퐁티의 『지각의 현상학』과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조우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이
니체를 만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대화를 나눈 까닭은?
“당신은 당신의 행동 자체에 거주한다. 당신의 행동은 바로 당신이다”(681쪽). 메를로 퐁티가 『지각의 현상학』 책 마지막 패러그래프에 등장하는 문장이다. 생텍쥐베리의 『전투 조종사』에 나오는 문장을 인용한 글이다. 역자 해설 포함 700페이지가 넘은 방대하고 난해한 책에 마지막으로 인용한 문장 중의 하나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방법,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를 아는 방법은 그 사람의 생각이나 관념에 들어있지 않고 그 사람이 직접 몸을 움직여 행동하는 과정에 있다는 말이다. 내가 보여주는 행동이 바로 나다. 나는 내 몸을 움직여 행동하고 생각과 아이디어를 실천하는 가운데 비로소 자기 정체성이 증명된다는 말이다. 이어서 퐁티는 생텍쥐베리의 『전투조종사』에 나오는 다른 문장을 한 번 더 인용한다. “인간은 관계들의 매듭이고, 오직 그것만이 인간에게 중요하다”(681쪽).
인간은 지금까지 몸으로 실천하면서 다른 사람과 마주치고, 낯선 공간과 시간과 부딪히면서 맺힌 얼룩과 무늬가 관계의 매듭으로 생겨서 탄생한 사회 역사적 합작품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더 정확히 알아보려면 내가 누구와 어떤 공간에서 무슨 시간을 보내면서 어떤 관계의 매듭을 만들어왔는지를 봐야 한다. 인간은 인간관계의 시공간적 합작품인 이유다. “타인의 신체와 나의 신체는 하나의 전체, 하나의 현상의 안팎”(529쪽)이다. 내가 상대와 맺어온 관계의 매듭은 어디가 안이고 밖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나의 밖으로 상대의 안이 침투해서 들어오고 상대의 밖은 나의 안으로 접목된다. 그래서 “우리는 완전한 상호성의 협력자이고, 우리의 조망들은 서로에게 스며들며, 우리는 동일한 세계를 통하여 공존한다”(530쪽).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된 인식 기반이 비슷해지는 이유다.
나는 나의 신체다
퐁티의 현상학적 몸을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차라니 나는 나의 신체이다”(238쪽)라는 표현에 녹아 있다. 생텍쥐베리가 이야기한 한 “당신의 행동이 당신”이라고 한 말과 일맥상통한다. 몸이 없는 지각과 의식의 불가능성은 방대한 책 전체를 통해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퐁티의 강력한 주장이다. “극복해낸 것에 대해서만 말해야 한다-다른 모든 것은 잡담이고 ‘문학’이며 교양의 부족이다”(9쪽).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에 나오는 말이다. 몸이 관여되지 않는 각성은 타성에 젖은 통념일 수 있다. 몸이 개입된 깨달음이 이전과 다른 감각적 깨우침으로 몸에 육화 된다. “나는 나의 신체와 같이 사물들에 참가하고 사물들은 육화된 주체로서 나와 같이 공존한다”(289쪽). 나와 신체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나 객체가 아니다. 몸은 이미 세계-에로-존재다. 몸이 사물을 만나면 몸은 사물을 의식한 채 사물 속으로 들어가고 사물은 몸을 지향하며 자신이 담고 있는 의미를 몸속에 투여한다. 몸이 사물로 뛰어들고 사물이 몸으로 침투하면서 뒤섞이며 서로가 지향하는 의미를 매개로 공존한다. “사물은 나의 신체의 상관자이자 실존의 상관자”(479쪽)가 되는 이유다.
사물이 말하고 싶은 의미, 지향하려는 의도가 이미 몸속에 침투하면서 사물과 나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별개의 개체가 아니라 한 공간 안에서 함께 어울려 공감각하는 공존재다. 그래서 퐁티는 “사물은 우리에게 몸소 주어진다”(479쪽)고 말한다. 몸소 주어진다는 말은 인식 주체와 독립적으로 거기에 존재하면서 누군가에게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사물도 이미 의도성을 갖고 의미를 이해하려는 주체에게 적극적으로 달려가 달라붙는다는 의미다. “우리가 주체의 핵심에서 되찾는 존재론적 세계와 신체는 관념으로서의 세계나 신체가 아니다. 그것은 전체적 파악 속에서 압축된 세계 자신이고, 인식하는 신체로서의 신체 자신이다”(610쪽). 신체와 세계는 관념적 관계로 존재하지 않고 실제 서로의 지향성으로 상호 침투하며 공감하는 공존재다.
“주체는 세계, 그러나 주체 자신이 기투하는 세계와 분리 불가능하다. 주체는 세계-에로-존재이고 세계는 주체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642쪽). 나는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 세계에 던져졌다. 내가 선택해서 이 세계로 온 것이 아니다. 사회적 관습과 제도와 문화 속으로 던져진 나는 던져진 현재를 초월하여 오늘과 다른 세계로 나를 내던짐으로써 실존의 이유와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다.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할지를 끊임없이 되물으면서 내가 던져진 세계에서 사투를 벌이며 나를 찾아나가는 기투의 과정 자체가 이미 세계-에로-존재하려는 몸부림이자 안간힘이다.
주체는 진공관에 홀로 외롭게 존재하지 않는다. 주체는 이미 주도적 목적의식과 의도성을 갖고 어딘가를 지향하고 뭔가를 갈망하며 누군가에게로 향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세계-에로-존재라는 의미다. 주체는 언제나 주체성을 획득하게 만들어주는 세계 내에서 세계를 향해 몸을 움직이며 행동하고 실천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주체가 주체인 이유는 세계와의 부단한 사투 속에서 자기 존재를 관계 속에서 부단히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영혼은 행위란다. 몸이 없는 성자들을 믿지 마라. 말씀으로 아름다워진 세상은 없다.” 김선우의 시집, 《녹턴》 중에 나오는 ‘햇봄, 간빙기의 순진보살’ 시의 일부다. 영혼은 순수한 정신의 결정체로 형성되지 않는다. 영혼의 존재 증명은 몸으로 증명하는 행위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할 때 가능해진다.
신체는 공간 안에 거주한다
마치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처럼 오늘과 다른 나로 변신하기 위해 주어진 삶에서 최선을 다하며 오늘과 다른 나로 거듭나려는 삶 말이다. 누군가 이미 정해놓은 도덕과 규범, 선악에 예속되어 살아가지 말고 논리와 이성으로 재단한 건조한 삶에서 벗어나 신체성을 중심으로 발휘되는 디오니소스적 욕망을 추구하라는 니체의 말은 인간적인 수준을 넘어 너무나 인간적인 메시지로 다가온다. 이성과 합리에 짓눌려 신음했던 신체성을 이성보다 우위에 두려는 니체의 욕망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길이 퐁티의 몸과 만나면서 뒷골목에 버려진 변덕스러운 욕망 덩어리, 신체가 우리 앞에 보석처럼 나타나 갑자기 빛나기 시작한다. “그러면 확실한 발걸음과 신뢰를 가지고 지혜의 길로 나아가라! 네가 어떤 존재이든 스스로 경험의 샘이 되어 자신을 도우라! 너의 본질에 대한 불만을 던져버리고 너 자신의 자아를 용서하라. 왜냐하면 어쨌든 너는 인식으로 올라갈 수 있는 백 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사다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282-283쪽).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중에 나오는 말이다. 실체도 없는 형이상학적 관념의 파편에 매몰되지 말고 너의 두 발로 겪은 경험의 샘물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참다운 지혜를 찾아보라. 이미 너의 앞에는 그런 지혜의 보고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백 개의 계단으로 준비되어 있지 않은가.
“때로는 진지한 숙고보다 횡격막의 발작이 우리에게 더 많은 지혜를 주는 법이다.” 발터 벤야민의 말이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잔머리 굴리는 공허한 관념적 앎보다 몸으로 겪으며 격전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신체성의 체험이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깨달음을 준다. 통찰이 행동으로 유발하기보다 행동이 통찰을 낳는 경우가 많다. 불현듯 찾아오는 횡격막의 발작이 일순간 신체적 고통을 주기도 하겠지만 낯선 체험적 자극이 인식의 깊이를 파고드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현장성을 호흡하며 살아가는 현실이 참다운 진실을 몸으로 증명해낸다. 몸으로 겪은 진실만이 진정성으로 다가오며 묵직한 체중이 실린 지혜다.
퐁티는 그래서 “나는 장(場)의 체험”(607쪽)이라고 말한다. 장(場)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장은 공간에 내가 거주하면서 신체적인 감각으로 느낀 오감각의 집합체다. 시장에 가면 지역 공동체의 삶이 씨줄과 날줄로 엮여 사람 살아가는 체혼을 느낄 수 있는 이유다. 장은 신체가 공간에 깊이 개입되어 공간과 함께 살아가면서 인간적 고뇌가 곳곳에 배이면서 생긴다. “신체는 공간 안에 있지 않고 공간에 거주한다”(223쪽). 신체가 공간 안에 있다는 이야기는 신체는 객체로서 공간에 잠시 들어왔다 나갔다는 의미다. 신체가 공간 안에 거주한다는 의미는 신체적 욕망과 의도가 공간을 파고들면서 남긴 흔적이 깊은 사연과 함께 공간에서 살아 숨 쉰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우리의 신체는 공간 안에 있지 않고 공간에 속해있다”(235쪽)는 표현이 적확한 주장이다.
시각은 관망이 아니라 낯선 행동이자 접촉이다
퐁티는 “신체의 공간성은 위치의 공간성이 아니라 상황의 공간성”(168쪽)이라고 말한다. 위치의 공간성은 공간 안에 표시된 물리적 흔적의 다른 이름이다. 신체가 공간에 거주하고 거기에 속한다는 말은 공간에 거주하는 신체가 남긴 피와 땀과 눈물의 흔적이 존재할 때 상황의 공간성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위치의 공간성에서 상황의 공간성으로 바뀌려면 몸 자신이 특정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그 공간에서 체험한 희로애락의 흔적과 얼룩이 담겨 있어야 한다. 위치의 공간성은 관념적으로 이해되는 대상이지만 상황의 공간성은 신체적 개입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확보될 수 없는 공간성이다. 그래서 공간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객체들 사이에 존재하는 허공이 아니라 공간에 존재하는 신체와 사물과 공간이 함께 어울려 공감하는 공존이다.
지각 주체와 대상이 공간이 만들어주는 특정 상황적 맥락에 따라 몸을 매개로 뒤섞일 때, 위치의 공간성은 상황의 공간성으로 재탄생된다. 신체가 공간에 거주할 때 공간이 비로소 인간적인 공간으로 재탄생되는 것처럼 공간의 “대상에 주목한다는 것은 그 대상에 거주하는 것”(125쪽)이다. 대상은 나의 탐구과정을 기다리는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나의 의식적 지향 대상으로 이미 내 몸 안으로 들어와서 지각되는 현상이다. 여기서 말하는 “현상은 내 안의 실재요, 의식의 존재는 자기에게 나타남이다”(564쪽). 현상은 바깥에 존재하는 대상이나 사물의 존재 자체를 지칭하지 않고 내 의식세계로 편입되어 지각된 대상이다. 현상은 이미 나의 의식적 노력으로 일정한 의미체계를 품고 다시 태어난 대상이다.
이처럼 “감각한다는 것은 언제나 신체와의 관련을 포함한다”(103쪽). 신체성이 개입되어 오감각으로 지각할 때 비로소 사물이나 대상은 나의 의식 속으로 편입된 현상으로 재탄생된다. 대상이 현상으로 탈바꿈되는 과정은 대상으로 침투된 신체성이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순간이다. “감각은 지향적”(327쪽)인 이유다. 세계-에로-존재하려는 신체성이 지향하는 감각 역시 지향적인 이유다. 감각은 앉아서 느끼는 수동적 느낌이 아니다. 감각은 신체가 적극적으로 관여된 행동이다. 퐁티가 “시각은 행동”(562쪽)이자 곧 “나의 존재와 세계의 존재의 동시적 접촉”(563쪽)이라고 표현한 이유다. 이것저것 보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장소나 위치도 바꿔가면서 내 주위의 시각적인 주변을 깨우고 그것이 내 몸으로 들어와 공감각적 존재가 되는 과정을 통해서만 사물이나 현상을 볼 수 있다. 퐁티의 표현에 따르면 사물에 의한 ‘붙둘림’ 또는 ‘사물 속으로 달아남’ 없이 사물은 나의 신체 속으로 파고들어 감각적 인식을 깨우치지 않는다.
“그때 눈은 지식에 항의하게 된다 : 그렇게 항의하면서 어떻게 눈이 진정 즐거울 수 있을까?” (349쪽).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에 나오는 말이다. 감각은 지향적이고 시각은 행동임과 동시에 기존 지식이 발목 잡고 새로운 상상력을 방해하려는 노력에 반기를 드는 항거다. 새로운 시각을 통해 상상력을 잉태하지만 기존 지식이 안 된다고 트집을 잡거나 무한한 가능성의 문을 닫아버린다.
수동성은 또 다른 적극성이자 자발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각은 이전과 다르게 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아무리 힘든 노력을 거듭해도 사물이나 대상에 대한 지각적 노력으로 그것의 본질이나 정체를 드러내지 못한다. “지각적 ‘종합’은 미완성이어야 하고 오류의 위험에 노출됨으로써만 나에게 ‘실제적인’ 것을 제공할 수 있다”(563쪽). 미완성일 때 더 알고 싶은 아니 더 채워 완벽에 가깝게 만들고 싶은 욕망의 물줄기가 흐른다. 완성되었다고 생각할 때 지각적 노력은 거기서 탐험을 멈춘다.
더구나 우리의 앎이 오류투성이라고 생각해야 더 낮은 자세로 배움을 겸손하게 이어나간다. 니체도 비슷한 맥락에서 불완전한 앎에 대한 인간적인 매력을 말한 적이 있다. “불완전한 것은 종종 완벽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다... 완벽한 것은 효과를 약화시킨다”(199쪽).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에 나오는 말이다. 불완전하다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식이 완전함을 향한 앎을 멈추지 못하게 막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교훈이다. 완벽한 앎에 도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지각을 통해 알아낸 인식이 오류투성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어제와 다른 신체적 감각으로 대상을 의식하고 지각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대상의 의식은 반드시 대상 자신의 앎을 포함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대상을 피해 가고 파악하지도 못할 것이므로, 의지한다는 것과 사람들이 의지하는 것을 아는 것, 사랑한다는 것과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을 아는 것은 하나의 행동일 뿐이며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의식이요, 의지한다는 것은 의지한다는 의식이다. 자기의식을 가지지 않는 사랑이나 의지는, 무의식적 사고가 사고하지 않는 사고이듯이 사랑하지 않는 사랑이요, 의지하지 않는 의지다”(564쪽). 의지와 사랑은 이미 의식과 인식을 넘어 행동이다. 의지는 이미 의지를 통해 실천하고 싶은 행동을 담고 있으며, 사랑은 이미 사랑을 통해 구현하고 싶은 행동을 잉태하고 있다. 의지로 지향성에 불을 지르고 사랑으로 앎에 불을 지필 때 의지와 사랑은 의식에 머무르지 않고 디오니소스적 욕망으로 과감하고 열정적인 실천의 불길을 태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목숨을 거는 적극성은 사랑받는 수동성을 전제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사람이 수동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낯선 실재성을 받아들임이나 외부가 우리에게 작용하는 인과성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앞서 존재하는, 우리가 끝없이 반복하는, 우리 자신을 구성하는 둘러싸임이고 상황 속에 있음이다. 단번에 획득된 자발성이자 그 획득에 의해서 존재로 영속하는 자발성이야말로 정확히 시간이요 주체다”(638쪽). 사랑받는 수동성은 속수무책으로 어쩔 수 없이 당하는 소극성이나 어떤 외부적 개입으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인과성이 아니다. 오히려 수동성은 적극성에 능동적으로 반응하는 자발적 자기 방어다. 적극적 구애자는 그 사랑에 목마를 사람이 수용하는 순간 수동적으로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적극성은 수동성의 다른 이름이고 수동성은 적극성의 다른 얼굴이다.
질병은 인식의 수단이자 낚싯바늘이다
“한 사람 속에 의사와 환자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나는 지금까지 시도된 적이 없는 정반대의 영혼의 풍토로, 즉 낯선 고장과 낯선 것 속으로 물러서는 방랑과 모든 종류의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을 나 자신에게 강요했다”(16쪽).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에 나오는 말이다. 의사의 적극적 치료행위(agency)는 환자의 감당 능력(patience) 없이는 무의미하다. 니체는 약 10년간 극심한 질병에 시달리면서 몸으로 겪어내는 고통 체험으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책을 썼다. 고통이 몸을 관통하는 순간, 세계를 지향하는 자신의 몸을 무기로 세계를 움직이는 선악과 도덕, 종교와 신앙, 예술과 저술, 전문가와 전문성, 행복과 불행 등 거의 모든 분야를 관조하고 관찰하며 얻은 통찰의 결과를 책으로 남겼다. “질병은 인식의 수단이며, 인식을 낚는 낚싯바늘로서 반드시 필요하다”(14쪽).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에 나오는 말이다.
질병이 건강한 인식의 씨앗을 잉태하게 만들었으며, 세계를 이해하는 날카로운 비판적 무기를 정련하게 만들었다. 퐁티 역시 니체와 비슷한 맥락에서 “철학은 자기 파괴를 통해서 분리됨으로써 자신을 실현한다”(681쪽)고 했다. 니체를 전복의 철학자이자 망치 철학자라고 칭하는 이유는 기정사실로 믿고 있는 형이상학적 신념이나 가치관을 망치로 깨부수고 근본과 정초까지 다 파괴한 다음 새로운 철학적 건축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철학적 인식은 고통스러운 자기 파괴의 과정을 통해서만, 그리고 타성과 통념에 젖은 과거와 결별과 분리를 통해서만이 새로운 자리매김을 할 수 있다.
니체는 같은 맥락에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에서 비슷한 고백을 이어가고 있다. “나의 항해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위험하고 고요한 바다에 있었던 과거의 한 시기에 대한 경의와 감사였다...... 실제로는 하나의 분리이며 결별이었다”(10-11쪽). 과거는 그냥 흘러간 옛날이야기가 모이는 곳이 아니다. 인식과 실천의 처절한 싸움이 강물처럼 흘러가는 곳이지만 그런 과거의 기억이 지금을 살아가는 기반이 되며 미래를 상상하는 터전이 된다. 하지만 과거의 연장선상에서 탑을 쌓고 집을 증축하는 노력을 넘어서 때로는 과거와 단절하고 과감한 이별을 선언할 때 낯선 출발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내가 썼던 철학적 개념도 그 당시의 문제의식의 산물이다. 그래서 “모든 단어에는 자신의 냄새가 있다”(301쪽)고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에서 밝히고 있다.
한 시기의 철학자가 남긴 개념이나 원리는 그 당시를 살아간 철학자의 사투의 흔적이 담긴다. 내가 살아가는 삶만큼 철학을 할 수 있고, 그 결과를 글로 남길 수 있다. 내 삶을 능가하는 철학과 철학적 저술은 불가능하다. 니체가 “모든 단어는 하나의 편견”(266쪽)이라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에서 말한 이유도 철학자의 참을 수 없는 인식의 불만감이 주관적 문제의식을 만나면서 정제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모든 시작은 위험하지만 시작하지 않으면 위대해질 수 없다
모든 철학자는 자기만의 신념을 개념에 담아 새로운 사유체계를 건축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하나의 신념에 매몰된 나머지 자신과 다른 신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신념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체념하게 만드는 탁상공론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니체는 “신념은 거짓말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391쪽)이라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에서 말한 것이다. 신념에 찬 사람은 자기 주도적이며 자발적으로 문제를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사람이면서 동시에 자신과 다른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위험한 고정관념의 소유자일 수도 있다. 진리는 언제나 내 몸을 관통하고 남은 흔적과 얼룩들이 숱한 시행착오와 세상의 비난이 던지는 화살을 온몸으로 맞고 생기는 상처의 산물이다. 그때마다 진리는 수많은 신념의 용광로에서 온몸으로 견디면서 새롭게 태어나는 운명을 타고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니체는 “개념과 감정은 액체이며 관습은 고체”(280쪽)라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에서 언급한 바 있다. 개념과 감정은 시대변화에 따라 일정한 시기마다 수시로 변하지만 개념과 감정을 기반으로 형성된 관습은 자신도 모르게 습관으로 고정되어 어지간한 충격으로는 부서지지도 않는다.
“어떤 강물도 자기 자신에 의해 크고 풍부해지지는 않는다 : 오히려 아주 많은 지류들을 받아들이며 계속 흘러가는 것, 그것이 강물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400쪽). 니체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에서 한 말이다. 고욤나무 줄기에 상처를 낸 다음 감나무 가지를 접목하면 고욤나무 줄기에 붙어 있는 감나무 가지에서 고욤이 열리지 않고 감이 열린다. 본래 내가 품고 있는 지식보다 몇 갑절이나 더 큰 지혜의 열매는 내 몸에 다른 사람의 고통스러운 깨달음이 접목될 때 가능하다. 강물 역시 바다로 흘러가면서 숱한 지류들을 받아들이고 끌어안으면서 큰 물줄기를 만들어 바다에 투항하는 것이다. 철학자 역시 자신이 창안한 개념과 통찰에만 머무르지 않고 부단히 다른 지류에서 만든 색다른 개념과 문제의식을 받아들여 내 것으로 체화할 때 기존의 앎을 초월하는 새로운 인식과 사유체계가 구축된다.
퐁티는 니체의 인간적인 면모에 못지않게 너무나 인간적인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우리의 선택이나 행동들이 우리의 자유를 제한한다고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선택과 행동은 오로지 우리를 우리의 닻으로부터 해방시키기 때문이다”(680-681쪽). 닻을 풀고 돛을 높여서 항해를 시작했지만 예기치 못한 덫이 곳곳에서 발목을 잡는다. 니체도 말하지 않았던가. 모든 시작은 위험하지만 시작하지 않으면 위대한 결실도 낳지 않는다고. 과감한 선택과 행동이 우리를 위험에 빠뜨린다고 해도 선택해서 행동하지 않으면 닻에 묶여 거친 파도를 몸으로 겪어내는 노련한 뱃사공의 놀라운 체험적 지혜를 얻을 수 없다. 비록 내가 겪어낸 경험과 체험적 통찰이 지금 여기서는 낯설게 다가간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거친 파도를 거슬러 미지의 세계로 진출하는 항해를 멈춰서는 안 된다.
신체만이 우리를 구원해줄 전체다
“훌륭한 책들은 모두 세상에 나왔을 때 떫은맛을 낸다 : 그 책은 새로움이라는 결점을 가지고 있다... 훌륭한 독자는 책을 점점 더 훌륭하게 만들고, 훌륭한 반박자는 책의 문제를 해결해준다”(98쪽).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I》에 나오는 말이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익은 책은 반감 없이 쉽게 받아들여진다. 낯선 깨달음이나 기존 앎의 체계를 불편하게 만드는 교훈이 없기 때문이다. 읽는 순간 공감되는 내용이 많은 것도 문제다. 기존 앎에 생채기를 내지 못하는 책이다. 그래서 니체는 사람들의 입맛을 거스르는 떫은맛의 책이 나와야 훌륭한 독자가 나타나 다양한 반박을 할 것이고 그런 반박을 견뎌낼수록 세상의 반전을 일으키는 훌륭한 책으로 변신시켜 준다는 것이다.
“하루하루를 잘 시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은 눈을 뜨면 그날 적어도 한 사람에게 한 가지 즐거움을 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하는 일이다”(418쪽).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에 나오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잠언이다. 한 사람에게 한 가지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해 퐁티와 니체는 오늘도 몸으로 겪어내는 신체성으로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나갈 것이다. 몸으로 겪어낸 깨달음의 보고가 많을 때 다른 사람에게도 깨달음의 바다로 끌어들일 수 있는 지혜를 갖출 수 있다. 퐁티는 니체를 만나 신체를 철학의 중심에 두고 기존 철학을 해체하는 과정을 몸으로 배우면서 몸 철학이야말로 나와 관계를 회복하고 세계를 이전과 다르게 이해하는 근본적인 철학임을 새삼 몸으로 느꼈다. 신체만이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는 유일한 전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