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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자람’은 ‘헛자람’이다

웃자란 개념어를 척결하라


웃자람은 헛자람이다웃자란 개념어를 척결하라


어떤 식물이 너무 빨리 자란 나머지 키는 큰데 실속은 없는 경우를 웃자랐다고 한다. 햇빛을 받고 광합성을 하면서 줄기를 튼실하게 만들면서 자라야 식물은 자기 몸을 견딜 수 있는 성장을 거듭할 수 있다. 하지만 보통 햇볕이 부족하면 식물은 햇볕을 받기 위해 일단 줄기를 높게 뻗는 본능적 속성이 있다. 높이 자란 줄기가 햇볕을 받아 광합성을 하지 않으면 키만 쑥 컸을 뿐, 자신의 몸을 가눌 수 있을 정도가 되지 못하고 부러질 수 있다. 즉 줄기는 뻗는 속도에 비례해서 햇볕을 받지 못하면 식물은 웃자라서 실하지 못하고 부러질 수 있다. 햇빛을 못 쏘이면 식물은 아직 땅 속에 있다고 착각해서 빨리 땅 위로 나가야 된다고 생각하는 성향이 있다고 한다. 땅 속에서 밖으로 나왔지만 햇빛이 없으니까 아직 땅속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땅속에서 벗어나 빨리 햇빛을 만나려는 식물의 본능적 욕망이 줄기만 높이 뻗어보려는 몸부림으로 나타난다. 


둘째, 식물에게 너무 많은 물을 주면 물먹고 웃자란다. 식물이 광합성을 하는 데 필요한 조건은 흔히 햇빛, 물, 이산화탄소를 꼽 는다. 이 중에서 장마철처럼 햇빛은 부족한 데 물만 주면 줄기가 물을 먹고 정상적인 성장속도를 추월해서 급히 자라기 시작한다. 또한 영양분이 부족하면서 부족한 영양분을 햇빛에서 흡수하기 위해 평소보다 더 빠른 속도로 햇빛을 찾아 줄기가 하늘로 향하는 것이다. 웃자란 식물은 흙으로 덧대어 웃자란 줄기를 적당히 덮어주면 다시 정상적인 속도로 성장을 시작한다. 또한 웃자란 식물의 줄기나 가지를  과감하게 가지치기를 통해 더 이상 높이만 자라려는 식물의 본성을 없애고 주어진 위치에서 기반을 다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면 다시 성장속도를 줄이고 본래의 성장 속도를 찾아간다.



웃자라는 식물을 방치하면 자기 몸을 가누지 못하고 줄기가 부러지거나 뿌리가 썩어서 회생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결국 웃자라는 일은 헛집거나 헛잡아서 성장했지만 자신은 물론 다른 사물이나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헛똑똑이를 탄생시키는 일일 뿐이다. 그래서 웃자람은 헛자람이다. 웃자라서 키는 커졌지만 헛발질이나 헛손질만 해대며 헛공부한 결과로 나타나는 게 헛자람이다. 헛자람은 고생했지만 무의미한 헛고생이나 헛수고의 산물이자 헛살아서 헛된 삶의 결과다. 웃자람은  


솔방울 씨앗이 날아가다 운이 좋아 비옥한 땅에 떨어지면 별다른 고생 없이 하늘높이 자라면서 목재가 된다. 반면에 운이 좋지 않아서 바위틈에 떨어진 솔방울 씨앗은 갖은 고생을 온몸으로 겪어내면서 뒤틀린 줄기와 가지로 무장한 분재가 된다. 운명의 장난인지 모르겠지만 고생 없이 쑥쑥 자란 목재는 목수에게 목숨이 끊겨 생을 마감하지만 우여곡절의 인생을 살다 분재 채집가에게 선택받은 분재는 양지바른 곳에서 평생 동안 극진한 대접을 받으면서 인생 찬가를 부른다. 식물이 웃자란다는 뜻에는 식물이 자라는 과정이나 환경에 식물의 성장을 방해하는 걸림돌이나 장애물이 없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가장 아름다운 춤은 엉거주춤이다


삶은 그 어떤 이론으로도 완벽하게 설명해 낼 수 없는 수많은 입장이나 주장이 난무하며 각축전을 벌이는 전쟁터다. 한 가지 진리가 잠시 세상을 지배해도 또 다른 반론이 시시각각 발목을 잡고 자기주장의 옳음이나 적절함을 소리 높여 외치며 박빙의 승부가 계속되는 곳이 바로 우리가 매일 만나는 일상의 현실이다. 그곳에서 저마다의 목적의식과 위기의식을 품고 살아내려는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 삶의 정당성이나 자기 정체성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살아가며 만나는 숱한 마주침의 의미를 해석한다. 지금 살고 있는 여기는 언제 어떤 일로 인해 삶의 흐름이 끊길지 어떤 사건과 사고로 뒤엉켜 혼란을 불러올지를 전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미지의 세계다. 이미 가본 길보다 아직 가보지 않은 두려움이 앞서는 길이 더 많이 펼쳐지는 삶이 지금 여기서의 삶이다. 지금 여기서의 삶이라고 할지라도 다음 순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라서 사람은 늘 바쁘게 뭔가를 준비하지만 불안하고, 두렵지만 또한 설레는 느낌이 중첩되어 교차되고 교감되는 외롭고 고독한 길이기도 하다.


과일가게에 가서 사고 ‘서너 개’ 달라고 하면 세 개나 네 개를 준다. 세 개인지 네 개인지가 명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세 개나 네 개를 줘도 손님은 별 문제를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미국의 과일가게에 가서 “사과 서너 개 주세요”(Apple, three or four please)라고 말하면 주인이 바로 되물어 본다. “당신이 원하는 사과가 세 개입니까? 네 개입니까?” 우리말에는 양자택일(兩者擇一)을 엄격하게 원하지 않고 양극단의 말을 하나의 단어로 포용하는 양단불락(兩端不落)이나 양자병합(兩者竝合)의 사고가 지배하는 경우가 많다. 서구의 언어는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되는 양자택일(兩者擇一) 형 사고인 'either A or B'의 사고방식을 강조하지만, 우리말은 두 가지 모순이나 극단의 언어를 하나의 언어로 끌어안는 양단불락(兩端不落) 형 사고인 ‘both A and B’의 사고방식을 따른다. 엉거주춤의 세계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항에서 임기응변적으로 얼버무리며 순간을 이겨내는 춤이다. 딱히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양극단의 스펙트럼에서 뭐라고 말할 수 없는 흑백논리의 세계에서 벗어난 희끄무리한 춤의 세계가 바로 엉거주춤의 세계다.



삶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이는 엉거주춤의 경계지대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지가 늘 고민이 되는 회색지대의 딜레마다.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고 이것도 저것도 다 정답이 될 수 있는 참으로 곤란한 세계다. 

삶은 양자택일(兩者擇一)의 세계가 아니라 양단불락(兩端不落)의 세계다. either A or B의 이자선택에서 중간함을 허락하지 않은 배제의 논리, 양자택일(兩者擇一)과 흑백논리의 압박에서 벗어나 모순을 끌어안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원칙을 개발해 왔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문화는 어느 나라 문화보다 양단불락(兩端不落)의 중간항 문화, either-A or B가 아니라 양단불락(both A and B)의 매개적 문화(intermediate culture)의 특성이 강하다(이어령, 2002). 나의 이익은 남의 손해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몽테뉴식 사고만으로는 살아가기 어렵다. 양자택일의 강압적 상황에서 선택은 곧 다른 것의 포기를 의미한다. 내가 선택함으로 이익을 보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내가 선택하지 않는 다른 것을 밟고 일어설 수밖에 없다. 즉 너 죽고 나 살기식 몽테뉴적 오류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우리 모두가 승리하는 윈-윈(Win-Win) 게임을 할 수 없다.


모순과 대립을 융합하는 한국인의 의식은 한국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여러 가지 일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이어령, 2003). 오르락내리락하는 승강기, 그리고 문을 열고 닫는 여닫이, 밀고 닫는 미닫이, 나갔다 들어오는 나들이와 같은 말은 데카르트의 이분법적 사고에 길들여진 서구의 언어로서는 도처지 포착하기 어려운 말들이다. 필 둥 말 둥, 먹는 둥 마는 둥, 가는 둥 마는 둥, 보일락 말락, 들락날락 등도 이항대립의 구도에서 벗어나 두 가지 모두를 한꺼번에 표현해 주는 한국적 언어관이라고 볼 수 있다. 문화는 언어를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언어 없는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는 인간의 사고와 감정, 행동에 담긴 의지를 표현해 주는 구체적인 전달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가위 바위 보에 담긴 말에도 의미심장한 한국민족의 문화적 차이가 숨겨져 있다. “보자기는 주먹을 이기지만 가위에게 집니다. 하지만 가위는 보자기를 이기면서도 주먹에게는 집니다(이어령, 2003p.348). 결국 가위바위보의 시스템 속에는 절대적인 승자도 패자도 없다. ”한국인들은 ‘이것이면서 저것’, 곧 and 문화권에 속해 있다. and 문화의 핵심은 음양의 원리이며, 상극과 상생의 원리가 지배하는 가치체계이다. 음양은 ‘서로 반대이면서 동시에 서로를 완전하게 만드는 힘’, ‘서로의 존재 때문에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힘’의 관계이다“(구본형, 2005, p. 107). 상극이면서 상생을 추구하고 상생을 추구하면서 상극을 끌어안는 포용과 관용의 논리는 오늘날과 같이 역설과 패러독스가 상존하는 우리 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개념의 웃자람은 주로 관념을 먹고 자란다


비교적 안정된 삶의 기반 위에서 잠시라도 여유나 휴식을 즐기는 최소한 자유를 확보한 사람은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지만 그나마 자유를 누리는 순간의 기쁨을 맛본다. 하지만 늘 언제 굴러 떨어질지 모르는 극심한 위기감 속에서 떠는 불안감을 껴안고 경계 밖에서 오늘도 절박한 하루를 보내면서 침묵의 절규로 세상을 향해 소리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삶은 그렇게 치열한 전쟁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전쟁 같은 순간이 무한 반복되는 괴로운 삶도 있지만,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결정적인 순간의 연속이기도 하다. 결정적인 한 순간의 모음이 바로 한평생을 살아가는 한 사람의 삶의 얼룩과 무늬다. 모든 순간은 동일한 언어로 포착될 수 없는 결정적인 다른 사건이다. 모든 순간을 동일한 의미로 포착해서 이해할 수 있는 일반적인 개념은 없다. 모든 순간은 다른 순간으로 대체 불가능한 결정적인 사건이다. 때문에 결정적 사건을 가장 적확하게 드러내는 개념 또한 이미 결정되어 우리를 기다리지 않는다. 늘 어제와 다른 느낌과 생각을 어제와 다르게 표현하기 위해 절치부심하며 언어를 벼리고 벼리는 이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일지라도 쉽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더 나은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 힘이 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순간을 몸으로 살아본 사람만이 그 상황에 가장 적확한 언어적 사유를 시작한다. 어떤 언어로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감정과 생각을 번역해 내야 가장 의미심장하게 세상으로 드러날지를 결정하기 위해 언어를 벼르고 벼른다. 언어를 벼르는 과정은 가장 적확한 단어가 무엇인지를 선택하는 노력이라면 언어를 벼리는 행위는 선택된 단어라고 할지라도 더 깊은 사유를 품은 언어로 재정련하는 과정을 포기하지 않는 치열한 사투를 의미한다. 어떤 언어를 사용할지는 관념적으로 결정되지 않고 신체적으로 결정된다. 현실에 대한 울분과 분노, 적개심과 도덕적 판단은 몸 안에서 울분(鬱憤)을 삭히다 어느 순간 몸 밖으로 터져 나온 단어들의 아우성이 만든 결단이다. 쉽지 않은 삶이 관념을 먹고 웃자라는 개념을 우리 삶에서 거주하지 못하게 막는 제초제나 다름없다. 삶이 파란만장한 만큼 파란을 일으키는 문장이 나오는 이유다. 우리 몸은 주어진 현실을 살아내면서 매 순간 깨닫는 앎의 각축장이나 다름없다. 한 문장 안에는 한 사람의 일생이 숨어 있고, 격전의 현장에서 사투를 벌이며 싸운 땀과 눈물이 뒤범벅된 얼룩이 무늬로 번역되어 있다. 그래서 김훈은 《달 너머로 달리는 말》에서 “문장은 전투와 같고, 표현은 양보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을까.



관념을 먹고 자라는 개념은 대부분 웃자란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은 주로 관념을 먹고 자란다. 사랑을 추상명사로 생각하는 사람은 진정한 사람의 의미를 직접 몸으로 겪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관념적으로 사랑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2012년도 사하라 사막 마라톤을 뛰면서 사랑이 더 이상 관념을 먹고 자라는 추상명사가 아니라 기꺼이 자기 시간을 투자해서 타인의 아픔을 완화 또는 치유하려는 지극한 정성과 진심 어린 배려에서 나오는 동사라는 걸 알게 되었다. 모든 추상명사가 내 몸을 관통하며 남긴 희로애락의 감각적 깨달음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면 관념적 파편으로 전락하기 시작한다. 개념은 나의 몸을 관통하며 몸서리를 쳐본 경험이 추가되어야 쉽게 흔들리지 않는 자기 고유의 신념으로 자리 잡는다. “형식보다 땀에 젖은 얼굴, 체온이 먼저다.” 땀으로 뒤범벅된 사막 한가운데에서 관념의 언어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모래사장으로 푹 빠지는 발을 재빨리 들어 올리며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발목이 잡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어떤 형식미보다 땀에 젖은 얼굴, 달아오른 체온이 그 사람의 언어를 대변하고도 남는다. 언어는 사랑을 능가해서 표현할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사랑은 언어를 매개로 전달되는 순간, 희석되고 증발되며, 심지어 탈색되고 왜곡되기도 한다. 언어가 아무리 형식미를 갖추어도 땀에 젖은 얼굴과 몸의 진정성을 고스란히 전달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관념어로 건축된 사유체계는 현실을 매개로 몸을 관통하는 체험적 넓이와 깊이를 확산하거나 심화시키지 않으면 사상누각처럼 무너진다. 웃자란 개념어들이 품고 있는 상투성이나 관념성을 거세하려면 개념이 품고 있는 의미나 의도를 직접 현장에 몸으로 실천하는 몸부림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몸부림의 과정을 거쳐야만 관념의 거품이 사라지고 단순하지만 의미심장한 의미의 정수만 남는다. 하나의 개념이 품고 있는 의미체계는 어떤 상황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고정된 명사가 아니다. 각각의 상황마다 어떤 상황에서고 찾을 수 없는 고유한 딜레마가 있다. 그럴 때마다 공부하는 한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유일한 무기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맥락이 요구하는 상황의존적인 더듬이를 더욱 더 예민하게 정련하는 길이다. 개념에 대한 추상적인 정의가 무력해지는 곳이 심각한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되고 한 가지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회색지대가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서는 시공간을 초월해서 통용될 수 있는 만고불변의 신념이나 진리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개념은 개념이 사용되는 맥락에서 언제나 동사로만 작용한다. 어제의 개념은 오늘 다른 맥락적 의미를 품고 다시 태어난다.



견해는 진부하지만 사실은 진부하지 않다


“자연체험, 살아있는 것들과의 살 섞음이 말하자면 내 촉각의 지층이요 감각의 고고학적·생물학적 깊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92쪽). 정현종 ‘시인의 시를 찾아서’의 일부 구절이다. 촉각의 지층에 축적된 체험적 자극이 없다면, 감각의 고고학적·생물학적 깊이가 천박하다면 그 위에 쌓은 이념의 건축은 사상누각처럼 순식간에 무너진다. 촉각 없는 시각은 착각에 불과하고 시각 없는 촉각은 쉽게 망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촉각은 감촉을 촉진시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으로 감지되는 감각의 원동력이다. 머리로 이해하기 전에 몸으로 느끼는 감각적 각성은 촉각의 지층에 굳건한 토대로 축적되면서 감각의 고고학적·생물학적 깊이를 더욱더 심화시킨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계관(世界觀)이 아니라 세계감(世界感)이다. 세계와 나를 온전하게 느끼는 감성의 회복이 긴급한 과제다. 우리는 하나의 관점이기 이전에 무수한 감점(感點)이다.” 이문재 시인의 《지금 여기가 맨 앞》이라는 시집에 나오는 말이다. 몸으로 느끼는 감점(感點)이 없는 관점은 맹점(盲點)이고, 관점이 없는 감점(感點)은 결점(缺點)이다. 감점이 관점을 지배하고 통제하며 규제한다. 몸으로 느끼는 감점이 시점(視點)의 강도와 각도를 결정하고 관점의 깊이와 넓이를 통제한다.


“사랑이 아닌 이념으로는 쓰러진 벽을 세울 수 없다. 날개 다친 물새를 날게 할 수 없고 발 다친 고라니를 뛰게 할 수 없다... 이념이 아무리 높고 견고하다고 해도 앉은뱅이 소년을 서게 게 하지 못한다... 이념은 침이고 총이다. 이념은 화살처럼 과녁을 향해 날아가 꽂히는 순간 암덩어리가 된다... 천 마디의 말보다 한 방울의 눈물.” 이기철 시인의 ‘이념이라는 추상’의 시의 일부다. “발 시린 펭귄과 함께 남극을 걷고 싶다”는 시인의 욕망처럼 살을 에는 눈보라와 한파를 견뎌내며 빙하 위를 걸어보지 않고서는 어떤 이념적 논리로도 발 시린 몸의 감각적 느낌을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구체적 현실이 직면한 모든 문제나 이슈는 이념으로 주장해서 해결될 것은 하나도 없다. 내 육신을 던져 타자의 아픔이 머무는 그곳으로 직접 개입하지 않고서는 하나도 나아지는 것은 없다. 이념은 밑바닥에서 자라는 사실을 왜곡하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이념은 관념을 먹고 웃자란 공허한 담론으로 현실 문제를 편향적 시각으로 재단하고 평가하는 불온한 잣대가 될 수도 있다.



김훈 작가는 한 때 언론이 자기 신념 위에 사실을 세워 당파적 의견을 내세우는데 골몰한 나머지 사실을 근간으로 신념을 펼치지 못한다는 지적을 한 바 있다. “‘너는 개자식’이라고 말하고 싶잖아. 하지만 기자는 ‘너는 개자식’이라고 쓰면 안 돼. 그렇게 쓰면 그 자식은 개자식이 안 되고 네가 개자식이 되는 거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 자식이 개자식이라는 말을 입증해야 해. 입증하려면 수많은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해.” 신념은 의견을 먹고 자라지만 사실은 객관적인 증거를 기반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한다. 의견(意見)은 한 사람의 주관적 가치관을 반영한 의심해 볼 만한 의견(疑見)이다. 사실 위에 펼쳐지는 의견은 일리가 있는 주장으로 설득력을 지닐 수도 있지만, 사실적 근거가 없는 의견은 한 사람의 주관적 편견으로 비칠 수 있다. “견해는 언젠가 진부해지지만, 사실은 영원히 진부해지지 않는다”는 아이작 싱어의 말을 기억해 볼 필요가 있는 이유다. 사실은 현실을 기반으로 지금 여기서의 삶이 양산하는 산물이다. 사실은 오로지 사실이 거주하는 현장에 몸이 개입되지 않고서는 파악할 수 없는 진실의 재료다.


강 건너 불이 났으면 불이 난 쪽으로 강을 건너가서 불이 난 위급한 상황에 뛰어들어봐야 현장의 아우성을 몸으로 느끼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형성된 자기 신념의 토대 위에서 강넌 너 불구경하며 불이 난 사실을 재단하고 평가한다. 몸으로 겪어본 느낌과 감각적 각성으로 앎을 만드는 게 아니라 기존의 관념적 앎으로 구체적인 삶을 재단하고 평가하는 공부를 반복하다 보면 현실과 무관하거나 거리가 멀어지는 관념이 생긴다. 알량한 앎이나 관념적 지식으로 각색한 사유로 삶을 재단하거나 평가하는 노력보다 뼈저린 고통체험으로 건져 올린 깨달음으로 관념적인 앎을 공격하는 지혜가 살갗을 파고드는 진한 감동을 주는 이유다. 신념은 자기가 옳다고 믿는 편향적 의견을 먹고 산다. 신념 위에 세워진 사실은 근거 없는 왜곡된 낭설일 수 있다. 신념을 기반으로 재단된 사실은 현장에서 자라는 뿌리가 없는 사실이라서 아주 쉽게 웃자란다. 신념을 기반으로 자라는 사실이 낭설로 온 세상에 쉽게 퍼지는 이유다. 



기정사실은 낯선 시작(詩作)의 적()이다


구체적인 현장을 몸으로 겪어본 경험이 없는 신념은 상황이 내뿜는 맥락적 정서에 공감하지 못한다. 관념을 먹고 자란 신념은 법적 정의나 논리적 당위성에 호소할 뿐, 상황에 따라 정답이 없는 상황에서 인간적 고민을 부르는 딜레마 상황에서 어떤 결단을 내릴지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당위론적 주장은 대부분 관념의 늪에 거주하며 구체적 현실에서 벌어지는 밑바닥 현장을 외면하거나 위장하기 일쑤다. 예를 들면 노동은 신성한 행위이고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주장은 우리 현장에서 과연 어느 정도 먹히는 설득력을 지니고 있을까. 법 앞에 평등하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은 과연 몇 사람이나 될까? 법(法)의 한자 의미는 물(氵)이 낮은 곳에 멈춘다(去)는 의미인데 과연 우리 사회의 법은 사회적 약자가 힘겹게 살아가는 낮은 곳으로 향하고 있을까?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가서 가장 낮은 바다로 모여들어 다시 수증기로 변신, 가장 높은 곳으로 비상하는 꿈을 꾼다. 가장 낮은 밑바닥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법대로 적용이 안 되는 현실에서 과연 우리는 법대로 살아가는 삶을 온전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낮은 곳일수록 사회적 시선은 비껴가기 십상이다. 함성을 지르고 절규를 해도 낮은 곳의 목소리는 사회 안으로 들어오기 어렵다. 밖으로 나오기까지 숱한 방음벽이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고정관념은 많은 사람들의 관념 속에서 고정되어 자라고 있는 명사라서 새로운 신념으로 무장한 동사들의 움직임을 멈춰 세워서 아군으로 만들어보려는 분투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명사로서의 고정관념은 기정사실과 결탁해서 치유 불가능한 고장관념이나 통념을 양산한다. 기정사실은 통념으로 물든 난공불락의 고착화된 편향적 관점의 산물이다. “기정사실은 그의 적이다.” 김수영의 《시여, 침을 뱉어라》에 나오는 문장이다. 시인을 영원한 배반자로 해석하는 김수영 시인은 시작하는 과정을 방해하는 최대의 적군은 기정사실이라고 말한다. 기정사실은 원래 그렇다고 생각하는 무덤에 살고,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통념의 그늘에 머무르고, 물론 그렇다고 받아들이는 고정관념의 밥을 먹고 자란다. 기정사실에 통렬한 문제제기를 통해 정해진 사실은 없다고 배반하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라는 것이다. 익숙한 일상도 사실은 익숙하지 않다. 시선을 바꾸면 시야가 달라지고 관점을 바꾸면 익숙했던 일상도 비상하는 상상력의 텃밭으로 돌변한다. 이런 점에서 세상은 언제나 다른 해석을 기다리는 텍스트다. 사람도 사물도, 그리고 사건이나 사고도 모두 저마다의 의미를 품고 있는 텍스트다. 나에게 다가오는 텍스트를 누가 어떤 시각과 관점에서 해석하는지에 따라서 동일한 텍스트라고 할지라도 전혀 의미체계로 건축된 삶의 드라마이자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각본이다. 삶의 각본은 누가 어떤 관점에서 해석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텍스트로 부각된다.



나는 물론이고 우리 모두는 이미 하나의 텍스트다. 삶의 얼룩과 무늬를 씨줄과 날줄로 엮어서 만든 직조(織造)의 신물이 삶이라는 텍스트다. 누군가의 텍스는 누군가 해석을 통해서 비로소 세상에 드러난다. “우리는 누군가의 주석이다”(105쪽). 박주영의《어떤 양형 이유》에 나오는 말이다. 나의 존재를 드러내는 방법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다. 누군가에게 가급적 많이 언급되는 사람은 뭔가를 성취했거나 사회적 입지를 굳힌 사람들이다. 반면에 누군가에게 전혀 언급되지 않는 사람은 그만큼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회적 약자일 가능성이 높다. 누군가 나에 대해 어떤 주석을 달면서 해석하는지에 따라서 나의 존재가치는 현격하게 달라진다. 누군가 나를 고통의 늪에 빠뜨리는 역전모의나 작당모의를 꿈꾸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방향으로 나를 위치지운 다면 누가 봐도 그건 정의롭지 못한 행동이다. 나에 대한 타인의 주석이 타인의 불온한 의도로 몰아넣는 수동적 주체로 결론지으려 한다면 나는 온전한 존재로 자리매김을 할 수 없다. 화려한 논리적 진술로 자신을 포장하는 사람의 주장은 시작부터 의심스럽다. 주어진 현실에서 진정성을 갖고 나름의 힘든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은 비록 어눌하게 보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신체적 믿음을 부르는 ‘에토스’가 강하게 느껴진다. 자기주장이 강하지만 또한 자기주장도 틀릴 수 있다는 열린 마음과 다른 사람의 다른 의견도 받아들이려는 수용적 자세가 한 사람에 대한 타인의 정직한 주석으로 자리매김을 해나간다.


“해석이라는 늪지”(박주영, 2019, p.35)를 통과하는 동안 저마다의 고유한 경험은 재탄생을 거듭한다. 《해석에 반대한다》는 수전 손택의 주장도 있지만 우리는 사실을 경험하는 게 아니라 사실에 대한 해석의 고통을 경험한다는 니체의 명언도 있다. 대나무가 고속 성장을 멈추고 마디를 맺은 다음 삶의 방향을 점검하듯이 삶도 고속 성장을 멈추고 성찰을 통해 내면적 성숙을 지향하지 않으면 웃자라면서 성과도 성취도 없는 헛자람을 반복한다. 특히 저마다의 개별적인 경험을 하면서 삶의 얼룩과 무늬를 만들어나가지만 그 어떤 삶도 사회가 정해놓은 보편적 기준이나 잣대로 일반화시켜 해석할 수 없다. 웃자람을 방지하는 하나의 강력한 방법은 삶의 모든 순간이 던져주는 의미를 기회가 닿을 때마다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를 따져 물어보고 주어진 상황에서 나에게 시사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해석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다. “해석과 변혁은 분리되지 않으며, 다르게 해석하는 행위가 곧 변혁이라는 것이다”(87쪽). 해석은 이전과 다르게 뭔가를 변화시키기 위한 몸부림이다. 고로 해석하는 행위는 이전과 다르게 세상을 바꿔보려는 안간힘이자 장기간에 걸쳐 쉼 없이 펼쳐지는 장기전의 레이스다. 해석 없이 해결 없다. 해석에 동원되는 관점은 물론 해석에 차용되는 언어적 수준과 내용의 차별성이 파격적인 변신을 거듭하지 않으면 우리가 골머리를 앓고 있는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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