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에 체중이 실려야 살갗을 파고드는 감동이 온다
자전거를 타는 즐거움 못지않게 괴로움이 온몸을 엄습할 때가 있다. 이른 아침 다음 목적지로 출발할 때 기온은 뚝 떨어져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비가 올 때다. 비가 그치기를 마냥 기다릴 수도 없을 때 상체를 덮는 우비를 입고 가방을 비닐로 덮어 씌운 다음 빗속을 뚫고 라이딩을 시작한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서 마주치는 빗줄기는 수직으로 떨어지지 않고 수평으로 다가와 온 몸을 적신다.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에서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라고 했지만 사실 젖지 않는 이유는 이미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비에 이미 젖은 몸은 비가 아무리 많이 내려도 비에 젖지 않는다. 다만 젖은 상태를 유지하는 시간을 늘릴 뿐이다. “더 힘들어질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도 사실 더 힘들어지면 또 사라진다”(19쪽). 김연수의 《지지 않는다는 말》에 나오는 말이다. 사실 비가 오는 데다 기온까지 영하의 날씨라면 자전거를 타고 선뜻 집 밖을 나서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출발하기 전에 들었던 각종 잡념이나 걱정은 일단 어려운 상황으로 나를 몰아넣으면 걱정은 긍정으로 바뀌고 두려운 고통은 경이로운 즐거움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몸으로 경험하고 느끼는 감정이나 기분은 머리로 생각하거나 상상할 때 얻을 수 없는 체험적 각성이자 통찰이다.
고통의 흔적이 축적될 때 체험적 각성이 일어난다
자전거를 타면서 겪는 또 다른 고통은 소위 낙타등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겪는 괴로움이다. 낙타등을 오르내리는 자전거 타기는 일정 시간 동안 반복해서 연주되는 괴로움과 즐거움의 이중주다. 다 올라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느낌이 몸으로 다가올 때 내 몸으로 직면하는 느낌은 좌절감뿐이다. 정말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올라온 언덕에서 이제 내려갈 길만 남았다는 안도의 숨쉬기는 아주 잠깐의 행복이다. 마음을 내려놓고 여유롭게 힘을 빼고 내려왔는데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또 다른 언덕이 갈 길을 가로막는다. 딱 버티고 서서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언덕으로부터 조용히 자전거에서 내리라는 환청이 들릴 정도로 심한 좌절감을 맛본다. 그것도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몇 개의 언덕과 내리막을 번갈아 겪는 가운데 극한의 고통이 시작되는 시점에 이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 된다는 강인한 집념과 더불어 오늘은 여기서 적당히 마치고 휴식과 음식을 취하자고 유혹하는 다양한 나의 또 다른 군상들이 사투를 벌이기 시작한다.
“영혼은 행위란다/몸이 없는 성자들을 믿지 마라/말씀으로 아름다워진 세상은 없다.” 김선우 시인의 시집, 《녹턴》에 나오는 ‘햇봄, 간빙기의 순진 보살’이라는 시의 일부다. 근사한 말이나 위대한 생각과 아이디어는 행위 없이 아름다워 지지 않는다. 말로만 하는 사람, 위대한 생각을 품고 거창한 계획을 세우지만 막상 실행하는 과정에서는 각종 핑계나 자기 합리화시킬 수 있는 핑곗거리를 최대한 동원하면서 과감한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계획은 언제나 거창하고 원대하지만 실천은 늘 부실하거나 실종된다. 실천이 실종되는 순간 실행력을 통해 실력을 쌓는 지름길도 막혀버린다. 실행하지 않으면 실력은 몸에 붙지 않기 때문이다. 실력은 머리로 발휘하는 뇌력이라기보다 몸으로 실행하면서 각인되는 체력으로 축적된다. 자전거로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방법은 가파른 언덕을 타고 올라가면서 몸으로 느끼는 감각적 각성의 산물이다. 모든 방법에는 그 방법을 개발하는 사람의 신체적 개입이 전제된다. 몸으로 느끼는 고통의 흔적이 축적될 때 언어화시킬 수 없는 체험적 각성이 생기는 법이다.
행동의 결과로 나오는 통찰이 통렬한 자극이 된다
자전거는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는 오로지 내 육신의 고통으로 움직이는 이동 수단이다. 힘들다고 페달을 밟지 않는 순간, 자전거는 앞으로 가기를 포기하고 옆으로 쓰러진다. 자전거의 존재 이유는 오로지 움직임이 반복될 때 비로소 밝혀진다.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삶을 이끌고/오리무중의 길을 걸어온 글자들이 만삭이다.“ 이기철의 《나의 모국어》라는 시집 중에서 ‘시집들’이라는 시의 일부다.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자전거 타기의 고통은 오리무중의 막막한 길을 달려온 사투의 흔적들이 온몸에서 절규한다. 출발 전에 품는 막연한 불안감과 불확실한 기대감이 교차하지만 일단 두 바퀴를 돌려 앞으로 나아가는 순간 불안감은 기대감 쪽으로 자리 이동을 시작한다. 고통이 일정한 경계선을 넘어서면서 지금 겪고 있는 이 괴로움도 얼마 후에는 곧 끝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불안감이나 걱정을 누르고 승리하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오늘의 목적지까지 예를 들면 150Km를 가야 하고, 목적지까지 가는 와중에 심한 경사로가 있는 언덕을 몇 개 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출발 전부터 막막함을 넘어 과연 내가 목적지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하지만 일단 출발하면서 언덕을 넘고 평지를 달리면서 목적지까지의 거리가 좁혀지는 게 신체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하면 몸은 더 격렬한 움직임으로 목적지를 내 앞으로 당기려는 안간힘을 쓴다.
오늘은 자전거를 어떻게 타야 될지를 아무리 머리로 생각하고 구상한다고 그대로 자전거 타기가 현실로 구현되지 않는다. 몸으로 경험할 수 없는 경계 너머를 상상할 수 있지만 그것도 체험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상상력이 아니면 몽상이나 망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 머리로 생각한 사고(思考)의 산물은 사고(事故) 치기가 어렵다. 실행하기 전에 잔머리를 굴려도 너무 굴린다. 조목조목 따져보고 수많은 가정법을 대입해 다양한 경우의 수를 동원해서 수지타산이나 이해득실을 따져본다. 생각이 오래 계속될수록 생각은 행동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다른 생각의 꼬리를 물고 결국 행동하지 않는 이유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생각의 결과로 나온 통찰보다 행동의 결과로 나온 통찰이 생각은 물론이고 행동을 바꿀 수 있는 통렬한 자극이 될 수 있다. 비 오는 날 자전거를 직접 타 본 사람은 몸에서 나는 열기가 비와 만나면서 묘한 감각적 자극으로 받지만 언어화시켜 다른 사람에게 그 느낌을 고스란히 전달하기는 불가능하다. 반면 비 오는 날 자전거를 옴 몸으로 타본 적이 없는 사람은 머리로 그걸 생각하면서 글을 쓴다. 글이 경험에서 나오지 않고 관념에서 나올 때 글은 그 사람의 삶을 반영하거나 대변하지 못하고 겉돌기 시작한다. 살갗을 파고들지 못하고 머릿속에서 관념의 파편으로 산산이 흩어지는 이유는 몸으로 겪은 체험적 스토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살의 아날로그는 몸으로 느끼는 감촉이다
“자신의 온몸을 모두 던져 우리 외부의 시적인 것을 감지해야만 그 시는 언어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몸이 생각한다는 말이 틀리지 않는 셈이다”(273쪽). 김연수의 《지지 않는다는 말》에 나오는 말이다. 시어는 몸으로 겪은 체험적 각성이 사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밖으로 표현되는 매개체다. 몸을 관통하지 않은 시어는 시시하거나 관념의 파편이 함축과 절제미 없이 마구 표출된 감정의 쓰레기일 뿐이다. 몸으로 겪어냈지만 적확한 언어를 만나지 못하면 몸에 각인된 체험의 흔적은 감동을 주는 기적으로 태어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이 겪은 체험적 흔적이 운 좋게 언어를 만나는 순간 안간힘을 쓰면서 담아내려는 시인의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시어에 담긴다. 시인이 선택한 언어에는 압축된 감정의 농도가 절제된 상태로 긴장을 품고 숨어 있다. 체중이 실린 언어는 가볍지 않다. 한 단어, 한 문장을 쓰기 위해 사투를 벌인 시인의 흔적이 땀과 눈물로 얼룩져 있다.
“여자 사랑하기를 좋아하는 내 바람둥이 친구는 “연애란 오직 살을 부비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아, 저렇게 간단한 것을 몰라서 이토록 헤매었나는 말인가 싶었다. 살은 오직 아날로그 방식으로만 작동한다. 나는 살의 아날로그를 자세히 쓸 힘이 없다. 그것은 아직도 내 언어의 힘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살의 아날로그는 언어와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언어의 반대말은 ‘살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276쪽).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에 나오는 말이다. ‘살의 아날로그’는 몸으로 느끼는 감촉이다. 대상에 대한 가장 정직한 느낌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기껏해야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정도까지만 표현이 가능하다. 표현이 불가한 특정한 상황에서 직감적으로 다가온 느낌이나 찰나의 순간에 문득(聞得) 드는 생각,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깨달았던 교훈이나 체험적 노하우를 고스란히 언어로 전환하거나 번역할 수 없다. 여전히 몸에 남아있는 깨달음의 흔적은 언어화를 거부한다.
감각적 각성을 모두 언어적 표현으로 담아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언어로 포착되어 표현되지 않는 감각적 각성은 여전히 몸속에 남아 자신을 세상 밖으로 데리고 나갈 언어를 기다린다. 느닷없이 언어가 자신의 세계로 침범해 자신이 원하지 않는 세상으로 언어가 끌고 나갈 수도 있다. 자신을 끌고 나간 언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여전히 표정은 밝지 못하고 뭔가 불만에 사로잡혀 있는 표정이 잠재되어 있다. 대공황을 맞은 탄광촌 노동자들의 열악한 삶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 탄광 체험을 직접 해본 조지 오웰은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육체노동을 하는 광부들의 실상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어떤 육체노동이든 다 그렇다. 그것 덕분에 살면서도 우리는 그것의 존재를 망각한다. 아마도 광부는 다른 누구보다 육체노동자의 전형일 것이다. 그것은 광부의 일이 더없이 끔찍하기도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너무나 필요함에도 우리의 경험과는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 실제로 보이지도 않고 그래서 우리가 혈관에 피가 흐르는 것을 잊듯 망각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49쪽).
실제로 땅 속 깊은 탄광에서 석탄을 캐내는 광부들의 비참한 노동현장을 목격한 조지 오웰도 실제로 광부로 노동자 생활을 하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그 세계를 더 철저히 탐구하고 싶다... 현재로서는 가난의 언저리까지 밖에는 보지 못한 것 같다”(284쪽). 조지 오웰도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정리하면서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광부들의 노동현장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얼마나 처참할 정도로 힘겨운 생활을 견뎌내고 있는지를 관찰자 입장에서 기술한 것이다. 조지 오웰이 광부들의 노동현장을 보고 느낀 점은 탄진을 마셔가며 허리 한 번 제대로 펼 수 없는 최악의 근무조건 속에서 석탄을 캐내는 광부들의 노동을 언어로 그려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지 오웰이 광부들의 삶에 깊은 공감을 가질 수 있는 원동력은 본인이 직접 현장에서 체험한 깨달음에 있다.
자전거를 타면서 몸이 느끼는 감각적 각성은 반복될 수 없는 일회성의 경험이다. 동일한 길을 다시 지나간다고 해도 똑같은 감각적 각성이 동일하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그때의 도로 사정은 물론 바람과 햇빛의 세기, 자전거 상태나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의 몸 상태가 이전과 다르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 만나는 다양한 사고도 마찬가지다. 펑크가 날 수도 있고 체인이 끊어지는 경험도 할 수도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만나는지에 따라 주어진 위기 상황을 탈출하는 방법은 그때그때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사고(事故) 치면서 몸으로 겪은 체험적 흔적들이 우리들의 사고(思考)를 바꿔나갈 뿐이다.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한다고 준비된 상태로 라이딩이 안전하게 지속된다는 보장도 없다. 움직이기 전에 세운 계획과 다짐은 언제나 하늘을 찌를 정도로 사기 충만하다. 하지만 계획을 실행하는 과정에 접어들면 예상치 못한 변수가 우발적으로 마주치면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양산하는 경우도 있다. 결국 자전거 타기는 우발적 상황과의 마주침 속에서 깨닫는 깨우침으로 어제와 다른 위기대응능력으로 맞서서 나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