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강 자전거길 종주를 마치고(2021.11.27.-28)
사람은 구겨진 종이와 같다
영산강 자전거길 종주를 마치고(2021.11.27.-28)
센트럴시티 서울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8시쯤 출발해서 담양 고속버스 터미널에 12쯤 도착, 간단히 점심을 먹고 담양댐으로 올라가는 자전거길을 택했다. 말로만 듣던 우레탄 길을 만났는데 걷는 데는 참 좋은 길일지 모르지만 라이더에게는 최악을 길이다. 페달을 밟은 만큼 앞으로 나가지 않는 난감한 길이다. 담양댐 인증센터에서 전열을 정비한 다음 본격적인 영산강 자전거 길 종주에 나섰다. 다음 인증센터인 메타세쿼이아 길 까지는 불과 7Km, 인증센터 간 최단 거리가 아닐까. 1970년대 초에 전국적으로'가로수 심기 사업'이 한창일 때, 다른 지역으로 가야 할 메타세쿼이아 묘목이 담양으로 잘못 배달되자 당시 흔한 수종이 아닌 데다 값비싼 나무라 담양군에서는 되돌려 보내지 않고 얼른 심어버려서 생긴 오늘의 메타세쿼이아 길에서 나무가 주는 위용과 위안에 잠시 느긋한 달리기와 함께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담양 대나무 숲으로 향했다. 대나무는 나무가 아니다. 나무는 나이테를 지니고 있지만 대나무는 중심을 비우고도 1년에 12m까지 자란다. 그 비결에는 마디가 있다. 고속으로 높이 자라지만 마디를 맺기 때문에 견딜 수 있는 버팀목이 된다.
승촌보 인증센터에 도착할 즈음 해는 벌써 서산으로 넘어가 하루의 피로함을 달래려는 듯, 빠른 속도로 기울어지고 있다. “그러지 말자고 기다리다 들뜬 저녁/그이는 오지 않고 노을이 덥쳤다...노을은 다급하게 어둠과 섞이고.” 안은주 시인의 『우리의 관계는 오래 되었지만』에 나오는 ‘멍’이라는 시의 일부다. 서산에 걸쳐 있던 불타는 태양은 산 전체를 붉게 물들이다 갑자기 어둠 속으로 자신의 몸을 던진다. 그 순간 세상은 태양이 저버리고 떠난 어둠의 자식들이 긴 밤을 준비하며 세상의 적막과 고요를 데리고 나타난다. 무리하지 않고 승촌보를 지나 죽산보 인증센터에 도착하기 전 홍어 냄새로 저녁노을을 달래는 나주 작은 시골마을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황포돛배 물그림자와 어우러진 월계정의 정취가 시간을 거슬러 조선시대로 여행을 떠난 듯 고즈넉하다”는 행안부 자전거길 홈페이지 글은 사실과 다르듯 죽산보 가기 직전에 만난 조그만 나주의 홍어 마을은 마음 전체가 홍어 식당만 있을 뿐 도무지 다른 곳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홍어 향 그윽한 낯선 이국땅 같았다. 시간이 여유로우면 다해 포구에서 이름만 들어본 황포돛배를 타고 영산강 물길을 거슬러 오르며 나주에서나 잠시나마 호사를 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서리는 진리다
이른 아침 일찍 일어나 죽산보 인증센터로 가지 못했던 나머지 여정을 향해 출발했지만 영하의 날씨라서 그런지 손발이 시려서 햇빛이 간절한 라이딩이었다. 밤사이 내린 서리가 길 옆의 갈대를 비롯해 온갖 풀들의 머리를 뒤덮고 일렬로 도열해서 우리들을 맞이해주었다. 대기 중에 머물렀던 수증기가 미처 잠들기 전에 깊어가는 밤이 몰고 온 온도차로 인해 지상의 물체 표면에 얼어붙어 온 세상을 서리가 장식하는 흰색 장관을 만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밤새 추위에 떨고 있는 갈대 머리에 된서리를 맞게 되어서 한껏 몸을 움츠리고 새벽의 온도차를 견뎌내고 있다. 얼마나 추위에 몸을 떨었는지 갈대의 몸은 움츠려 들다가 굳어진 듯 새벽 찬 기운에 된서리를 맞고 고개마저 푹 숙이고 풀이 죽어 있었다. 모든 진리는 서릿발 같은 찬 기운에도 몸을 움츠려 들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목적의식과 열정으로 자신의 신념을 기반으로 뜻하던 바를 이루어낼 때 밤사이 내리는 서릿발처럼 조용히 다가온다. 진리는 서릿발처럼 시련과 역경으로 미지를 향해 떠나는 사람의 의지와 열정을 차갑게 식게 만들어도 굴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경지에 이르는 자신만의 신념으로 체념을 극복할 때 탄생된다. 서리에는 언제나 진리로 향하는 굳은 의지가 초겨울을 맞이하는 냉정하고 엄정한 자세로 깃들여 있다.
된서리 맞은 길가 옆의 갈대나 다른 나무나 풀들은 밤새 하얀 옷을 입고 버티고 있지만 한 가지 희망이 오지 않는 다면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 그들에 한 가지 희망은 한시라도 빨리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하면서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서릿발을 녹여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이 조금이라도 더 연장된다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한계 지점에 이르러 결국에는 동사당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공기 중의 수증기가 또다시 언제 서릿발을 만들어 자신들을 위협할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태양빛이 비춰주는 멀건 대낮에는 밤새 저질렀던 만행을 반복할 수 없다는 안도감이 있다. 문제는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준비를 하는 동안 공기 중의 수증기 입자는 서서히 찬 기운을 만나면서 세상을 또다시 냉기로 몰아갈 준비를 할 때 발생한다.
한참을 달려도 태양빛이 하늘로 떠오르지 않다가 얼어붙은 손발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차가운 냉기에 얼어갔다. 그때 마침내 세상을 순식간에 따뜻하게 만들어줄 태양빛이 드넓은 영산강 물줄기 너머에서 서서히 강물의 온도를 높이면서 지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영산강을 무안지역에서는 몽탄강(夢灘江)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한글로 풀어쓰면 ‘꿈여울’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무아지경 상태로 무안지역의 몽탄강을 끼고 달리면서 연실 감탄사를 연발하는 이유는 서릿발을 뒤집어쓴 새하얀 갈대 머리가 떠오르는 햇빛에 녹아 본색을 드러내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 길옆의 이정표가 나주군 ‘다시면’이라고 알려준다. 면소재지 이름이 ‘다시면’이라는 이름에 언젠가 꿈에 젖은 몽탄강 줄기를 따라 달밤에 라이딩하고 싶은 생각이 떠올랐다.
느러지 전망대로 가는 길에 만난 물안개는 가을의 끝자락에서 느끼는 초겨울 날씨를 포근하게 감싸 안고 흐르는 강물을 덮어주고 있었다. 하늘과 강이 밤새 나눈 사랑의 흔적도 물안개 속에서는 흐릿하다. 아마 물안개라는 장막을 가리고 하늘과 강은 상류에서 하류로 흐르며 밀애를 즐겼으리라. 흐르는 강물은 기암괴석이 즐비한 산 허리를 만나는 순간에도 한 눈 팔지 않고 자기 길을 가다가도 못내 아쉬운 듯 살짝 감정의 혼란을 겪으며 회오리 물살을 만든다. 하지만 강물은 거기서 머뭇거리지 않고 안갯속에서 희미하게 보이지만 선명한 하늘의 끈질긴 구애에 이내 빠져버리고 만다. 그 사이 물안개도 낮게 깔리며 강물을 뒤덮다가 하늘의 고요한 적막 소리에 몸을 비틀며 살짝 움직이다 다시 강과 적당한 거리릃 두고 하늘 사이에서 자기 자리를 잡는다. 물안개는 강물이 돌덩이에 부딪히는 소리도 넓디넓은 가슴으로 품어 안으며 허공으로 날려 보낸다. 스치는 바람도 안갯속으로 빨려 들고 강변에 서 있는 나무도 안갯속에서는 속수무책으로 형체를 잃어버린다. 오 리나 되는 짙은 안개 속이라는 오리무중(五里霧中)은 온기가 주변을 데우면서 서서히 세상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불안한 낙엽, 숙박지와 목적지를 바람에게 물어보다
자연과 생태가 살아 숨 쉬는 자전거 아우토반이라는 표현에 걸맞게 몽탄대교를 건너 소댕이 나루터까지 이어지는 약 10Km 영산강 자전거길은 자연과 생태, 하늘과 땅, 강과 둑이 만나 낭만적인 가을 라이딩을 부르는 자전거 하이웨이가 아닐 수 없다. 길 끝에 길이 이어지고, 그 끝에 가면 어느 사이 길과 하늘이 맞닿아 그 길로 향해 달리는 라이더를 부르는 길이다. 여기서 저기를 바라볼 때 언제나 저기에 도달할 수 있을지 아득하기만 하지만 어느 사이 내 몸은 자전거가 여기서 저기로 데려다준다. 죽산보를 지나 느러지 관람 전망대 인증센터로 가는 길은 짧지만 강렬하게 업힐이 두세 군데 갑자기 나타나 영상강 하굿둑으로 가려는 라이더의 마음을 무겁게 해 준다.
평탄한 길만 있을 줄 알았지만 느닷없이 쉽게 오를 수 없는 업힐이 갑자기 나타난다. 힘을 최대한 빼고 앞뒤 최단 속도를 낼 수 있을 장도로 기어 변속을 한 다음 페달을 밟는 순간 이 정도 업힐이면 안전하게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느낌이 온몸을 파고들었다. 오를수록 힘이 들어야 하는데 오를수록 묘하게도 자전과 한 몸이 된 나는 언덕을 향해 아주 조금씩 몸을 옮기고 있었다. 언덕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나무들은 깊어가는 가을의 끝자락을 잡고 있는 듯 마지막 남은 몇 개의 잎새를 붙잡고 마지막 안간힘을 쓰고 있다. 무안 들녘 황금물결을 가로질러 흘러온 영산강은 강둑 사이에서 고개 숙이고 도열하는 갈대들의 갈색 물결과 햇살에 출렁이는 물결이 맞장구치며 얼마 남지 않은 목포 앞바다를 향해 유유히 흐르고 있다.
“몇 잎의 낡은 잎새로/세상에 매달려 보았나/흔적을 남기지 않는/바람에 시달려 보았나.” 윤강로의 ‘바람 부는 날’이라는 시의 일부 구절이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모든 순간이 고통스러울지라도 그것만큼 소중한 것이 어디 있으랴. 마지막 남은 몇 잎일지라도 그것마저 놓는 순간 나무는 이제 홀몸이 되어 긴 겨울을 나목으로 버텨내야 한다. 고통스러운 나무의 앞날이 걱정되지만 그 사이 나무와 마지막 작별을 고한 나뭇잎은 젖은 낙엽과 함께 다음 목적지를 바람에게 물어보고 있다. 여전히 몇 잎 남지 않은 나뭇잎은 지나가는 바람을 가르며 온몸으로 저항하고 있다. 바람이 나무의 멱살을 휘어잡고 뒤흔든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다 공중낙하를 시작한다. 봄부터 가을까지 세찬 비바람이 몰아쳐도 견딜 수 있었는데, 이제 살아갈 거쳐를 땅으로 옮겨 다시 환생을 꿈꾼다. 빗방울은 어디로 떨어질지 알지만 낙엽은 떨어지기 전에 자신의 낙하지점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낙엽은 언제 떨어질지 자신의 의지대로 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나가는 바람이 갑자기 친구가 필요할 때 낙엽을 데리고 떠나갈 뿐이다.
떨어진 낙엽의 운명은 더욱 예측하기 어렵다. 비라도 오면 자세를 낮추고 땅바닥에 붙어 근근이 생명을 연장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언제 어디로 날아갈지 불어오는 바람만이 알 뿐이다. 낙엽을 추락하면서 그동안 살아온 생의 역사를 자기 몸에 아로새긴다. 마지막 투혼을 다해 울긋불긋 열기를 공중분해시켜 생을 마감한다. 낙엽은 밤이 오면 더욱 불안에 떨 수밖에 없다. 나무가 어둠의 저녁을 건너는 사이, 낙엽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계제로의 세계에서 절치부심하는 수밖에 없다. 스스로 이불이 되어 한기가 올라오는 땅을 침대 삼아 긴 밤을 적막과 함께 지새워야 한다. 그것도 한 곳에서 잠을 잘 수도 없는 불안한 심정으로 낮 동안의 고난이 밤에도 계속된다. 지나가는 사람의 발길에 차이고 밟혀가면서 온몸이 상처투성이로 바뀌어도 응급실조차 갈 수 없다. 피곤한 몸에 더해지는 설상가상의 위협은 그 끝을 알 수 없다. 얼마나 뒤척이는 시간을 보내야 먼동이 터올지 모른다. 먼동이 트고 날이 밝는다고 누군가에게 밟히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새벽이 잉태한 희망이 나무에게는 전해지지 않고 또 다른 불안한 하루가 반복될 뿐이다.
순간적인 편안함과 길이를 알 수 없는 불안감 사이에서 낙엽은 오늘도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다음 목적지를 향해 낮은 자세로 엎드려있다. 어둠이 세상을 무심하게 건너 먼동이 터오고 중천으로 떠오르는 태양빛의 찬란함이 낙엽에게는 참혹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본 적이 없는 세상으로 아무 때나 떠다니는 낙엽에게 오늘도 곤두박질치면서 떨어지고 흩날리는 수밖에 없다. 느러지 전망대를 향해 힘겹게 오르는 순간에도 나의 힘든 순간보다 자전거 바퀴에 밟히는 낙엽의 고통스러운 일생이 자꾸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낙엽이 살아가는 방식에서 하루를 견디며 살아가는 불안한 사람의 불편한 삶을 그려본다. 그래도 다행인 일은 불안하고 불편한 삶은 불가능하지 않다는 사실, 불가능하지 않은 불안하고 불편한 삶에서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는 자유는 여전히 살아 있지 않은가.
차이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희망은 절망의 끝에서 완성되고, 실력은 실패하는 와중에 생기며, 시작은 언제나 끝에서 출발한다. 망하기 전에 망하는 지름길로 가는 느낌이 온몸을 휘감을 때 전율하는 두려움과 걱정이 앞선다. 절망하기 전에 온몸은 절망하기 직전까지 사투를 벌이며 견뎌내야 한다, 막상 실패로 끝나고 좌절로 이어지는 순간은 찰나, 오히려 실패로 이어지는 긴 여정에서 상처가 생기기 전에 슬픔은 소리 소문 없이 엄습해오다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어느덧 느러지 전망대 정상에 올라 흐릿한 물안개를 덮고 고단한 하루를 견디며 흐르는 강물을 굽어본다.
“너무 흐릿해서 의심할 수 없고/너무 분명해서 기억나지 않는 이야기들.” 이현승의 『친애하는 사물들』 시집에 나오는 ‘드라마 전용관’이라는 시의 일부다. 너무 분명해서 의심할 수 없는 게 아니고 너무 흐릿해서 기억나지 않는 게 아니라는 시인의 역설적 표현 앞에 시인의 역발상에 무릎을 꿇는다. 흐릿하게 보일수록 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없기에 의심할 건더기기조차 없으며, 너무 분명하면 분명한 것들 간의 치열한 사투로 인해 불분명해진다는 이야기다. 라이딩 도중에 만나는 강가의 무수한 생명체는 흐릿하게 다가와서 무슨 이름을 갖고 있는지 조차 알 수 없기에 그것이 거기에 왜 존재하는지 의심 자체를 품을 수 없다. 가끔씩 다가오는 분명한 정체는 이미 내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왕국을 건설하고 있어서 누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非一非再)로 발생한다.
모든 호기심은 아픔을 먹은 기억 덕분에 더욱 집요하게 물음표를 품고 여기저기 방황의 곡선을 그리며 우회적으로 나에게 다가온다. 호기심에는 아픔과 슬픔, 기쁨과 즐거움이 씨줄과 날줄로 뒤엉켜 구분되지 않은 채, 어느 순간 갑자기 고개를 들고 세상 밖으로 튀어나온다. 어둠 속에서 고개 숙이며 아래로 뿌리를 뻗어가며 밝은 세상을 고대하던 콩나물처럼 호기심의 물음표 역시 어둠과 함께 궁금증을 잔뜩 잉태한 채, 세상 밖으로 나가기를 고대한다. 노란 모자를 쓰고 있던 콩나물이 어둠의 장막이 걷히면서 갑자기 들이닥친 밝은 세상 앞에서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 어둠 속을 뚫고 올라오느라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지도 못한 채 전라의 몸으로 밝은 빛을 찾아 그렇게 수직 상승을 꿈꾸어 왔던가.
“자연이 말하는 방식과 내가 말하는 방식이 모두 한 문장이다.” 시인의 말, “지금 말하면 달라지는 것들에게”로 시작하는 김언 시인의 『한 문장』에 나오는 ‘한 문장’이라는 시의 첫 구절이다. 영산강이 말하는 방식과 내가 영산강을 보고 말하는 방식이 한 문장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영산강이 나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과 내가 영산강의 의중을 파악하고 하고 싶은 말 사이에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지금 말하면 달라지는 의미가 분명 존재할 것이다. 달라지는 의미 사이에서 무수한 차이는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영산강 하굿둑에서 기다리는 바다를 향해 흘러갈 것이다. 지금 여기서 흐르는 강물과 바다로 뛰어들기 직전의 강물과는 무슨 차이가 있는지 여기서 알 수 없다. 차이는 그래서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차이는 지금 이 순간부터 끊임없이 탄생하는 생성의 과정이자 어제와 다른 차이를 만들어내는 동사가 아닐 수 없다.
‘느러지’에서 영산강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다
담양군 용면 용추봉 기슭에서 시작된 영산강 물줄기는 강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량이 미미하다가 담양 가마골 용소에서 비로소 강의 본모습을 갖춘 다음 담양, 광주, 나주, 무안의 평야지대를 지나 목포 하굿둑에 이르로 바다로 뛰어든다. 특히 영산강은 나주평야를 흠뻑 적시며 지나갈 때 갑자기 강폭이 넓어지며 유속이 느려진다. 느림의 미덕을 온몸으로 보여주며 세월 따라 물결을 만들던 영산강은 나주 동강면 옥정리와 무안 동탄면 이산리 사이를 지나면서 특이한 지형을 형성한다. 그 모습이 한반도 지형과 특이하게도 닮은 S자형 모습을 띠면서 물은 더욱 느리게 곡선을 취하며 흐른다. 강물이 갑자기 늘어지게 주저앉으며 느리게 흐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느러지’다. 물이 느려졌다는 숨은 의미를 담고 있는 ‘느러지’는 마치 안동의 하회마을 앞 낙동강 물줄기와 닮은 것처럼 보이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영산강의 자연스러운 흔적이 만든 아름다운 지형을 감상할 수 있도록 지난 2010년 건축된 느러지 전망대에서 바라본 느러지의 특이한 지형은 ‘작은 한반도’라 불릴 정도로 자연이 만든 경이로운 경관이 아닐 수 없다.
느러지 전망대 꼭대기 위에 올라가 내려다본 느러지 모습은 S 자라기보다 정확히 U자 지형에 가까웠다. 영산강 곳곳의 큰 바위를 만난 물결이 할수(割水)되면서 순간적으로 유속이 약해지는 사이 모래가 자연스럽게 쌓여 생긴 특이한 지형이 느러지다. 하루도 쉬지 않고 오랜 시간 동안 세월의 희로애락을 품고 흘러온 영산강이 벗삼았던 기암괴석과 은빛 모래, 강물의 흐름을 묵묵히 지켜보며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 수백 년 수령의 고목들 어우러져 그려낸 비경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여기가 바로 꿈속에서 절경을 감상하며 감탄하는 무안의 몽탄 ‘느러지’라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느러지에서 강물은 U자형 지형을 끼고 힘들게 달려온 유속을 줄이며 한 시름 놓는 사이 강물의 흐름이 S자형을 띤다고 해서 과거에는 이곳을 곡강(면)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아름다운 자연 절경과 맥을 같이하며 탄생한 설화와 역사적 흔적에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유적지 같기도 하다.
‘느러지’가 생긴 무안의 몽탄이란 지명 이름도 꿈 몽(夢)’, ‘여울 탄(灘)’에서 기인했다고 한다. 몽탄 이름에 걸맞게 느러지에는 역사적 흔적이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며 혼재하며 꿈을 꾸고 있다. 그 역사적 흔적 중의 조선시대 인물인 최부의 ‘발자취’를 ‘느러지’가 고스란히 품고 있다. 최부라는 인물은 ‘느러지’가 위치하고 있는 나주 동강 출신이다. 그는 세계 3대 중국 기행문으로 평가받는 대작, 표해록을 명나라 체류 중에 집필한 인물이다. 최부는 본래 도망간 유민이나 죄인을 잡아들이는 관원이었는데 제주도 파견 중 부친상을 당해 나주로 돌아가다 풍랑으로 표류, 명나라까지 가게 됐다. 표해록은 이 기간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해 둔 여행기다. 남도일보에 따르면 최부는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환송 중 상중이라는 이유로 상복을 벗지 않고 부친을 향한 효를 다해 명나라 관리들을 탄복시켰다고 한다. 최부의 지극한 효심을 기리기 위해 나주 느러지 전망대 입구에서 비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 인근 곡천리 철산마을에서 옥정리 봉추 마을까지 조성된 ‘곡강 최부길’도 최부의 역사적 흔적을 후세에 알리기 위한 작은 발걸음이라고 생각된다.
사람의 이름의 주름과 같다
느러지 전망대 인증센터에서 영산강 자전거길의 종착역인 영산강 하굿둑 인증센터까지 가는 길은 다시 영산 강둑을 따라 달리는 평탄한 코스다. 바다에 가까워지면 마지막 이별을 준비하는 영산강은 바다와 같은 위용을 지니며 서서히 바다를 닮아가는 것 같았다. 강다운 면모라고 찾아볼 수 없었던 영산강은 지금까지 흘러내려오면서 수많은 지류들을 집어삼켜 세력을 키워왔으리라. 영산강 하굿둑에 가까워질수록 숱한 고뇌와 시련을 견디며 물속에 품은 한 많은 사연을 바다에게 던져주고 한 생애를 마감하는 준비를 서두르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것은 내 눈의 착시현상 때문일까. 세상의 모든 아픔을 다 어루만져주면서 이곳까지 흘러내려오는 동안 강물도 깊은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어재 받은 상처는 밤 사이 상처 위를 흐르는 다른 물살로 지워지거나 아물었을 것이다. 그렇게 강물도 숱한 흔적을 몸으로 품으며 주름이 생겼지만 인간의 육안(肉眼)이나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뇌안(腦眼)으로는 보이지 않을 뿐이다. 시인의 눈으로 바라볼 때 수심(水深)이 품은 상처 받은 수심(愁心)이 심안(心眼)으로만 읽어질 것이다.
철학자 들뢰즈는 다중체(multiplicity)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다중체는 말 그대로 다양한(multiple) 주름(pli)이 축적되어서 생긴 한 사람의 정체성(multiplicity)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름은 사건과 사고를 겪으면서 나도 모르게 내 몸에 각인된 직간접적인 경험의 흔적들이다. 내가 겪으면서 내 몸에 남긴 얼룩과 무늬가 다양한 주름으로 축적되면서 나의 정체성이 생성되고 형성된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보는 방법은 그 사람이 살아오면서 겪은 다양한 삶의 희로애락(喜怒哀樂)에 담긴 사연을 알아보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이름에는 그만큼 살아오면서 겪어낸 몸부림과 안간힘의 흔적으로 생기는 주름과 맥을 같이한다. ‘이름’은 ‘주름’이 되는 이유다.
박지성이라는 이름은 운동장에서 축구하면서 생긴 주름이 있고, 박태환은 수영장에서 물살을 가르며 수영하면서 생긴 주름을 갖고 있다. 김연아는 스케이트 장에서 무수히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생긴 얼룩과 무늬가 주름으로 축적되어 있고, 안산 양궁 선수는 활시위를 무수히 당기면서 날아가는 화살을 정조준하는 주름이 온몸에 아로새겨 있을 것이다. 저마다의 주름이 그 사람의 이름값을 한다. 박지성에게는 축구하는 다중체가 생겼고 박태환에게는 수영하는 다중체가 생겼다. 박지성과 박태환의 주름은 그동안 자신들이 노력하는 무대 위에서 씨름한 정도만큼 생긴다. 박지성에게 수영하는 주름은 없고, 박태환에게 축구하는 주름은 없다. 김연아에게는 얼음 위에서 연기하는 주름이 생겼고 안산에게 양궁하는 주름이 생겼다. 저마다의 다양체가 저마다의 고유함을 드러내는 정체성으로 형성된다.
사람은 구겨진 종이와 같다
주름은 마치 구겨진 종이와 같다. 힘들고 어려울 때는 삶이 많이 구겨진다. 나의 의지대로 되지 않을 때 바깥의 뜻하지 않는 힘에 굴복당할 때도 있고, 멀쩡하게 걸어가던 사람이 느닷없이 나타나 장애물에 의해 넘어질 수도 있다. 우여곡절의 삶을 살다가 겹겹이 쌓이는 구구절절한 사연이 구겨진 종이처럼 내 몸에 얼룩으로 남는다. 종이가 많이 구겨질수록 정석대로 접은 비행기보다 멀리 날아간다. 우여곡절이 많은 구겨진 종이일수록 원하는 방향으로 멀리 날아간다. 똑바로 접은 비행기는 내 마음대로 날릴 수 없지만 종이를 구겨서 만든 종이비행기는 내 의지와 방향대로 멀리 날아간다. 시련과 역경을 경험하면서 나도 모르게 내 몸에 각인된 다양한 주름은 세상을 살아가는 밑거름이 된다. 그만큼 세상의 흐름을 타고 나의 주체적 의지대로 험난한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내력(耐力)이 생긴다.
힘든 세상을 살아오면서 내 몸에 생긴 주름이 안으로 굽어지면서 그 안에 내가 겪은 숱한 삶의 애환이 사연으로 쌓인다. 주름이 안으로 생겨서 의미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함축된다. 그게 바로 시사점(implication)이나 암시(暗示)다. 주름(pli)이 안(im)으로 생겨서 내포되거나 함축된 의미, 즉 함의(含意)다. 반대로 그 주름의 의미를 겉으로 드러내 놓고 의미를 따져보는 게 설명(explication)이다. 주름이 안으로 접히면서 의미를 품고 있는 시사점이나 그 주름을 펼쳐보면서 주름에 내포된 의미를 따져보는 설명은 모두 한 사람이 이름값을 하면서 만들어온 주름의 역사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행위다. 안으로 품고 있는 주름의 시사점은 쉽게 파악되지 않는다.
사람은 인생의 ‘주름’과 ‘씨름’하면서 ‘나름’의 의미를 만들어가며 자기 ‘이름’ 값을 하면서 살아간다. 인생의 고비마다 ‘먹구름’이 낄 때도 있고, ‘시름시름’ 앓아가면서 힘든 삶과 사투를 벌이지만 여전히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아서 공허할 때가 많다. 그러다가 갑자기 누군가의 ‘부름’을 받고 ‘심부름’을 하거나 한 시대의 ‘흐름’을 타고 ‘소름’ 끼칠 정도로 일이 잘 풀리면서 승승장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인생은 ‘모름’의 바다이며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일들이 ‘고름’처럼 우리들을 괴롭히며 아픔을 얼룩으로 남긴다. ‘한시름’ 놨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고드름이 뚝 떨어지듯 절망과 좌절의 주름이 나도 모르게 늘어만 간다. 내가 겪은 모든 주름의 흔적은 ‘밑거름’이 될 수 있고 용오름처럼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상승기류를 타며 자기 존재를 ‘아름’ 답게 드러냄으로써 한 편의 화양연화(花樣年華)와 같은 ‘필름’으로 남기기도 한다.
열심히 매진하고 몰입하다가도 갑자기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거나 ‘게으름’ 피우고 싶어서 거들먹거리는 시간도 많을 때가 있다. 타는 ‘목마름’으로 뭔가를 갈구하다가도 수단과 목적이 구분되지 않고, 뭐가 뭔지 혼돈스러울 때 ‘푸르스름’하거나 ‘누르스름’하며 ‘거무스름’하게 인생이 흑백논리나 양자택일로 구분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생긴다. 하나의 잣대로 ‘판가름’ 하기 어려운 경우다. 겉으로 보기에는 ‘허름’하게 보여도 내면으로 축적한 인생의 ‘주름’은 그 누구보다도 ‘아름’ 다운 사람이 많다. 이런 모든 직간접적인 경험의 축적이 ‘주름’으로 생기면서 한 사람의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한 많은 사연을 품고 강물은 바다에 안긴다
강물도 다양한 주름을 만들며 흐름을 이어오다 그동안의 시름을 잊고 마지막 순간에 바다로 뛰어든다. 강물이 품은 한 많은 세상은 바다에게 몸을 던지면서 순식간에 사라진다. 아니 사라지는 게 아니라 바다가 품고 희석했다가 그 의미를 파도가 알려줄 것이다. 바다는 천 개의 가슴으로 강물의 사연을 받아들이고 해석해서 파도소리로 들려준다. 해불양수"(海不讓水)라고 하지 않았던가. 넓은 바다는 어떤 사연을 품은 강물이라도 뿌리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바다는 탁한 물이든 깨끗한 물이든 가리지 않고 드넓은 마음으로 품어 정화시켜준다. 해불양수는 결국 모든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는 말이다. 강물이 바다로 뛰어드는 사이, 바다는 이미 강물 속으로 들어와 민물의 정체성을 희석시켜 놓았다. 그것도 모르고 강물은 바닷속으로 뛰어내리며 짠물을 마신다. 소금에 절임 당한 강물은 이제 한 세상을 마감하고 다음 생을 기약한다.
강물의 죽음과 바다의 탄생 그 경계영역을 기수역(汽水域, Blackish water zone)이라고 한다. 기수역은 담수와 해수가 혼합되어 형성되는 지역으로 일반적으로 염분의 농도가 0.5% 이하인 물은 담수(淡水), 30% 이상은 해수(海水), 그 중간을 기수(汽水)라 한다. 이곳에서 바다와 강의 경계는 유명무실해진다. 어디까지 바다이고 어디까지 강인지 구분하는 인위적 잣대는 무의미하다. 이미 바닷물은 고단한 여행을 끝으로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민물을 드넓은 가슴으로 바다가 맞이한다. 그 순간 바다는 강물에게 앞으로 소금물을 먹으며 살아가는 방법을 잠깐이지만 몇 가지 충고로 알려준다.
기수역은 이런 점에서 바다가 강물에게 뭔가를 알려주는 교육장이며, 상충하고 갈등하는 이물이 만나 교감하고 소통하는 마주침의 공간이다. 강물에서 살던 민물고기는 바다를 만나기 오래전부터 바다로 들어가 살아가기 위한 몸과 마음의 준비를 했을 것이고, 바다에서 살던 고기들도 갑자기 옅어지는 염기를 견뎌내며 경계에서 살아가는 노하우를 터득했을 것이다. ‘장어의 일생-기수역(汽水域)에서’라는 시를 고두현 시인은 “바닷물과/민물이 만나는/이곳에 머무는 동안/내 이름은/바다 장어인가/민물 장어인가.”라는 짤막한 시 속에 장어의 혼미한 정체성을 표현한 적이 있다. 험난한 파도를 넘어 먼바다로 나가서 산란하는 뱀장어는 아마 일찍부터 바다에 나가기 위한 적응훈련을 했을 것이다. 반대로 민물에서 산란하는 숭어나 황어, 황복, 우어, 연어 등은 민물이 밀려오기 오래전부터 철저한 준비를 하기 위해 몸을 풀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수역은 생태적 습성이 전혀 다른 물고기들이 민물과 바닷물을 오고 가면서 경이로운 생명체가 탄생하는 위대한 생태계의 경작지가 아닐 수 없다.
바다로 뛰어든 강물은 여기서 한 생애를 마감하지만 또 다른 생으로 이어지는 환생을 꿈꾼다. 바다에 안긴 강물은 잠시 휴식을 취하다 온기 품은 햇빛으로 비상하는 꿈을 잉태하다 어느 순간 일렁이는 파도 춤에 맞춰 수증기로 변신하며 수직으로 상승한다. 강물의 사연을 모두 품은 바다는 주야를 가리지 않고 일렁이는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차일피일 승천하는 꿈을 꾸다 열기 가득한 우주 공간에서 승천하라는 소식이 도착하자마자 입자 속에 자신의 정체성을 숨긴 채 하늘 높이 뛰어오른다. 가장 낮은 곳에 머물던 바다가 강물을 품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 마침내 가장 높은 공간으로 몸을 들어 올린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어오르던 던 물입자 들은 다시 땅의 시샘과 질투를 견디지 못하고 다시 추락하며 대지를 눈물바다로 만드는 비로 변신한다. 물에서 수증기로 변신했다 다기 물로 돌아와 땅속으로 스며든 빗물은 방랑하는 예술가처럼 우여곡절의 지류를 따라 파고들다 강물과 어깨동무를 하며 연대한다. 다시 강물은 환생을 통해 바다가 흘러간다. 우주의 순환 법칙에 강물도 예외는 없다.
영산강 자전거길 종주를 마지막으로 4대 강 자전거길 포함 국토종주를 마치고 이제 제주도 환상 자전거길만 종주하면 꿈에 그리던 국토완주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다. 하나의 성취 과정에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의 손길이 스며들어 있다. 나를 자전거길로 안내해주고 국토완주 그랜드 슬램 여정을 챙기면서 함께 라이딩을 즐긴 정태성 비전 택시 대학 총장이 없었다면 라이딩의 기쁨을 즐기는 행복한 여정은 없었을 것이다. 힘들고 난관에 부딪혔을 때 초긍정 마인드로 문제를 해결하고 어떤 위기 상황이 와도 다양한 시나리오로 난국을 돌파하는 맥가이버 같은 브리꼴레르 기질과 임기응변력을 배웠다. 우여곡절이 품은 사건 속의 사연과 사고(事故)가 잉태한 사고(思考) 덕분에 자전거는 움직이는 인생 학교임을 몸으로 배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