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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未知)는 기지(旣知)가 평가한다

미지는 과연 기지로 평가받을 수 있는가?

미지(未知)는 기지(旣知)가 평가한다

미지는 과연 기지로 평가받을 수 있는가?


누군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낸다. 좋은 아이디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그것도 아이디어라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다. 새로운 아이디어, 좋은 아이디어는 누가 무슨 기준으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일까? 좋은 아이디어라는 이야기도 결국 선호하는 관점이나 편향적 의견과 기지(旣知)에 비추어서 판단한, 즉 기정사실(旣定事實)로 아이디어의 진실(眞實)을 판단한 산물이 아니겠는가?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나 접근논리, 이론적 시각이나 원리를 발견한 사람이 그것의 경이로운 가능성을 주장한다고 해서 기존 학계나 공동체가 그대로 받아주지 않는다. 낯설고 새로운 관점이나 이론적 가능성은 모두 기존 시각과 주장에 의해 비판적으로 재해석되는 가운데 놀라운 생각으로 받아들여진다.


결국 모든 새로움, 낯섦, 참신함이나 놀라운 발견이나 창조는 기존 관점이나 가치관에 의해 평가받고 통과되지 못하면 영원히 기성세계로 진입하지 못하고 불필요하거나 무용한 생각으로 폐기처분당할 운명에 놓인다. 기성세계의 통념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등장하지만 통렬한 비판 자체가 통념으로 거부당하는 모순과 딜레마에 동시에 직면한다.


“미지(未知)를 추구하는 예술조차 그 평가는 언제나 기지(旣知)에 의해 이루어진다. 미지를 추구하는 예술의 가장 큰 딜레마, 기지를 거부하면서 탄생하는 미지는 다시 기지로부터의 평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 평가를 거치면서 미지의 성격이 분명해진다”(16쪽).


《시는 어떻게 오는가》라는 책에 나오는 김언 시인의 ‘그 여름에서 여름까지 짧은 기록 몇 개·3’에 등장하는 예술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의 주장을 정리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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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는 언제나 ‘토대’(base)가 평가한다"는 식의 관점은 아도르노의 비판이론, 특히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파생된 토대와 상부구조(base and superstructure)의 관계에 대한 사유를 반영한 것이다. 어떤 것이 사용되거나 존재하는 환경과 조건에 따라 동일한 존재나 실체하고 할지라도 그 의미와 가치가 판이하게 달라진다. 물 한 잔의 가치도 언제나 토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예를 들면 사막 한가운데서의 물 한 잔은 생명과 직결되는, 그 어떤 보석보다도 귀한 가치를 지니지만 홍수가 난 지역에서의 물 한 잔은 오히려 넘쳐나는 물 때문에 가치가 없거나, 심지어 해가 될 수도 있다. 물이 결핍된 사막이라는 토대와 물이 과잉 공급되어 위험한 홍수라는 토대에 따라 물의 가치는 달라진다. 물의 미래 가치는 물이 존재하는 기존 토대가 결정한다.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공저한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Dialectic of Enlightenment, 1947)에서는 대중문화와 ‘문화산업’을 비판하며, 문화적 가치나 취향, 예술의 평가는 자본주의 생산 방식, 즉 경제적 토대(base)에 의해 형성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가치 판단이 자율적이지 않고 시장과 생산체계에 의해 규정된다"는 관점은 이 책에서 매우 뚜렷하게 나타난다. 즉 가치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경제적 토대'들이 부여하는 의미와 중요성에 의해 결정된다.


“예술작품 내부의 질서는 외부의 무질서만큼이나 정신없고 어수선하지만, 둥시에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장악되어 있다. 장악되어 있어야 한다. 장악되지 않는 예술이 있다면 그것은 자연이다”(16-17쪽).


《시는 어떻게 오는가》라는 책에 나오는 김언 시인의 ‘그 여름에서 여름까지 짧은 기록 몇 개·3’에 등장하는 예술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의 주장을 정리한 다른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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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르노는 《미학이론》(Aesthetic Theory, 1970, 유고작)에서도 예술이 일정 정도 자율성을 갖지만, 그 평가와 해석은 역사적·물질적 조건에 깊이 얽혀 있다고 주장한다. 즉, 예술작품은 독립된 가치를 갖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사회적, 경제적 토대에 의해 그 의미와 가치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기존의 사회적, 경제적 토대와 무관한 미지의 가치가 결정되지 않는다. 아도르노는 《미니마 모랄리아》(Minima Moralia, 1951)에서 개인적 삶과 문화적 가치들이 어떻게 사회 구조와 경제 시스템에 의해 왜곡되는지에 대해 자주 언급된다.


아도르노의 토대 개념과 유사한 '아비투스(habitus)'라는 개념을 만든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라는 사회학자가 있다. 그에 따르면 '아비투스는 개인이 특정 행동을 취하거나 특정 대상을 선호하는 경향 등, 무의식적으로 구조화된 성향체계를 말한다. 아비투스는 단순히 습관이나 취향을 넘어, 개인이 속한 사회적 계급이나 집단의 경험이 신체에 체화되어 나타나는 실천적 감각이자 인지 구조이며, 세상을 인식하고 행동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무의식적인 틀을 의미한다.


개인의 의식, 인식, 행동, 그리고 가치 판단이 순수한 개인적 선택이 아니라 광범위한 사회적 구조와 조건에 의해 깊이 형성된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아도르노의 토대 개념과 아비투스는 유사하다. 개인의 자율성이나 자유로운 의지에 대한 순진한 믿음을 비판하며, 개인이 사회적 조건화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권력과 지배가 단순히 물리적 강제가 아니라, 미묘하고 종종 무의식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며 사회적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데 기여한다는 점을 분석한다.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를 통해 계급 재생산을, 아도르노는 문화 산업을 통해 대중의 의식 조작을 설명하는 것이다.


내가 선호하는 가치(예: 취향, 미적 판단, 예술적 선호도)가 결코 보편적이거나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특정 사회적 맥락과 조건 속에서 형성되고 평가된다는 점을 공유하는 것이다. 즉 기지가 미지를 지배하고 점유하며 판단하고 평가하는데 기반 지식과 관점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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