐승 같은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하찮은 것에 속상해하며 서로를 욕하고 괴로워하는 삶을 반복하면서 번민과 고뇌에 찬 일상을 어쩔 수 없이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시간과 돈과 선물이 생길 때는 언제나 카말라를 찾아가 황홀한 시간을 보내면서 그녀의 제자이자 애인겸 친구가 되었다. 싯다르타가 카마스와미에게 장사를 배우는 궁극적인 목적도 카마스와미와 이전과 다른 행복한 사랑을 나누는 데 두고 있었다. 무사안일에 휩싸여 살아가는 싯다르타는 세월이 지가는 것을 느끼지 못한 채 교외와 강가에 정원도 갖고 집과 하인을 둘 정도로 부자가 되었다. 바라문 시절 아버지에게 배운 절도와 사색과 침잠의 시간을 통해 깨닫는 기쁨은 이제 하나둘씩 가라앉아버린 상태가 되었다. “싯다르타의 영혼 속에는 세속과 나태함이 뚫고 들어왔으며, 그것들이 서서히 그의 영혼을 메웠으며, 그것을 묵직하게 만들어버렸으며, 그것을 지치고 권태롭게 만들어버렸으며, 그것을 잠들게 만들어버렸다”(113쪽). 시간이 지날수록 싯다르타는 삶에 대한 의욕을 상실하고 지겨운 기색이 역력해졌으며, 생각은 늙어가는 몸과 더불어 낡아 빠졌다. 환멸과 역겨움이 수시로 드나들고 세상이라는 유혹과 환락과 태만의 덫에 걸려 어지간한 의지와 용기로 빠져나오기 어려운 난국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싯다르타는 경고의 꿈을 꾸었다. 카말라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난 후 몰골이 추해진 자신의 모습과 더불어 고달프고 권태로운 기색이 역력한 카말라의 인생행로를 자신의 삶에 비추어 잠시 생각해보기도 했다. 극심한 불안과 절망감에 빠져 간신히 잠든 싯다르타는 무의미하고 무거운 굴레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타락과 나태의 수레바퀴에 맞물려 돌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깊은 절망에 빠지곤 했다. 깊은 비애감에 휩싸여 잠을 자다 갑자기 꿈에서 깨어난 싯다르타는 모든 인생에서 처절하게 패배하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난파자의 모습으로 홀로 외롭게 강가에 서 있는 모습을 연상하였다. 싯다르타는 자기의 소유하고 있는 정원의 망고 나무 아래에서 정좌를 하고 지난날을 잠시 돌이켜 생각해보았다. “도대체 자기가 언제 어느 때 행복이라는 것을 체험해보았으며, 그리고 도대체 언제 진정한 환희를 맛보았는가?”(122쪽). 망고 나무 아래서 정좌하고 있는 동안 계속해서 내면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하나의 길이 네 앞에 놓여 있다. 너는 그 길을 걸어가게끔 소명을 받은 몸으로, 온갖 신들이 너를 기다리고 계신다”(122쪽). 그리고 “떠나거라! 떠나! 너는 소명을 받은 몸이니라!”(123쪽) 뚜렷함 목적의식도 없이 내면의 소리를 들을 시간적 여유도 없이 삶을 향상하려는 분투 노력도 없이 보낸 헛된 세월을 얼마나 오랫동안 보냈는가? 


싯다르타는 카밀라를 통해 잠자고 있던 육체적 사랑이 주는 쾌락에 새로운 감각을 깨우고, 그녀와 사랑의 쾌락을 계속적으로 즐기기 위해 카마스와미에게 장사하는 방법을 배우면서 돈을 벌고 상인의 길을 걷는다. 사문 시절에 스스로 억압했던 관능이나 본능적 애욕이 터져 나왔고, 카마스와미에게 배운 장사의 기술을 통해 세상의 부유함과 부자로 즐길 수 있는 환락의 정점에 이르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권력이 주는 참을 수 없는 마력에도 빠져보았다. 하지만 환락과 쾌락도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한 순간의 욕망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은 싯다르타는 속세와 쾌락의 삶을 멈추고 망고나무 아래서 인생의 무상함을 깨달은 것이다. 싯다르타는 소리 소문 없이 그날 밤 자신의 정원을 떠났다. 하지만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싯다르타가 떠나 얼마 지나지 않아 카말라는 제2의 싯다르타를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카말라와 나눈 뜨거운 사랑의 흔적으로 생긴 싯다르타의 2세는 싯다르타의 수행 여정에 새로운 돌발변수로 등장하지만 이 또한 또 다른 깨달음과 성찰의 기회를 던져주는 인연이다. 싯다르타는 삶의 변곡점과 전환점과 끊임없이 조우하면서 언제나 새로운 반추와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준다.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사유하면서 자신이 찾는 궁극의 진리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경주한다. 



III. 깨달음의 세계-자아의 새로운 탄생

긴 우회도로를 통해 깨달음의 목적지에 다다르는 싯다르타 


숲 속을 걷던 싯다르타는 고타마가 사는 도시로부터 빠져나올 때 자신을 뱃사공이 건너다 준 강가에 이르렀다. 강기슭의 야자나무랄 팔로 껴안고 있다가 갑자기 흐르는 강물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강한 충동을 자신을 발견했다. 그때 영혼의 후미진 곳에서 어떤 소리가 경련하듯 내면을 파고들며 혼잣말로 웅얼거리듯 내뱉은 말이 다름 아닌 완전한 것이나 완성을 뜻하는 ‘옴’이었다. 비참과 절망에 사로잡혀 살아왔던 싯다르타는 육신을 소멸시켜가면서까지 갈구하던 안식이 사라지고 이제 자신의 몸은 죽음을 맞이하려는 허망한 신체로 전락해버린 것인지를 생각해보았다. 옴을 웅얼거리다 피곤을 참지 못하고 싯다르타는 깊은 잠에 빠졌다. 깊은 잠에 골아떨어졌다가 눈을 뜬 싯다르타는 눈에 띌 정도로 활기에 넘쳤으며 호기심에 가득 차 있었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 몸을 일으키는 순간 어린 시절 친구인 고빈다를 극적으로 조우하면서 잠시 동안이지만 자신의 모습을 반추해보는 의미심장한 대화를 주고받는다. 부자들이 입는 옷을 입고, 지체 높은 사람이 신는 신발과 좋은 향수 냄새를 싯다르타에게서 감지한 고빈다는 싯다르타가 과연 순례자인지를 의심한다. 싯다르타의 고빈다의 지적에 형상 세계의 덧없음을 이럴게 지적하면서 응수한다. “형상의 세계란 무상한 것, 덧없는 것이야. 우리의 옷차림이나 머리카락 모습이라는 것도 지극히 무상한 것이지. 우리의 머리카락과 몸뚱이 그 자체도 덧없기는 마찬가지고”(136쪽). 고빈다와 작별을 고하고 “경이로운 잠에서 깨어난 뒤의 이 찬란한 시간, 온몸이 온통 옴으로 충만된 이 순간에,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137쪽)라고 감탄사를 연발하는 싯다르타는 자신의 기이한 인생을 회고하고 반추하면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길을 걸어가기 위해 무수한 우회도로를 방황하면서 걸어온 것이 아닌지 자문해보았다.  


싯다르타는 빛나는 바라문의 가문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방황하는 자아와 사투를 벌였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싸움이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바라문의 교리와 섭리에 회의를 품고 한 때 받았던 강인한 인상으로 사문으로 접어들어 수행을 거듭했지만 거기서도 궁극적 삶의 본질과 진리의 모습을 만나지 못했다. 싯다르타는 어쩌다 세속의 유혹으로 빠져 들어갔지만, 그가 겪은 것은 자신에 대한 혐오와 공허감이었을 뿐이다. 금욕과 권력, 사랑의 쾌락과 유희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으며, 장사꾼, 주사위 노름꾼, 술꾼, 탐욕스러운 자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다가 결국 자기의 내면에 있던 사제 의식과 사문 의식이 죽어 없어지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음을 깨닫는다. 마침내 싯다르타는 파국으로 가는 급행열차를 타고 삶의 종말에 이르게 되었다.  쓰디쓴 절망적 체험을 밥먹듯이 하던 싯다르타는 탕아 싯다르타, 탐욕자 싯다르타의 죽음을 경험하며 스스로를 강물 속에 빠져 죽게 만들고, 새로운 싯다르타로 변신해서 잠에서 깨어나게 된다. “내가 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다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기 위해서였어. 앞으로 나의 길이 나를 어디로 끌고 갈까. 그 길은 괴상하게 나 있을 테지. 어쩌면 그 길은 꼬불꼬불한 길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 길은 원형의 순환도로일지도 모르지. 나고 싶은 대로 나 있으라지. 그 길이 어떻게 나 있든 상관없이 나는 그 길을 가야지”(141쪽). 카말라에게 배운 사랑의 쾌락과 관능적 감각에 아첨하는 방법, 카마스와미에게 배운 장사의 기술과 돈 쓰는 방법도 사실은 방탕과 방랑과 방황의 길이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에게 삶의 또 다른 의미와 가치를 반면교사로 가르쳐 주면서 진정한 삶의 방향이 무엇인지를 우직지계(迂直之計)의 지혜로 깨우쳐 준 소중한 체험의 추억이었다. “너무 많은 지식이, 너무 많은 성스러운 구절이, 너무 많은 제사의 규칙들이, 너무 많은 단식이, 너무 많은 행위와 노력이 자기를 방해했던 것이다”(145쪽). 언제나 조금이라도 현명해지려고 더 많은 지식을 더 열심히 습득하기 위해서 학자이자 사상가이며 현인 행세를 하려던 교만한 마음에 휩싸여 지냈던 지난 시절을 참회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도 미래도 없는오로지 현재만 흐르는 강물의 지혜를 배우다

     

싯다르타는 한 때 자신을 강 건너로 데려다주었던 뱃사공 바주데바를 만나 강물을 매개로   삼라만상의 이치를 배우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깨달음을 완성하는 시간을 갖는다. 강물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고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라는 단일성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되새기면서  인생도 결국 한 줄기 강물과 같다는 사실을 깊이 새겨본다. 그 옛날 자신을 강을 건너게 도와준 뱃사공을 생각하며 애정을 담은 눈길로 도도히 흐르는 강물 속에 자신을 투영해보는 싯다르타는 수천 개의 눈으로 변신하며 수정같이 맑은 영혼으로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강물을 바라보며 싯다르타는 깊은 사색과 명상에 잠긴다. “이 강물을 사랑하라! 그 강물 곁에 머물러라! 강물로부터 배우라!”(149쪽) 강물은 시간의 변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지금 여기서 유유자적하게 흐르고 있을 뿐이다.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건 그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바라보는 강물은 지금 여기서 현재를 흐르고 있을 뿐이다. “강에는 현재만 있을 뿐, 과거라는 그림자도 미래라는 그림자도 없다”(157쪽). 강물을 자연의 스승일 뿐만 아니라 인간적 삶의 흐름에 비유해서 반추해볼 때 사람과 삶의 방향과 성격을 가늠해볼 수 있는 소중한 교훈을 던져준다. 강물을 사랑하고 강물 곁에 머무르면서 끊임없이 배워야 되는 이유다. “이 강물은 흐르고 또 흐르며, 끊임없이 흐르지만 언제나 거기에 존재하며, 언제 어느 때고 항상 동일한 것이면서도 매 순간마다 새롭다!”(149쪽) 항상 동일하지만 항상 새로운 강물을 바라보며 “ 강의 소리 속에는 삼라만상의 모든 소리들이 다 들어 있지요”(158쪽)라고 중얼거리며 강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고 싯다르타는 우주의 소리 ‘옴’을 경험한다. 



“그것이 단순한 물소리가 아니라, 생명의 소리요, 현존하는 것의 소리이자 영원히 생성하는 것의 소리였다”(159쪽). 현존하는 소리이면서도 영원히 생성하는 강물의 소리는 그 자체가 한 편의 위대한 교향곡이며 우주 삼라만상이 함께 춤을 추며 울리는 합주곡이다. “모두가 강이 되어 그리움에 사무쳐서, 갈구하면서, 고통스러워하면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강의 소리는 그리움으로 가득 찬 채, 가슴을 에이는 듯한 비통함으로 가득 찬 채, 도저히 잠재울 수 없는 욕구로 가득 찬 채, 울려 퍼지고 있었다”(197쪽). 강물은 하염없이 흐르고 있지만 거기에는 인생의 희로애락이 숨겨 있다. 그리움에 대한 갈망과 고통 속에서도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갈망의 숨결이 매 순간순간 조용한 침묵 속에서도 우렁차게 울려 퍼진다. “그리움에 애타는 탄식 소리, 깨닫는 자의 웃음소리, 분노의 외침 소리와 죽어가는 사람의 신음 소리, 아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있었으며, 이 모든 것이 수천 갈래로 얽혀서 서로 밀착하여 결합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합해져서, 그러니까 일체의 소리들, 일체의 목적들, 일체의 그리움, 일체의 번뇌, 일체의 쾌락, 일체의 선과 악, 이 모든 것들이 함께 합해져서 이 세상을 이루고 있었다”(198쪽). 강물이 흐르며 토해내는 우렁찬 침묵의 온갖 소리는 저마다 허공으로 분산되지만 나도 모르는 사리에 어느새 하나의 운율로 하모니를 이루며 아름다운 어우러짐 속에서 인생의 삼라만상을 한 편의 음악으로 작곡해서 들려준다. 거기에 누가 어떤 가사를 붙여 해석해내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선율이 흐르는 음악으로 들릴 것이다. 


저마다의 존재 이유와 목적이 있고 흘러가는 방향이 있지만 강물 속에 용해된 우주 삼라만상의 다양한 군상은 하나가 되어 서로 밀착하고 융합해서 유유히 흐른다. 강물 속에서 선과 악, 음과 양, 번뇌와 쾌락, 절망과 희망, 차 안과 피안 서로 상반되는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자연과 우주와 인간이 위대한 하모니를 이루는 생명의 음악을 완성한다. “강물은 수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가 비가 되어 하늘로부터 다시 아래로 떨어져서 샘이 되고, 시내가 되고, 강이 되었다. 그리고 또다시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갔으며, 또다시 새롭게 흘러갔다”(197쪽). 강물의 목적지는 바다다. 아니 가장 낮은 바다에 모여 강물은 다시 수증기로 변신해서 가장 높은 곳으로 비상한다. 가장 낮은 곳에 임해야 가장 높은 곳으로 비상할 수 있음을 강물은 조용히 우리들에 일러준다. 가장 높이 올라간 강물은 정상에서 자만에 빠지지 않고 다시 자신을 드높여준 땅으로 비가 되어 내려온다. 수평으로 흐르던 강물이 수직으로 상승했지만 다시 수직으로 하강해서 수평으로 흐른다. 마치 삶의 씨줄과 날줄이 횡적으로 흐르다 종적으로 만나 얼룩과 무늬를 만들어나가듯 강물의 흐름에서 삶을 넘어 우주 자연 삼라만상의 순환의 역사를 배운다.



지식은 전달할 수 있지만 지혜는 전달할 수 없다


많은 사람으로부터 현인으로 알려진 뱃사공을 꼭 만나보고 싶은 열망 때문에 나루터로 가는 길을 선택한 고빈다는 강가에 이르러 그 노인에게 강을 좀 건네 달라고 부탁한다. 건너편에 내린 고빈다는 그 노인과 대화를 시작하는 와중에 그 노인이 바로 싯다르타라는 사실을 간파한다. 구도의 행위에 너무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고빈다를 우회적으로 지적한 싯다르타는 하나의 목표에 매몰되면 그 목표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다고 강변한다. 고빈다는 이어서 자신이 방황하는 삶을 통해서 깨달은 소중한 삶의 지혜는 “지혜라는 것은 남에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네, 지혜란 아무리 현인이 전달하더라도 일단 전달되면 언제나 바보 같은 솔로 들리는 법”(206쪽)이라고 이야기한다. “지식은 전달할 수가 있지만, 그러나 지혜는 전달할 수가 없는 법이야. 우리는 지혜를 찾아낼 수도 있으며, 지혜로써 기적을 행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지혜를 말하고 가르칠 수는 없네”(206쪽). 지식은 책상에서 공부해서 가르칠 수 있지만 지혜는 일상에서 체험적으로 깨달을 수밖에 없어서 오로지 몸으로 배울 수밖에 없다. 지혜는 언어를 매개로 타자에게 직접 전달할 수 없다. 오로지 그 지혜를 지니고 있는 사람과 장기간 합숙 훈련하면서 비효율적으로 몸으로 익히는 수밖에 없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사람도 자신이 어떻게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는지 언어를 매개로 전달할 수 없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사람과 기회가 닿을 때마다 그 사람과 일거수일투족을 같이하는 수밖에 없다.


궁극의 진리와 세상의 본질은 피안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고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차안의 삶에 존재한다. “세계는 불완전한 것도 아니며, 완성을 향하여 서서히 나아가는 도중에 있는 것도 아니네, 그럼, 아니고 말고, 이 세계는 매 순간순간 완성된 상태에 있으며, 온갖 죄업은 이미 그 자체 내에 자비를 지니고 있으며, 작은 어린애들은 모두 자기 내면에 이미 백발의 노인을 지니고 있으며 젖먹이도 모두 자기 내면에 죽음을 지니고 있으며, 죽어가는 사람도 모두 자기 내면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208쪽). 나를 나답게 만드는 진정한 자기다움은 자기 안에 존재한다. 내가 보여주는 매 순간순간의 작은 생각과 행동, 그것이 만들어가는 일상의 변화 속에 나의 본래 모습이 잠자고 있다. 밖으로 향하는 관심과 애정을 안으로 향하게 만들어야 하는 이유다. 주변에서 만나는 작은 생명체든 사물이든 그것이 품고 있는 우주가 있다. ”이 돌멩이는 돌멩이다. 그것은 또한 짐승이기도 하며, 그것은 또한 신이기도 하며, 그것은 또한 부처이기도 하다. 내가 그것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까닭은 그것이 장차 언젠가는 이런 것 또는 저런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리고 항상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210쪽). 싯다르타는 관념적 사상보다 현실적 사물이 품고 있는 변화무쌍한 모습을 중시한다. “나는 사상이라는 것도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는 사물들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어. 예를 들어보자면, 여기 이 나룻배에 있었던 사람, 한 성스러운 사람이 나의 전임자이자 스승이었는데, 그 사람은 오랜 세월 동안 단순히 그저 강만을 믿을 뿐 그 밖의 다른 것은 아무것도 믿지 않고 살아왔어”(212쪽). 강물을 관념적으로 사유하는 것보다 강물에 자신을 투영하고 강물이 흐르는 모습에서 삶의 본질을 반추하고 성찰하는 가운데 내면으로 파고드는 사유의 샘물을 소중하게 생각할 때 나는 강물에 대한 다른 사람의 사유체계에 종속되지 않고 나 자신의 고유한 사유양식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나 현상은 이미 저마다의 존재 이유와 사유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다. 사과 씨앗 속에 사과나무를 품고 있듯이 작은 미물에도 이미 우주만물의 진리가 잠자고 있다.



열반은 존재하지 않고 단어만 존재한다


하물며 동일한 종류에 속하는 사물이라고 할지라도 언제 어디서 존재하며 다른 사물이나 사람과 관계를 맺는지에 따라 천차만별의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모든 돌멩이는 하나하나가 제각기 독특한 것이며, 제각기 나름대로의 방식대로 옴을 읊조리고 있으니, 모든 돌멩이 하나하나가 바라문인 셈이지. 그렇지만 이와 동시에 꼭 마찬가지로 그 돌멩이는 돌맹이기도 하며, 기름 같은 느낌을 주거나 비누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지. 그리고 바로 이점이 내 마음에 들어, 바로 이점이 나에게는 경이롭고 숭배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여겨져”(210-211쪽). 돌멩이 자신도 돌멩이가 품고 있는 자아와 더불어 그 어떤 특정한 소리에 함몰되지 않고 모든 소리들을 듣고, 전체, 단일성에 귀를 기울일 때면, 그 수천의 소리가 어우러진 위대한 노래는 단 한 개의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니, 그것은 바로 완성이라는 의미의 옴(唵)이라는 말을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돌멩이에서 발견한다. 이렇게 관심과 애정을 품고 주변을 살펴보면 삼라만상이 색다른 상상력을 자극하는 배움의 텃밭이다. “자네가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마도 바로 이 가르침이라는 것, 바로 그 무수한 말들이 아닐까 싶어”(212쪽). 무수한 가르침의 교리와 섭리를 이해하기 위해 어제도 오늘도 분투노력해왔다. 아마 별일 없으면 내일도 오늘과 같은 삶을 반복할 것 같지만 과연 이런 가르침의 세계에서 나는 어느 정도 배워야 가르침의 말씀을 듣는 여정을 끝마칠 수 있을까. 그런 가르침의 세계를 추구하면 일체의 속박과 구속에서 벗어나 나는 열반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너무 많은 지식이, 너무 많은 성스러운 구절이, 너무 많은 제사의 규칙들이, 너무 많은 단식이, 너무 많은 행위와 노력이 자기를 방해했던 것이다”(145쪽). 



“우리가 열반이라고 부르는 것,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아, 다만 열반이라는 단어만이 존재할 뿐이지”(212쪽). 불교에서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여 미혹과 집착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한 최고의 경지를 일반적으로 열반이라고 하지만 그런 경지도 관념일 뿐 실제로는 거기로 향하는 느끼는 깨달음의 희열이나 법열이 순간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목표로 향하는 여정에서 깨닫는 부산물이 오히려 산물보다 더 소중한 열반 체험을 제공해줄 수 있다. 열반이 우리 모두가 도달해야 할 궁극적 목적지라고 생각하고 나를 비우고 거기에 이르는 여정을 추구하다 오히려 사람은 열 받을 수 있다. 싯다르타는 궁극의 진리와 본질을 찾아 피안의 세계를 지향하는 수행을 반복하다 그것이 오히려 나를 죽이는 파행적 삶임을 깨닫는다. “사랑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여겨져. 이 세상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일, 이 세상을 설명하는 일, 이 세상을 경멸하는 일은 아마도 위대한 사상가가 할 일이겠지. 그러나 나에게는,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것, 이 세상을 업신여기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를 미워하지 않는 것, 이 세상과 나와 모든 존재를 사랑과 경탄하는 마음과 외경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것, 오직 이것만이 중요할 뿐이야”(214쪽). 지금 여기서 만나는 작은 미물이라고 할지라도 어제와 다른 마음으로 진심 어린 관심과 애정으로 바라보며 사랑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나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면서 아름다운 관계를 맺어가는 최고의 수행이다. 싯다르타는 이런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 감동과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으며, 그의 가슴속에서는 진정에서 우러나온 가장 열렬한 사랑의 감정, 가장 겸허한 존경의 감정이 마치 불꽃처럼 활활 타올랐다. 싯다르타의 미소는 그에게 자신이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사랑했었던 그 모든 것, 자신이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가치 있고 신성하게 여겼던 그 모든 것을 떠오르게 해주었다”(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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