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와 나는 마주 보며
사랑에 빠진 눈부처다

북한강 자전거길을 종주하고 나서

자전거와 나는 마주 보며 사랑에 빠진 눈부처다:

북한강 자전거길을 종주하고 나서


버려졌던 옛 경춘선 길을 리모델링해서 만든 북한강 자전거길은 아름다운 산세가 계곡 사이로 북한강을 품고 가을로 향하는 경치를 한껏 자랑하는 풍경을 감상하며 달릴 수 있는 자전거길이다. 북한의 금강산(金剛山) 부근에서 발원한 금강천이 남쪽으로 흐르면서 강원도 철원군에서 금성천(金城川)을 합친 후, 화천군 화천읍(華川邑) 휴전선에서 북한강 국가하천 구간이 시작된다. 이후 남쪽으로 흐르다가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楊西面) 양수리(兩水里)에서 남한강과 합류하여 한강(국가하천)으로 흘러든다(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북한강에서 양수리까지 흘러 내려오면서 북한강은 봄부터 겨울까지 사시사철의 계절 변화를 노래하면서 손꼽아 기다리던 남한강과 합류해서 한강의 기적을 만드는 배경이 되었으리라. 북한강은 남한에 내려와 오매불망 기다리던 남한강을 만나는 순간 한눈에 반해버린 듯, 한 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남한강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고 남과 북을 뗴어버리고 하나의 강, 한강으로 다시 태어난다. 북한강과 남한강은 둘 다 강이지만 발원지에서 시작해서 우리 눈앞에 나타나기까지 흐르면서 강물이 품고 있는 뜻은 다르다. 열길 물속은 알 수 있지만 한 사람 속은 알기 어렵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열 길 물속의 마음도 알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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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망각이고 새벽은 암시다


오늘은 북한강 줄기를 따라 라이딩하면서 강물이 품고 있는 속 깊은 뜻을 물어볼 작정이다. 남한강 자전거 길과 북한강 자전거길이 만나는 밝은 광장 인증센터에서 날이 밝기도 전에 새벽 라이딩을 시작했다. 집에서 정태성 총장 차로 5시 조금 넘어 출발해서 6시가 되기도 전에 오늘의 출발지, 밝은 광장인증센터에 출발을 알리는 인증 도장을 찍고 약 15Km 라이딩 후 대성리 역에서 정태성 총장을 다시 만날 예정이다. 차를 대성리 역에 주차한 다음 여기서 기차를 타고 춘천까지 가서 내려오는 방향으로 북한강 자전거 길을 즐기기로 했기 때문이다. 북한강 자전거길은 서울에서 춘천까지 약 70.4km의 거리로 이어지는 추억과 낭만, 산과 강, 시간과 공간이 이중주를 연주하며 라이더를 반갑게 맞이하는 환상적인 자전거 코스다. 북한강 자전거 길을 춘천방향에서 내려오다 보면 의암호수와 청평호반, 축령산과 운길산 등을 지나며 호반이 산을 사이에 두고 강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아름다운 풍광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북한강 자전거길은 무엇보다도 대성리와 청평유원지, 자라섬과 강촌유원지에서 대학시절 시들지 않는 청춘과 열정을 불태웠던 추억의 명소를 지난다.


기억은 또한 망각이다. 한 가지를 기억한다는 사실은 또 다른 사실은 기억조차 못하거나 망각하기로 선택한 결과다. 대성리에서 보낸 젊은 시절 추억은 대성리가 아닌 다른 지역이나 비슷한 시기에 보낸 다른 추억을 의도적으로 기억하지 않기로 선택했거나 배제한 결과다. 2010년 12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옛날 경춘선 기찻길을 북한강 자전거 길로 리모델링해서 다시 태어난 길이 바로 북한강 자전거길이다. 북한강 자전거 길은 이미 과거 철길이었던 자신의 탄생 원천을 망각해야 출발지와 목적지가 늘 사전에 정해져 있고, 정확한 시간에 주어진 구간을 통과해야 하는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전거 길은 철길과 다르게 화석연료를 태우는 엔진의 힘으로 움직이지 않고 인간의 안간힘을 매개로 에너지를 발산하는 사람이 투자한 노력의 양만큼만 움직이는 땀 흘리는 길이다. 출발지와 목적지가 정해져 있는 철길과 비슷하게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지향하는 목적지까지 출발지에서 움직이지만 자전거를 타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출발지와 목적지를 주어진 상황의 여건에 따라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주어진 구간을 통과하는 시간도 전적으로 자전거를 타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 철길이 속도와 효율, 목표와 성과가 지배하는 패러다임이라면 자전거 길은 밀도와 효과, 과정을 즐기며 뜻밖의 생각지도 못한 변수를 만나는 우발성을 기꺼이 수용한다.


밝은 과장 인증센터에서 샛터 삼거리 인증센터까지 달리는 자전거 길은 먼동이 트기 전에 긴 밤의 끝에 맞이하는 새벽길이었다. 어젯밤은 저녁을 맞이하면서 하루를 정리했지만 새벽은 피곤한 밤을 품고 새벽의 정기를 잉태했다. 새벽 속에 어젯밤이 걸어온 길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길가의 나무가 치열하게 살았던 어제의 하루를 반추하고 있다. 절망과 비탄의 하루가 밤을 지나는 사이 다시 희망과 감탄으로 새벽의 꿈을 잉태할 즈음 바람 불어 좋은 어느 날, 소리 소문 없이 그 꿈이 성취되었으면 좋겠다. 지금 이 새벽에 내 몸은 자전거가 안내해주는 북한강길을 따라 난생처음 강물이 친구가 되고 살갗을 스미는 바람이 어떤 비관도 자신에게 맡겨주면 낙관으로 바꿔주겠다고 속삭이며 다가온다. 곤궁에 처하는 일상적 삶이 반복되고 늘 불안에 떨며 어떤 일을 해도 미숙함을 벗어날 수 없다는 안타까움에 어제를 보냈다. 계획대로 풀리지 않는 일을 붙잡고 대책을 마련하며 안간힘을 써보지만 여전히 갈 길을 멀고 능력은 재능을 찾아내기에 역부족이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일그러진 얼굴에서 작은 미소 하나 발견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오늘 새벽이 그 디딤돌을 만들어주면 좋겠다. 나에게 새벽은 암시다. 그 암시가 품고 있는 의미는 쉽게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둠과 밝음 사이에서 어제와 다른 차이를 잉태하고 있다는 믿음, 그 믿음 위에서 새벽은 언제나 처음처럼 시작하는 상상으로 비상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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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타는 뜨거운 정열보다 지속적인 열정이 중요하다


사실 자전거를 타는 시간보다 자전거를 타기 위해서 새벽에 일어나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출발지까지 이동했다가 다시 자전거 전용도로를 벗어나 일반도로를 통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더 험난하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복잡하고 힘든 준비의 시간을 기꺼이 투자하고 귀찮은 이동거리를 마다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전거를 끌고 기꺼이 집을 나서는 이유는 자전과 함께 집을 나서본 사람에게만 이해가 가는 숨은 의미와 가치가 있다. 모든 시작에는 시작하기 위해 준비해야 될 최소한의 조건이 필요하다. 준비를 너무 철저하게 오랫동안 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지만 준비를 전혀 하지 않는 것도 실패를 준비하려는 철저한 준비나 다름없다. 북한강을 둘러싸고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체와 함께 어울리며 북한강 자전거 길에 빠져들어야겠다는 강렬한 열망 자체가 많은 준비를 내포하고 있다. 열망이 사그라들지 않고 북한강 자전거 길을 즐기겠다는 목표를 만나면 열정이 개입되기 시작한다. 자전거를 타야겠다는 정열은 불타오르듯 폭발적으로 끓어오르다 금방 대책 없이 식을 수 있지만 자전거를 타보겠다는 열정은 목표를 만나는 순간 비교적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발산한다. 자전거를 타야겠다는 정열이 열정으로 이어질 때 자전거는 이제 내 삶의 동반자로 자리매김하면서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내 삶의 소중한 일부가 된다.


대성리역으로 가는 길에 물의 정원을 지난다. 봄에는 양귀비가 라이더의 발길을 유혹하고 가을에는 길가에 핀 코스모스와는 다르게 황화 코스모스가 깊어가는 가을 길목에서 지나가는 라이더의 발목을 잡는다. 이른 아침에 잠시 다가왔던 물의 정원이지만 깊은 밤에서 깨어나는 중인지 인기척을 해도 잠잠하기만 하다. 물 건너가기 전에 물의 정원을 둘러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기에는 너무 이른 새벽이다. 다음이라는 시간은 잘 오지 않지만 생태학자로서 물이 공원으로 바뀌는 생태학적 상상력을 배우러 다음에 꼭 와봐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먼동이 터오는 새벽안개를 뚫고 다가오는 산천초목을 두 바퀴에 담아본다. 바퀴는 두 개 밖에 안 되지만 이 둘이 힘을 합치면 전국의 어디든 갈 수 없는 곳이 거의 없다. 네 바퀴로 구르는 자동차는 도로가 없으면 갈 수 없지만 바퀴를 두 개로 줄인 자전거는 지구의 자전조차 거슬러 사람의 의지가 닿은 곳까지는 웬만하면 다 갈 수 있다. 자전거가 갈 수 있는 길을 상상하는 사이 갑자기 다가오는 언덕길 앞에서는 가급적 신속한 방식으로 기어를 변속하고 업힐을 기어오를 준비를 해야 한다. 평탄한 길이라고 생각하고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다가 중간중간에 갑자기 나타나는 약간의 언덕들은 의외로 라이더의 의지를 시험하거나 수시로 괴롭힌다.


행복은 속도가 아니라 밀도가 좌우한다


샛터 삼거리 인증센터에서 두 번째 인증 도장을 찍고 대성리역 방향으로 향하자마자 터널이 나온다. 옛 경춘선의 낭만을 싣고 이 터널을 빠져 다니며 터널 위의 나무나 풀, 그리고 이곳에서 서식하는 모든 생명체를 괴롭히는 기적(汽笛)이 울렸을 것이다. 요란한 소음과 함께 멀리서 여기까지 데려온 바람과 함께 순식간에 들이닥친 기차가 터널을 진입하는 순간 터널 주변의 생명체에게는 버티기 어려운 심각한 소음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 소음이 때로는 자신의 생존 터전을 위협하는 경고음으로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 엔진을 동력원으로 활용하는 자전거가 소리 소문 없이 터널을 빠져나간다. 가슴 졸이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던 그때 숱한 생명체의 긴장감은 지금쯤 많이 해소되지 않았을까. 긍정적인 해석과 기대를 하지만 당사자가 느끼는 고통은 오로지 당사자만이 정확하게 알 수 있다. 터널을 빠져나오자마자 짧지만 내리막이 터널 속에 머물렀던 어둠을 버리고 빛의 세계로 빠져드는 기쁨을 선사해주었다. 터널을 뒤로하고 내리막길을 맞이하는 순간 터널이 품고 있었던 들리지 않았던 적막마저 시원하게 걷히는 듯했다. “황새는 날아서/말은 뛰어서/거북이는 걸어서/달팽이는 기어서/굼벵이는 굴렀는데/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반칠환 시인의 ‘새해 첫 기적’이라는 시다. 옛 경춘선의 기차는 한 걸음에 대성리에 역에 도착했겠지만 내가 탄 자전거는 15Km의 거리를 1시간 남짓 못하게 나를 대성리역에 데려다주었다. 무엇을 타고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으로 가는 수단인지 타본 사람은 알 것이다. 행복은 속도보다 매 순간 느끼는 삶에 대한 충만감, 밀도가 보장해준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성리역에서 춘천역까지는 기차를 타고 이동했다. 휴일 이른 아침에도 불구하고 자전거 라이더들이 앞칸의 자전거 거치대는 다 차지하고 있었다. 자전거 내비게이션인 오픈 라이더를 끄지 않고 춘천역에 내린 것을 뒤늦게 알았다. 북한강 자전거길로 찾아가는 시점에 다시 오픈 라이더를 작동시켜 보니 이미 60Km를 탔고 평속은 44Km나 된다는 메시지가 나와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금방 알아차렸다. 자전거로 평속을 44Km, 그것도 60Km 넘는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춘천 시내를 지나 북한강 자전거길로 들어서기 전 도로도 호반과 잘 어울리는 춘천의 고즈넉한 가을날의 모습을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었다. 아직은 푸른 잎이 압도하는 나뭇가지에서 지나가던 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지나가던 자전거 앞으로 흩날리다 내동댕이치면서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한 생애를 마감한다. 낙엽의 불안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어디로 더 날려갈지 낙엽도 모르는 판국에 바람은 알고 있을까. 갑자기 떨어진 충격에서 벗어난 밤처럼 해맑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더니 어떠한 미련도 없이 그 사이 불어 닥친 바람에 어디론가 미련 없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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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역에서 춘천 신매대교 인증센터로 가는 길에 소양강에서 한 많은 지난 세월을 대수롭지 않은 듯 굽어보는 소양강 처녀 동상을 만났다. 소양강 처녀는 반야월이 작사하고 이호가 작곡한 대한민국의 가요이자 한국인의 대표 애창곡으로 1970년으로 넘어가면서 가수 김태희가 불러 큰 인기를 얻었던 노래다. 소양강 처녀의 실제 사연과 배경을 제공해준 1969년 당시 가수 지망생이었던 윤기순 씨였다. 소양강 처녀라는 노래는 떴지만 소양강 처녀의 악상을 제공해준 실제 인물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면서 힘든 세상을 보냈다. 지금은 동상으로 거듭나서 소양강을 굽어보며 곡절(曲折)이 많았던 예전의 설움을 흘러가는 노래의 곡절(曲切)에 담아 세상의 서러움을 담아내고 있다. 물과 안개의 도시라고 불리는 춘천은 닭갈비나 닭 보쌈과 막국수 음식을 떠올리게 만드는 도시이기도 하다. 나에게는 음식보다 먼저 눈으로 들어온 것은 호반의 도시 춘천을 넓은 가슴으로 품고 있는 의암호의 위용(偉容)이다. 인공호 수지만 자연호수처럼 주변 경관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삼악산과 벗 삼아 침묵하면서도 소리 없이 말하는 의암호의 의연함에 잠시 빠져들었다. 의암호가 말하는 것을 삼악산이 침묵하면서 받아들이고, 삼악산이 말하는 것을 의암호가 받아들이고 있지만 침묵하는 듯, 춘천에서 시작하는 북한강 자전거길을 더욱 설레게 만들었다.

자전거 타는 동안은 동안(童顏)이다.


신매대교 인증센터에서 경강교 인증센터까지는 30Km 정도의 거리다. 북한강 옆길을 타고 강물과 함께 내려가는 자전거길은 강변에서는 쉽게 만날 수 있는 코스모스와 갈대를 비롯해서 푸르름의 마지막 순간을 붙잡고 가을로 향하는 길목에서 서서히 자기 색깔을 드러내는 대자연의 합창곡을 듣는 것처럼 풍요로우면서도 여유로운 사색의 길이었다. 자전거길을 달리다 보면 이 길도 본래는 자신들의 영토였음을 몸으로 보여주기 위해 길 가장자리부터 길 안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풀들의 불법침입 장면을 여러 군데서 목격할 수 있다. 그럴 때마다 봄부터 지금까지 살아낸 그들의 생명성에 경이로움을 느끼며 무심코 짓밟고 자전거의 무게로 지나왔던 지난 라이딩에 반성하는 시간을 갖는다. 갑자기 부딪히며 줄기와 가지가 꺾이고 잎새가 날아가며 몸집에 생긴 상처를 바라보는 풀들의 아픔에 숙연해진다. 살아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경이로운 생명력의 기적이며 감동스러운 삶의 향연이다. 자전거길에서 만나는 강변의 모든 풀과 나무는 아픔과 부딪히기 전에 먼저 몸을 눕는 듯, 바람에 흔들리며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고 있다. “매일의 온몸만이 집이며 길인, 그런 자유를……“ ‘민달팽이를 보는 한 방식’이라는 김선우 시인의 시다. 북한강변 길에서 만난 모든 풀과 나무와 꽃은 자신이 머무는 지금 여기가 바로 집이며 그들이 살아갈 길이다. 집과 길에서 누리는 자유가 진정한 자유라는 것을 김선우 시인은 복잡한 시대 변화 속에서 깨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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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가평군을 지나면서 자라섬을 만난다. 1943년 청평댐(淸平)이 건설되면서 북한강(北漢江)에 생긴 섬이라고 한다. ‘자라처럼 생긴 언덕’이 바라보고 있는 섬이라 하여 ‘자라섬’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하는데 이 섬은 동도, 서도, 중도, 남도 등 4개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물 울타리를 둘렀다/울타리가 가장 낮다/울타리가 모두 길이다. “ 함민복 시인의 섬이라는 시다. 울타리는 밖과 안을 구분하고 경계 지우기 위해서 만든다는 게 우리들의 생각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런 통념을 통렬하게 깨부순다. 물과 울타리의 이종결합을 통해 울타리를 누구나가 드나드는 길로 변신시킨다. 시인의 통렬하고 통쾌한 언어 변주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그 섬에 가고 싶다." '섬'하면 떠오르는 정현종 시인의 시다. 강과 산 사이에 자라섬이 손짓하고 있지만 그 섬에 가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산과 강 가장자리로 내어준 자전거길을 대신 가기로 한다. 가고 싶은 섬이지만 때로는 섬을 사이에 두고 높은 벽을 두르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섬은 두 사람 사이에 소통이 단절된 불통의 상징이 되기도 하고 섬을 사이에 두고 싸움을 벌이는 적대관계를 만들기도 한다. 박덕규 시인의 ‘사이’가 그런 시다. "사람들 사이에/사이가 있었다 그/ 사이에 있고 싶었다/양편에서 돌이 날아왔다." 나는 적어도 자라섬에게만은 그런 돌이 날아드는 적대관계의 섬이 아니라 물 울타리로 둘러싸여 누구든 그 섬에 가고 싶은 그리움의 섬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전거 타고 가는 동안만큼이라도 나도 시인이 되면 동안(童顔)이 될 수 있을까


일생동안 연주하는 삶의 이중주, 오르락(樂) 내리락(樂)


경강교 인증센터에서 올라오다 이미 인증 도장을 찍은 샛터 삼거리 인증센터까지는 이제 약 25Km를 남겨두고 있다. 이 구간은 자동차 드라이브도 환상적인 코스지만 대학 다닐 때 자주 갔던 MT의 대표 코스인 대성리와 청평, 그리고 가평을 따라 이어지는 호수 전경이 환한 미소로 맞이해주는 자전거길이다. 자전거길은 곧 인생길이다. 거기에는 평탄한 길만 있는 게 아니라 자전거를 타고 올라가기에는 힘에 겨운 오르막이 잊을만하면 나타나 마지막 남은 힘을 쏟아붓게 만든다. 간단하게 생식에 두유를 타 먹고 시작한 오늘의 라이딩이 정오 시간에 가까워지면서 뱃속은 서서히 음식이 유입되기를 기다리는 눈치다. 그 와중에 언덕길은 배고픔을 견디고 올라서야 하는 즐거운 비극의 서사다. 비극인 이유는 배고픔에도 불구하고 올라가야 하는 일이고, 즐거운 이유는 올라서면 내리막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과 함께 곧 배고픔을 해결하는 점심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사람은 늘 이런 사이에서 좋은 사이를 꿈꾼다. 사이가 좋지 않으면 그 사이에서 살아가는 사람도 행복하지 않다. 사이는 늘 색다른 사유가 싹트는 사유의 접경지대이기도 하고, 여기서 저기로 건너가는 건널목이기도 하다. 사물과 사물 사이에 아름다운 ‘공간’이 존재하고, 사건과 사건 사이에 ‘의미’가 살아 숨 쉴 때 그 ‘사이’에는 소통의 꽃이 핀다! 나와 너, 우리와 그들 사이에 불통의 장벽을 없애고 누구나 머물고 싶은 ‘섬’을 만들고 싶다. 그 ‘섬(island)’으로 다가가기 전 잠시 멈추어 ‘섬(stop)’으로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섬’을 생각해고 싶다. 우리가 가고 싶은 섬은 멀리 서서 바라보는 전망과 동경의 대상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가서 함께 머물고 싶은 희망과 공감의 이웃이다. 그 섬 중에 하나가 바로 ‘그럼에도’라는 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부대끼고 힘든 소통을 하지만 그래도 살아가는 이유를 알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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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동안 연주하는 삶의 이중주가 있다. 바로 오르락(樂) 내리락(樂)이라는 노래다. 올라갈 때는 즐겁고, 내려갈 때는 즐겁다는 말이다. 올라갈 때만 즐거운 게 아니라 마음을 비우고 내려가면 실수나 실패로 어쩔 수 없이 추락하는 게 아니라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또 다른 경지에 오르기 위해 의도적으로 내려갈 때는 즐겁다. 올라갔다고 자만하지 말고 내려갔다고 좌절하지 말자. 올랐다는 이야기는 이제 내려가야 된다는 암시이고, 내려갔다는 이야기는 언젠가 다시 올라가는 시기가 온다는 반증이다. 오르막에 오르는 여정을 즐기다 보면 정상에 이른 후에도 자만하지 않는다. 정상이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상은 살아가면서 수없이 다시 올라가야 되는 경지이기 때문이다. 경지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일정한 경지에 오르면 더 이상 오를 경지가 없는 게 아니라 오늘 오른 경지는 더 이상 경지가 아니다. 오늘의 경지와 다른 경지에 오르기 위해 어제와 다른 방법으로 경지에 오르는 시도를 부단히 전개할 때, 경지는 나의 실력과 재능을 끊임없이 연마하는 무대일 뿐이다. 오르막에 오를 때처럼 내리막으로 향하는 과정에도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오른 후에 쌓은 성취감이 순식간에 좌절감이나 낭패감으로 전락한다. 잘 내려가는 이유는 이전과 다르게 잘 올라가기 위해서다. 올라가는 즐거운 음악이 오르락(樂)이고 내려갈 때도 즐기는 음악이 내리락(樂)이다. 인생은 오르락 내리락을 연주하면서 두 가지 음악이 요구하는 선율에 맞게 내 삶의 품격도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지 않으면 실격 패당 한다.



지금 당장 달라지는 게 아무것도 없어도 자전거를 계속 타야 되는 이유는?


“늦은 일요일 쇼펜하우어로부터의 연락, 결국 달라지는 것은 없을지 모른다“(6쪽). 이현승 시인의 《아이스크림과 늑대》라는 시집에 나오는 시인의 말이다. 비슷한 문장이 이현승 시인의 다른 시집, 《생활이라는 생각》, ‘빗방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라는 시에 나온다. “내일은 내가 웃고 네가 기도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이라는 일상을 어제의 연장선상에서 벗어나 어제와 다른 다짐과 각오로 출발선상에 서야 한다. 그럼에도 섬에 가고 싶은 이유는 달라질 게 없다고 단정하는 사람이 많아도 달라질게 여전히 많은 삶의 낯선 단면을 만나고 싶어서다. 자전거를 타면서 만나는 장면도 어딘가에서 보거나 상상한 장면도 많겠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낯선 의미로 다가오는 이유를 만나기 위해서다. 니체의 영원회귀를 떠올리지 않아도 우리는 안간힘을 쓰고 발버둥을 치면서 어제와 다른 오늘을 맞이하려는 평범한 노력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발버둥을 치면서 살아도 어제와 다른 나로 변신하지 않으면 지금 살고 있는 생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라고. 어제와 다른 나로 변신하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그렇게 변신하려고 발버둥 치는 나는 누구인지를 알아가는 노력이 더 소중하다. 여기가 주는 안락함에서 벗어나 자전거가 데려다는 평범해 보이는 길이지만 한 번도 자전거로 지나가 보지 않은 낯선 길로 내 몸을 자전거에게 맡기는 이유는 저기가 주는 불편함에 내 몸을 노출시켜보기 위해서다. 결국 달라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할지라도 내가 자전거를 계속 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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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강 자전거길은 짧은 거리지만 그럼에도 자전거 타는 즐거움과 함께 힘든 건 여전하다. 팔목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허벅지도 당기는 와중에 안장통도 왔다 갔다 했다. “우리는 아플 때 더 분명하게 존재하는 경향이 있다.” 이현승 시인의 ‘빗방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라는 시의 일부 구절이다. 의사가 되어 환자를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행위자의 적극성보다 환자가 되어 어쩔 수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묵묵히 의사의 치료를 견뎌내는 환자의 수동적 감당 능력이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이다. 공개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주어진 자리에서 자기 본분을 다 감당해내는 담당자의 역할처럼 자전거 타는 사람이 겪는 안장통도 내가 자전거를 계속 타는 한 겪어내고 이겨내지 않으면 자전거를 타는 사람의 존재 이유를 증명할 방법이 없다. 자전거를 타면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은 안장통이다. 안장통이 심할 때 비로소 내가 자전거를 참 열심히 타고 있다는 존재감이 가장 적나라하게 다가온다. 안장통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그동안 힘겹게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꽤 오랫동안 견뎌왔다는 반증이다. 우리가 언제 안장통을 경험해볼 수 있을까. 좁디좁은 안장 위에 온몸의 체중을 싣고 쉴 새 없이 페달을 밟으면서도 중심을 잡고 몸을 유선형으로 누인 채 앞으로 달려 나가는 삼중고(三重苦)를 내가 왜 겪어내야 하는 것일까. 여기서 말하는 삼중고란 안장통을 비롯해서 온몸을 수시로 습격하는 통증과 쉴 새 없이 페달을 밟아야 하는 허벅지의 고통, 그리고 수직으로 내리쬐는 뙤약볕을 뚫고 아직도 가야 할 먼길을 향해 참고 견뎌내야 하는 인내심으로 감당하는 고통이다. 안장통 없이 장기간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안장통은 안전하게 자전거를 타고 있는 반증으로 통증으로 증명해주는 셈이다.


자전거와 나는 마주침이자 마주 보며 사랑에 빠진 눈부처다


자전거를 타고 앞으로 나가야겠다는 절박한 심정의 이면에는 견딜 수 없는 노곤함과 그래도 조금 더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결연함이 양극단에서 서서 팽팽한 줄다리기를 한다. 노곤함을 이기는 유일한 묘안은 노곤함에도 불구하고 몸을 믿고 앞으로 나가려고 힘쓰는 발버둥이다. 하지만 대체로 사람들의 변화에 대한 갈망은 변화를 위해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변화를 위한 조급한 결심에 머물러 있는 안타까움이다. 변화를 추진하겠다는 다급한 갈망 자체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는 언젠가 추진하겠다는 어설픈 다짐으로 관성이 되어 자리 잡는다. 다짐도 습관이 되어 아예 타성에 젖어든다. “진실을 고정되어 있지 않다.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러므로 진실을 응시하려면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부패와 타락은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생긴다. 세계는 인간을 고정시킨다. 역할에 고정시키고, 영역에 고정시키고, 계급에 고정시키고, 집단에 고정시키고, 이데올로기에 고정시킨다. 인간은 꿈조차도 고정의 대상이다. 고정된 인간은 고정된 얼굴을 갖는다. 세계는 고정된 인간의 얼굴을 끊임없이 찍어낸다. 고정된 얼굴은 생명의 얼굴이 아니다. 죽음의 얼굴이다. 세계가 거대한 묘지로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묘지 사이를 바람처럼 질주하는 이들이 있다. 시인이다. 시인의 존재성은 끊임없는 변신에 있다. 시인은 고정된 얼굴을 거부한다. 고정된 얼굴을 거부하는 시인이야말로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혁명가다. 세계는 그들을 두려워하고 적대하는 것은 필연이다”(67쪽). 정찬의 《길, 저쪽》에 나오는 말을 길게 인용해보았다. 진실과 자전거의 공통점은 끊임없이 움직이지 않으면 부패되고 넘어진다는 사실이다. 한 가지 영역에 멈춰서 고정되지 않고 두 바퀴를 굴리며 끊임없이 이동하며 자신을 재탄생시키듯 고정된 대상과 대상의 고정에서 벗어나 탈주를 반복할 때 변신의 가능성이 열린다.




자전거 그랜드 슬램을 위한 작은 보행이 어느 날 경이로운 행보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전거를 타면서 만나는 사물과 현상은 그냥 거기에 존재하는 객체가 아니다. 나의 눈과 끊임없이 마주치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닌 주체다. 사물이나 현상과 내 눈이 맞으면 그것이 바라보는 ‘눈길’이 달라지고 ‘눈부처’가 생긴다. 눈부처는 상대방의 눈에 내 모습이 보이고, 내 눈에 상대방의 모습이 보이는 경우다. 상대의 바라보는 눈에 내가 있고, 상대를 바라보는 내 눈에 네가 있을 때 둘 사이는 지극히 사랑하는 사이다. 《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을 쓴 강신주에 따르면 눈부처의 핵심은 상대방이 나를 바라볼 뿐만 아니라 나도 상대방을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고 한다. ‘눈총’ 쏘지 말고 ‘눈길’을 줄 때 따뜻한 ‘손길’도 따라온다. 사물이나 현상도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바깥세상에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객체가 아니다. 사물이나 현상도 주체적 의지를 갖고 의미를 발산할 때 나의 주체적 의지와 눈부처가 되어 우발적으로 마주친다. ‘마주 봄’이 없는 ‘마주침’은 ‘피뢰침’에 불과하다. 사물이나 현상과 나는 마주 보는 시인이다. “시인은 ‘See-in. 사람과 사물의 안쪽을 깊이 들여다보는 운명을 타고난, 신과 내통하는 종족들이다”(175쪽). 최민자 작가의 《사이에 대하여》라는 책에 나오는 말이다. 강과 산, 추억과 낭만이 교차하는 사이에서 북한강 자전거길을 종주하며 만났던 수많은 사물과 현상의 안쪽을 깊이 들여다보며 자전거 타는 시인을 꿈꾼다. 내일은 자전거라는 물건이 색다른 세계로 인도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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