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건강을 위해 메타버스만
타지 말고 자전거도 타라

동해안 자전거길 종주를 마치고

유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한다,

너의 건강을 위해서 메타버스만 타지 말고 자전거도 타라고

동해안 자전거길 종주를 마치고(2021.11.9.일~11.12일)


국토완주 그랜드 슬램에서 국토종주보다 더 어렵다는 동해안 자전거길 강원 코스(242Km)와 경북 코스(76Km)를 2박 3일 동안 산과 바다가 만나 만들어주는 절경을 감상하며 즐겁게 종주했다. 새벽 라이딩을 시작하기 위해 전날 속초 근처에서 숙박을 했다. 11.10일 첫날은 통일전망대 인증센터에서 북천 철교와 봉포 해변, 영금정과 동호해변을 거쳐 지경원과 경포해변 인증센터까지 짙푸른 동해 바다와 맑은 하늘, 그리고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늦가을의 산이 연주하는 3중주 음악을 들으며 행복한 라이딩을 즐겼다. 구름을 벗 삼아 승천하는 하늘이 바다로 내려와 드넓은 가슴으로 파도로 화답하는 바다의 꿈을 품는다. 파도를 통해 승천하려는 바다와 바다를 발판 삼아 하강하려는 하늘의 의지가 맞닿는 사이에서 수평선은 오늘도 불안한 조수간만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듯하다.


연결과 관계가 존재의 본질을 결정한다


자전거길에서 만나는 사건과 사고는 언제나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뜻밖에 마주치는 우발적 사건과 사고와 닮았다. 북천 철교를 지나 봉포 해변으로 가는 와중에 국토 종주할 때 말썽을 부리던 뒷바퀴 기어 변속 상태가 말썽을 부리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송지호 주변에서 체인이 끊어지는 뜻밖의 사고를 당했다. 굉음과 함께 갑자기 멈춰 선 자전거 페달은 밟아도 체인을 통해 힘을 뒷바퀴 기어로 전달해주지 못한다. 페달을 밟아서 생긴 힘이 체인을 상실한 후에는 아무리 센 힘이라고 할지라도 전달할 대상을 상실하고 나니 무력해진다. 체인이 있을 때는 몰랐던 앞단의 기어와 뒷단의 기어의 연결고리의 힘이 자전거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중요한 원동력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앞바퀴가 방향을 잡고 뒷바퀴가 밀어서 가던 힘을 잃은 자전거는 여전히 부품과 부품으로 연결된 이동 수단이지만 체인이 끊어짐으로 인하여 다양한 부속품으로 조립된 자전거는 독립적 개체가 지닌 고유한 기능을 순식간에 상실하고 말았다.


자전거 체인 끊어짐.jpg


독립적 존재가 호혜적 관계로 연결되지 않고 끊어져 있다면 존재는 개체로 전락하고 고유한 기능을 상실한다. 체인 덕분에 앞과 뒤로 연결되어 페달을 밟는 힘이 전달되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관계가 존재보다 앞선다는 말이 이럴 때 안성맞춤임을 경험을 통해 새삼 느낀다. 체인이 끊어지니 자전거로 달리던 길도 끊어진다.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사고 덕분에 가까운 도시 인근 자전거 수리점에서 다시 체인을 이었더니 다시 자전거의 본래 모습대로 돌아왔다. 다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는데 뒷바퀴 기어 변속을 하지 않았음에도 가장 낮은 기어와 그다음 기어가 마음대로 변속이 되면서 불편한 라이딩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결단을 내리고 같이 갔던 친구의 자전거를 내가 타고 내 자전거는 차에 싣고 친구가 운전하면서 내 뒤를 따르기로 했다. 불편하고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고 언제나 뒤에서 자린이를 지켜보며 손길을 보내주는 이 친구는 국토종주와 국토 완주 거의 대부분의 구간을 같이 한 배움의 도반이자 인생 여행의 동반자나 다름없다. 앞으로 같이 꿈꾸며 도전하면서 남은 인생을 즐겁고 재미있는 추억을 만들어나갈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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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바위가 배경이 되어준 덕분에 전경으로 빛나다


경포해변 인증센터 근처에서 숙소를 잡고 첫날의 피로를 푼 뒤 강릉 초당 순두부로 하루에 필요한 에너지를 보충한 다음 11.11일 이튿날 정동진을 거쳐 망상해변 그리고 추암 촛대바위와 한재공원을 거쳐 임원까지 가는 난코스를 사력을 다해 페달을 밟았다. 경포해변에서 정동진으로 가는 코스에 등명낙가사라는 절이 있다. 7% 경사로를 타고 낙타 등을 타듯 다 끝났다고 생각하면 또 다른 언덕이 조용히 엄습한다. 경사도가 급하지 않지만 1.2Km 정도 이어지니까 힘을 비축했다고 분배하지 않으면 두 번째 고개를 오를 때 낭패당할 수 있다. 망상해변을 지나며 머릿속에 서서 숙성되지 않고 성숙하려 발버둥 치던 모든 망상을 해변에 버리려 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몇몇 생각의 파편들은 단념하지 않고 바람에 떠도는 상념과 함께 자전거에 싣고 라이딩을 계속했다.



그러다 만난 추암(楸岩)의 촛대바위는 가던 길을 멈추기에 충분했다. 추암 바닷가에는 산과 바위들을 통칭하는 능파대(凌波臺)가 있다. 능파대를 삼척에서는 바다의 절경이라고 부를 정도로 경치가 아름다워서 소금강이라 했으며, 동해 팔경(東海八景) 중 하나로 지정되어 있다. 능파대 앞에는 높이 5~6m쯤 되는 바위 하나가 촛대처럼 우뚝 솟아 있어서 촛대바위라고 한다.


추암 촛대 바위 지나가다

‘모래’가 ‘내일’보다 오늘이 좋다고

저 멀리 바위가 눈웃음 지며

나를 멈추게 한 곳.


파도가 몰고 온 꿈 이야기를 들어보자며

하늘과 바다 사이에서 구름이 속삭이며

나에게 손짓하던 곳.


짙푸른 바다가 지나가던 바람을 만나

지난날의 하소연을 흘려보냈지만

넘실대는 거품만 쏟아놓고 허공으로 사라진 곳


찬 기운이 태양볕에 달궈지며

잠시 온몸을 감싸더니

짓궂은 바람이 느닷없이 달려와

냉기로 심술을 부린다.


그곳에서 가던 길을 멈추고

하늘과 바다와 바위가 배경이 된 덕분에

잠시 전경으로 드러난 기쁨을 맛본다.


힘겹게 땀 흘리며 달려온 노고는

온몸으로 파고들어 오늘의 순간을 기억한다.

지친 몸을 달래며

구석구석에 추억의 한 페이지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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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암 촛대 바위에서 바다와 바위, 그리고 푸른 꿈으로 채색된 하늘을 배경으로 사진을 몇 장 찍은 다음 마음에 점을 찍는 점심을 물곰탕과 생선구이로 배불리 먹고 오후의 라이딩을 준비했다. 한재공원 인증 부스는 높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북쪽으로 삼척항이 있고 남쪽으로 맹방해변을 품고 있다. 힘들게 올라온 라이더를 드넓은 바다가 두 팔을 벌려 포근하게 안아준다. 힘들게 올라온 사람에게만 인증센터 도장을 찍은 기쁨을 준다는 의미가 숨어 있나. 한재(漢峙)는 해발고도 102.6m로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했던 산줄기 중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고개로, ‘큰 고개’라는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4차선 동해대로가 개통되면서 직선 주로 인 한치 터널이 뚫려 굽이 굽이 오르는 한재는 이제 한산(閑散)한 고개(岾)가 되고 말았다. 한재 정상의 소공원 내에 위치한 팔각정에서 삼척항에 이르는 해안과 명사십리 맹방해변을 감상하면서 이제 동해안 강원 코스의 최난이도 업힐을 위해 마음의 준비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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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과 절망 끝에 희망이 없을 수도 있다


동해안 자전거길에서 제일 난이도가 높은 곳이라고 생각되는 한재 공원에서 임원 인증센터까지는 거리도 33Km나 되는 지루한 코스지만 만만치 않은 업힐이 4개나 나온다. 첫 번째 고개는 사래재다. 맹방 해수욕장 곁을 따라 바다를 감상하며 라이딩하다 만나는 고개가 공양왕이 살해(殺害) 당해서 붙여진 사래재다. 1.19km의 거리에 평균 경사도 5.0%를 자랑하는 만만치 않은 업힐이다. 사래재를 넘으며 약간의 사래가 걸릴 듯하다가 더 높고 긴 고개가 라이더의 맨탈을 다시 한번 검증하는 고개가 나타난다. 평균 경사도는 6%, 길이는 1.2 km에 달하지만 순간 경사도가 12% 정도 찍히는 곳도 있다고 하는 용화재다. 용화재를 넘어서면 장호항과 길남항으로 이어지는 용화 해변의 절경이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듯 탁 트이는 전경과 함께 멋진 풍광을 선물로 준다.


동해안 자전거길 강원도 코스 중에서 삼척에 언덕이 집중되어 있다. 그중에 해신당공원 고개는 라이더의 멘탈을 탈탈 털어 극한의 한계 상황으로 몰고 가기로 유명한 업힐이다. 2Km가 넘도록 끝없이 이어지는 오르막이지만 계속 오르막만 이어지다 언덕이 끝나는 게 아니라 다 올라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고개가 나타나 급한 경사도를 힘든 라이더들에게 시련의 선물로 내준다. 내리막이라고 안심했다가 큰코다치는 언덕이 바로 해신당 공원 고개다. 다시 오르막이 조용히 시작된다. 좌절과 절망의 다른 이름은 용기와 희망이라고 한다. 사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음을 이번 고개를 넘으면서 깨달았다. 좌절감을 극복하고 절망을 딛고 일어서려는 순간 또 다른 절벽이 느닷없이 다가올 때 희망은 졸이던 가슴을 펴려는 순간 다시 힘없이 절망감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산산조각이 난 절망을 희망으로 품는 수밖에.



해신당 공원을 내려오면 신남항이 땀 흘린 덕분에 온화한 미소로 파도에 실은 꿈과 함께 맞이해준다. 숨 돌리며 잠시 쉬면서 신남항을 지나 임원항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임원재가 가파른 위용을 자랑하며 라이더의 도전을 기다리고 있다. 임원재는 총길이가 2Km 정도 달하는데, 오르막을 힘겹게 올라가 내리막을 신나게 내려갔지만 순간적으로 또 다른 오르막이 나타나기를 무려 4번 정도 반복한다. 정상이라고 생각해서 안심하는 순간 또 다른 오르막이 웃음 지으며 숨 쉴 겨를 없는 라이더에게 절망을 들이민다. 더욱 좌절감을 맛보면서 갑자기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는 이유는 동해안 자전거길임에도 불구하고 바다를 등지고 내륙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해신당 공원에서 정신 차리고 안간힘을 쓰면서 정상에 올라 한 숨을 쉬었지만 다시 더 경사가 가파른 임원재에게 얻어맞으면 웬만한 라이더들의 정신력과 체력은 바닥이 난다.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끝나야 끝난 것임을 임원재에서 처절하게 경험한다. 임원 되기가 이렇게 어려운 줄을 임원재를 넘으며 뼈저리게 절감했다. 이제 임원인증센터에 도착했다고 안심하는 순간 인증센터로 가는 길목에 또 다른 업힐이 숨 죽이며 기다리고 있다. 마지막 고개를 힘겹게 넘어서야 임원인증센터를 언덕 위에서 만날 수 있다. 임원 인증센터는 임원항을 조금 지나서 언덕 끝자락에 볼품없이 외롭게 라이더의 인증 확인을 기다리고 있다. 힘들게 타고 올라온 라이더를 위해 위로나 노고로 지친 몸을 위해 향연이라도 펼쳐주리라고는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정상에 서 있는 인증센터는 너무나 태연하고 말없이 언덕 바람을 등지고 외롭게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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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뚫고 나온 태양을 하늘이 뜨겁게 안아준다


울진 은어 다리 근처에서 하루 동안 고생한 내 몸에게 고단백 영양식품과 와인을 선물로 주면서 하루를 마감했다. 11.12일 셋째 날은 76Km에 달하는 동해안 자전거길 경북 코스를 울진 은어 다리 인증센터에서 출발했다. 은어 다리 양쪽에서 서로를 그리워하면서 만날 날을 고대하는 두 마리의 은어를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고 망양휴게소와 월송정, 그리고 고래불 해변을 거쳐 오늘의 마지막 종착역이자 동해안 경북 코스의 마지막 인증센터인 해맞이 공원에 도착하는 힘겨운 여정을 시작했다. 해뜨기 직전 아침 바람은 강하지 않지만 바람막이 점퍼를 뚫고 들어와 초겨울의 한기를 느끼게 해 주고, 바람을 뚫고 나가는 자전거 핸들 위 손에 낀 장갑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손이 시릴 정도로 한기(寒氣)가 라이더의 앞길을 가로막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새벽의 적막을 깨고 온기품은 태양이 온 세상을 뜨겁게 달구려는 기세로 차가운 바다를 뚫고 용솟음치듯 서서히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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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어찌 그리도 서둘러 바다를 건너오는가! 너희는 그의 사랑의 갈증과 뜨거운 입김을 느끼지 못하는가? 태양은 바닷물을 빨아들여 그 심연을 자신의 높이까지 들이마시려 한다. 이에 천 개나 되는 젖가슴을 갖고 바다가 욕망으로 부풀어 오르는구나. 바다는 태양이 목말라 자신에게 입맞춤하고 자신을 마셔버리기를 소망한다”(210쪽). 아침 일찍 해변도로를 달리면서 갑자기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구절이 연상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밤새 잉태시킨 신생아가 바다를 뚫고 하늘로 치솟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은 구름 사이로 비집고 나와 뜨겁게 포옹해준다.


밤잠을 설치며 붉은 꿈을 잉태하던 태양이

밤새 추위에 떨며 기다리던 바다의 호위를 받으며

빼꼼히 얼굴을 드러낸다.


허공을 나르던 공기도 열기에 덴 듯

잠시 숨을 고르더니 솟아오르는 햇살 주위를 맴돈다.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파도 소리에 베인

바람의 비명처럼 새벽의 적막을 깨운다.


때마침 불어오던 바람도 맞장구를 치며

파도가 실어 나르는 꿈의 향연에 동참한다.


바다에서 떨어지려는 하늘과

하늘에서 멀어지려는 바다 사이에서

수평선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하늘은 바다를, 바다는 하늘을

서로 당기며 놓지도 않고,

놓을 수 없는 사이에서 내려다보던

구름도 시시각각 변심한 애인처럼

갈수록 심해지는 갈증을 해소할 길이 없어진다.


파도가 들려주는 아침 서곡과

태양이 보내주는 응원의 함성,

구름에 걸터앉은 산의 후원에 힘입어

바람이 기다리는 오늘의 목적지,

영덕 해맞이 공원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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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은 잡입 없이 급습하듯 언덕도 서서히 다가오지 않고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다. 그것도 힘들게 올라간 오르막을 신나게 내려갔다고 생각하는 순간 절망을 부르는 절벽처럼 불현듯 나타난다. 언덕은 비밀을 주렁주렁 망토처럼 걸치고/오르자마자 쉼 없이 한숨이 이어진다/내리막은 1초도 되지 않아서 오르막으로 다가온다. 이 문장은 이현승의 시집, 『아이스크림과 늑대』에 나오는 ‘창피하다 창피해’라는 다음과 같은 시의 구절을 바꿘 쓴 것이다. “달은 비밀을 주렁주렁 망토처럼 걸치고/보름이 되자마자 이지러진다/새해는 1초도 되지 않아꿔 올해가 됩니다.” 임원 인증센터까지 낙타 등을 연상하듯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해서 간신히 임원이 되는가 싶었는데 고래불 해변에서 해맞이 공원으로 가는 자전거길은 지금까지 넘은 언덕과는 차원이 다르다. 내리막의 즐거움을 만끽할 겨를도 없이 갑자기 눈앞에 등장하는 오르막의 장벽은 차라리 절벽에서 뛰어내려 고통을 일순간에 해소하는 게 낳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절망적이다. 임원이 되고 나서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난제를 던져준다. 그것이 바로 고원(高原)이라는 더 높은 자리가 사람을 시련과 역경으로 실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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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이 없는 삶이 가장 위험한 삶이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 자유정신이 강한 사람이다. 한가한 사람은 자전거를 타기보다 편안한 상태로 힘 안 들이고 주어진 시간을 소일할 거리를 찾는다. 책 읽을거리를 찾아 독서에 몰입하는 사람은 한가한 사람이라기보다 속박된 정신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생각을 꿈꾸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내 몸으로 동력을 얻어 앞으로 나가는 고된 노동이지만 즐거운 노동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자전거를 타는 사람은 불특정 다수의 사람 중에서 정상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보다 예외적인 사람이 많다. 왜냐하면 자전거를 타고 국토종주를 하거나 국토완주를 꿈꾸고 실행하는 일은 그냥 시간과 돈이 있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다. 속박된 일상에서 벗어나 내가 상상하는 대로 몸을 움직여 가보고 싶은 곳으로 내 몸을 이동시키는 운동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결단과 결행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자유정신은 예외이며 속박된 정신은 상례다... 자유정신은 근거를 요구하고 다른 정신들은 신앙을 요구한다”(227-228쪽).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에 나오는 말이다. 나이 들어서 관절에 별다른 무리 없이 근육운동을 하면서도 유산소 운동이 된다는 과학적 근거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에게 더욱 강렬한 동기부여의 원천으로 작용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자전거는 남자들의 정력에 안 좋다거나 상상을 초월하는 위험이 따른다는 근거 없는 믿음을 갖고 있다. 이런 믿음은 세상 사람들이 그렇다고 말해진 구전을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긍정하면 생기는 사실무근의 신념이나 가정이다. 이들에게는 자기 삶이 없고 인생을 살아가지만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세상 사람들이다. 그들이 옮다고 믿는 신념이나 가치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믿으며 후세에게 전해준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통념을 먹으며 살아가는 길이며 무리에 끼어서 큰 무리(無理) 없이 살아가는 인생의 방책임을 몸으로 배워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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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하지 않은 일이 세상에 있을까. 험난한 물살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격랑의 파고를 넘나들며 난파 위기를 모면하며 오늘의 목적지로 힘겹게 사투를 벌이며 오늘을 살아내는 우리들의 모든 삶 역시 위험하기 짝이 없다. 오히려 가장 위험한 삶은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위험한 일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이다. 위험이 없는 삶이 가장 위험한 삶이라는 사실을 언제쯤 깨달을 수 있을까. 자전거를 타는 일도 매 순간 위험천만한 곡예의 연속이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모든 순간이 깨달음의 연금술로 다가오는 배움과 익힘의 과정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기 어려운 시계제로의 불확실한 형국에서 가만히 있는다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거나 없어지지는 않는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나와 자전거는 만날 일이 없어진다. 마치 항구에 정박한 채 위험한 바다라는 핑계로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모든 시작은 위험하다고 니체도 말하지 않았던가. 위험하기 때문에 모험심이 생기고 가장 안전한 보험을 마련할 수 있는 체험이지 않을까.


자전거를 타면 위험하다는 근거 없는 통념이나 세상의 속설을 버리고 자기 신념으로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는 사람이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다. 자유는 자기의 존재 이유라고 하지 않던가. 내가 누구인지는 지금 여기 앉아서 탁상공론으로 해법을 찾을 수 없다. 나였던 그 아이를 찾아 나서는 내면으로의 여행은 역설적이게도 자전거를 타고 여기서 저기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만날 수 있다. 자전거가 이동시켜주는 내 몸은 앞으로 나아갈수록 마음은 안으로 파고들어 내면 여행을 즐긴다. 몸이 수직으로 서서 바쁘게 움직일 때 마음은 수평으로 누워 안식을 취한다. 그때 평화로운 마음이 수평을 유지한 채 마음 안을 이곳저곳 여행을 하며 잠자고 있던 자아를 흔들어 깨우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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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은 편리함을 주는 대신 불편한 불행을 조용히 가져다준다


곳곳에서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트렌드 관련 새로운 뉴스는 언제나 몸을 바쁘게 만들고 머리를 복잡하게 만든다. 온라인, 디지털, 사이버, 언택트, 비트 코인, 메타버스 등 시시각각 세상은 아날로그적 삶의 기반을 벗어나 가상공간으로 옮겨가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한 여름의 폭염을 견뎌내고 논밭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의 아날로그적 정성과 노고가 없이는 디지털 세상에서 메타버스로 농작물을 재배할 수 없다. 가장 아바타가 농부 흉내를 낸들 거기서는 인간의 신체성이 직접 관여되지 않는 사이비 동작이 실제를 모사하기 위한 부단한 움직임만 존재할 뿐이다. 왕삼겹.com이라는 삼겹살 집에서 사이버 공간에서 메타버스로 삼겹살을 굽는 게임을 백날 해봤자 입에는 침만 고이고 흘릴 뿐, 내 신체성이 삼겹살과 소주에 뒤섞이는 감각적 체험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메타버스에서 버스 대신 자전거를 열심히 타는 아바타들의 현란한 몸동작을 책 상에 앉아서 키보드로 입력하고 마우스로 조작한 들, 손가락은 아프고 두통은 심화되며 몸은 찌뿌둥해질 뿐이다. 메타 버스에서 자전거를 아무리 타도 가상의 현실은 현실에서 느끼는 실재감을 피부로 느낄 정도로 신체적이지 않다. 가상은 거짓 상상력이 꿈을 꾸며 몽상과 망상, 허상과 환상이 뒤섞이는 미혹의 세계일 뿐이다. 진짜 삶은 내 발이 땅에 닿고 손이 뭔가를 만지며 몸이 느낄 때 비로소 꿈틀거리며 구현되는 것이다. 건강을 기반으로 다가오는 행복한 삶은 인간의 신체가 직접 개입하는 자전거 길에서 내 몸이 동력원으로 작동하면서 온몸의 세포가 격럴하게 움직여 자전거를 탈 때 폐부를 찌르는 감동과 살갗을 파고드는 감동이 스며든다. 건강을 위해서라도 자전거를 먼저 탄 다음에 메타 버스를 타고 상상 여행을 떠나라. 세상의 흐름을 좇다가 또 다른 트렌드에 쫓기는 악순환의 연결고리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메타버스를 타고 가상의 시공간을 여행하기보다 자전거를 타고 내면으로 향하는 여행을 떠나는 길에 건강과 행복과 행운이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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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기술은 언제나 인간에게 편리함을 주는 대신 불행의 불편함을 맛보게 한다. 내비게이션의 편리함으로 길을 찾아 나서는 여행자의 낯선 설렘과 두려움이 없어졌다. 인터넷이 발달시킨 검색 기술의 편리함으로 불편한 사색의 여유로운 시간이 없어졌다. 가상공간의 현실화를 꿈꾸며 달려오는 메타버스의 편리함이 불편한 현실 공간의 대체 불가능한 아날로그적 신체성과 감수성을 빼앗아 갈 것이다. 어느 쪽은 선택하는 문제는 언제나 인간에게 던져진다. 우선 편리하다는 생각에 불편한 현실을 버릴수록 삶은 불행의 길목에서 발목을 잡히고 말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뭔가를 잃어버리고 나면 잃어버리기 전에 누렸던 소중한 가치를 뒤늦게 깨닫는다. 깨달음이 잃어버린 소중한 가치를 원상 복귀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할 때 우리 사회는 과거와 현재가 주는 전통과 현대의 진통을 슬기롭게 극복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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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산을 넘지 않고 먼산만 바라보다 눈도 멀어진다


고래불 인증센터까지는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중천으로 올라가는 햇빛이 언제나 든든하게 호위를 해주고 끊임없이 다가오는 파도는 포기하지 않고 꿈을 실어 나른다. 적당히 온기를 품은 바람은 바람막이가 되어주기도 하다가 앞으로 진군하는 나의 앞길을 가로막는 방해꾼이 되기도 한다. 고래불 해변 인증센터에서 극도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수소문해서 찾은 커피숍에서 짧지만 진한 휴식과 함께 다시 오전의 원기를 회복하는 휴식을 취했다. 오후 1시가 조금 안 되기 전에 오늘의 마지막 종착역이자 동해안 자전거 길 경북 코스의 끝인 해맞이 공원을 향해 힘찬 질주를 시작했다. 꺼져가던 불씨가 살아나듯 소진된 에너지로 힘없이 구르던 페달도 다시 가열차게 밟으면서 진군에 진군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카카오 맵에 보이는 경사도를 사전에 인식하면서 언제쯤 가파른 업힐이 나타날지 온통 빨간색으로 채색된 구간을 위해 힘을 비축하는 연습을 시작했다. 드디어 작은 언덕이 나오더니 한 숨에 오르기 어려운 긴 업힐 구간이 시작된다. 작은 언덕으로 예행연습을 시킨 다음 소리 소문 없이 점차 높은 언덕을 시험 삼아 눈앞으로 갑자기 가져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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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힘을 다해 다 넘었다고 생각하며 긴장과 걱정을 놓는 순간 짧은 내리막이 찰나의 즐거움을 선사해준다. 하지만 기다림은 길고 기회는 짧듯이, 오르막은 길고 내리막은 언제나 짧다. 사력을 다해 올라왔지만 사력을 능가하는 강도 높은 노력을 요구하는 언덕이 라이더의 멘털을 극한으로 몰아간다. 긴 언덕을 온 힘을 다해 넘어서는 순간 오늘의 종착역 해맞이 공원까지는 갈 길이 멀다. 두세 번의 언덕을 연속해서 오르기 위해서는 비장하고 비범한 전략이 필요하다. 하나의 언덕을 사투를 벌이며 넘어서면 짜릿한 내리막의 희열이 기다릴 것이라는 기대는 금물이다. 언덕을 넘어서는 순간 절벽 같은 언덕이 라이더의 멘털을 검증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다가온다. 앞단의 기어를 가장 작게, 뒷 단의 기어를 가장 크게 변속해놓고 온몸에 힘을 빼고 자전거 바로 앞바퀴만 바라보고 묵묵히 페달을 밟는다. 언덕 위를 올려다보는 순간 좌절감이 온몸으로 엄습하며 라이더의 얼마 남지 않은 힘을 송두리째 빼앗아 달아날 수 있다. 오로지 자전거 앞바퀴가 정상을 향해 느리게 돌아가는 모습만 바라볼 뿐, 깊은 생각도 사절이다. 먼산만 바라보다 눈도 멀어진다. 앞산부터 넘고 또 넘다 보면 먼산은 또 다른 앞산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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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두 발로 찍은 얼룩이자 무늬다


힘을 빼고 자전거 페달을 밟는 순간의 나는 자전가와 혼연일체가 된 무아지경의 상태다. 가파른 언덕에서는 최대한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땅과 바퀴가 맞닿으며 내는 옅은 마찰음을 조용히 들을 뿐이다. 이따금 만나는 돌부리에 타이어가 이상 반응을 보이면서 들려주는 선율도 듣기 좋으며, 침묵을 유지하며 오로지 물아일체가 되어 언덕을 기어오르는 순간 카카오 맵에서 나오는 차분한 안내자의 목소리는 침묵을 깨는 달콤한 전령사의 목소리 같다. 그렇게 먼산을 바라보지 않고 눈앞으로 다가오는 길만 쫓아 사투를 벌이는 와중에 반가운 소식이 빨간 곡선으로 목적지 근처에 왔음을 알려준다. 그제야 고개를 들고 정상을 본다. 빨간 직사각형 박스가 세로로 서 있는 인증센터가 보일 때 안도의 한숨과 함께 드디어 동해안 자전거길을 종주했다는 성취감이 엄습한다. 머리로 계산한다고 내 몸을 여기까지 데려다주지 않는다. 내가 힘차게 구른 횟수만큼 페달은 자전거 바퀴를 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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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는 그 사이 수없이 거리를 계산하고 생각은 오락가락 갈피를 잡지 못하며 마음은 날씨보다 변덕스럽게 들락날락 안정을 취하지 못한다. 오로지 내 발이 움직이는 대로 머리도 마음도 따라왔을 뿐이다. “발바닥이 가는 대로 생각하게 되고/발바닥이 이어주는 대로 만나게 되고/그 인연에 따라 삶 또한 달라지리니/현장에 딛고 선 나의 발바닥/대지와 입맞춤하는 나의 발바닥/내 두 발에 찍힌 사랑의 입맞춤/그 영혼의 낙인이 바로 나이니.” 박노해 시인의 ‘사랑은 발바닥이다’라는 시의 일부다.


글은 까만 글자들이 춤을 추며 남긴 얼룩과 무늬의 합작품이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일상적 삶에서 감각적으로 체험했던 느낌의 흔적들이 어느 날 갑자기 구름처럼 몰려와 주어와 동사, 그리고 목적어가 자기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며 얼룩과 무늬를 남기는 안간힘이다. 우연히 펼쳐 읽은 책 한 구절이 과거의 내가 어디선가 했던 추억 어린 경험을 자극해서 한 문장을 남기고 가는 경우도 있다. 내가 겪은 경험이 지금의 그 무엇과 연결되는 순간 생기는 연상은 또 다른 상상의 날개를 달고 비상하기 시작한다. 본래 날아갈 생각이 없었던 상상(想像)이 연인(戀人)을 만나 끝을 모르는 연상(聯想)을 낳듯, 부지불식간에 쳐들어온 단상(斷想)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백지 위에서 까만 글자들의 춤으로 바뀐다. 앞뒤를 가리지 않고 쏟아져 나온 단어들이 열기를 더해갈 무렵, 느닷없이 마침표가 찍히는 순간 단어와 단어의 연결고리로 이어졌던 문장 역시 잠시 멈춰 서서 다음 문장을 불러올 짧은 쉼을 갖는다. 단절된 순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머릿속의 생각은 손가락을 타고 키보드로 향하지만 시작하는 단어를 잃어버린 채 하얀 백지만 들여다본다. 자전거를 타면서 스쳐 지나가던 단상도 휘발되기 전에 잡아놓지 않으면 순식간에 종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글도 몸으로 다가온 감각적 깨달음의 흔적을 잡아놓았다가 최대한 기억으로 남은 글감을 영감으로 버무려 만들어 놓은 얼룩이자 무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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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날리던 낙엽이 달리는 자전거를 피하지 못하고 무게에 짓눌린다. 순간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낙엽의 갈비뼈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고 심각한 타박상까지 얻는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낙엽의 치명적인 손상에 바람마저 애속하게도 이리저리 낙엽을 뒹굴게 만든다.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흩날리는 바람은 자신의 근원을 알 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디로 가야 할 목적지조차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 번도 한탄하거나 자신의 처지를 한심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해변과 산이 만나는 접점에서 세차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깊이 뿌리내리고 버티는 소나무 역시 애초에는 자신의 씨앗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뿌리내리고 살고 있는 지금 여기가 삶의 터전임을 받아들이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비록 비바람에 흔들리고 눈보라에 떨었지만 자리 탓을 하지 않고 한 곳에서 목숨 걸고 숱한 해를 보냈다. 소나무의 독야청청에 주변 나무들은 더불어 살기를 포기하고 일찌감치 저만큼 멀리서 거리를 두고 삶의 터전을 일궈왔다.


해풍에 더욱 붉어진 단풍은 다가오는 마지막 순간을 위해 처절한 몸부림과 갈급한 아우성을 치고 있다. 올해가 마지막 가을일 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에 작은 바람에도 한 눈 팔 수가 없다. 불타는 단풍이지만 세상을 향한 마지막 절규이자 지금 여기서 보여줄 수 있는 외로운 육박전이다. 그 어떤 방화범도 이렇게 온산을 한꺼번에 불을 지르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도 시간차를 두고 불타는 단풍은 남향으로 부는 바람을 따라 붉은 물결을 몰고 남쪽을 향해 거침없이 내려오고 있다. 해풍에 시달린 나뭇잎이 마지막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하며 몸을 사리고 있다. 업힐을 하다 순간적으로 바라본 산 중턱에는 마지막 가을의 단상을 보내기 싫은 듯 침묵으로 항변하고 길가에 떨어진 낙엽은 일찍 생을 마감한 자의 처량한 여유를 보이며 드러누워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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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원천은 관념이 아니라 신념이다


“어쩔 수 없이 내놓은 문장들에는 범상치 않은 침묵의 순간이 있다”(141쪽). 그리고 “좋은 문장에는...탈구된 관절을 제 손으로 끼워 맞춘 듯한 통증의 자국들이 들어 있다”(116쪽). 이영광의 『왜냐하면 시가 우리를 죽여주니까』에 나오는 명문이다. 모든 문장은 침묵 속에서 숙성되고 발효된 애쓰기의 산물이다. 문장에는 문장을 쓰기 위해 세상의 모든 단어들을 레고블록 조립하듯 위치를 배열하고 전후관계를 따지면서 고뇌했던 저자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문장을 읽어나가면 저자가 고뇌했던 사투의 흔적이 우렁찬 침묵의 목소리로 아우성을 치며 지나가고 그 문장을 만들기 위해 절치부심했던 사투의 이미지가 뇌리를 관통한다. 동해안 자전거길을 종주하고 남기는 여기의 모든 문장에는 머리로 생각한 관념의 파편이 아니라 발바닥으로 겪으로 체험적 깨달음이 담겨 있다.


이 글 역시 내가 처음으로 달려본 낯선 해변도로에서 하늘과 바다, 구름과 바람이 산을 벗 삼아 나눈 신체적 감수성의 기록이다. 생각으로 맴돌던 바다의 짙푸름도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푸른색보다 검은색을 띠면서 파도치는 이유를 직접 곁에서 몸으로 느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신비의 세계다. 봄부터 여름을 넘어서면서 울트라 마린(군청색)을 띄다가 겨울이 가을을 초대하는 늦가을로 접어들면서는 인디고(남색)에 검은색이 가미된 짙푸른 색을 띤다. 아마도 그만큼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의 무게가 무거워서 버티고 견디다 가슴 한편에 맺힌 한이 검은색조를 가미한 바다색을 만들었을 거라고 추정해볼 뿐이다. 바다에게 아무리 물어봐도 대답은 하지 않는다. 열길 물속은 알 수 있어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말도 이런 점에서 맞지 않는다. 한 길 바닷속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레슬링 선수처럼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가까이 다가가 승부수를 던지는 수밖에 없다. 바다 가까이 다가가서 파도 소리에 담긴 바닷속 마음을 미루어 짐작하는 길만이 바다가 품은 깊은 속뜻을 알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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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원천은 관념이 아니라 신념이다. 신념은 살아본 사람이 몸으로 깨달은 격정과 각성의 산물이다. 신념은 머리로 만드는 이성적 사유 작용의 산물이 아니라 몸으로 겪으면서 깨달은 체력의 산물이다. 체력이 부실하면 신념도 바로 체념(諦念)이 된다. 견디기 어려운 체험이 몸을 관통하고 지났어도 이것을 포착할 적확한 개념이 포착되지 않는다. 상념이 날개를 달고 몸 구석구석을 훑어봐도 시간만 속절없이 흐르고 직조된 문장은 미미하기 짝이 없다. 떠오른 단어는 구름 위를 떠다니고 그나마 태양빛에 반사되어 본래의 색깔도 잃어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그 사이 바닥에 흩어져 자기 위치를 찾지 못하는 생각의 파편들이 어울리는 단어를 찾지 못하고 수습이 불가능한 편린으로 여기저기서 뒹굴고 있다. 아직도 수습되지 못한 숱한 단어들이 동해안 자전거길에 누워있다. 해가 넘어가고 어둠이 짙게 깔리면서 두려움과 공포감에 하룻밤을 무사히 견뎌내지 못하면 자기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찾을 수 없는 미궁의 세계로 사라질 것이다, 언제 어디서 부름을 받을지 모르는 막연함이 단어들의 삶을 더욱 막막하게 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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