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바위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바다는 바위가 살아가는 인생에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제주도 환상 자전거 길 종주를 마치고(2021.12.2일-12.4일)


꿈에 그리던 국토완주 그랜드 슬램은 제주도 환상 자전거 길을 종주하면 완성된다. 육지에 있는 자전거 길을 다 타고 마지막 코스로 남은 제주도 환상 자전거길이라서 더욱 설렌다. 해안선을 따라 펼쳐지는 제주도 자전거 길은 그동안 탔던 다른 자전거 길에 비추어 볼 때 바다와 기암절벽, 그리고 하늘과 구름, 그리고 바람이 만나는 아름다운 섬 여행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용두암 인증센터에서 제주도 자전거 길 종주를 마침과 동시에 국토완주 그랜드 슬램의 마지막 종착역도 용두암으로 정하고 싶어서 용두암 인증센터 다음 인증센터인 다락 쉼터에서 라이딩을 시작했다. 다락쉼터에서 해거름 마을공원 인증센터를 거쳐 송악산 인증센터와 법환바당 인증센터를 지나 첫날은 쇠소깍 인증센터까지 가서 첫날 일정을 마치고, 둘째 날 용두암에서 국토완주 그랜드 슬램 달성을 자축하고 다락쉼터까지 갈 계획이었다.


바다는 파도로 자신의 존재 모습을 세상에 알린다


해거름 마을공원 인증센터 근처 카페에 들러 첫날 출발의 여유로움을 만끽하며 먼발치에서 밀려오는 파도소리에 담긴 제주도 자전거 길의 마음을 엿들었다. 해안선을 따라가는 자전거길이지만 날씨도 심상치 않고 앞으로 나가려는 라이더의 안간힘을 굴복시키려는 맞바람이 매서울 것이라는 진언이 들리는 듯했다. 가을의 끝자락에서 줄달음쳐 달려온 겨울바다가 초겨울 접경지대를 만나 밤새 추위에 떨었는지 푸르름에 어둠이 담겨 짙푸르게 무장하고 있었다. 바다도 작렬하는 태양열에 달궈져 농염한 염기를 가득 품은 채 뜨거웠을 텐데, 겨울로 향하는 12월의 거센 부름에 어찌할 수 없었으리라. 모든 존재는 시간의 영겁 속에서 무한히 저항하면서 저마다의 생존 방식을 터득해오면 자연과 우주의 순환 원리에 적응해왔다. 바다 역시 내리쬐는 태양열을 받아 희석되어 가는 염도를 조정하고 지나가는 바람의 힘을 빌려 파도 소리에 자신의 존재 이유를 어제와 다른 방식으로 온 세상에 보여주며 지금의 이곳에 이르렀으리라. 깊은 바닷속에서 자라는 해초와 심층수, 그리고 자신보다 힘 약한 생명체를 먹이로 잡아먹고 자라는 각종 바닷고기들 역시 먹고 먹히는 가운데 오늘과 같은 존재양태와 방식으로 진화되어 왔다.


해거름 마을 공원 인증센터 바닷가.jpg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바닷속의 무수한 생명체들은 쉼 없이 흐르는 해류를 거슬러 오르며 얼마나 많은 바닷물을 삼켰다 토했다를 반복 했을까. 때로는 바닷물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생명 조직의 성장과정에 필요한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식물도 있고, 시간은 늘 언제나 그 자리에서 과거와 현재를 이어서 미래로 흐른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현재 시점에서 지나간 과거가 소환되고 상상하는 미래가 현재로 다가와 곁눈질을 하며 자신의 모습을 구상한다. 현재가 과거를 해석하다 과거에 비추어 지금 이 순간을 성찰하기도 한다. 그 순간에 언뜻언뜻 미래가 상상 속으로 날아와 현재의 심장을 뛰게 만들기도 한다. 바다는 파도로 자신의 존재의 모습을 육지 사람들에게 알린다. 늘 같은 모습의 파도로 보이지만 세상의 오물들이 바다로 뛰어들면서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받아들인 바다는 갈수록 괴로운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 나날이 타들어가는 가슴 한 구석에 쌓여가는 바다의 애절함을 파도소리가 전해준다. 오늘도 파도는 어제보다 더 처절하게 아픈 마음을 머금고 구성지게 울어대며 세상을 향해 구원의 손길을 요청하고 있다.


해거름 인증센터.jpg


받은 상처는 모래에 기록하고 받은 은혜는 대리석에 기록하라


다락 쉼터에서 송악산으로 가는 길에 소낙비가 내렸다 그쳤다, 지나가는 비를 맞다가 잠시 길옆으로 정자에서 비 그치기를 기다렸다 출발하기를 반복했다. 동쪽 하늘에는 비구름이 없지만 아직도 반대편 하늘에는 먹구름이 비를 잔뜩 머금은 채 갈 길 먼 라이더 마음을 조급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바다에 모인 강물이 절치부심 끝에 태양열을 연료로 공기 입자로 변신 한 다음 수직 상승하는 꿈을 이룬다. 공기 입자로 도처에 산재하던 수증기는 구름이라는 집 속에 살며 맑은 하늘을 잿빛 하늘로 얼룩을 만든다. 하늘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구름을 땅으로 밀어낼 때 숨어 있던 빗방울이 무리 지어 뛰어내리기 시작한다. 어느 구름이 얼마만큼의 비를 품고 있는지 알 길이 없지만 모든 비는 수직 강하해서 빨리 자신들이 살던 물길을 찾아가고 싶은 욕망을 품고 있다. 갈 길 바쁜 빗줄기는 지나가던 바람에 베이기도 하고 수평으로 저만큼 날려 엉뚱한 곳에 도달한다. 땅으로 수직 낙하한 빗물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떨어진 빗방울이 다른 빗방울과 만나 어떤 물길을 만들어 강물로 변신할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는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송악산 인증센터에 도착하기 전에 모슬포에 잠시 유난히 모래가 많은 비밀을 알고 싶었다. 몹쓸 바람이 많이 불어서 ‘몹쓸포’라고 불리거나 먹고살기 힘들어 ‘못살포’라고도 인구에 회자되는 모슬포항을 지날 때 모슬포라는 이름의 어원도 궁금했다. “모래가 많은 바닷가 마을”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사상누각(沙上樓閣)이라는 말처럼 모래는 주로 부정적인 뉘앙스를 품고 있는 단어다. 사상누각의 의미를 담고 있는 명언도 있다. “우정이 바탕이 되지 않는 사랑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 엘라 휠러 월콕스의 말이다. 모래는 그만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수시로 변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바윗돌 깨뜨려 돌덩이, 돌덩이 깨뜨려 돌멩이, 돌멩이 깨뜨려 자갈돌, 자갈돌 깨뜨려 모래알”과 같은 동요 가사처럼 모래도 저절로 생기지 않았다. 효율과 속도 복음을 거부하고 엄중한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바윗돌에서 시작한 모래는 큰 돌덩어리가 강을 타고 내려오면서 자갈이 되고 자갈은 무수한 상처를 몸에 아로새기면서 오늘의 모래가 되었다. 모래는 강물의 흐름, 계절의 바뀜, 태양열과 바람, 그리고 기온과 습도를 몸으로 섞은 자갈들이 더 작게 부서지면서 지금 내가 바라보는 모슬포 모래로 바뀐 것이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 속에서 천국을 본다”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구절처럼 모래 한 알에는 우주의 순환 원리가 숨어 있다. 하지만 여전히 모래알은 부정적인 메타포에서 멀어지지 않고 있다. “받은 상처는 모래에 기록하고 받은 은혜는 대리석에 기록하라.”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이다. 그만큼 모래는 가까운 미래 모습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하거나 산만하게 흩어져 집중이 안 되는 경우를 지칭한다. 모슬포항에서 바라본 모래는 모슬포항이 간직한 슬픈 역사를 바다에 씻겨 보내고 금빛 모래알의 빛나는 이상을 향해 자신의 몸을 갈고닦는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문재 시인의 ‘사막’이라는 시를 보면 “사막에/모래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모래와 모래 사이다“라는 구절을 만난다. 모슬포항에서 만난 모래 역시 모래보다 더 많은 것은 모래와 모래 사이다. 그 사이에서 모슬포항의 과거와 현재 사이, 현재와 미래 사이가 사연을 품고 파도 소리에 운율을 맞춰 지난 시절의 고달픔을 날려 보내고 있다.


송악산 인증센터.jpg


바다는 바위가 살아가는 인생에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송악산 인증센터에서 중문 관광단지를 지나면 법환 바당 인증센터를 만난다. 성산 일출봉이 동쪽에 있다면 남쪽을 향하고 있는 범섬은 법환 포구에서 만날 수 있다. 제주의 바위는 유독 까만색의 농도가 짙다. 우리나라 남단 바다와 남국의 이국적인 사랑을 나누려는 바위에게 바다는 애간장을 녹이는 상대다. 바다는 거친 파도를 몰고 와서 하얀 거품만 쏟아붓고 바위의 끈질긴 구애작전을 번번이 외면해왔다. 상처 받은 바위는 늘 바닷가 가장자리에서 바다의 넓은 가슴을 열고 자신을 품어주기를 기대하고 고대해왔지만 바다는 번번이 싸늘하게 외면해왔다. 버림받은 바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에게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오늘도 목욕재개 한 다음 쓸쓸하고 허탈한 마음 달래면서 속을 까맣게 태우고 있다. 어둠이 깔리면 온 세상이 깊은 밤에 빠져 잠이 들어도 바위는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고 꼿꼿하게 까만 밤을 지새운다.


법환버당 인증센터.jpg


바위의 몸 안에 서식하고 있는 바다를 향한 연정은 끊임없이 물음표를 만들어 바위에게 속삭이듯 질문한다. 하지만 바다는 못 들은 척 변함없이 바위가 들을 수 없는 파도 부서지는 소리로 하얗게 화답해왔다. 바다는 바위가 살아가는 인생에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바위는 언제나 위태로운 자세로 서 있다가 바람이 때리고 간 자리에 깊은 상처 아물고, 뜨거운 태양빛에 그을려 온몸은 까맣게 타들어간다. 간혹 뭉게구름이 지나가다 뜨거운 태양빛을 가려주는 행운도 맛보지만 바위는 동트는 새벽녘부터 해지는 저녁까지 미동도 않은 채 묵언 수행을 반복한다. 뜨거운 열기로 제 몸을 가누기 어려울 때마다 그래도 바다는 뜨거워진 바위의 몸을 식혀준다. 그것도 뼛속 깊은 사랑에 빠지지 않고 순식간에 파도를 타고 밀려들다 잠깐 사이에 저 멀리 도망가기를 반복한다. 쉴 새 없이 질주하는 자동차 행렬이 내뿜는 매연과 소음 또한 바위의 마음을 새까맣게 태우는 장본인 중의 하나다. 달리는 자동차에게 속도는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미덕이지만 가만히 서서 그 질주하는 속도감을 온몸으로 느끼는 바위에게는 견딜 수 없는 무참한 폭력이다.


범섬 법홤바당.jpg


넘어지면 일어날 수 있지만 무너지면 일어설 수 없다


송악산 인증센터에서 법환 마당 인증센터까지 어둑해지는 저녁 즈음에 도착했다. 밤길은 작은 장애물에 부딪혀도 대형사고가 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고는 잠시 방심하는 사이, 눈 깜짝할 찰나의 순간에 갑자기 발생한다. 어둠이 깔리는 자전거 길을 헤드 라이트 빛에 의존해서 온 몸이 촉수가 되어 달리던 즈음, 보도 블록의 낮은 턱을 넘어서 다른 길로 들어서려는 순간, 앞바퀴가 미끄러지면서 넘어졌다. 오른쪽 손바닥으로 땅을 먼저 집는 사이, 오른쪽 광대뼈와 턱이 동시에 땅에 닿으면서 순간적으로 지금까지 넘어져 본 경험 중에 가장 충격이 크다는 직감이 들었다. 부랴부랴 법환 바당 인증센터에 도착해서 확인해보니 턱에 조금 피가 맺혔고 다행이 오른쪽 광대뼈 부분에는 이상이 없었다. 쇠소깍 인증센터로 가는 중간 지점에서 숙소를 정한 다음 확인해보니 오른쪽 손바닥이 시퍼렇게 부어올랐고 오른쪽 새끼손가락 위에도 크지 않은 상처가 생겼다. 왼쪽 무릎 부분에도 통증이 와서 확인해보니 상처가 생긴 부위로 약간 부어올랐다.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할 수 있다(Pain is inevitable. Suffering is optional).”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이다. 넘어져 생긴 아픔은 이미 내 몸에서 진행되는 통증의 호소다. 하지만 그 아픔으로 느끼고 겪어내는 고통은 사람이 받아들이기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자전거 국토완주 그랜드 슬램을 하면서 몇 차례 넘어졌지만 약간의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경미한 사고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처음으로 얼굴과 몸 곳곳에 작은 상처와 통증이 동시에 느껴졌다. 앞으로 넘어지는 걸 엎어진다고 하고 뒤로 넘어지는 걸 자빠진다고 한다. 옆으로 넘어지는 걸 쓰러진다고 한다. 사고의 위험성은 앞으로 엎어지는 넘어지기보다 뒤로 자빠지는 넘어지기가 더 위험하다. 엎어질 경우 손으로 큰 사고를 예방할 수 있는 작은 예비 동작이 가능하지만 자빠질 경우에는 머리가 먼저 땅에 닿으면 큰 충격을 받을 수 있다. 자전거를 타다 보면 앞으로 엎어지기도 하고, 옆으로 쓰러지기도 하며 뒤로 자빠지기도 한다. 엎어지고, 자빠지고 쓰러지는 걸 다 합쳐서 넘어진다고 한다. 하지만 넘어지기는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무너지는 행동과 차이가 난다. 넘어지는 것에 비해 무너지면 다시 일어날 수 없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자전거는 앞으로 가야 하지만 앞으로 가면서도 뜻밖의 장애물을 만나 쓰러진다.


폼 잡고 1.jpg


오늘의 목적지 쇠소깍 인증센터까지 어둑해지는 자전거 도로를 계속 가는 게 위험할 수 있다고 판단, 중간 지점에서 숙소를 정하고 힘든 일과를 정리하면서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해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를 청했다. 이튿날 ‘쇠소깍’까지 가는 데 생각보다 날씨도 청명해졌고 기온도 어제보다 많이 따뜻해졌다. 먼동이 터오면서 새벽이 품은 찬 기운이 몸속으로 엄습해온다. 깊은 산속일수록 짙은 어둠을 품고 있다가 떠오르는 태양빛에 한 꺼풀씩 벗겨내면서 밝은 빛과 맞바꾼다. ‘쇠소깍’ 인증센터에서 도장을 찍고 주변을 보니 기암괴석이 양 옆은 물론 밑에도 있는 모습이 특이했다. 그게 바로 ‘쇠소깍’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쇠소깍’은 한라산에서 흘러내려는 효돈천의 담수와 해수가 만나 생긴 깊은 웅덩이라고 한다. 담수는 멋모르고 흘러 내려오다 갑자기 짠물을 만나 놀랐을 테고 해수는 담수를 만나 자신의 본질과 정체성인 염도를 위협한다는 점을 직감적으로 깨달았으리라. 하지만 이미 두 물 사이에는 경계가 없어지고 순식간에 뒤섞이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색다른 변화가 일어난다. 서로 다른 성질의 물이 화학반응을 일으켜 바위를 갖가지 형상으로 조각해낸 모습이 ‘쇠소깍’이다. '쇠소'는 '소가 누워 있는 모습의 연못'을 '깍'은 '마지막 끝'을 의미한다고 한다.


쇠소깍 인증센터.jpg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쇠소깍에서 표선 해변 인증센터를 거치는 동안은 잠잠하던 바람이 성산 일출봉 인증센터를 향할 즈음에 서서히 맞바람이 불더니 성산 일출봉 인증센터에서 김녕 성 세기 해변 인증센터를 갈 때는 앞으로 나아가기 힘에 겨울 정도로 강풍에 가까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이렇게 세게 바람을 맞아본 적이 없다. 바람도 맞아본 사람만이 바람의 세기를 감지할 수 있듯이 중심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세찬 바람이 쉬지 않고 정면으로 다가온다, 해변의 풀들이 바람보다 먼저 눕지만 불어 닥치는 바람을 피할 길은 없다. 바람은 누워 있는 풀은 건드리지 않는다. 오로지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머리를 들고 있는 생명체만 심하게 흔들고 그래도 뽑히지 않으면 뒤흔들어댄다. 사람도 살아가면서 많이 흔들리며 원하는 방향으로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면서 겪은 상처들의 얼룩을 보듬으며 고유한 무늬로 만들어간다. 갑자기 ‘최종 병기 활’이라는 영화의 명대사가 떠올랐다.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바람은 어디서 어디로 불어 가는지를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세기와 방향조차도 일정하지 않다. 내가 바람을 아는 방법은 몸으로 맞서서 느껴보고 어떻게 맞서 나갈지를 순간순간에 대응하는 길 뿐이다.


표선 해비치 인증센터.jpg


바람이 몰고 오는 위험한 위력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라이더의 처절한 비애 사이에서 자전거 길은 침묵을 지키고 앞으로 이어져있다. 바람이 분다고 뒤로 물러서거나 바람을 타고 오던 길로 돌아갈 수는 없다. 후퇴해야 후회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후퇴한다고 바람이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잠시 카페에 들어가 바람이 몰고 오는 난국을 돌파할 방안을 모색해봤다. 커피 한잔에 담긴 아프리카의 뜨거움을 몸 안으로 집어넣고 뜨거워진 몸을 자전거에 싣고 다시 거센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거센 맞바람이 잠시 동안이지만 잠잠해지거나 맞바람이 아니라 옆으로 부는 바람일 경우 온 힘을 다해 페달을 밟으며 앞으로 달려 나가려고 했다. 바람은 언제 다시 불어 닥칠지 예측할 수 없다. 앞으로 나가는 속도에 비해 바람이 달려오는 속도가 빠르면 내 몸은 움직일 수 없어서 열기가 식고 바람이 부는 속도에 비해 내가 앞으로 달려 나가는 속도가 빠르면 몸은 다시 달궈지면서 땀으로 열기를 배출한다. 김녕성 세기 해변 인증센터에 도착한 시간이 벌써 5시 30분경을 넘어서면서 짙푸른 바다가 긴 밤을 함께 지낼 육지를 짙은 어둠으로 깔기 시작했다. 잠시 인증 도장을 찍고 함덕 서우봉 해변 인증센터를 향해 피곤한 몸을 싣고 다시 출발했다.


바닷물이 달을 품에 안고 바람결에 파도로 춤을 춘다. 바닷물에 안긴 달을 바라보는 또 다른 달이 밤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자기 분신을 보내 놓고 바다의 표정과 움직임을 살핀다. 기울어져가는 쇠락의 기운을 감지한 탓인지 달빛도 퇴색되어가는 듯하다. 언뜻언뜻 비치는 자기 그림자에서 다시 차오를 보름달의 꿈을 감지한다. 깊고 짙은 어둠으로 뛰어드는 해변가의 밤을 라이딩하면서 기울어져가는 퇴락과 차오르는 충만 사이를 오고 갔던 인생의 어느 시기를 떠올려본다. 해맑은 표정보다 회색빛 청춘을 보내면서 겪은 삶의 고뇌가 깊이 있게 드리워진 얼굴에 더 신뢰가 간다. 바닷물도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면 왠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 수심이 어느 정도 깊어서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때 알고 싶은 호기심과 함께 수심에 찬 바다의 안부를 물어보고 싶다. 바닷물에 담긴 사연의 깊이가 느껴질 때 발원지에서 여기까지 흘러 내려오면서 겪었을 숱한 애환이 궁금해진다.


제주환상길 자전거 종주1 사색.jpg


새로운 의미가 사태에 채워지는 순간, 시가 탄생한다!


난생처음 바람을 가장 거세게 맞아본 오늘, 어둠 사이를 뚫고 함덕 서우봉 해변 인증센터에 도착했다. 본래 계획은 오늘 제주도 환상 자전거 길을 종주함과 동시에 국토완주 그랜드 슬램 도전의 피날레를 장식하려고 했다. 아쉽지만 바닥난 체력을 충전해서 내일 맑은 정신으로 용두암 인증센터에서 거대한 도전 여정의 종지부를 찍기로 했다. 함덕 해수욕장 부근의 한 식당에서 저녁 만찬을 하며 내일 장식할 대미를 미리 상상했다. 그동안의 대장정이 주마간산처럼 몸이라는 필름에 담긴 추억의 장면을 한 장씩 펼치면서 고기에 와인이 어울리는 향연을 미리 축제처럼 즐겼다. “술은 차갑게 마시고 차는 뜨겁게 마신다. 찬 술은 가슴을 뜨겁게 데우고 뜨거운 차는 머리를 차갑게 식힌다... 술은 물로 된 불, 차는 불로 우려낸 물이다”(44쪽). 최민자의 『손바닥 수필』에 나오는 명문이다. 차가운 술이 몸을 뜨겁게 달구고 뜨거운 차가 머리를 차갑게 만드는 비밀은 누구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까. 술과 차가 몸으로 들어올 때 만드는 화학반응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심오한 의미의 차이를 품고 있다. 머리가 복잡할 때 뜨거운 차를 마셔 열기를 식히는 이열치열의 전략으로 이해해도 되는 것인가. 하지만 차가운 술을 마셔 심장을 뜨겁게 달구는 비법은 이 한치 열(以寒治熱)인가? 참으로 신비로운 처방전이다.


함덕 서우봉 해변 인증센터.jpg


머리는 차갑고 가슴은 따뜻해야 찬 기운과 따뜻한 기운이 조화를 이루어 세상을 이끄는 아름다운 리더가 될 수 있다는 말에서도 배운다. 차가운 머리는 냉철한 이성을 낳고 따뜻한 가슴은 온기품은 감성을 낳는다. 반대로 머리가 뜨거워지고 심장이 차가워지면 한심(寒心)한 사람이 된다. 머리가 좋은 사람보다 가슴이 아픈 사람이 세상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고 눈여겨본다. 그냥 살펴보지 않고 보살피고 눈여겨본다. 그때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가슴 아파한다. 가슴이 아픈 사람은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발 벗고 나서서 벗을 고통의 나락에서 건져 올린다.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것을 본다는 것, 어떤 사실을 기정사실로 보지 않는 것이다. 물론 기정사실로 보지 않을 때, 사태는 일종의 무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 여기서 무의미는 무서운 마력을 가진다. 무의미는 시인에게 ‘당신이 의미를 빼앗아 갔으니, 당신이 새로운 의미를 채워야 한다’고 강제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의미가 사태에 채워지는 순간, 시가 탄생한다! 그리고 오직 이럴 때에만 시인은 다른 사람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태와 관계 맺는다(pp.166-167). 강신주의 『김수영을 위하여』에 나오는 말이다. 바위의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간 이유와 파도의 거품이 뭍을 만나면서 하얀 거품을 쏟아놓고 사라지는 현상에 새로운 의미로 채워지는 순간 바위와 파도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심과 상상력이 잉태되기 시작한다.


폼잡고.jpg


다른 미래는 정강이의 상처와 함께 온다!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되어 사물도 사람처럼 감정을 갖고 있다고 가정할 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에서 사유의 씨앗을 잉태할 수 있다. 같은 사람이라도 그 사람 입장이 되는 역지사지(易地思之) 체험을 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그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체험적 상상력과 공감력은 언제나 ‘체험적’이라는 형용사의 덤불에서 살아간다. ‘체험’해보지 않는 깨달음은 자칫 잘 못하면 상대방에게 ‘적’으로 돌변할 수 있다. ‘체험적’ 깨달음이어야 위험한 삶을 극복하며 모험에도 불구하고 내 삶의 소중한 보험이 되는 삶을 개척해나갈 수 있다. “바닷가의 모래가 부드럽다는 것을 책에서 읽기만 하면 다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 맨발로 그것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감각으로 느껴보지 못한 일체의 지식이 내겐 무용할 뿐이다”(p.39).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에 나오는 말이다. 오감으로 느껴서 알게 된 체험적 각성과 오로지 머리로 분석하고 종합해서 알게 된 관념적 앎에는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한다. 자전거를 타보지 않고 자전거 행복론을 주장하는 책을 읽어도 내 몸으로 겪어본 자전거 타기 경험이 없다면 자칫 잘못하면 자전거 맹신도가 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칸트가 남긴 말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개념 없는 직관(감각)은 맹목적이고, 직관(감각)이 없는 개념은 공허하다.”


오늘 바다가 아름답다면 지나가는 바람이 바다를 흔들어 깨운 덕분이다. 오늘 바다가 어제와 다르게 보인다면 하늘을 횡단하던 구름이 바다의 흐름에 맞춰 호흡을 맞춘 덕분이다. 오늘 바다가 더 높은 파도를 데리고 오는 까닭은 조만간 육상으로 불어 닥칠 태풍이 온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물고기들의 살아가며 바다에 내놓은 비린 냄새와 해조류가 뿜어내는 가스 덕분에 용두암 인증센터로 가는 길에 만난 바다는 햇살에 반사되면서 유독 은빛 찬란하다. 내 생애 가장 험난한 바람맞으며 중심에서 멀어지지 않으려고 흔들렸고, 비에 젖어 열기를 빼앗긴 몸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자전거 바퀴는 자꾸 뒤로 헛도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생긴 몸 구석구석의 상처를 보듬으며 가을 햇살을 벗 삼아 노을을 노래하며 시작한 자전거 여행이 오늘 일단락된다. “다른 미래는 현실에서나 시에서나 힘을 다한 겨룸 끝에 아침처럼, 정강이의 상처와 함께 올 것이다”(109쪽). 이영광의 『왜냐하면 시가 우리를 죽여주니까』에 나오는 말이다. 제주도 환상 자전거 길 종주하면서 가장 크게 넘어져서 오른쪽 손등과 턱밑, 그리고 무릎과 정강이 부분에 피멍이 들어 있거나 상처가 아물지 않고 마지막 고통을 토해내고 있다. 자전거 국토완주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가 당장 내일부터 다른 미래가 오지 않는다. 미래를 다르게 생각할 때, 정말 내가 원하는 다른 미래가 온다.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지면서 생긴 상처와 함께 기존 앎에도 생채기 생기면서 아픈 삶을 가슴으로 보듬어줄 따듯한 지식과 날카로운 지혜가 내 앞날을 밝혀주었으면 좋겠다.


달리는 모습.jpg


습관적인 ‘보행’이 자전거 타는 위대한 ‘행보’로 바뀌다!


함덕 서우봉 해변 센터 근처에서 두 번째 밤을 보내고 느지막이 일어나 고대하던 국토완주 그랜드 슬램을 위한 마지막 인증센터인 용두암으로 출발했다. 날씨도 한결 따듯해졌고 청명한 겨울 하늘이 우리들의 대장정을 위해 레드 카펫을 능가하는 블루 카펫으로 장식해놓은 듯했다. “소설 한 편을 쓰고 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이전의 그와 완전히 똑같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전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언어와의 관계가 변화했기 때문입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작가, 페터 비에리의 『자기 결정』에 나오는 말이다. 극토완주 그랜드 슬램을 하기 전에 자전거는 나에게 단순한 이동 수단이자 주체인 내 몸과 분리된 하나의 객체에 불과했다.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자전거가 우리나라 자전거 길 곳곳을 파헤치고 다니면서 나는 자전거이고 자전거는 내가 되는 혼연일체(渾然一體), 즉 이동 수단이나 객체가 아니라 내 신체의 일부로서 나와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가 되었다. 똑같은 자전거라는 단어라고 할지라도 나와 함께 국토완주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자전거는 내 몸이 겪은 경험을 고스란히 같이 겪었으리라. 때로는 나보다 더 극심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펑크도 나고 체인도 끊어지며 치유되기 어려운 내상(內傷)도 구석구석에 새겨졌으리라.


국토완주 그랜드 슬램 글씨.jpg


국토종주를 넘어 국토완주를 몸으로 겪으며 느끼고 깨달은 마주침의 흔적들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다. 여기저기 잔해로 남아있는 느낌과 생각의 파편들을 긁어모아 적확한 언어를 찾아 씨줄과 날줄로 엮어 문장을 직조(織造)한다. 내 몸으로 겪었어도 글로 남기지 않으면 몸으로 겪은 체험적 기억은 몸의 어딘가로 숨어버리고 종적을 감춘다. 힘든 경험에 대해 내 몸이 어떻게 감각적 반응이 어떤 울림으로 다가갔는지, 그 울림 속에서 나는 어떤 사람으로 변신해서 살아가려고 안간힘을 썼는지를 발견하기가 어려워진다. 자전거와 나, 길과 자연 생태계가 함께 어울려 만들어낸 하모니가 어울림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동차를 타고 속도와 효율 복음을 마시고 즐기는 쾌락에 빠져갈 때 그동안의 습관적인 ‘보행’을 바꿔 오로지 내 몸뚱이가 몸부림으로 굴러가는 자전거를 타는 ‘행보’를 선택했다. 자전거와 내 몸이 만나 흘린 땀방울이 전국의 자전거 길에 뿌려지면서 땀 냄새가 난다고 해도 나는 책임질 수 없다. 그것이 내 몸이 원한 본능적 욕망의 로드맵이었기 때문에 나는 내 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몸으로 겪은 신체성의 추억이 어울림의 장편 서사로 간직되기를 기원하면서 사라져 가는 기억을 붙잡고 국토완주 그랜드 슬램 마지막 후기를 쓰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사람은 구겨진 종이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