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나발루(Kinabalu) 입산 여정을 마치면서
도전하는 사람만이 뜻밖의 선물을 받을 수 있다
키나발루(Kinabalu) 등정 여정을 마치면서
왜 모든 산의 정상은 우뚝 솟아 지상을 내려다보고 세상을 굽어보는 모습으로 그 위용을 자랑하는 것일까. 정상에 오른 사람만이 정상에서 비정상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도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정상에 오른 사람은 하나같이 비정상적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정상으로 인식되는 산의 모습은 오르는 사람에게 늘 정상에 오르기까지의 우여곡절의 여정을 한 몸에 품고 범접하기 어려운 위용과 거역하기 어려운 신화적 전설로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 비상하는 상상력을 자극해왔다. 산은 나에게 늘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입산의 주체였다. 남보다 빨리 오르는 데에만 전력투구하는 등정주의(登頂主義)와 남다른 방법으로 올라가는 과정에 의미를 두는 `등로주의(登路主義)`다. 정상에 올라가는 목적은 같지만 올라가는 여정과 방법은 다르다. 산에 오르는 모든 순간을 감탄과 경이의 순간으로 맞이하면서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 오를수록 호흡은 가쁘게 심장을 요동치게 만들고 순간적으로 포기하고 싶은 충동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가야 된다는 갈등 속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앞으로 옮겨 놓지 않으면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절박감 자체가 나를 살아있게 만드는 숨은 원동력이다.
키나발루산은 신비의 영산(靈山)이다
평소 꿈꾸는 게 몇 가지 있다. 그중에 세계 7대 대륙 최고봉을 다 올라가 보는 게 평소 꿈꾸는 버킷 리스트 중의 하나다. 2015년 탄자니아에 있는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5,800m) 정상을 오른 이후 코로나 탓이기도 하지만 잠시 중단되었던 도전의 꿈은 식지 않고 늘 가슴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2019년 유럽의 최고봉 앨브러즈(5,640m)에 오르는 꿈을 꾸었지만 러시아 전쟁과 코로나 19 사태로 꿈을 접고 절치부심하다 잡은 대안 코스가 코타키나발루에 있는 키나발루 산(4,095m)다. 4,095m를 1박 2일에 오른다는 여행사의 간단한 정보가 이미 킬리만자로를 오른 나에게는 만만해 보였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지금껏 도전한 버킷리스트, 예를 2012년 사하라 사막 마라톤이나 2014년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도전과 제주도 100km 마라톤에 도전한 경험보다 훨씬 더 힘든 사투의 여정이었다. 힘든 상황에 처할수록 사람은 이전과 다른 방법으로 힘을 쓰는 여러 가지 방법을 매 순간 고민하고 그 지점, 그 순간에 결단을 내리고 바로 행동에 옮기지 않으면 위험한 순간에 빠질 수 있다. 산을 오르는 사람에게 한 걸음은 일생일대의 가장 겸손한 내디딤이며 정신은 늘 살아있음의 증표다.
키나발루(Kinabalu) 산은 말레이시아 있으며,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섬, 적도가 관통하는 보르네오(Borneo) 섬 동북쪽에 있다. 하나의 섬이지만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세 나라가 나눠서 영토를 지배한다. 섬 아래쪽은 인도네시아가, 위쪽은 말레이시아와 브루나이 영토로 분할되어 있다. 키나발루 산은 “산의 조상”이라는 신화적 전설로 산 아래 사는 사람들이 신비의 영산(靈山)으로 떠받는 산이다. 키나발루 산이 왜 신비의 영산인지 막상 정상에 올라 키나발루 정상을 품어봤을 때 직감적으로 온몸을 휘감으며 정상을 둘러싸고 휘감아 몰아치는 바람과 함께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온몸을 파고드는 신비한 영감을 잊을 수 없다. 금방이라도 나를 날려 버릴 것 같은 거센 바람은 나약한 인간 존재의 미천한 모습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조금 늦게 도착한 탓에 키나발루 정상에서 맞이하는 환상적인 일몰은 나를 외면했지만 구름 사이로 뜨겁게 타오르는 일출의 경이로운 순간은 잠시 말을 잊게 만들었다.
2015년 6월 5일에는 코타키나발루는 가장 슬픈 소식을 품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1964년 탐방로를 개방한 이후 키나발루 사람들이 경험한 최악의 인명사고이자 전대미문의 강진이 일어난 해이기 때문이다. 역사상 가장 큰 진도 5.9의 지진이 발생해 18명이 숨지기도 했던 아픈 추억을 갖고 키나발루 산을 등정하는 감회는 남다르다. 이곳에 사는 카다잔두순족의 영혼이 묻혀 있기도 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고로 죽음을 맞이한 등산객들의 슬픈 과거도 함께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신비의 영산, 키나발루 산의 영혼이 인간에게 내린 경고이자 저주라고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믿고 있다. 키나발루 산은 단순히 등산객을 부르는 등반코스를 넘어서 지구 상에서 쉽게 발견할 수 없는 다양한 생명체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생태계의 보고이기도 하다. 키나발루 국립공원의 면적은 서울(605.21㎢)은 물론이고 싱가포르(719㎢)보다도 큰 753.7㎢ 정도라고 한다. 이 공원 안에 지구 식물의 2.5%, 식물 종류만 6000개가 넘게 살아서 단위 면적당 가장 많은 식물이 사는 지역이라고 한다. 지구에서 가장 큰 꽃 라플레시아라는 희귀종도 키나발루 산자락에서 서식한다(중앙일보, 2019.4.27.일자 기사 참고)..
첫 째 날 등반 일정은 키나발루 공원 HQ의 팀폰 게이트(Timpohon Gate-1,866m)에서 해발 3,272m에 위치한 파나라반 산장(3,314m)까지 오르는 것이다. 어제 코타키나발루 공항에 12시 밤늦은 시간에 도착, 2시간 정도의 운행 끝에 키나발루 국립공원의 산장에 새벽 3시 즈음 도착, 간단하게 짐을 풀고 산에 오르는 데 필요한 물품만 챙기고 나머지 짐은 가이드 차량에 옮겨야 했다. 담당 가이드와 함께 등반에 필요한 모든 등록을 마치고, ID TAG를 착용하고 등반 시작 지점인 팀폰 게이트로 이동, 보르네오 최고봉인 키나발루산 등반을 시작했다. 키나발루 산은 4계절을 다 경험하는 묘한 산이다. 산 아랫자락은 열대 기후라서 반팔과 반바지로 등반을 시작한다. 3,000m에 가까워질수록 고산 기후가 나타나면서 서늘한 가을 기운을 느끼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늦가을이나 초겨울의 날씨를 경험한다. 다양한 기후가 공존하는 키나발루 국립공원 산자락에 세계 어디에서도 구경할 수 없는 희귀한 식물이 자라는 까닭이다. 키나발루 국립공원을 왜 전 세계 식물의 낙원이라고 불리는지를 등산 초입부터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생태계의 다양성을 경험할 수 있어서 키나발루 국립공원은 2000년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런 키나발루 국립공원의 생태학적 다양성과 신비한 기후변화를 산 높이에 따라 다른 온도차를 경험할 수 있는 즐거움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등반 초반부터 가파른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면서 정상까지 이르는 등반 일정이 평탄하지 않음을 암시해주었다. 라반라타 산장에 대강 오후 4시 전후면 도착한다는 가이드의 말을 믿고 그저 앞사람의 발뒤꿈치만 보고 걸어 올라갔다. 올라가면 언젠가 원하는 오늘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작은 희망 하나 품고 괴로운 순간의 유한 반복이 되기를 믿을 뿐, 지금 이 순간에는 어떤 도움도 스스로 견뎌내야겠다는 다짐과 결단을 능가할 수 없다. 오로지 내 몸이 땀 흘리며 앞으로 내딛는 발걸음만이 나를 진일보하게 만드는 유일한 원동력이다.
등산은 우공이산(愚公移山)이다
제1 휴게소 칸디스 쉼터(Pondok Kandis Hut)는 해발 1,951m에 있으며, 팀폰 게이트로부터 0.5km, 약 25분 정도를 걸으면 나타난다. 첫 번째 쉼터에서 맞이한 짧은 휴식은 앞으로 걸어 올라갈 등반의 암담함을 감춘 채 우리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열대우림이 주는 삼림이 폭염에도 불구하고 서늘한 그늘을 선물로 주었다. 잠시 쉬고 싶은 충동이 자주 나타나는 이유는 초반부터 급경사를 오르는 계단이 숨 쉴 틈도 없이 빈번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제2 휴게소 우바 쉼터(Ubah Hut)까지는 해발 2,134m이며, 팀폰 게이트로부터 1.5km, 제1 휴게소로부터 약 15분 정도 걸으면 만날 수 있다. 산 높이로는 200m도 안 되고 거리상 1Km 남짓한 거리지만 피부로 감지되는 거리는 생각보다 길었다. 초반에 만나 계단은 물론 단계적으로 올라가라는 신호였지만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장애물이 아닐 수 없다. 앞을 다투어 밀고 당기는 입산 행렬은 무한대로 반복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계단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힘겹게 넘어서는 계단은 한두 번의 고행으로 끝나는 인생의 단계가 아니라 넘어도 넘어도 끝나지 않고 이어지며 포기하지 말고 계속 가라고 메시지를 던지는 훈계처럼 느껴졌다.
제3 휴게소 로위 쉼터(Lowii Hut)는 팀폰 게이트로부터 2km, 제2 휴게소로부터 약 25분 정도 소요되는 지점에서 제4 휴게소인 멤페닝 쉼터(Mampening Hut)까지는 팀폰 게이트로부터 3.3km, 제3 휴게소로부터 약 30분 정도 될 때까지 우리들의 최대 관심은 어디서 점심을 먹고 심기일전(心機一轉)할 것인가였다. 고심 끝에 제4 휴게소를 넘어 제5 휴게소, 라양라양 쉼터는 해발 2,621m, 팀폰 게이트로부터 4Km 지점이다. 여기가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최적의 휴게소였다. 라양라양 휴게소는 제4휴게소로부터 35분 정도 소요되는 지점에 위치한다. 휴게소 중에서 가장 넓은 시설을 갖고 같이 모여 앉아서 점심을 먹기에 가장 좋은 장소였다. 도시락으로 싸준 점심용 포장박스를 여는 순간 한식을 아는 한국분이 싸준 정성스러운 도시락이라는 점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얀 쌀밥을 덮고 있는 계란 프라이와 함께 볶음 김치, 콩자반, 멸치 볶음, 그리고 당근과 같은 밑반찬을 먹으면서 앞으로 다가올 힘든 여정을 극복할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었다. 마음에 점을 찍는 점심을 먹고 다시 힘을 모아 제6 휴게소인 빌로사 쉼터(Villosa Shelter)로 발길을 늦출 수가 없었다. 제6 휴게소는 해발 2,896m 팀폰 게이트로부터 5Km 지점, 제5 휴게소로부터 45분 정도 소요되는 지점에 있다. 제6쉼터에는 헬기장인 "헬리포트"가 있어 비상시 이용되며 날씨가 맑을 때는 정상의 웅장한 경치를 볼 수 있다.
산을 오를수록 등산로에는 활엽수는 줄어들고 고산지 침엽수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자세를 낮추고 언제 불어닥칠지 모르는 바람의 위협 앞에 자연의 생명체는 오랜 세월을 통해 깨달은 삶의 지혜를 온몸으로 배워온 것이다. 고산일수록 저산 지대보다 낮은 자세로 땅과 함께 혼연일체가 되는 이유다. 나무가 자라면서 견뎌내는 시간의 고통을 자기 몸에 새겨 만든 세월의 흔적을 나이테라고 한다. “나이테는 그 여름의 연서이자 그 겨울의 난중일기다...나이테는 제 가슴에 새긴 목판 경전이다.” 반칠환 시인의 ‘둥근 시집’이라는 시의 문구다. 나이테는 여름에는 한가롭게 자라면서 낭만적인 연애편지를 쓸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롭게 자라지만 겨울에는 치열한 생존경쟁을 해도 성장할 수 있을지를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한 마음으로 기록한 난중일기라는 표현이다. 나이테는 나무가 자라면서 희로애락을 겪으면서 자기 몸에 아로새긴 목판 경전이라는 말에 키나발루 산 등정 중에 만난 나무가 우러러 보였다.
제6 휴게소로부터 약 25분 오르면 오늘의 목적지 산장까지 가는 데 만나는 마지막 휴게소가 제7 휴게소인 파카 동굴(Paka Cave) 쉼터다. 제7 휴게소는 해발 3,190m, 팀폰 게이트로부터 5.5Km에 위치한다. 팀폰 게이트로부터 6Km 지점에 있으며 제7 휴게소로부터 약 35분 정도 소요되는 라반라타 산장(Laban Rest House, 3,273m)에 도착하게 된다. 한 걸음의 반복적 축적이 인생의 반전을 일으키는 디딤돌이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움직인다는 우공이산의 신화가 등산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난다. 세상의 모든 기적은 흔적을 축적하는 고단한 반복 끝에 맞이하는 경이로운 선물이다. 산을 오르면서 만나야 할 최고의 산은 우공이산(愚公移山)이 아닐 수 없다.
한숨은 숨넘어가는 호흡 끝에 맞이하는 순간의 여유로움이다
머리가 약간 지끈지끈 아픈 증상은 고산증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초기 신호다. 하지만 우리를 반기는 티 없이 맑은 하늘을 수놓기 위해 몰려드는 구름이 오르는 동안 겪었던 온갖 시름을 한 방에 날리고도 남을 만큼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 주었다. 간단히 여정을 풀고 방배정을 받은 다음 오후 4.30분부터 저녁 식사가 시작된다. 산 중턱에 있는 산장이라서 4인실에서 12인실까지 남녀노소 국적을 불문하고 한 방에서 피곤한 일정을 마무리하고 일찍 자야 한다. 다음날 새벽 2시 30분부터 키나발루 정상 등반 일정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싱가포르에서 온 두 남자와 같이 4인실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다음 새벽 한 시에 눈이 떠졌다. 밤새 한 잠도 못 잔 밤은 아마 근래 내가 보낸 최초의 시간이 아닐까 할 정도로 심하지는 않지만 머리가 지끈지끈 뒷골을 당기면서 새벽 등반의 출발을 어둡게 만들었다.
새벽 1시에 일어나 등반 준비를 하면서 간단하게 정상에 오르는 최소한의 에너지를 몸에 충전하기 위해 입맛이 전혀 없지만 억지로 빵 한 조각과 계란 프라이 하나를 강제로 먹고 2시 30분에 정상을 향한 고된 등정이 시작되었다. 산행을 새벽에 시작하는 이유는 정상에서 일출을 맞이하기 위해서다. 새벽 2시 30분에 출발해서 어둠을 뚫고 산장에서 출발하자마자 급경사를 오르는 계단을 만난다. 오로지 앞사람의 뒤꿈치를 믿고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는 순간은 매번 숨이 막히는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이 반복될 뿐이었다. 앞사람이 가던 길을 멈추면 나도 멈춰야 하지만 내 몸이 쉴 수 있는 가장 소중한 멈춤의 순간이다. 하지만 내가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쉬는 동안 내 앞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앞사람의 뒤꿈치는 더 이상 보이지 않고 나를 쫒던 뒷사람들의 행렬이 서서히 나를 앞질러가 가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앞질러가는 사람과 너무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마지막 남은 안간힘을 쏟아붓는 악전고투가 시작되었다.
베이스캠프 산장(3,273m)을 출발하여 나무와 숲을 사이로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다 만나는 화강암 절벽은 어둠을 뚫고 기어올라야 할 난공불락의 장벽처럼 보였다. 오로지 바위 위로 늘어뜨린 밧줄이 나의 생명줄이자 희망의 마지노선이었다. 힘겨운 싸움이 끝날 것 같지 않았지만 마지막 남은 힘을 다 쏟아부으며 1시간 30분 정도 오르면 체크포인트인 사얏사얏 대피소가 나온다. 사얏사얏 대피소에서 키나발루 산 정상(4095m)까지는 아직도 3시간 정도 사투를 벌여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다. 한 발자국을 내딛는 동작 자체가 위대한 한 걸음의 연속이다. 수직 절벽에 가까울 정도로 절박한 결심 없이는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장벽이 내 앞으로 가로막고 있다. 매 순간이 결단의 순간이다. 심장박동은 더욱 거세지며 호흡은 가파른 절벽만큼 절박하게 내몰아 쉴 뿐이다. 숨이 막힐 지경을 몇 번이나 넘어서야 한 숨을 쉬며 여유롭게 숨을 쉴 수 있을까. 숨넘어가기 일보 직전의 호흡을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내뱉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얼마나 더 반복해야 내가 꿈꾸는 등반의 반전이 일어날 수 있을까.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어봐도 산은 대답 없이 묵묵히 나의 다음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절벽은 넘을 수 없는 철벽이 아니라 희망이 잉태되는 새벽이다
키나발루산 정상 등정의 길은 쉽지 않은 등반가의 꿈의 등정이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세월의 시름을 끌어안고 모진 풍파를 견디며 살아남은 자의 가슴앓이를 보는 듯 새까맣게 타들어간 속마음을 바위들이 내보이는 듯 주변을 둘러싸고 악전고투를 반복하는 우리들을 위로해주고 있다. 저마다의 위치에서 힘든 삶을 살아내기 위해 전쟁과도 같은 삶을 사는 우리들에게 키나발루 산으로 향하는 여정에 만난 바위들의 형상 역시 세찬 비바람을 맞으며 겪어내 삶의 형상들이 고스란히 드러나면서 한편으로는 힘든 사투를 벌이고 나에게 어둠을 뚫고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듯하다. 정상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국적이 저마다 다양한 이유도 키나발루 정상이 전해주는 감동을 선물로 받기 위해 전 세계에서 날아온 까닭이지 않을까.
키나발루 산은 등반 코스 중에서 암벽을 넘어서 등반을 하는 구간도 다른 산에 비해 상대적으로 길다. 특히 해발 3800m 이상 등반 구간 대부분이 암벽지대일 정도로 다른 산에 비해 난이도가 높다는 것을 여기 와서야 깨닫게 되었다. 험준한 바위산을 정상에 오르기 위한 디딤돌로 삼아 사투를 벌인 끝에 눈앞에 키나발루 정상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벌써 앞서 출발한 사람들은 이미 하산을 서두르고 있고 다수의 등반객은 정상에서 사진을 찍는 모습도 보였다. 이제 키나발루 정상을 코앞에 두고 완만한 바위산을 기어 오는 모든 순간은 숨 멎을 정도로 고산과 함께 다가오는 마지막 심장박동인 것처럼 호흡은 더욱 가빠오고 바람은 난데없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다행히 고산증은 산의 높이가 올라갈수록 심해지지 않고 안정을 되찾았고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추위는 체온을 강하시킬 만큼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정상으로 향하는 등정을 힘들게 했다. 정상을 향할수록 발목을 잡았던 복병은 산을 오를수록 양말이 벗겨지는 고통이다. 등산화와 산이 맞닿는 경사만큼 뒤로 미끄러지는 마찰이 양말을 벗겨내면서 신발과 양말을 분리시키는 장본인으로 작용하는 원인으로 작용한 셈이다. 왼쪽 양말을 오른쪽 양말로 바꿔 신고 올라가도 무용지물이었다. 수시로 양말을 다시 신어가면서 올라가는 산은 말없이 손짓하며 나의 시들어가는 용기를 북돋아주는 침묵의 스승이었다. 그 산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자세를 낮추고 입산하면서 쉽지는 않지만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입신의 경지를 꿈꾸는 수밖에 없었다.
기어오르고 또 기어오르다 보면 어느덧 동쪽 하늘이 어둠을 걷어내고 슬그머니 밝아온다. 이윽고 시커멓고 희끄무레한 화강암 깔린 키나발루 정상 고원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보이기 시작하면서 보면 볼수록 좌절감만 더해주는 울퉁불퉁한 바위 봉우리들 사이로 구름 속에 가려진 햇빛이 내뿜는 광채를 받아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바로 그 순간 지금 여기서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키나발루의 영혼이 연주하는 아침 서곡이 울려 퍼지면서 지금껏 만나보지 못했던 낯선 세상이지만 꿈에 그리던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가쁘게 내 몰아 토해내는 거친 숨소리는 바위와 구름과 하늘 사이로 연주되는 대자연의 서정시와 같은 음악이 여기까지 기어오른 노고를 치하해준다. 카나발루의 어원적 의미가 ‘영혼을 위한 안식처’라고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장엄하고 웅장하지만 어둠을 뚫고 울려 퍼지는 침묵의 대서사시는 온몸을 휘감으며 순간순간 괴로웠던 고통의 순간을 희열과 환희의 음악으로 바꿔놓았다. 절벽에서 만난 난공불락의 철벽은 새벽을 맞이하는 희망의 텃밭이다. 넘을 수 없다고 생각되었던 장벽은 나를 괴롭히는 장애물이지만 나를 성장시키는 보물단지가 아닐 수 없다.
결산은 등산보다 하산에서 결정된다
이제 키나발루 정상 바로 밑에서 마지막 힘을 다해 기어오르면 꿈에 그리던 키나발루산 정상, 로우피크(Low‘s Peak) 4,095m에 이르게 된다. 키나발루산은 400만 년 전 화산 활동으로 생성됐다고 한다. 정상에 이르는 약 100m 거리는 온통 저마다의 바위로 절벽을 형성하면서 마지막 정상 등반의 꿈을 꾸는 사람에게 절망을 안겨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험난하기만 하다. 거기다 몸이 날아갈 정도로 불어 닥치는 바람은 순간적으로 죽음을 생각하게 할 정도로 잠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먹은 게 별로 없어서 이제 내 몸에 남은 에너지는 바닥이 날 정도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내디딜 기운조차 고갈되었다. 그런데 눞앞의 바위들이 만든 절벽의 산은 나에게 절망을 강요하며 한 걸음도 쉽게 내주지 않았다. 내 인생에서 겪어본 최대의 위기이자 위협적인 난국 앞에서 지금까지 기어오르며 다짐했던 자신과의 약속도 한없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끝이 보이지 않았던 키나발루 정상은 이제 손만 뻗으면 닿을만할 정도로 코앞에 다가왔다. 키나발루 정상에서 불어 닥치는 세찬 바람은 차가운 혹한의 삭풍 같기도 했다. 하지만 더욱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잠시라도 바위를 붙잡고 있지 않으면 내 몸이 날아갈 정도로 거세게 불어 닥치는 바람의 세기였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은 어떤 느낌일까. 죽음은 경험할 수 없다. 죽음을 경험하는 순간 죽음을 맞이하고 그 죽음을 맞이한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죽음을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키나발루 정상에서 불현듯 다가온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이유를 순간적으로 생각해보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좋아하는 일, 만나면 행복을 전해주는 모든 사람이 나에게는 경이로운 기적이며 쉽게 만들어낼 수 없는 행운이다. 내가 살아가는 삶과 사람을 사랑하는 이유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떠오르는 까닭은 무엇일까. 마지막 순간까지 나의 기억창고에서 추억의 그림자를 선물로 주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경험할 수 없는 죽음의 순간을 미리 앞당겨 예측해본 죽음은 키나발루 정상이 나에게 준 뜻밖의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천신만고 끝에 정상에 이르러 감동과 경이로운 정상 등반의 역사적 순간을 한 장의 사진에 남겼다. 함께 오른 강경태 한국 CEO 연구소 소장도 바닥까지 드러난 체력의 한계를 극복하고 함께 등반한 동반의 기쁨을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기는 역사적 인증샷을 남겼다. 이틀간의 고단한 여정을 중단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 정상에 오른 곤경이 순간의 정경을 낳은 원동력이다. 정상에 등정한 기쁨을 남기자마자 이제 하산의 두려움이 앞을 가리고 있었다. 특히나 저체온증으로 몰려오는 두려움을 잊기 위해 하산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지체하는 순간 갑작스러운 죽음이 몰려올 거 같은 공포감이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미약하나마 남은 체온조차 거센 바람이 몸으로부터 빼앗아 달아나는 안타까움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이제 오르는 순간 경험했던 고초를 다른 방법으로 내려가면서 감당하는 수밖에 없다.
키나발루산 정상부에서 내려다본 보르네오섬의 위용은 구름 속에서 우리를 반기는 태양의 눈빛만큼이나 장엄하고 웅장하기 이를 데 없었다. 화산의 힘으로 밀어 올려져 생긴 키나발루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계곡 사이로 울창한 삼림이 하늘에 떠 있는 구름과 함께 하산하려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만들었다. 산 정상의 고산 기후와 산 아래의 열대 기후가 만드는 이중주는 중간 지대 구름을 몰고 와 적당한 경계선을 만들어 험난한 등반 여정을 잊게 만들어주는 절충 지대 같았다. 산을 험하게 만들어 놓은 이유는 삶은 험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자각하게 만들기 위해서인가. 오르는 길의 험난함은 내려가는 길의 험난함을 예고한다. 얕잡아 보았던 나의 오만불손함은 키나발루 정상에 오르고 내려가는 순간 한 없이 겸손한 자세로 산이 주는 위용 앞에 초라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산에 실패하면 또 다른 인생의 산을 넘을 수 없다. 결산은 등산보다 하산의 성패가 결정한다. 잘 올라갔어도 잘 내려오지 못하면 다시 오르지 못한다.
하산은 적막강산(寂寞江山)이자 결산이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 갖은 고난의 순간을 참고 견뎌야 했다. 악전고투 끝에 꿈에 그리던 정상에 오르는 순간 그동안 몸으로 겪어낸 고통은 한순간에 앓음 다운 추억의 한 장면으로 네 몸에 각인된다. 아주 적적하고 쓸쓸한 풍경을 이르는 적막강산은 산을 내려올 때 느끼는 감정을 적확하게 드러내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오로지 오르겠다는 신념과 의지는 하산하는 순간부터 다시 출발했던 그 지점까지 언제나 도착할지 정상을 앞에 두고 기어오르던 때의 불타는 의지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막막할 따름이다. 비행기도 이륙할 때보다 착륙할 때 사고가 많이 나듯이 정상 등반보다 하산할 때 사고가 많이 나는 이유는 정상 등반의 성취감에 젖어 하산하는 위험을 순간적으로 잊기 때문이다. 앞일을 내다볼 수 없게 캄캄하고 답답한 지경이나 심정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적막강산은 등산보다 하산할 때 절박하게 와닿는 이유는 특히 키나발루 산세의 험난한 등반 일정이 말해주기 때문이다.
내려올 때 만나는 계단을 오를 때 만났던 계단과는 전혀 다르게 내 몸의 하중을 견뎌내야 하는 무릎이 말해준다. 이 높고 수많은 계단을 과연 내가 올랐던 계단이 맞는지 내려오는 내내 의심이 들었다. 오를 때의 계단은 힘듦에도 불구하고 올라서야 할 절벽이지만 내려올 때의 계단은 힘듦에도 불구하고 내려가야 할 장벽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절벽의 존재 이유가 있다. “네 앞에 절벽이 있다면 주저앉으라는 것이 아니라 타고 넘으라는 뜻이다.” 반칠환 시인의 ‘담쟁이덩굴’이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다. 오를 때의 절벽보다 내려올 때 만나는 장벽은 더 높고 고달프기만 하다. 계단을 밟고 내려와도 끝없이 이어지는 장벽은 등산할 때 출발점에 다시 이르기 위한 고통스러운 장애물이 아닐 수 없다. 내려가면서 이어지는 계단을 만날 때마다 과연 내가 오를 때 통과했던 계단인지 반복해서 되묻고 하지만 계단은 대답하기도 전에 다음 계단을 눈앞에 데려다 놓는다.
오를 때 사투를 벌이며 장벽으로 작용했던 난공불락의 장애물은 내려올 때는 하산하는 사람을 괴롭히는 또 다른 복병이 아닐 수 없다. 이미 고갈된 체력을 회복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이제 바닥으로 떨어진 체력으로 또 다른 사투를 벌이며 내려가지 않으면 오늘의 정상 등반하면서 산과 혼연일체가 된 입산은 무의미하다. 올라가는 성장욕구보다 내려가야 살아남는다는 생존 욕망이 더욱 간절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지만 지금 여기서 마지막 남은 에너지를 방출하고 내려가면서 잡은 밧줄을 놓는 순간 나는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최후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는 절박감이 한순간도 떠나지 않고 내 몸을 휘감고 있었다. 내려가도 내려가도 하산의 끝은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적막강산의 암담함이 앞을 가리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의 반복되는 고통의 순간을 견뎌내지 못하면 내 인생의 결산은 무주공산(無主空山)으로 끝날 수 있다. 아직 개척되지 않아 꿈을 펼치거나 사업을 확장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은 시장이나 분야를 비유하는 무주공산이지만 하산에 실패하면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다. 베이스캠프 산장인 라반라타에서 정상에 이르는 시간은 약 4시간 정도 소요되지만 다시 라반라타 산장에서 팀폰 게이트(1,866m)까지 하산 또한 4~5시간 정도 소요된다.
한 순간을 넘어서는 한평생은 없다
우리가 산을 오르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정상 정복의 기쁨을 맛보기 위해서 정상에 이르는 수많은 힘든 역경을 참아내는 이유다. 누군가는 자신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며 내가 살아가는 이유와 살아내지 않으면 안 되는 까닭은 발견하기 위해서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냥 사는 게 힘들어서 더 힘든 상황에 직면했을 때 과연 나는 어떤 선택이 올바른 선택인지를 힘든 상황 앞에 내몰린 자신에게 물어보기 위해서다. 오르면 오를수록 힘든 산을 오르는 이유는 이렇게 저마다 다르다. 나의 경우, 힘든 산을 오르는 이유는 힘든 산을 오르지 않으면 힘든 상황에 직면한 자신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모르기 때문에 극한의 한계 상황에서 나 스스로를 한계 상황에 몰아넣는다. 매 순간 포기하고 싶은 강한 충동과 더 가야 한다는 결단의 칼날이 부딪히면서 등반 내내 심각한 정신적 스트레스가 온몸을 뒤덮는다.
한 순간의 고통이 등반 도중에 축적되면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약 없는 짧은 미래에 내 몸을 던져보는 이유는 어디까지 가면 정말 한계 상황인지를 책상에 앉아서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순간의 지루한 반복이지만 반복되는 매 순간은 동일한 순간은 없다. 가쁜 숨을 내 몰 아쉬는 매 순간도 바로 직전의 심장박동이 내뱉는 호흡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다르다. 무엇이 다른지를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절망적인 순간의 연속임에도 불구하고 절망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몸부림은 반복된다. 안간힘을 쓰는 가운데 없었던 힘도 소리 소문 없이 흘러나오면서 정상에 이르는 고통의 유한 반복이 어느 순간 끝을 맺는다. 그 순간 터져 나오는 탄성은 내가 살아있다는 감탄과 경탄이다. 매 순간 느끼는 감각적 탄성이 삶을 감동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경이로운 경탄이 아닐 수 없다. 한순간을 넘어서는 한평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삶의 순간적 축적이 한평생의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가는 흔적이다.
정상에 서면 정상에 오른 이유를 확연하게 알 수 있다. 어둠이 가시기 전 정상을 향한 산행을 시작하는 이유는 험난한 정상이 눈앞에 보이는 순간, 절망과 좌절이 합작해서 오르기도 전에 사기를 산산 조각낼 수 있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앞이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몸을 던지는 이유는 가다 보면 어둠이 걷히고 우리가 원하는 미지의 세계가 흐릿하게나마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어둠에 가린 미지의 세계에 도달하는 방법은 어둡다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비록 앞이 보이지 않지만 눈앞에 보이는 작은 이정표라도 벗 삼아 떠나야 꿈에 그리던 미지의 미래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먼 산을 넘으려면 앞산부터 넘어야 한다. 지금 당장 보이는 앞산부터 넘지 않으면 먼 산에 도달할 수 없듯이 지금 당장 보이는 앞사람의 뒤꿈치를 믿고 언젠가는 걷힐 어둠 속의 미래를 믿고 출발하지 않으면 내가 꿈꾸는 미래를 절대로 만날 수 없다. 눈앞에는 절망밖에 보이지 않지만 절망의 뒤안길에는 반드시 희망의 불빛이 자신을 감추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힘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내 발걸음을 멈출 수 없는 이유다.
등반(登攀)은 동반(同伴)을 넘어 인생을 살아가는 기반(基盤)이다
“밤중에 계속 걸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다리도 날개도 아닌 친구의 발소리다.” 발터 벤야민의 말이다. 등반의 성공은 함께 정상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는 발걸음이 주는 위안에 달려 있다. 지금 당장 내 곁에서 나와 함께 발걸음을 옮기는 동료에 대한 묵직한 믿음은 물론이고 나와 함께하지 않지만 나의 등반을 믿음으로 응원하는 사랑하는 사람의 침묵의 응원은 정상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출 수 없게 만드는 강력한 지원군이 아닐 수 없다. 어디선가 들리는 친구의 발소리는 나를 분발하게 만드는 마지막 촉발 요인이다. “누군가의 ‘구름’ 속에 ‘무지개’가 되어라!” 미국의 흑인 시인, 마야 안젤루(Maya Angelo)의 말이다. 이 말을 바꿔서 영화 번역가 이미도는 “누군가의 ‘암흑’ 속에 ‘등대’가 되어라!”라고 번안한다. 책 속에서 만난 한 문장이 구름 속의 무지개였으며 암흑 속이 등대였듯이 내 앞에서 어둠을 걷어내며 앞으로 걸어가는 동료의 한 발걸음은 절망적인 이 순간을 이겨내라는 무언의 압박이자 격려가 아닐 수 없다.
등반은 혼자서 사투 끝에 정상에 오르는 외로운 여정이 아니다. 우선 무거운 짐을 날라주는 포터 덕분에 내가 지고 갈 수 있는 최소한의 무게만을 짊어지고 산행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아침과 점심, 그리고 저녁때에 맞춰 음식을 마련해주는 요리사 덕분에 힘든 사투를 벌일 수 있는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함께 길을 가며 안내해주는 가이드 덕분에 힘든 산행도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사력을 다해 등반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원동력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함께 키나발루로 떠났던 강경태 한국 CEO 연구소장 덕분에 견디기 어려운 산행을 동행하면서 정상 등반까지의 여정을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할 수 있었다. 죽고 싶을 정도로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쉬지 않고 나를 괴롭혔지만 괴로운 순간에 굴복하지 않고 함께 목표했던 정상을 넘어설 수 있는 감동적인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원동력도 등산을 함께 했던 동반의 힘에서 나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걷다가 너무 힘들어 주저앉는 상황에서 메고 가는 배낭을 대신 들어주며 힘을 더해주었던 가이드가 없었다면 키나발루 정상에서 느끼는 감동과 회한의 삶을 몸으로 느껴보지 못했을 것이다. 힘든 순간에도 지금 당장 느끼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견뎌내지 못하고 포기하지 않게 만든 가장 중요한 원동력도 목적지를 향하는 희망의 연대가 만든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성취의 뒤안길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손길이 숨어 있으며, 그 결과는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암묵적 응원의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함께 했던 동료 덕분에 이루어진 합작품이다.
가장 힘든 순간 뒤에 가장 감동적인 순간도 찾아온다. 눈물겨운 사투 끝에 다다른 정상에서의 감회는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지조차 잠시 잊고 그저 정상에 올라섰다는 안도감과 함께 찾아오는 진한 감동이었다. 그 감동 역시 나 혼자 사투를 벌이며 해낸 독립적인 노력의 산물이 아니다. 결단의 순간을 매번 맞이할수록 단호한 의사결정을 통해 한 발걸음 내딛을 수 있는 원동력도 함께 고난을 감수하며 정상에 오르는 꿈을 꿀 수 있는 절박한 동료에서 발원된다. 지금까지의 그 어떤 도전 여정보다 힘들었던 순간도 곤경을 극복하고 풍경으로 만들 수 있었던 버팀목도 먼발치에서 포기하지 않고 함께 하고 있다는 무언의 신호다. 동반 없이 등반도 없다. 동반은 절반을 넘어 인생의 나침반과 같이 암담한 인생을 견디며 살아가게 만드는 기반이 아닐 수 없다.
일출과 일몰 사이, 삶의 묘미가 살아간다
모험(Adventure)을 해본 사람만이 인생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Advance)할 수 있는 충고(Advice)를 해줄 수 있다. “모험이 부족하면 좋은 어른이 될 수 없다”는 일본 철도의 광고처럼 몸으로 겪어본 경험이 부족하면 나의 신념으로 관념적 지식의 무력(武力)을 견뎌낼 수 없다. “딴생각은 머리를 흔들어서가 아니라 몸의 경험으로 기존 언어를 부정할 때 가능하다”(118-119쪽). 정희진의 《낯선 시선》에 나오는 말이다. 몸으로 겪은 입산의 고통은 기존과 다른 언어 사용 방식을 만나지 못하면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등산의 느낌과 다르지 않다. 등산과 입산 사이에도 산을 정복 대상으로 삼는 목표지향적인 사람과 산을 영원한 동반자로 생각하며 혼연일체를 꿈꾸는 사람 사이에 차이가 살아간다. 산을 좋아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도 동일한 차이가 존재한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좋아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차이가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입산(入山)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나누고 싶은 입성(入城)이다. 산을 정복 대상이 아니라 나와 함께 험난한 인생을 살아가는 동반자로 생각하는 순간, 나와 함께 인생을 살아갈 산은 등산이 아니라 입산이다.
도전은 뜻밖의 선물을 안겨주는 삶의 동반자이자 나를 어제와 다른 나로 거듭나게 만드는 내 삶의 동력이다. 도전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삶은 모든 순간이 축복이자 경이로운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산을 오를 때 가쁘게 내쉬는 호흡이나 정상에 섰을 때 느끼는 절박한 위협도 도전하는 사람만이 온몸으로 느끼는 감동이자 감격이 아닐 수 없다. 힘겨운 산행 끝에 고단한 산행길을 반추하면서 맞이하는 키나발루 해변을 일몰은 인생의 몰락이 아니라 새로운 출몰을 위한 장엄한 서사시나 다름없다. 제산이 일조가 넘어도 일출(日出)과 일몰(日沒) 사이의 경이로움을 몸으로 느낄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힘겨운 사투를 마무리하고 맞이하는 키나발루의 일몰은 나에게 몰락하면서도 저렇게 아름다운 여운을 남겨주는 자연의 경이로운 선물이 있을까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저무는 해의 그림자에는 말할 수 없는 내일의 희망이 담겨 있다. 그 희망이 나에게 무얼 말하는지는 나 역시 알 수 없다. 다만 지지 않으면 다시 뜨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만 남길뿐이다. 오늘을 즐기는 삶의 여유 없이 숨 가쁘게 맞이하는 내일은 Today 없이 Tomorrow도 없다. 오늘을 살지 않고 내일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지금 키나발루 해변을 불타게 만드는 일몰의 황홀한 기운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금 여기서 맞이하는 삶의 순간이 주는 경이로운 기적에 감탄하지 않는 사람에게 다가오는 내일은 그저 한탄의 대상일 뿐이다. 지지 않으면 뜨지 않는다. 멋지게 지는 사람에게 오늘과 다르게 뜨는 삶의 지혜를 만날 수 있다. 도전하는 사람은 시간이 남아서 하는 게 아니라 시간을 내서 오늘과 다른 내일을 맞이하기 위한 축제를 준비하는 사람이다. 오늘과 다르게 멋지게 도전하는 사람만이 생각지도 못한 인생의 멋진 선물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오늘 저녁에 맞이하는 코타키나발루의 일몰을 비롯 세계 3대 일몰 광경에 포함되는 남태평야 피지, 그리스 산토리니 일몰이라는 말도 내 몸으로 느끼는 감각적 각성 없이는 무용지물이다. 그냥 보는 것과 가서 보는 것 사이에는 천지차이가 존재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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