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판 용접공에서
지식 용접공으로 변신하다


철판 용접공에서 지식 용접공으로 변신하다


저는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발전소 운전에 필요한 발전기계를 전공했습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많은 것을 배웠지만

제 몸에 각인된 기술은 전기용접입니다.


추운 겨울 3000℃가 넘는 뜨거운 열기는

그야말로 엄동설한을 버틸 수 있는

한 순간의 따뜻한 위로였으며,

회색빛 청춘의 추운 겨울을

버틸 수 있는 난로였습니다.


평소에도 용접이 적성에 맞지 않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접을 해야 되는 이유는

용접기술로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해야

한전 입사와 동시에 군면제 혜택이 되기 때문입니다.


현대미포조선 1.jpg


어쩔 수없이 해야 되는 용접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용접을 하기 싫은 계절이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흐르는 한여름,

전기용접으로 철판을 뜨겁게 달구는 일은

체온을 넘어 불같은 열기를 견디는 인내심 실험이었습니다.


가슴팍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의 종착역은 알 길이 없고

얼굴로 달려 드는 수많은 불꽃 파편은

죽을지도 모르고 백열등에 달려드는

하루살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렇게 한 바탕의 뜨거운 격투가 벌어지고 나면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고

불꽃 파편이 떨어진 흔적은

입고 있는 옷에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용접/ 이석현


온몸으로 젖어 본 사람은 알 수 있지


보안경 너머로

삼천도 불꽃 물의 길을 터주면

두툼한 방열복 속으로

후끈 스며들던 고열의 마음들


서로 녹아 넘치도록 혼절해야만

한 몸 되는 힘겨운 접목

뼈와 살을 녹여내는 아픔을

나눈 후 태어난 신생


기억을 가로지르는 고압선에서 나온

수많은 불티들을

온 가슴으로 막아내다가

지나온 길을 더듬어 균열을 살핀다.

마음과 마음을 묶는 일이

얼마나 뜨거운 일인지

시뻘겋게 달아

온몸으로 젖어 본 사람은 알 수가 있지.

- 시집 『둥근 소리의 힘』(문학만, 2010)


용접을 해보지 않고서는 이런 시를 쓸 수 없습니다.

이질적 철판이 용접봉 덕분에 뜨거운 쉿 물이 되어

이쪽에서 저쪽으로, 다시 저쪽에서 이쪽으로 뒤섞이며

두 개의 철판은 이제 힘겹게 하나로 붙습니다.


두 철판 사이를 녹여 붙이는 과정에서

넘나드는 쉿 물의 흐름을 따라가며

용접봉으로 접합하는 과정에는

용접하는 사람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깁니다.

마음결을 그대로 반영하는 용접의 결이 생깁니다.


이질적 지식이나 학문 사이를

융합하는 일이 쉽지 않은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뜨거운 마음으로

다가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통하기 전에 논리적 통합을 설명하지만

이해는 가나 와 닿지 않아서

서로가 서로에게 닿을 수 없는

평행선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조선 건조업으로 유명한 회사에 와서

3천 명이 넘는 전 직원을 대상으로 강연을 했습니다.

한 때는 부업으로 용접을 해볼까도 생각해봤습니다.

회색빛 청춘시절 용접을 하면서 깡소주를 마시던

그 시절로 돌아가 잠시라도 과거의 상혼을

어루만져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머리로 배운 관념적 지식이나

전공에 갇힌 속 좁은 인식의 지평을 전달하기보다

짧은 경험이었지만 몸으로 체득한

체험적 지혜로 나를 바꾸고 관계를 변화시키는

강연을 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힘든 상황 속에서 하루하루

위기의 바다를 건너는 뱃사공처럼

언제나 평범한 일상도 비상한 일터로 생각하면서

‘이전과 다르게 생각해야 살아남을 수 있음을

생각하는 실마리를 던져주었습니다.


기술직의 약 50%가 용접공이라는 사실,

그들은 언제나 가장 낮은 곳에서 위를 보거나

가장 높은 곳에서 아래를 향해 힘든 자세로

불꽃 파편을 온몸으로 막아내면서 용접을 합니다.


용접을 해보지 않았다면

갈등관계에 직면한 두 이해당사자들을

다시 뜨거운 심장의 연대로 엮어낼 수 있는

지혜를 알지 못했을 겁니다.


현대미포조선2.jpg


용접을 해본 덕분에

뜨거운 목적의식으로 이질적 지식을 녹여 붙이는

지식 용접공으로 변신할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고상한 지식융합보다

척박한 지식 용접이 폐부를 찌르고

심장을 뛰게 만들며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어

지식을 창조하는 여정에 열정으로 물들게 만듭니다.


불황의 늪에서도 결코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으며

창업자의 정신을 잊지 않고

오늘도 불가능과 한계에 도전하는

그들의 마음에 작은 불쏘시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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