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적 신념과 개념 전환에 비추어
‘신념’이 ‘개념’을 만나면 자기만의 ‘철학’이 된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적 신념과 개념 전환에 비추어
개념은 영어 콘셉트(concept)의 우리말 번역어다. 사전적 정의로는 본질을 파악해서 추상화시킨 것이다. 사물과 그 과정의 본질적 특징들을 포착해서 파악해내는 행위다. 개념은 무엇보다도 인간이 다양한 사고활동을 하는 과정에 쓰이는 기본적 단위이자 재료다. 개념이 풍부하면 그만큼 사고의 재료가 풍부하다는 말이다. 남다른 사고를 하고는 사람은 하고 싶은 말을 적확한 개념을 동원해서 간단명료하게 표현한다.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복잡한 상황을 한 마디로 정리하는 힘은 해당 상황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개념 사용력에 달려 있다. ‘concept라는 단어를 분해해보면 개념이 지니고 있는 위력을 알 수 있다. 우선 ‘con-‘ 은 ‘여럿을 하나로’라는 뜻을 지니고 있고, ‘-cept’는 ‘잡다’ 라는 뜻이다. 즉 ‘concept’는 “여럿을 하나로 잡다”라는 의미다. 개념이 풍부한 사람은 여러 가지를 관통하는 한 가지 본질로 사물이나 현상의 의미를 포착한다. 뉴톤은 ‘만유인력’ 개념으로 만물 사이에 작용하는 힘의 원리를 간단하게 잡아냈다. 과학자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과 식견이 하루 아침의 혁명으로 과학사가 바뀌는 과정을 명쾌하게 설명해냈다. 니체는 지금의 나에서 부단한 변신을 통해 이상적인 인간상에 이르는 한 인간의 사투하는 과정을 ‘위버멘쉬(Übermensch)’라는 개념으로 포착했으며, 푸코는 감시당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감시는 물론 생각까지도 권력기관에 의해 조종당하면서 살아가는 현대판 감시 메카니즘을 ‘팬옵티콘(panopticon)’이라는 개념으로 경종을 울렸다.
이처럼 개념을 창조하면 창조된 개념대로 세상은 이전과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개념은 그래서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렌즈이자 관점 전환의 재료다. 삶이 혁명적으로 바뀌는 근간에는 언제나 개념적 전환이 자리잡고 있다(황진규, 2018).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적인 천재 언어 철학자 비트겐 슈타인은 자신의 언어철학을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개념적 전환을 만들어냈다. 전기의 철학은 언어그림이론(picture theory)을 주장하는 《논리-철학논고》로 대표된다. 후기 철학은 언어게임이론으로 대표되는 《철학적 탐구》에 집약되어 있다. 언어그림이론은 다음과 같은 주장에 근거하고 있다. “세계는 사물들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들의 총체다.” 세계는 물이나 나무처럼 사물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물이 흐른다”, “나무가 흔들린다”처럼 사물이 만들어가는 사실의 세계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언어그림이론에서 언어는 낱말이 아니라 문장임을 알 수 있다. “차가 달린다”는 문장은 실제로 차가 달리는 모습을 그림처럼 지시하거나 묘사하고 있다. 언어그림이론은 세계를 구성하는 사실들을 그림처럼 분명하게 반영할 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언어그림이론은 언어의 의미는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과 일대일로 일치하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언어그림이론은 지시하는 대상이 없거나 지시하는 대상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 언어는 무의미하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담고 있다.
하지만 모든 문장을 그림처럼 묘사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주장이나 의견을 담고 있는 문장은 그림처럼 지시하는 대상이 없거나 지시하는 대상과 일치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은 같은 능력이다”라는 말은 뭔가를 지시하거나 어떤 현상을 그림처럼 일대일로 묘사하지도 않는다. 다만 한 사람의 주관적 주장이나 의견일 뿐이다. 또 “개념 없는 체험은 위험하고 체험 없는 개념은 관념이다”라는 문장은 지시대상이 없기에 지시대상과 일치하지도 않는다. 언어그림이론에 따르면 이 문장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이 문장은 한 개인의 체험적 깨달음을 표현한 주관적 의견으로서 일리있는 주장이다. 그림이론이라는 개념으로 자신의 언어철학을 개념적으로 정리했던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전기 언어철학의 한계와 문제를 스스로 인정하고 개념적 전환을 시도한다. 비트겐 슈타인의 후기 언어철학은 낱말의 의미는 그것이 쓰이는 상황적 맥락에 따라 다르다는 언어개임이론으로 전환한다. 언어게임이론의 핵심은 같은 단어라고 할지라도 그 단어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즉 문맥에 따라 단어의 의미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언어철학은 한 낱말의 의미는 언어에서 그것의 쓰임새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언어의 의미를 알고 싶으면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과 일치하는지의 여부를 묻지 말고 그 언어가 어떤 맥락에서 쓰이고 있는지 용도를 물어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잘 한다”는 언어는 남다른 성취를 이룬 사람에게 할 때는 칭찬이지만 기대 밖의 예상치 못한 잘 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할 때는 비난하는 말이다. 즉 잘 한다는 언어의 의미는 그것이 어떤 문맥에서 사용되는지에 따라서 같은 말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의미로 쓰이는 것이다. 언어는 의미가 아니라 사용이 결정한다.
언어그림이론의 ‘그림’이라는 개념에서 언어게임이론의 ‘게임’이라는 개념으로 개념적 전환이 일어나면서 언어에 관한 사고방식의 혁명적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언어는 현실을 고스란히 묘사해주는 그림과 같다. 그럼처럼 묘사할 수 없는 언어는 언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다. 말할 수 없는 것은 곧 세계를 언어로 그림처럼 묘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대상은 철학적 탐구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언어그림이론에서 언어는 세계를 구성하는 사실들을 얼마나 정확하게 그림처럼 묘사해내느냐에 따라 그 의미와 효용가치가 달라진다는 이론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쓰는 모든 언어를 그림처럼 표현할 수 있을까? 언어를 그림이라고 생각했던 언어이론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음을 비트겐슈타인은 어떻게 깨닫게 되었을까.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는 말로 자신의 철학적 작업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케임브리지를 떠나 오스트리아 시골마을에서 약 6년간 교사 생활을 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언어로 시골 아이들과 소통이 잘 되지 않음을 깨닫는다. 자신이 경험적으로 터득한 언어의 세계와 시골 아이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의 세계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함을 알게 된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더 이상 침묵으로 일관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실제로 일상언어에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많다는 점을 깨닫고 자신의 언어그림이론이 결정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그가 내세웠던 그림으로서의 언어를 게임으로서의 언어로 개념적 전환을 시도하는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세계를 그림처럼 표현할 수 없는 문장이 훨씬 더 많다는 깨달음과 함께 자신의 신념을 반영하는 개념을 폐기처분한다. 그리고 자신의 신념을 적확하게 표현할 새로운 개념을 물색한다. 그것이 바로 ‘그림’이라는 개념에서 ‘게임’이라는 개념으로 언어철학적 사고를 전환한 것이다.
자신이 만든 철학적 개념에 담긴 신념이 흔들린 것이다. 한 개념에는 그 개념을 창조한 사람의 문제의식과 사연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언어를 그림으로 비유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적 신념이 초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잘못된 가정위에 생긴 것임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신념이 개념을 만나면 자기만의 철학이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한 낱말의 의미는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과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생각했던 언어그림이론의 한계를 느겼다. 동일한 언어라고 해도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이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의미로 쓰일 수 있는 맥락 앞에서 넘을 수 없는 절벽을 만난 것이다. 이제 사실로 구성된 세계를 그림처럼 정확하게 일대일로 묘사하던 언어는 언어 자체의 의미보다 어떤 상황에서 누가 어떤 의도로 사용하는지 문맥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게 된다. 게임은 그림과 다르게 게임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지켜야 될 규칙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내가 축구 게임의 규칙을 모르고 축구 게임에 참가할 수 없다. 축구는 골키퍼를 제외하고 손으로 공을 다룰 수 없는 규칙이 있다. 누군가 축구하면서 왜 손으로 만지면 안 되냐고 물어본다면 그 사람은 이미 축구 규칙을 무조건 따르는 사람과 같이 축구 게임을 즐길 수 없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탐구》에서 “내가 규칙을 따를 때, 나는 선택하지 않는다. 나는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른다”고 했던 것이다.
어떤 경기의 규칙이 왜 그런지 의문을 던지지 않고 무조건 믿고 따를 때 게임을 지속될 수 있다. 규칙은 의문과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맹목적 믿음과 순종의 대상이다. 장기 게임에서 차(車)와 포(包)가 가는 길이 다른 것은 게임을 만들 때 사전에 천명한 약속이다. 예를 들면 몇 가지 예외적인 경우는 있지만 차(車)는 상하 및 좌우로 마음대로 원하는 곳에 자유롭게 다닐 수 있고, 포(包)는 다른 기물 한 개를 반드시 넘어야 상하 및 좌우로 다닐수 있다. 이를 어기고 차(車)가 포(包)처럼 또는 반대로 움직일 때 이미 장기는 쌍방간에 즐길 수 있는 게임이 될 수 없다. 주어진 게임을 즐기기 위해서는 우선 그 게임의 규칙을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한다. 규칙을 의심하는 순간 게임도 즐길 수 없고 같이 게임을 하는 사람과 소통할 수 없다. 게임에 참가하는 사람은 게임의 규칙에 의문을 던지거나 비판적 논의를 해서는 안 된다. 게임을 가장 잘 배우는 방법은 물론 게임을 재미있게 즐기는 방법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것처럼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라야 한다. 마찬가지로 특정한 공동체에서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은 그 사람들이 사전에 정한 규칙에 따라 맹목적으로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다. 그 규칙을 왜 그렇게 사용하냐고 질문하는 순간 그 사람은 해당 공동체에 있는 사람과 같이 언어를 사용해서 소통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사랑해”라는 말이 사랑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 사용했을 때는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 담아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는 말이다. 그런데 사랑을 시작한지 어느 정도 지난 사람들이 주고받는 “사랑해”라는 말은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인사말에 지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사랑이 식어서 헤어질 무렵에 사용하는 “사랑해”라는 말은 분노와 좌절감이 스며든 말이다. “사랑해”라는 말을 왜 그렇게 사용하느냐고 묻거나 깊이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그렇게 사용하는 게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규칙인 것이다. 어린이가 처음 말을 배울 때 문법을 먼저 배운 다음 문법에 맞는 말을 배우지 않는다. 무조건 어른들이 사용하는 말을 따라서 배운다. 여기서 문법은 비트겐슈탄이 말하는 규칙이다. 문법 즉 규칙을 선택하지 않고 당연히 배워야 될 것으로 가정한다. 그리고 그 문법에 맞는 말을 자동적으로 배운다. “사랑해”라는 말이 문맥에 따라 달라지는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사전에 정한 규칙이다. “사랑해”라는 언어는 특정 대상을 지칭하는 그림이라기보다 그것이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서 천차만별의 의미를 지니는 게임으로서의 언어로 변신한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그림에서 게임이라는 개념으로 바꾸면서 언어를 이전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개념을 탄생시킨 것이다. 개념을 의미하는 영어 콘셉트(concept)는 뭔가는 낳는다 또는 임신하다를 뜻하는 ‘conceive’에 어원이 있다는 점을 알면 개념은 새로운 생각을 잉태하거나 임신하는 근원임을 알게 된다.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생각의 재료가 융합될 때 잉태되거나 탄생된다. 생각의 재료는 다름 아닌 개념이다. 아무리 위대한 생각을 갖고 있어도 그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개념이 없으면 생각은 생각으로 머무를 뿐,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색다른 생각으로 탄생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어렴풋하게 생각했던 관념이 서서히 자신의 의지와 집념을 만나면 신념으로 전환된다.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신념이 겉으로 표현되려면 개념이 필요하다. 개념 없이 신념은 세상으로 나오지 못한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신념을 전달 할 수도 없다. 우리가 새로운 개념을 부단히 공부해야 되는 이유는 개념의 습득 없이 생각은 진화되거나 발전되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이 고정관념에 빠지고 타성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이유는 생각의 원료인 개념이 틀에 박혀있기 때문이다. 나의 신념으로 다른 사람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는 자신의 문제의식과 위기의식을 담고 있는 개념을 창조해야 한다. 개념은 다른 말로 그것을 창조한 사람의 신념이 반영된 고뇌의 산물이다.
절박한 상황에 놓인 사람일수록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단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개념을 선정해서 단순하게 표현하는데 비장하기까지 하다. 치열한 고뇌와 사투 끝에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개념을 조합하여 단순하게 표현한다. 복잡함은 나태함의 산물이지만 단순함은 치열함의 산물이다. 위대한 경지에 이른 사람일수록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단순하게 표현한다. 단순한 표현이지만 촌철살인의 의미가 심장에 꽂힌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을 지극히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다면 당신은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말이다. 복잡한 내용도 단순하게 표현하는 사람의 특징은 콘셉트의 본질인 여러 가지 속성에 관통하는 본질을 잡아 한 가지로 포착하는 개념화 능력이 뛰어나다는 점이다. 확고부동한 신념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신념을 적확하게 표현할 개념을 찾아 헤매다 기존 개념을 다른 의미로 재개념화시키거나 없었던 개념을 창조한다. 비트겐슈타인은 후자에 해당된다. 자신만만하게 생각했던 초기의 언어철학적 신념이 변화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더 이상 자신의 신념이 통용되지 않는 언어적 현실을 만났기 때문이다. 진정한 학자의 용단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자신의 철학적 신념을 포기하고 새로운 신념으로 무장, 이것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철학적 메타포를 바꿔 자신의 신념을 재무장할 수 있는 학문적 결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적 현실에서 건져올린 치열한 문제의식과 절박한 위기의식을 언어게임이라는 단순 명쾌한 개념으로 풀어낸 것이다.
보는 대로 보이지 않고 개념대로 보인다. 세상을 다르게 보고 싶은가? 내가 사용하는 개념을 바꾸면 바꾼 개념대로 세상을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개념은 세상을 다르게 보는 생각과 관점의 재료다. 언어그림은 세상을 언어적 그림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언어적 그림으로 포착할 수 없는 수많은 언어적 현실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개념이 필요해졌다. 그것이 바로 언어게임이라는 개념이다. 개념은 세상을 살아가는 무기다(사이토 다카시, 2017). 몰랐던 개념을 새롭게 알았을 때 새롭게 깨달은 개념은 이제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무기가 된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고뇌가 담긴 언어그림이론과 언어게임이론은 언어에 관한 단순한 이론이 아니다. 언어의 한계가 곧 세계의 한계라고 했던 한 철학자의 일생이 담긴 철학적 개념이다. 특히 그림으로 언어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고 자신했던 자신의 이론적 한계와 문제점, 오만과 자만을 스스로 인정하면서 깊은 탐구 끝에 언어적 현실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새로운 개념적 무기를 만든 노력과 결단을 배울 필요가 있다. 한 학자가 자신의 이론을 스스로 용도 폐기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전기 언어철학적 신념이 지나친 자만과 오만에서 비롯된 잘 못된 가정위에 세워진 사상누각임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후 언어게임이론을 새롭게 정립한 후 언어의 의미를 묻지 말고 언어의 사용을 물으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언어의 진정한 의미는 그것이 지니고 있는 현실의 정확한 복제로서의 그림에 있지 않고 현실적 맥락에 따라서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언어게임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