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를 달성하는 ‘완주’보다 온전한 나로 거듭나는 ‘온주’가 소중하다
국토 ‘종주(縱走)’는 ‘완주(完走)’가 아니라 ‘온주(穩走)’다(1부):
목표를 달성하는 ‘완주’보다 온전한 나로 거듭나는 ‘온주’가 소중하다
자전거 타기는 차이를 반복하는 배움의 과정이다
인천 아라 서해갑문 인증센터에서 낙동강 하굿둑 인증센터까지 총 633Km를 자전거로 종주(縱走)하면서 체력보다 더 중요한 능력은 상상력임을 깨달았다. 물론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자전거로 인천에서 부산까지 갈 수 없다. 체력이 있어야 실행력이 생기고 실행력이 있어야 없었던 실력도 생긴다. 하지만 이정표로 잘 안내되는 자전거 길도 갈림길에서는 어디로 가야 할지 결정적인 순간에 순간적인 판단 착오로 엉뚱한 길로 한 참을 가다가 되돌아오는 일도 많다. 지도를 따라가다 막히거나 방향을 잃었을 경우 직관적인 감각으로 지형을 파악한 다음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방황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말 걸어오는 산과 강, 구름과 하늘, 그리고 바람을 맞이하는 산천초목들과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작은 실천을 진지하게 반복한 결과 어제와 다른 차이를 낳았다.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의 참고문헌을 빼면 633페이지다. 인천 아라뱃길 인증센터에서 부산 낙동강 하굿둑까지 633km라서 『차이와 반복』의 페이지수와 상징적으로 만난다. 하지만 실제로는 670Km 정도에 육박할 정도로 먼 거리다. 나에게 ‘633’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60대에 33가지 새로운 차이를 반복해서 어제와 다른 인생 후반전을 의미심장하게 보내라는 상징적인 숫자의 의미다. 633Km 자전거 길을 달리면서 어제와 다른 차이를 반복하며 페달을 밟으려고 노력한다. 동일한 자전거와 동일한 라이더가 지나가는 동일한 자전거길이지만 누가 어떤 문제의식으로 그 길을 지나가는지에 따라서 길은 언제나 새롭게 다가온다. 오늘 내가 지나가는 길은 누군가 걸어간 그 길이 아니라 내가 오늘 처음으로 걸어가는 낯선 길이다.
모든 길은 모든 사람에게 처음 걷는 길이고 달리는 길이다. 다름과 차이가 반복되어야 반전이 일어난다. 같은 자전거를 같은 사람이 같은 길을 가지만 동일성을 반복하지 않고 어제와 다른 차이를 진지하게 반복한 덕분에 작은 반전이 일어나는 것이다. 동일한 자전거를 타고 가는 동일한 사람이 누군가 달려간 동일한 자전거 길을 633Km나 반복하지만 나에게 자전거는 매 순간 다른 나와 다르게 만나는 움직이는 인생학교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내가 주인공이고 전경이라기보다 나 역시 낙동강 하굿둑까지 이르는 한 사람의 인생 여행자로서 내가 스스로 배경이 되어 세상의 얼룩과 무늬를 받아들일 것이다. “불행을 배경으로 삶을 보면 어떤 일도 견딜만해진다.” 이현승 시인의 ‘질문 있는 사람’의 일부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 만날 숱한 불행한 사건이나 사고 역시 불행 중 다행을 만들어가는 내 삶의 소중한 역사가 될 것이다. 자전거를 타면서 다가오는 수많은 자극은 나에게 해석을 기다리는 사건이자 낯선 기호들이다. 늘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이지만 나에게 다가오는 의미는 어제와 다르기에 그 자체는 하나의 사건이자 그 사건이 품고 있는 사연은 해석을 기다리는 기호다. 자전거 타기가 차이를 반복하며 색다른 의미를 양산하는 배움의 과정이 되는 이유다. 차이의 반복이 지향하는 목적지는 ‘완전(完全)’이 아니라 ‘온전(穩全)’이다.
자전거 국토종주는 목표를 달성하는 완주보다 목적을 지향하는 온주다
사람은 ‘완벽(完璧)’하거나 ‘완전’해질 수 없다. 늘 결핍되거나 부족한 존재로서 ‘완성(完成)’을 향해 몸부림치고 안간힘을 쓸 뿐이다. 자전거로 국토 종주한 결과나 성과보다 종주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깨달음의 순간을 중시할 때 종주는 완주의 의미보다 그 길 위에서 온전한 나로 변신하는 노력이 새롭게 다가온다. 매 순간 거듭나기를 반복하며 어제의 나와 다른 나로 무한 변신하는 니체의 위버멘쉬처럼 위험하지만 모험을 체험하는 라이딩은 움직이는 인생 학교 자체다. 완벽함이나 완성을 추구하는 완전보다 온전이 온 힘을 다해 추구해야 할 인생의 소중한 덕목이다. ‘온전하다’는 ‘본바탕 그대로 고스란하다’는 뜻과 ‘잘못된 것이 없이 바르거나 옳다’는 뜻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국토 종주에서 다친 곳 하나 없이 온전한 몸으로 라이딩을 마쳤다.’처럼 올곧은 마음 자세로 주어진 일을 뿌듯하게 마친 모습을 상상하게 만든다. 반면에 ‘완전하다’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조건을 충족시켜서 부족한 것이 없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고민하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다.’라든가 ‘오늘 나에게 맡겨진 책임과 임무를 완전하게 수행했다.’와 같이 쓸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완전은 더 이상 더할 것이 없이 충족된 최상의 상태를 지칭하지만 온전함은 한 존재의 정체성이 지향하는 바람직한 모습을 갖춘 상태를 지칭한다. 완전하지 못하다는 이야기는 아직 더 채워야 할 것이 남아 있다는 뜻이고, 온전하지 못하다는 이야기는 뭔가가 부실해서 한 존재의 본래 모습을 잃어버렸다는 뜻이다.
‘온전’과 ‘완전’은 그런 성격을 갖춘 사람에 대입하면 그 의미가 더욱 확연하게 비교가 된다. ‘온전한 사람’을 떠올리면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 인간적으로 존경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 자세를 낮추고 겸손하게 뭔가를 끊임없이 배우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연상된다. 반면에 ‘완전한 사람’은 완전무결하거나 너무나 완벽한 조건을 다 갖추고 있어서 전혀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완전한 사람이 되기에는 불가능하지만 온전한 사람이 되기는 노력 여하에 따라 인식의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가능한 일이다. ‘완전함’을 추구하는 여정은 ‘목표’를 달성하는 피곤하고 지루한 반복이지만 ‘온전함’을 추구하는 여정은 숭고한 ‘목적’을 향하는 자기 발견과 자기 재창조의 과정이다. 자전거 국토종주 과정 완전함을 추구한 ‘결과’가 아니라 온전한 나로 거듭나기 위한 변신의 ‘과정’이다. 끝까지 ‘종주(縱走)’하고 ‘완주(完走)’하는 것도 목표지만 길 위에서 내가 온전(穩全)히 주인이 되는 ‘온주(穩走)’를 해서 더욱 행복하고 경이로운 기쁨을 맛보았다. 완주나 종주나 결과를 중심으로 고속으로 달리는 속도와 효율을 중시한다. 하지만 온주는 자전거와 나, 산과 강, 구름과 하늘이 모두 혼연일체가 되어 함께 동반하는 행복한 라이딩이다. 종주나 완주가 산을 정복 대상으로 보고 얼마나 높이 빨리 올라가느냐를 중시하는 등정주의(登頂主義) 패러다임과 일맥상통한다면 온주는 산과 대화를 나누며 혼연일체가 되어 입산을 강조하는 등로주의(登路主義) 패러다임과 맞닿아 있다.
길 위의 바람이 낙엽을 한 나절 내내 뒤집어 읽는다
(아라서해갑문-아라한강갑문-여의도-뚝섬 전망 콤플렉스-능내역)
“어느 날 아침 우리는 떠난다. 머리는 뜨겁고 가슴은 원한과 쓰라린 욕망으로 가득 차, 그리고 우리는 간다, 물결을 따라 흘러 유한한 바다 위에 끝없는 마음을 흔들며.” 보들레르의 여행이라는 시의 일부다. 나 역시 10월 어느 멋진 날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국토 종주를 떠났다. 뜨거운 머리 대신에 가벼운 머리로, 원한과 쓰라린 욕망 대신에 질문과 호기심을 품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자전거로 가는 여행이다. 작은 하천과 수많은 물줄기를 만나겠지만 부산으로 가까이 갈수록 낙동강 물결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만나는 바다가 나의 원한과 욕망을 받아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서 대장정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코로나 팬데믹 장기화로 인해 우리가 여행을 떠나지 않으니 여행이 우리를 떠났다. 여행이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기 전에 두 발과 두 바퀴가 합작해서 떠나는 자전거 국토종주를 시작했다. 사실 국토 종주에 대한 부담감을 조금이라고 완화하기 위해 지난 9.18일 아라배길 서해 갑문 인증센터에서 능내역까지의 구간을 미리 타놨었다. 특별히 나의 자전거 국토종주를 우리 집 귀염둥이 반려견, 씸바가 나와서 축하해주었다. 모든 출발은 새 출발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쉼보르스카가 ‘두 번은 없다’는 시를 쓴 것처럼 동일한 두 번의 출발도 없다. 어제 출발한 곳에서 오늘 출발해도 어제와 같은 출발이 아니다. 어제와 다른 마음을 품고 다른 생각을 하면서 다르게 출발한다. 이번 자전거길은 이현승 시인의 『대답이고 부탁인 말』이라는 시집과 함께 간다. 자전거 타는 라이더가 자전거가 지나가면서 만나는 숱한 사물이나 현상, 강과 산, 바람과 햇빛이 모두 시적 탐구 대상이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지금 순간을 살아가는 생명체를 시인의 마음으로 만나볼 생각이다.
추위 속에서 달궈진 가을의 열기가 녹음으로 여름을 겪어낸 나뭇잎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자기 색깔을 지니기도 전에 무심한 바람이 낙엽을 흔들어 떨어뜨린다. 가을 낙엽이 그 바람에 떨어져 땅바닥에 누워 불안한 자세로 다음 목적지를 기다리고 있다. 땅바닥에 반쯤 몸을 기댄 낙엽의 운명은 바람만이 알고 있다. 바람이 데려다주는 다음 목적지가 어디일지 궁금하다. 가급적 멀리 가고 싶은 낙엽이 있을 테고 가까운 곳에서 정주하고 싶은 낙엽도 있겠지만, 자신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는 숙명을 낙엽은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다. “이미 읽은 전단지를 한 나절 내내 뒤집어 읽는/공터의 바람처럼” 이미 지나간 길을 하루 종일 이리저리 생각해보는 자전거의 바퀴가 두 발에게 그 의미를 물어본다. 어디까지 가려고 이렇게 서두르는가. 무엇을 위해 이렇게 힘든 여정을 떠나는가. 이런 질문에 아랑곳하지 않고 두 발은 두 바퀴를 돌리기 위해 여전히 힘을 쏟는다. 머릿속에서 증류된 상념이 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겪은 사투의 흔적이 땀과 눈물에 걸러져 각인된 체험적 각성이 마음을 움직이고 머리를 뒤흔든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모든 것을 기록한다. 쓴다는 것은 곧 생각하는 것이며, 그곳은 생활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삶의 의미를 잡는 일이기 때문이다”(11쪽). 린드버그의 『바다의 선물』에 나오는 말이다. 자전거 타면서 스쳐 지나가는 생각, 오랫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는 고뇌의 산물, 심장을 파고드는 야멸찬 느낌들이 뒤범벅되어 삶의 의미를 만들어간다. 그것이 지금 여기서 무슨 의미인지를 포착하려는 안간힘으로 몸이 겪은 느낌이 실종되기 전에 잡아두려고 한다. 사실 생각한 것을 쓴다기보다 쓰면서 생각나는 것들을 내 몸을 떠나가기 전에 잡아놓고 그 의미를 끊임없이 번역해본다.
모든 기록은 기억을 번역하는 과정이다
(능내역-양평 군립 미술관-이포보-여주보-강천보-비내섬-충주댐-충주 탄금대)
국토종주에는 10대 업힐이 있다고 하는데 그중에 처음 만나는 오르막이 바로 암사업힐, 아이유 고개다. 다 넘었다고 생각하면 또 다른 고개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나타나지만 라이더에게는 포기를 권유하며 끌바를 요구하는 듯한 표정이다. 약 800m 정도의 경사도 5%가 되는 언덕이다. 다 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마지막 세 번째 고개가 다시 시련을 선물로 가져다준다. 언덕을 넘으며 느낀 깨달음의 흔적은 정상에 오르는 순간 메모를 한다. 기억의 휘발성을 막기 위해서다. “글을 쓰는 것은 시간이 우리 속에 새겨 놓은 무늬를 글로 번역하는 과정이다. 장르에 관계없이 글 쓰는 모든 행위는 망각에 대한 저항이다”(10쪽). 김기석의 『일상 순례자』 중에 나오는 말이다. 가만히 거기 있음을 침묵으로 번역하지 않고 자기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보이지 않는 안간힘으로 번역한다. 모든 번역은 오역의 가능성을 품고 있고 심지어 반역이 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귀담아들어보려고 한다. 자전거 길 곳곳에서 라이더들에 잠시나마 안도의 한 숨을 쉬며 다음 목적지를 생각하는 여유를 선물하는 곳이 바로 자전거길 인증센터다. 능내역 인증센터까지 자전거를 이전에 탄 끝 지점에서 남은 국토종주 구간을 10월 13일 능내역에서 다시 출발했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출발을 반복해왔는가. 매일 아침 학교로 출발하는 출근을 반복해왔고, 어제와 다른 도전을 위해 또 다른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 모든 출발은 이전에 시작했던 출발을 지우고 또 다른 출발의 기억을 심어놓는다. 같은 위치에서 출발하지만 늘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다. 무슨 일을 당해도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리라.
능내역을 지나 다음 인증센터인 양평군립미술관 가는 길에 북한강 철교를 만난다. '호텔 델루나'에 소개되며 더욱 인기를 얻게 된 북한강 철교는 그냥 지나가기에는 아까울 정도의 풍광을 자랑한다. 다리 사이로 “오늘의 바람은 가고 내일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듯 다리를 건너는 사람의 다리를 붙잡고 하늘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가라고 유혹한다. 북한강 철교는 아래로 흐르는 물을 굽어보고 위로 펼쳐지는 하늘을 이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포근한 바람을 선물로 건네준다. 그 다리 위에 자전거를 타고 잠시 멈춰서는 순간 하늘도 강물도 나를 기다렸다는 듯 잠시 멈춰 서서 나를 감싸 안고 잠시라도 쉬어가라고 말한다. 우리들의 출발을 환영하는 듯 하늘에서는 구름이 열병식을 거행하고 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앞을 다투어 구름이 하늘의 호위를 받으며 보무도 당당하게 행진을 한다. “파란 하늘 바라보며 커다란 숨을 쉬니 드높은 하늘처럼 내 마음 편해지네”로 노래한 가수 아이유의 노래가 생각나는 가을 하늘이다. 앞을 보고 라이딩을 해야 하지만 자꾸 고개 들어 하늘을 쳐다본다. 앞만 보고 달리지 말고 한 폭의 거대한 하늘그림에서 마음을 주라는 속삭임이 온천지에서 들린다. 울트라 마린과 인디고 색의 경합 끝에 중간 어디서엔가 자기만의 색깔을 정한 하늘을 수채화처럼 그려 놓은 그림도 감상하고 가라고 따스한 햇볕 전령사가 전해준다. 하늘 그림 속에는 뭉개 구름이 고단한 열병식을 마치고 끼리끼리 모여 앉아 살아온 이야기와 살아갈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하늘이 친구가 되어 구름의 이야기를 엿듣는다.
가을은 여름이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쉬었다가 건너가는 계절이다. 여름에 몰아치는 폭풍우와 겨울에 살을 에는 듯한 삭풍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가을바람은 한 존재의 지친 영혼을 어루만져준다. 갈 길을 잃은 가을바람이 여기저기를 헤매다가 포근하게 감싸주면서도 느긋한 여유를 찾을 수 있도록 살포시 다가와 귓전을 간지럽힌다. 내가 자전거 길 위를 달리는 게 아니라 하늘과 구름, 햇빛과 바람이 강줄기를 따라 나를 데리고 우주여행을 떠나는 기분이다. 땅 위를 달리는 자전거가 아니라 하늘 위에 깔아놓은 구름 길 위를 날아가는 기분이다. 나 혼자 힘으로 달리는 줄 알았는데 바람이 밀어주고 햇빛이 당겨주고 하늘이 엄호해주며 구름이 반기고 있었다. 구름을 타고 달리는 환상을 상상하다 갑자기 국토종주 두 번째 난관을 만난다. 이포보 직전에 만나는 경사도 10%를 자랑하는 약 800m 거리로 이어지는 후미개 고개다. 중간 지점에서 경사가 약간 완만해지는 듯 마음을 놓으면 큰코다치는 국토종주 길의 두 번째 난관이다. 가장 낮은 기어로 바꿔 꾸역꾸역 힘을 빼고 쉼 없이 페달을 밟는 방법을 택하지 않으면 끌바의 끌림에 유혹당하는 업힐이다. 이포보를 지나 여주보 인증센터까지 가는 길은 넓은 활주로를 달리는 기분이다. 더 높이 멀리 날아가기 위해서는 활주로 역시 더 넓고 길어야 하듯, 국토종주를 넘어 더 멀리 더 오래 자전거를 타기 위해서는 심호흡을 가다듬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심리적 폐활량을 늘려야 한다. 강천보를 지나 비내섬으로 가는 국토 종주에서 만나는 세 번째 업힐은 시작부터 거대 오르막이 보여서 겁을 먹게 되는 창남이 고개다. 창남이 고개는 약 900m 거리에 경사도 6% 정도 되는 언덕이다.
오르막의 고난 강도가 높을수록 내리막의 희열 강도를 배가시킨다
(충주 탄금대-수안보 온천-이화령 휴게소-문경 불정역-상주 상풍교-안동댐)
충주 탄금대에서 수안보 온천을 가는 도중에 수주팔봉을 만난다. 수직 절벽으로 솟은 바위 사이를 연결하는 출렁다리가 하늘을 가로 질로 구름 위에 떠 있는 듯하다. 수주팔봉은 문주리 팔봉마을에서 달천 건너 동쪽의 산을 바라볼 때, 정상에서 강기슭까지 달천 위에 여덟 개의 봉우리가 떠오른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멀리서 바라보면 한 쌍의 바위가 절벽을 사이에 두고 애타가 서로를 그리워하는 절창이 들리는듯하고, 각양각색의 모양을 띠고 있는 송곳 바위나 칼바위가 마치 창검처럼 솟아 올라 있지만 허공을 향한 갈구일 뿐 서로에게는 전달되지 않는 안타까움이 엿보인다. 수안보 온천을 거쳐 이화령 휴게소에 이르는 길은 국토종주 구간 중에서 라이더들에게 최대의 장애물, 소조령과 이화령이 기다리고 있는 구간이다. 평균 경사도 5%인 소조령은 경사도가 급하지는 않지만 2Km 넘게 꾸준히 오르막이 이어진다. 이화령을 넘기 전에 언 드는 연습용 업힐이 소조령이다.
소조령을 넘어 평균 경사도 6%에 해당하는 이화령을 본격적으로 넘기 전에는 안심이라도 시켜주려는지 평탄하고 순조로운 자전거길이 펼쳐지다가 이화령 정상까지 5.2Km라는 사인이 도로 바닥에 붙어서 라이더의 마음을 굳게 다잡게 만들었다. 여기서부터 한 번도 쉬지 않고 정상에 오르는 게 작은 다짐이다. 오르막을 오르면서 최대한 힘을 비축하기 위해서 좌측으로 굽어진 언덕에서는 최대한 왼쪽으로 붙어서 타고 우측으로 굽어진 언덕에서는 최대한 오른쪽으로 붙어서 타면 경사도를 최대한 낮추면서 약간은 쉽게 자전거를 탈 수 있다. 500m마다 나타는 정상까지의 잔여거리는 사실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힘을 쏟아부어서 힘겹게 올라왔는데 아직도 500m 지나왔다는 도로 표지판은 함흥차사(咸興差使)이기 때문이다.
오르막에서 겪은 고난의 강도가 높을수록 내리막에서 느끼는 희열의 강도도 높다. 먼산을 바라보지 않고 우선 눈앞의 앞산을 넘듯이 이화령 정상을 바라보지 않고 힘겹게 구르는 자전거 앞바퀴만 보고 쉬면서 여유롭게 올라갔다. 적당한 힘으로 페달을 번갈아 밟는 허벅지를 믿으며 조금씩 기어오르다 보면 정상은 나에게 다가올 것이다. 누군가 “다 왔다”라고 힘을 내라는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리는 듯했다. 좀 긴 업힐이었지만 경사도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하지는 않아서 쉬지 않고 마침내 이화령 정상에 도착했다. 오르락(樂)도 즐겁지만 내리락(樂)은 더없이 희열의 강도가 끝을 모르고 온몸을 휘감는다. 힘들여 올라온 길이지만 힘을 빼고 내려갈 수는 없다. 가속도가 붙으면서 핸들을 힘 있게 잡고 고도의 집중을 하지 않으면 급경사로 이어지는 내리막에서는 위험천만한 사고가 순식간에 일어날 수 있다. 6Km 정도 이어지는 내리막 끝 무렵에서 좀 이른 점심을 먹고 문경 불정역 인증센터를 거쳐 상주 상풍교 인증센터에 도착했다. 국토 종주를 포함 국토완주 그랜드 슬램을 꿈꾸고 있다. 때문에 국토종주 코스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국토완주 그랜드 슬램 코스에는 포함되는 안동댐까지 차를 불러 자전거를 싣고 안동댐에 4시가 좀 넘어서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부지런히 가야 8시 전에 도착할 수 있다. 안동댐 인증센터에서 다시 상주 상품교 인증센터까지 부지런히 페달을 밟았지만 우리가 달리는 속도보다 빠르게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고단한 삶을 겪어야 고단수를 지닌 고수가 탄생한다
안동댐에서 상주 상풍교 인증센터까지 가는 길도 만만치 않다. 오늘은 그야말로 업힐 구간을 타는 최난이도 라이디이었다. 소조령과 이화령을 넘고 그에 버금가는 배고개와 단호재를 넘었으니 말이다. 배고개는 경사도 7%, 약 500m 업힐 구간이고, 단호재 역시 배고개를 능가할 정도의 경사도에 좀 긴 업힐 구간이었다. 내가 고개를 넘어서려는 안간힘이 아니라 고개가 나에게 다가왔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그리움으로 최하단 기어로 변속해서 쉼 없이 언덕에 올랐다. 단호재를 넘어 내리막을 타면서 펌핑된 허벅지에게 조용히 말을 걸어보았다. 오늘 고개를 넘으면서 난생처음 가장 많은 근육운동을 한 허벅지는 그래도 말없이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는 듯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앞쪽에는 유독 빛나는 별들이 있었고 그 옆쪽으로 반달이 어둠 속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달밤에 달리는 자전거는 쉼 없이 체인으로 바퀴를 돌리며 적막 속으로 달리고 있었고 반달은 왼쪽으로 약간 누운 채 다정하게 우리 곁을 지켜보고 있었다. 찬바람은 낮동안 달궈진 열기를 식히며 몸 구석구석으로 파고들었다. 바람막이를 꺼내서 입고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뚫고 얼마나 갔을까. 자전거 뒤쪽에 달갑지 않은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자전거 짐받이가 가방 무게와 반복되는 요동을 견디지 못하고 부러져 뒷바퀴에 가방 닿아서 내는 소리였다. 다행히 두 개의 지지대 중에 하나만 부러져 어느 정도 더 가도 될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나머지 하나의 지지대로 가방 무게를 견뎌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할 수 없이 짐가방을 오른손에 쥐고 힘겹게 어둠을 뚫고 오늘의 목적지 상주 상풍교로 향했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는 들고 가는 짐의 차이라는 사실을 2012년도 사하라 사막 마라톤 도전 과정에서 절실하게 느꼈다. 프로는 정말 필요한 최소한 필수품만 챙겨 달리는 부담을 줄이지만 아마추어에게는 모든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무게가 프로들의 두배나 넘는다. 내가 짊어지고 가는 무게만큼 몸에 쌓이는 피로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이번 국토종주 4박 5일 일정에 필요한 짐도 줄인다고 줄였지만 그래도 자전거 짐받이가 견딜 만큼 가볍지는 않았다. 오른손으로 무거운 가방을 들고 얼마 남지 않은 상주 상풍교 인증센터까지 가는 길도 쉽지 않았다. 뒷바퀴 기어 변속을 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꾸역꾸역 밤으로 얼룩진 자전거길을 헤치고 간신히 큰 길가로 나와서 구조요청을 했다. 오늘 넘어온 고개에 쏟아부은 힘겨움이 밤이 깊어가면서 온몸으로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신체의 ‘신음’이 만들어낸 것만이 ‘믿음’이다
“신체에 현실적인 짐을 지우고, 근육에 신음소리(어떤 때는 비명을) 지르게 함으로써. 이해도(理解度)의 눈금을 구체적으로 조금씩 높여가게 하여, 가까스로 납득하게 되는 타입인 것이다”(45쪽).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나오는 명문이다. 신체가 짊어질 수 있는 짐이 바로 현실을 살아가는 마지노선이다. 신체가 현실적인 짐을 짊어질 수 없다면 나에겐 미래도 꿈도 없고 비전은 슬픈 비전(悲典) 일뿐이다. 신체는 이전보다 힘든 상황에서만 힘을 쓴다. 기존의 힘으로도 충분히 극복이 가능하다고 신체가 판단하면 신체는 힘을 쓰지 않는다. 힘을 쓸 필요가 없기 때문에 생각도 거기서 멈춘다. 신체가 힘든 상황에 놓였을 때 기존의 힘만으로는 지금의 상황을 극복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 때만 신체는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힘을 쓰기 시작한다. 힘든 상황에 직면할 때만 신체는 힘을 들여서 난국을 극복한다. 신체의 신음이 마음을 움직이고 더 힘든 위기 상황도 극복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만든다. 신음 없이 새로운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신체로 확인한 믿음만이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고 이전과 다른 물음을 제기하며 웃음 짓게 만든다. 몸이 관여해서 깨닫는 힘겨운 싸움이 나를 또 다른 세계로 발돋움하게 만드는 디딤돌이자 원동력이다. 운동의 ‘아픔’과 ‘고통’ 사이, 그 사이에서 생각의 차이가 자란다. 신음(身音)만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몸이 내는 소리, 신음(身音)은 믿음의 소리, 신음(信音)이다.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하기에 달려 있다Pain is invitable, suffering is optional”(9쪽).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나오는 말이다. 아픔(pain)은 태생적이라서 불가피합니다. 태어날 때 산모가 겪는 아픔은 피할 수 없다. 정면으로 맞서는 게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산통이 주는 고통(suffering)은 내가 해석하고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고통은 아픔에 대해 사후에 내가 느끼는 주관적인 경험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볼 때 내가 겪는 고통은 고통도 아니라고 생각할 때 고통은 상대적인 느낌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25년 전에 내가 처음 조선일보 춘천 마라톤 훌코스에 출전했을 때 느꼈던 신체가 겪었던 아픔이나 통증은 피할 수 없는 신체 경험이었다. 마라톤이라는 힘든 운동을 선택해서 춘천까지 달려간 내 몸이 피할 수 없는 아픔이었다. 이 아픔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내 몸을 그런 경험을 하지 않는 상황으로 데려가는 길 뿐이다. 아픔이 없는 곳에는 아름다움도 없다. 아름다움은 아픔을 겪어내며 안간힘을 쓰면서 극복해내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람다움이기 때문이다. 아픔은 내 신체가 겪는 객관적 데이터이고, 고통은 아픔에 대한 주관적 데이터다. 사람들이 고통에 더욱 시달리며 몸부림치는 이유는 내 몸이 직접 경험하는 객관적인 통증이 아니라 내 몸으로 느끼는 주관적 고통을 쉽게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통증은 의료기술을 바탕으로 약을 통한 치료 대상이지만 주관적인 고통은 고통의 근원을 어루만져주면서 그것으로 지금 겪고는 그 사람의 진정한 고뇌가 무엇인지를 공감하고 감정 이입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도 고통은 치유되지 않는다. 다만 고통의 곁에서 고통과 함께 할 뿐이다. 우리가 진정한 치유자라면 그 사람의 아픔이나 통증보다 고통을 어루만져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